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들이 요 근래 들어 가장 많이 날아온 날이다. 학마을이란 이름이 어디서 유래되었는지 알 정도로 우리 마을 뒷산은 학들의 요람이요, 놀이동산이다. 지금은 관공서에서 학이라는 말 대신 정확한 명칭을 사용하여 “백로도래지”란 푯말을 마을 앞에 세워주었다. 그러나 오랜 시간 동안 불러온 이름이 더 익숙하여 우리는 여전히 학이라고 한다. 그들이 가득 앉은 나무는 솜털처럼 하얀 빛이 물결을 이루어 절경이다. 그러나 그런 아름다움에 비해 학의 똥은 매우 독하다. 그들이 생활하는 나무는 시들어 고사 직전이라 한 눈에 보아도 어떤 게 학들 전용인지 알 정도로... 바닥에 떨어진 학 똥이 딱딱하게 마르면 우리 마을에서는 벌래 같은 해충을 쫓을 때 활용하였다. 옛날에는 마을에 아이들이 많아서 학을 쫓아다니는 재미에 살았지만, 이제는 나이 드신 어르신들뿐이라 그들의 기세가 날로 세지는 중이다.
[버버리는 아직도 학을 쫓아다녀]
슈퍼에서 학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자니 듣고 있던 울산댁 할매께서 한마디 거드셨다. 버버리란 마을 입구로부터 두 번째 집에 사는 70초반의 할배로 말을 더듬어서 버버리로 불린다.
[여..여기..들..이..있..었..구만..]
갑자기 슈퍼 문이 열리더니 바로 그 버버리 할배가 들어왔다. 일을 하다 오셨는지 한 손에는 삽을 들었다.
[막걸리 한 잔 줄까?]
슈퍼 주인 할매는 다 안다는 듯 먼저 사발을 들며 물었다. 술이라면 엄청나게 좋아하는 버버리 할배가 웬일인지 고개를 젓는다.
[권...선상...이..거..조..좀...봐...]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해진 종이 한 장을 꺼내 건네주셨다. 얼마나 들고 다니셨는지 접힌 부분이 다 일어났다.
[이게 뭔데요?]
[그 집 아버지가 남겨준 거야]
슈퍼 주인 할매가 대답 했다. 그 말에 나는 그를 살짝 처다보았다. 버버리 할배는 손에 땀이 나는 듯 연신 바지에 닦는다.
[왜 저에게?]
[나..가..그..글을..모..몰러]
[권선생이 제일 똑똑하니까 가져왔구먼. 우리에겐 보여주질 않던데..]
종이를 펴고 읽다보니 특별할 것도 없는 중풍 예방 안내장이다.
[별거 아니네요. 중풍 아시죠?]
[뭐?]
[풍이요..풍]
뒷목을 잡고 쓰러지는 행동을 보여드리니 버버리 할배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인다.
[아~풍. 그거 걸리면 콱 죽어야지 오래 살면 못 쓴다]
울산댁 할매가 손바닥을 치며 끼어들었다. 대화란 게 사람이 많으면 엉뚱한 곳으로 간다고 이야기는 갑자기 우리 어머니의 과거로 껑충 뛰었다. 나는 여기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서울로 올라가서 사정을 몰랐지만, 어머니는 시어머니 병수발과 작은 할매 중풍 치다꺼리까지 도맡아 하셨다고 한다.
[똥 냄새가 어찌나 고약한지..구들댁이 엄청 고생했어]
[진짜 시어머니도 아닌 사람을...]
작은 할매라는 분은 첩이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만 해도 우리 집 땅을 안 밟으면 못 걸어간다고 할 정도로 부자였다. 옛날에는 본부인 말고도 옆 마을에 첩을 두는 게 당연한 시대라 우리 집 역시 그랬다. 문제는 시어머니가 병으로 누워 있을 동안 어머니가 병구완을 다한 뒤 장례를 치뤘는데, 1달 뒤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작은 할매가 중풍에 걸렸다.
결국 그 날은 이렇게 다른 말들을 듣다가 막걸리에 취해서 버버리 할배를 도와드리지 못하고 헤어졌다. 며칠 뒤에 만난 청산 할매가..
[버버리네도 풍이었어]
라고 귀띔해주셨다. 그분이 돌아가시고 나서 유품을 정리할 때 지갑 속에서 발견한 후 지금까지 신주단지처럼 가지고 계셨단다.
[중풍을 예방하는 이 방법은 일본의 민간요법이며 일생에 한 번만 복용하면 중풍에 걸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조제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계란 흰자 1개, 사기 또는 유리 그릇, 머윗잎 5매, 곡주, 생매실 또는 우에 보시 5개를...]
정자에 앉아 큰 소리로 종이에 적힌 내용을 읽었다. 내 앞에는 버버리 할배뿐만 아니라 마을의 모든 어르신들이 모여 계셨다. 유언이 아니라 하여도 다들 고령이시니 풍 예방 차원에서 읽어달라는 요청이다. 문제는 읽어내려 갈수록 이것이 과연 믿을 만한지 의문점이 증폭된다. 계란이랑 머위, 곡주, 생매실을 섞은 걸 딱 한번만 먹으면 죽을 때까지 중풍에 안 걸린다는 말이 진실이면 벌써 세계적인 이슈일 테지만 들어 본 적 없다. 그런데도 학마을 어르신들은 열광적이다.
