새벽에 이상한 느낌에 깼다. 방안이 더워서 죽부인을 끌어안고 대청마루에서 자고 있는데 바닥이 울렸다. 지진이다. 아주 심하지는 않으나 무시하기도 어렵게 흔들리니 내가 사는 곳이 불안전한 지구의 한 귀퉁이가 맞다. 잠시 동안 땅의 울림이 계속되다 마침내 멈추었을 때 마당에 호수가 생겼다. 놀랍게도 작은 연못이다.
[진도 3이었데요. 소백산 근처에서 발원했다는 데 별일 없으세요?]
아침 일찍 도착한 후배가 라디오에서 들었다면서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그는 대청마루에 앉자마자 누런 봉투에서 계약서를 꺼내 건네주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와~선배네 집은 멋지네요. 운치도 있고. 이런 연못이 있다는 말 안했잖아요]
[아..그게..]
이 사태를 뭐라고 설명해야할지 모르겠지만 멋있기는 하다. 마당은 잡초들의 강한 생명력으로 다시금 원상복귀가 된데다가 나무들도 색색의 모습이고 그 한가운데에 약간은 묘한 느낌이 드는 연못이 동그랗게 있어 마치 무릉도원 같다. 게다가 호수 안에는 은색으로 빛나는 물고기들이 뛰어놀아 반짝반짝 수면이 빛난다.
후배는 다른 지인들의 소식을 전부 전한 뒤, 계약서에 사인을 받고는 바로 갔다. 내 손에는 계약금이 적힌 수표가 있다. 운칠기삼..그것이 이번엔 돈과 더불어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아름다운 연못까지 데려왔다. 아아, 과연 언제까지 이 운이 가려나. 진짜 로또를 살까보다.
[저 세상 것들이 왔구먼]
[네?]
청산 할매는 구경 와서 연못을 바라보시더니 쯧쯧 혀를 차셨다. 할매는 여러 가지 지식을 가지고 계신다. 전부 어디서 배우신 건지 그런 학교가 있으면 나도 다니고 싶다.
[권선생은 인기도 많아. 이리 맨날 온갖 놈들이 따라다니기도 어려운 법인데..]
할매의 표현에 따르면 이 호수는 지진으로 지옥인지 천당인지의 문이 열려 우리 세계로 넘어온 것이란다. 하여 본 적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신기한 모습이지만, 그 안에 있는 건 맛있어보여도 먹어서는 안 되다고 하신다. 생각해보니 내가 음식 좀 먹여 보내려고 부엌에 들어갔다 나오니, 후배가 연못가에 앉아 안을 들여다보다가 쩝쩝 소리를 내며 입을 닦았다. 그냥 두어도 될까 걱정된다.
[그냥 둬]
할매의 간단한 말에 마음이 상했다. 그래도 그 후배는 나를 생각해 일을 가져다 준 은인인데 이런 문제를 만들었다는 게 미안하다. 여기 오지 않았으면 저 세상의 것을 먹을 리도 없는데..이런 저런 생각에 두통이 몰려왔다.
[참으면 심해지니까 이 약 먹어]
할매는 항상 가지고 다니시는지 타이레놀 한 알을 손에 꼭 쥐어주고는 돌아가셨다. 갈수록 깊어지는 통증에 냉큼 먹고는 호숫가에 앉았다. 문득 든 생각이지만 한 번만 더 지진이 생기면 이게 사라지지 않을까싶다. 사실 이미 이치에 맞는 않는 일이니 새삼 제대로 되겠냐는 자조적인 마음도 들지만..
[아저씨~]
수로 너머에 지난번의 그 아가씨가 나타났다. 대꾸하기도 귀찮아 고개만 끄덕였다.
[들어가도 되요?]
하기사 이제 뭐가 더 문제가 되겠냐 싶어 들어오라고 손짓 했다.
[무슨 일로 왔니? 청산 할매한테 들키면 일 날 텐데..]
