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날씨가 좋아서인지 마당의 풀들이 쑥쑥 자란다. 종류가 여러 가지겠지만 이름을 아는 건 애기똥풀 하나라 나머지는 잡초로 여긴다. 이름을 알고 부르면 마음이 가고 정이 생기니, 어차피 싹 뽑아버릴 예정이라면 모르는 게 좋다.

[뭘 드시는 거예요?]
[된장이랑 표고]

  귀찮은 마음에 잡초들 정리는 내일로 미루고 산책을 나섰는데 마을 앞 정자에 청산 할매가 앉아 계셨다. 무엇인가를 열심히 먹는 모습에 호기심이 동하여 물어보았다.

[이렇게 먹으면 피떡을 방지해 준다잖아]
[피..뭐라고요?]
[피떡도 몰라?]

  할매는 내 무식함을 탓하듯 쯧쯧 혀를 차시더니 피떡을 설명해주셨다. 얼마 전에 보건소에서 실시한 검진 결과 고혈압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보건소 의사가 혈전에 대해 설명했는데 그게 바로 피떡이란다.

[피 혈자, 앙금 전자. 혈전이 피떡이라는 말이잖아. 시골 할매들은 무식해서 혈전이라고 말하면 몰라. 참, 거기도 나이가 마흔이 되간다고 했으니까 건강 관리해]

  피떡이라는 단어는 결국 청산 할매의 창의적인 번역 작품이었다. 내가 지난달부터 살기 시작한 이곳은 학마을이라는 정식 주소를 가진 시골 동네인데 열분 정도의 어르신들만 사신다. 청산 할매와는 이웃사촌이라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거의 내가 얻어먹는다.

[하나 먹어보시게]
[아..네..잘 먹겠습니다]

  내 건강을 생각해서 된장을 듬뿍 찍은 표고를 건네시는데 안 먹기도 멋하여 입에 넣었다. 시골 특유의 진한 된장 냄새가 입 안에서 코로 이어졌다. 30여년 서울 생활에선 좀처럼 먹기 힘든 전통 된장이다.

[고혈압에는 소금 섭취를 줄이셔야해요. 된장을 너무 많이 드시는 건..]
[내 이날까지 밥 잘 먹고 살았어. 피떡은 내 알아 신경 쓰니 거기나 잘 드시게]

  오히려 피잔만 한 바가지 먹고 물러섰다. 나이가 든다는 건 고집이 생긴다는 뜻이다. 나 역시 옳다고 생각하는 걸 우기며 남 말 안 들은 게 한두 번이 아니니 80살이 넘은 할매야 오죽할까 싶다. 한편으로는 앞으로 얼마 사시겠냐 싶어 먹던 대로 드시다 돌아가시는 것도 복이지..라고 생각을 바꾸었다.

[막걸리 한 잔 주세요]

  시골의 햇볕은 유난히도 따갑다. 30분 정도 걸었더니 목도 칼칼하고 등에 땀도 나기에 슈퍼에 들렀다. 학마을의 단 하나뿐인 슈퍼라 음식점도 같이한다. 5평 남짓한 가게에 한쪽을 비워 탁자 2개를 둔 게 음식점인 셈이다. 또한 도로 앞에 위치했다는 장점으로 택배 아르바이트도 겸하니 참 쏠쏠한 벌이다.

[크~]
[권선생, 안주도 먹어야지 안 그럼 속 버려]

슈퍼 주인 할매는 김치 그릇을 상에 내려놓았다. 나는 한 때 교직에 몸담아 이 곳 사람들은 권선생이라고 부른다.

[마당에 풀이 가득하던 데 안 뽑아?]
[내일 하려고요]  
[구들댁은 참 부지런했는데..]

  돌아가신 어머니를 칭찬하시던 슈퍼 주인 할매는 건너편에 앉으시더니 막걸리 한 잔을 따라 드셨다. 나는 김치를 벗 삼아 두 잔 더 마신 뒤 풀을 뽑기로 약속 하고 일어섰다. 휘적휘적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햇볕이 쨍쨍 내리 찌는 게 대청마루에 늘어지고 싶다. 하지만 슈퍼 주인 할매가 나물 캐러가는 길에 마당을 볼 게 확실하니 하고 자는 게 좋겠다. 나는 한숨을 쉬고는 팽개쳐두었던 장갑을 찾아 끼고 마당에 쪼그렸다. 
  자세히 보니 한 놈 한 놈이 모두 예쁘고 튼튼한 데 뽑아버리자니 문득 미안해졌다. 이놈들도 다 먹고 살자고 여기에 뿌리내린 것을 인간에게 거치적거린다는 이유로 생을 마감하니 안 불쌍하겠는가. 하여 마음속으로 사과하면서 잡아 뽑았다. 1/3쯤을 정리하고 반대편으로 몸을 획 돌리는 순간 현기증이 난다. 눈앞에서 아지랑이가 살랑살랑 피어오른다. 균형을 잡으려고 왼 손으로 바닥을 집는데 순간 물컹했다. 깜짝 놀라 내려다보니 길이 40센티미터쯤 되는 뱀이다. 천만 다행인 게 이미 죽었다.