[머위? 그게 뭐지?]
[머우 있잖아. 머우]
[아~머우. 뒷산에 가면 많아]
다들 이러쿵저러쿵 하면서 준비물을 나누셨다. 계란도 그냥 계란은 안 되고 유정란만 효험이 있다는 말에 어제 낳은 계란을 갖고 오시겠다며 청산 할매는 재빠르게 가셔서 두 손에 소중히 담아 오셨다. 게다가 곡주는 화학 성분이면 안 된다고 시내에 다녀오라고 채근하여 순도 100%의 술을 사왔다. 마침내 생매실까지 마련 되자 모두 갈아 섞은 뒤 컵에 담았다.
[전..안 먹어도 건강한데요]
[참말로..권선생..풍이 사람 봐가며 오나!]
내 손에도 컵이 들려졌다. 다들 그 푸른색의 액체를 바라보시는 모습이 비장하다. 버버리 할배를 시작으로 모두들 쭉 들이킨다.
[흐미...맛이 참 요상하네..]
[원래 몸에 좋은 게 쓰잖아]
손으로 쓱 입을 닦으며 하시는 말씀들에 먹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특히 슈퍼 주인 할매는 입을 틀어막고 목만 꿀렁꿀렁 소리를 내신다.
[권선생! 아까 워라. 다시 만들어야겠구먼]
나는 그 역하디 역한 맛을 참지 못하여 입에 넣은 지 몇 초 만에 모두 뿜어냈다. 청산 할매는 등을 쓸어주며 다시 만들자는 제안을 하신다. 깜짝 놀라 손을 내저으며 잔에 남아 있는 나머지만 먹었다. 젊으니 반만 먹어도 약효가 좋다는 열변을 토하며..
마침내 집에 돌아와 대청마루에 누웠다. 빈속에 술이 섞인 중풍 예방 음료를 넣었더니 서 있기가 거북했기 때문이다. 취기가 올라오는 게 얼굴에 열이 난다.
[권선생..괜찮아?]
청산 할매가 나를 건드리며 옆에 앉았다.
[기분이 영..나쁘네요]
[이게 도움이 될 테니 불 붙여서 옆에 두고 자]
할매는 나뭇잎에 싼 것을 건네주시고는 할 일이 많다며 바삐 가셨다. 나는 꼼짝하기도 싫어 어두워지도록 그 자리에 엎어져 시간을 보냈다. 부엉이 소리가 성큼성큼 다가오자 어쩔 수 없이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책상 안을 뒤져 작년에 쓰던 모기향 그릇을 꺼내 나뭇잎에 싼 것을 옮겨 담았다. 그것은 학의 배설물이다. 단단하게 굳었고 나름 모양도 단정하다. 여러 번의 시도 끝에 불이 붙은 배설물에서 묘한 냄새를 풍기는 연기가 솟아올랐다. 아마 대도시에 사는 사람에게는 이 냄새 역시 중풍 예방약만큼이나 끔찍할 수 있지만 나는 그 똥 밭에서 굴러다닌 인물이라 반갑기 그지없었다. 팔베개를 하고 창 너머로 보이는 검은 하늘의 반짝이는 별을 센다.
[별 하나, 별 둘, 별 셋, 별 넷...]
별세기 작업이 30을 넘었을 때 한 개씩 내 품으로 떨어졌다. 행복한 기분이 퐁퐁 솟아오른다. 낙향이든 귀향이든 이런 시골 생활도 과히 나쁘지 않다는 생각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권선생~권선생~]
나를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어느새 아침이다. 밤새 배고 있었던 팔이 감각이 없을 정도로 저려 두드리고 문지르며 밖으로 나왔다.
[장군이가 또 월척을 낚아왔어]
내가 고통을 격는 동안 장군이는 어디서 구해온 것인지 아주 실하디 실한 놈을 잡아왔다. 청산 할매와 나는 그 물고기를 노릇노릇하게 구운 후 입에 넣고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켰다.
[이것이 보약이에요]
[하긴 사람은 잘 먹고 잘 싸면 되는 거지. 명 껏 살다 죽는 게 최고야]
그 요상한 약이 예방을 하기는 하는지 그 뒤로 학마을에서는 한 분도 풍을 맞으신 분이 없었다. 중풍 예방약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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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의 한마디: 중풍예방 안내장..어머니가 만들어 주셔서 먹었는데..정말 넘어옵니다..--;
아래 사진은 백로들이 서식하는 나무의 사진입니다. 영주에 가면 "백로도래지"표시가 있고 마을
뒤에 정말 이렇게 죽어가는 나무가 있답니다.(사진 출처: http://cafe.daum.net/jds0808/1xlE/26?docid=17mWA|1xlE|26|20070524171949&q=%B9%E9%B7%CE%B5%B5%B7%A1%C1%F6&srchid=CCB17mWA|1xlE|26|2007052417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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