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을 설치하려고 신청했다. 과연 이 마을에서 인터넷이 가능할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기사가 와서 확인해준다고 하니 기대하는 마음이 뭉클뭉클하다. 소백산에 둘러싸인 학마을은 전기랑 수도 빼고는 핸드폰도 뚝뚝 끊어질 정도로 이래저래 어려운 곳이라 인터넷은 언감생심이었고, 또 금방 돌아갈 생각에 짐도 제대로 가져오질 안았다. 하지만 몇 달을 살아보니 학마을이 마음에 드는데다가 어쩌면 일자리가 생길 것 같아 아예 이곳에 눌어붙자고 결정했다. 그것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영주 시내의 초고속 인터넷 대리점에 전화를 건 이유다.

[권선생, 이제 진짜 선생님이구먼]
[아직 결정 안 났어요]
[이 근방에 권선생 같은 이가 또 어디 있다고.. 꼭 될 테니 걱정 말고 기다려봐. 내 술이나 한잔 받으시게]

  슈퍼 주인 할매는 응원의 말씀을 하시며 새로 나온 막걸리를 따라주셨다. 씨껍데기 막걸리라고 부석 양조장에서 첫 생산한 제품이다. 한 입 쭉 들이켰더니 시원하고 쌉싸래한 맛이 위까지 전달돼 행복하다.

[할매, 이거 아주 좋아요]
[버버리도 그러더만. 그 양반이 좋다고하면 진짜 좋은 거야]

  우리는 더위를 피한다는 핑계로 유유자적 놀며 씨껍데기 막걸리를 두 병 마셨다. 기분도 좋고 약간의 취기도 더해져 나는 슬렁슬렁 밭 사이를 걸어 다녔다. 지난주에 영주 시내에 있는 중학교에 응시 해두었는데 아직 답변이 없다. 진짜 슈퍼 주인 할매 말대로 이 근방에 나만한 선생이 없다면 되겠지만 사람일은 한 치 앞을 모르니 100% 장담도 어렵다. 해서 나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나날이다.

[뭐하세요?]
[깻잎 장아찌 할라고]

  정자 밑 시원한 그늘에서 청산 할매가 빨간 고무 대야를 놓고 일을 하시는 모습이 보였다. 다가가 보니 또 다른 대야에는 한가득 물이 담겼고 그 옆에는 막 딴 깻잎이 포대자루로 한 가득이다.

[할매, 실이랑 바늘은 왜요? 옷 수선하시려고요?]
[아니. 깻잎 꼬매려고]
[네?]
[권선생은 서울서 살아 모르겠네. 여기는 깻잎 장아찌를 이렇게 해]

  청산 할매는 깻잎을 20장 정도씩 집은 후 명주실을 낀 바늘을 두 번 통과 시켰다. 단단히 묶어 이로 자르니 마치 문방구에서 파는 종이 다발 같아보였다.

[소금물에 잘 담가두면 숨이 푹 죽고 나중에 꺼낼 때도 일일이 펼 필요 없어서 좋아]

  아, 이런 것이 선조의 지혜다. 혼자 하시는 폼이 언제 끝나실까 싶게 많아 결국 나도 앉아서 깻잎 꿰매기에 동참하였다. 잠시 후에 또 한 사람, 또 한 사람 늘어나더니 결국 8명의 거대 모임으로 변신했다. 어느 분이 가져오셨는지 씨껍데기 막걸리도 같이 마시며 농도 주고받으니 시간이 참 빨리 갔다. 나는 술의 힘을 빌어 깻잎과 물이 가득 담긴 대야를 번쩍 들고 일어나 청산 할매네 마당에 가져다주었다.

[할매, 이걸로 끝이에요?]
[아니~ 닷새 후에 화장해야지]
[화장?]
[깻잎을 뭔 맛으로 그냥 먹어. 여자들처럼 얼굴에 양념칠 해야지]

  청산 할매의 유머는 확실히 고차원이다, 마을에서 제일 젊은 내가 못 따라 갈 정도니..나는 큰 소리로 웃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요즘 날이 한 여름이라고 어찌나 더운지 매일 등목을 해야 한다. 나도 이제는 살이 타서 살짝 구릿빛으로 가고 있으니 서울에서 왔다고 하면 믿을까 싶다. 등목을 한 차례하고 대청마루에 죽부인을 안고 누웠다. 대나무의 찬 기운과 함께 잠이 솔솔 몰려온다.

[따르르르릉..따르르르릉]

  주머니 속 핸드폰이 오랜만에 울린다. 비몽사몽간에 전화를 받았다. 교사 임용에 떨어졌다고 누군가가 전해준다, 그것도 매우 친절하게. 알았다는 말로 웅얼거리고 휴대폰을 내려놓은 뒤 바로 잠으로 빠져들었다.     

[운칠기삼이야. 더 좋은 일 생길라고 그러는 거니까 기다려봐]

  저녁을 얻어먹으러 청산 할매네 가서 결과를 알려드렸더니 그렇게 말을 하신다. 운칠기삼이라..시골 학교 교사 임용도 그런 게 필요할 줄은 몰랐다. 부적이라도 쓸 걸 그랬나.

[부적 같은 거 믿을라치면 차라리 산신한테 빌지]
[아~산신..]

  봄에 갔었던 허물어진 사당이 기억났다. 한 때는 그곳에서 자식들 시험이나, 병수발에 지친 아낙들이 매일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나름 효험이 좋다고 하는 데 이제는 찾는 이가 없어서 황폐하다.