[미물이라도 고이 묻어줘야지. 어째 그리 태우는가?]

  풀을 뽑아 쌓아 놓은 더미에 마른 장작들을 올려 불길을 만들고 뱀을 던졌는데 어느 결에 오셨는지 청산 할매 목소리가 들렸다.

[묻어주기도 좀 그래서..]
[나무관세음보살]

  할매가 불교 신자라는 사실을 이 순간 알았다. 뒷짐을 짓고 휘적휘적 돌아가시는 걸 보니 갑자기 만사 귀찮아진다. 뱀이 타는 연기를 잠시 바라보다가 장갑을 벗어던지고 대청마루에 올라섰다. 팔베개를 하고 옆으로 돌아누워 눈을 감았다. 어렸을 때 다른 형제들과 뱀 잡이 사냥을 갔던 일이 생각난다. 내가 한창 크던 때는 찢어지게 가난해서 과자 같은 건 아예 상상도 못했다. 대신 꿩이랑 개구리, 뱀 등을 잡아 구워먹는 게 최고의 간식이다. 보통 용감한 셋째 형이 짐승의 목을 따면 첫째 형이 노릇노릇하게 구워주어 그 옆에서 구경하는 나는 군침을 흘렸다.

[어이~막내야. 빨리 와서 먹지, 뭐 하냐?]

  잠시 추억에 잠겨 있는데 셋째 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청마루에서 고개를 들어보니 뱀을 태우던 그 자리에 난데없이 셋째 형이 장작을 쌓아놓고 토끼를 굽고 있는 게 아닌가. 게다가 왼 손에는 뱀도 한 마리 보였다. 그는 칼로 뱀의 머리 쪽에 열십자를 그었다. 껍질을 잡아 당겨 생선 비닐을 벗기듯이 깨끗하게 발라냈다. 언제보아도 깔끔한 솜씨다.

[형? 여기서 뭐해?]
[뭐하긴..보면 몰라? 이리 와라]

  눈이 매운 듯 셋째 형은 손으로 비비며 소리쳤다. 얼결에 일어선 나는 마당으로 내려가 옆에 앉았다. 뱀이 기가 막히게 좋은 냄새를 풍기며 구워진다. 형은 뱀을 들어 올리더니 잘 익은 살을 건네주었다. 과거에 형은 모두가 징그럽다며 고개를 저을 때도 저렇게 나서서 해결해주더니 지금도 변함없다. 왠지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든다.

[짜식..잘 먹네..더 주랴?]

  입 안에서 장어와 비슷한 식감을 내뿜는 뱀을 우적우적 씹고 있자니 형이 빙그레 웃으며 들고 있던 나머지 부분도 흔들었다. 솔직히 이 나이가 되고 보니 뱀이란 게 특별한 목적이 있을 때나 먹기에 좋지 그냥은 별로인거 같아 거절하였다.

[막걸리 한 잔 할래?]
[좋지. 집에 있어?]
[받아오면 되. 잠깐만 기다려]

  토끼를 빙글빙글 돌리며 굽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점심에 마신 막걸리가 생각났다. 이렇게 목이 칼칼할 때는 시원하게 넘어가는 한 잔의 술이 필요한 법이다. 형이 고개를 끄덕이자 부엌에 가서 주전자를 꺼내왔다. 그 때 그 시절처럼 고기를 구워먹는 거라면, 막걸리 역시 주전자에 담아야 흥이 난다.

[너, 오다가 몰래 마시고 물 섞어오지 말아라]
[오케이]

  내가 종종 써 먹던 수법을 형은 아직도 기억한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져 나는 한 걸음에 슈퍼로 달려갔다. 막걸리를 받은 뒤 잔돈 200원은 팁이라고 하자 돈이 넘쳐나냐며 핀잔을 들었지만 아무려나 좋았다. 어서 형이랑 한 잔 해야지..하는 생각에 또 다시 한 걸음에 집으로 뛰어갔다.

[형~막걸리 사왔어]

  마당에 들어서며 외치는데..아무 것도 없었다. 형도, 한창 구워지고 있어야할 토끼도, 한 쪽에 버려둔 뱀의 껍질도.

[권선생, 거기 서서 뭐해?]

  멍한 표정으로 돌아보니 청산 할매가 길가에서 손짓하신다.

[그게..뱀을 구워먹다가..]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청산 할매는 고개를 흔들며 불경을 외우시더니 멀어져갔다. 아마도 뱀을 태우다보니 추억이 신기루처럼 나타났었나보다.

[그나저나 이 막걸리는 어쩌냐..]

  허탈하게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보니 저녁노을이 아름답다.  별이 뜨    

에 뽑다 내버려둔 풀들을 빨리 해결하고 저녁 식사 준비나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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