[냄새가 나서요. 저거..맛있겠네요]
아가씨는 해맑은 얼굴로 반짝이는 이를 살짝 드러내며 입맛을 다셨다. 연못에는 여전히 은색의 물고기들이 텀벙거린다. 나는 둔한건지 맛있겠다, 먹고 싶다는 생각은 아직 안 드는데 후배나 이 아가씨는 그런가보다. 정말 먹고 싶다는 표정이다.
[저거 먹으면 큰일 난데. 단념해]
[에이..]
아가씨는 여전히 입맛을 다시다가 연못 탐방에 나섰다. 조그만 연못에 탐방이라는 말도 참 멋하지만 그럴 정도로 시시각각 주변이 변하는 중이다. 겨우 몇 시간 지났는데 처음 보는 풀들이 자라난다.
[저건 닭의장풀이고, 그 옆에는 사위질빵이에요]
[진짜 그런 이름의 풀이 있어?]
[그럼요. 아름다운 대자연에 뭔들 없겠어요. 근데 이건 내가 붙인 게 아니라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이에요. 저렇게 아름다운 애들한테 닭의장풀이랑 사위질빵이라니...좀 그렇잖아요. 쯧쯧]
닭의장풀이라는 작명이 누구 솜씨인지 참 웃기다. 얼핏 보면 파란 꽃잎이 꼭 제비꽃 같아 보이는데 희화하자면 장 닭의 벼슬이 양 옆으로 발라당 누웠다. 사위질빵 꽃은 특이하달 것도 없는 흰색인데 일반적인 꽃잎 사이에 길쭉길쭉하니 무채를 썰어놓은 듯한 모습이다. 그 옆에는 나도 아는 개망초다. 다른 것들은 기억 못해도 이 풀의 이름은 잊지 못하는 것이 고등학교 때 선생님 한 분이 재미있는 유래를 알려주셨다. 본래 개망초는 우리나라 풀이 아니라 외국의 곡류에 섞여 들어와 번식하게 되었는데 논과 밭에서 뽑아도, 뽑아도 계속 자라나 화가 난 농부가 개망초를 집어던지면서 “망할 놈의 풀”이라고 말한 데서 이름이 지어졌다고 하셨다. 맞는 건지는 모르지만 각인이 된 듯 몇 십 년이 흘렀는데도 생각 난다.
[너, 개망초에 대해서도 알아?]
[그럼요. 감기, 위염, 장염, 설사에 특효약이에요. 아주 좋은 약초죠]
[넌 참 묘한 데가 있어. 사람도 아니면서..]
[그래서 아저씨가 절 마음에 들어하시는 거잖아요]
아가씨는 갑자기 큰 소리로 웃었다. 메아리가 치듯 연못 주변으로 소리가 흘러다닌다. 거참 무릉도원도 아닌데 이건 또 웬 안개인지..정말 우리 집 마당이 어디로 가려는 걸까 걱정 된다.
[아저씨~그냥 즐기세요. 다 하늘의 뜻인데..어쩌겠어요, 연못을 가지는 것도 아저씨만의 복인가 보죠. 도시에선 돈 주고 만든다던데..]
내 표정이 별로였는지 그런 위로를 하고는 뽀르르 사라졌다. 이어 청산 할매가 나타났다. 그 아가씨는 겁나지 않는 듯 행동해도 실상 할매가 싫은 것이다.
[자꾸 이상한 것들을 불러들이지 말아]
[그냥들 오네요. 휴]
[기운 내. 젊은 사람이 요깟 일에 코 빠져서야..권선생~]
[뭔데요?]
[쓸데없는 음식은 먹지 말아]
이 미스터리 호수는 밤이 되어서도 사라질 기미가 없다. 오히려 첨보는 벌레들까지 날아오니 조만간 밀림이 되지 싶다. 풀이 엄청 자라 무릎께를 살짝 넘는다.
[권선생, 고생하네]
[이거 씨껍데기 막걸리야, 속 탈 때 한잔 들이켜]
마을 어르신들이 전부 마실 오셨다. 그분들 중 누구도 이 걸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 대사건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도대체 학마을에서는 어느 정도의 수준이 되어야 놀랄까. 새삼 존경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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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의 한마디 : 닭의장풀과 사위질빵 꽃 사진이에요(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