[거기 다 무너졌던데요]
[그래도 기도 빨은 좋아]
[할매는 불교 신자면서 산신한테 기도해요?]
[종교는 차별하면 안되지]
[그럼..교회는요?]
[게도 가봤어]
[성당은요?]
[응]
[신은 다 똑같은 건데 사람들이 그걸 몰라 싸우는 거지]

  할매의 신앙심은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우주적인 포용력을 지니신 분이라 대범하고 강단 있으신 것이리라. 결국 부적은 없었던 일로 하고 풀이 죽어 집으로 돌아갔다.

  오일이 지나 깻잎을 화장해야할 날이다. 청산 할매는 오전 밭일을 마치고는 나를 부르셨다. 할 일도 없는 백수에게 여자 일, 남자 일이 어디 있겠냐고 생각을 고쳐먹고 마당에 들어섰다. 부지런한 할매는 깻잎을 건져내는 중이다.

[엇!]
[왜?]
[개구리에요!]

  깻잎을 꺼내는데 뭔가가 톡 손바닥 위로 올라섰다. 보니 푸른색의 개구리다. 우리가 어릴 때는 거의 매일 잡아 구워 먹었던 바로 그 개구리였다. 청산 할매는 개구리를 잡아 수로로 던졌다. 한 번에 퐁당. 농구를 하셔도 잘하시겠다.

[권선생 그거 아나?]
[네?]
[저 개구리야말로 운칠기삼일세]

  깻잎을 다 꺼내 바짝 물을 빼라고 하셔서 베보자기에 싼 뒤 발로 밟았다. 그 사이 청산 할매는 대량의 양념장을 만들기 시작하신다. 간장이 졸아드는 냄새를 맡으며 옆에서 오도카니 지켜보고 있는데 난데없이 그렇게 말씀하셨다.

[저 놈은 본래 소금물에 오래 있으면 죽을텐데, 빨리 발견해서 살지 않았나. 게다가 내 덕에 맑은 수로로 이사했으니 운칠기삼이지] 

[아..그러네요]

  그제야 청산 할매의 운칠기삼이 뭔지 알겠다. 작은 미물도 저렇게 운을 타고 나는데..하는 생각에 기운이 빠져 조용히 물어보았다.

[할매..저는 어때요?]
[권선생?]
[네. 학교 떨어진 게 운칠기삼일까 해서요]
[글쎄..그건 모르지. 사람이랑 미물이랑 같나]

  할매는 새벽이 될 때까지 깻잎 화장을 시키셨다. 12시가 넘으니 허리가 뻣뻣하여 크게 기지개를 켜는데 깻잎을 담은 그릇을 건네주며 한마디 하신다.

[나도 운칠기삼인기라. 권선생이 이렇게 일도 도와주고~ 수월하다 이거지]

  진짜 나만 빼고는 모두 운칠기삼인거 같아서 기분이 더 나빠졌다. 내가 힘들여 바른 깻잎 장아찌를 몇 장 먹고는 냉장고에 잘 넣은 뒤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인터넷 설치 기사가 왔다. 그의 말로는 보건소에 전용선이 들어오니까 그걸 끌어다 쓰면 어렵지 않다고 한다. 다만 거리 비례로 설치비가 드니 문제다. 좀 더 생각해보고 연락하겠다고 한 뒤 돌려보냈다. 현재까지 돈은 한 푼도 못 벌고 살살 까먹고 있으니 그리 헤프게 주기엔 좀 부담스럽다. 인터넷 없이 사는 게 과연 언제까지 가능할까 생각중이다. 학마을이 아무리 좋아도 뼈 속 어딘가는 대도시의 편리함이 배어있으니까. 이럴 때 로또라도 한 방 날려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따르르릉. 따르르릉]

   서울에서 종종 보던 후배의 전화를 받았다. 이런 저런 안부 인사 후에 시골에서 유유자적 선비 흉내를 낸다고 했더니 책을 내보지 않겠냐고 제안을 한다. 그는 중고등학교 학습지 출판사에 다니는데 개정 교과서용 출판물이 필요하단다. 이게 웬일이냐 싶어 덥석 물었다. 다음 주 초에 계약서를 가지고 오겠다고 한 말을 뒤로 우리의 통화가 끝났다. 이것이 진정한 운칠기삼임을 이제야 깨닫는다. 학교가 되었으면 다니느라 바빠서 학마을에 관심이 줄어들 것이고, 그럼 청산 할매는 혼자 힘들게 일을 해야 하고, 더불어 더 이상 장군이도 구해줄 수 없다. 모두에게 좋은 운칠기삼이 이루어지려고 교사 임용에서 떨어진 것이라 결론지으니 어이 안 좋을 수 있겠는가. 해서 다음 날 권선생 주최 씨껍데기 막걸리 잔치를 열어 어르신들을 마당에 모셨다. 불판에 자들자글 구워지는 쇠고기를 한 점 집어 입에 넣으시던 청산 할매가 나에게 속삭이신다.

[내 말이 맞지?]
[네, 할매. 운.칠.기.삼!]

  때마침 지나가던 도토리묵 장수도 얻어먹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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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의 한마디 : 씨껍데기 막걸리..마셔보면 막걸리 중에 최고입니다! 특히 울릉도 나리분지에    서 파는 게 g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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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쁜하루 2009-09-03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씨겁데기 막걸리..마셔보고 싶군요.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