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 볕이 잘 듭니다 - 도시에서 사일 시골에서 삼일
한순 지음, 김덕용 그림 / 나무생각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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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복잡한 곳에서 4일, 물 맑고 공기 좋은 한적한 곳에서 4일을 산다.(일주일은

7일이지만 목요일 오후에 내려와서 월요일 새벽에 올라가는 나에게는 모두 4일씩이다)그렇게 산지

벌써 3년이 되어 간다. 나도 저자처럼 서울로 올라가려고 준비할땐 한없이 밍기적거린다. 서울에 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열심히 생활하지만 경기권을 벗어나 6번 국도에 들어서면 마음이 설렌다. 일단

창문을 내린다. 숨이 쉬어 진다. 그렇게 숨을 쉬기 시작하며 서울 생활을 하며 생각나거나 좋았던

음악들을 하나씩 듣는다. 이 시간이 너무 좋다. 집에 도착하면 며칠 동안 방치된 마당과 텃밭이 반갑게

나를 맞이한다. 집에 들어서서는 짐도 풀기 전에 그라인더에 빈을 담고 간다. '드르륵 드르륵' 갈리는

소리와 함께 올라오는 커피향이 너무 좋다. 그리고 여과지를 깔고 정성껏 물을 부으면 올라오는 커피향은

이미 그 자체로 행복이다. 그렇게 내려진 커피를 후배가 만들어 준 하얀 잔에 담으면 또 한번의 향연이

펼쳐진다. 이렇게 나의 시골 생활은 시작된다. 책을 읽는 내내 저자의 시골 생활이 그려진다. 나와 거의

비슷하기에 동질감 마저 느껴진다.

​

그래서인지 저자가 말하는 '섞이다'라는 말이 마음으로 느껴진다. 나도 그랬다. 낯설고 어색하고 경계심

많던 서울 촌놈이 어느새 자연을 누리고 즐기며 함께 섞여 가고 있고,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십년여를 살아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던 무관심 말기 환자가 옆집 앞집(뒷집은 없다.우리집이 마지막

집이기에) 어르신들의 자녀들 손주들 이야기까지 속속들이 안다. 그뿐인가. 그저 '풀떼기'로만 알고 있던

무수히 많은(저자의 글에도 나오는 원추리, 개망초, 작년에는 자연산 송이도 캐봤다) 식물들을 알게 되는

개벽이 일어 났다. 사람은 그렇게 섞여가는 것이다. 세상과 섞이고, 사람과 섞이고, 자연과 섞이며 그렇게

사는 것이다.

​

저자는 임지훈이라는 가수에게서 쉼표를 건져냈다. 노래를 하지 않는 순간 노래를 느끼는 경지를 만나기도

한다. 아무 소리 없는 공명, 음과 음 사이의 여백, 기타 소리의 긴 여운을 통해 자신의 감정과 마주 볼 수

있는 시간을 만난다. 나도 '꾸러기' 시절의 그를 만났다. 정말 꾸러기였고 숫기없는 삐딱이였다. 그런 그가

무대에만 오르면 광기를 보였다. 무아지경에서 나오는 기타 소리는 천상의 소리이다. 가끔 둔탁하게 들리는

6번 줄의 소리는 징과도 같았던 기억이다. 그는 여전히 미사리의 어느 카페에서 노래를 하고 있다. 같은

기억과 비슷한 세대들의 공통점은 문화를 나눈다는 것이다. 아마도 저자는 나와 같은 세대일 것이다. 나에게도

그런 '쉼표'가 있다. 김민기 선배이다. 선배는 노래를 참 못 부른다. 목소리도 굉장한 탁성이다. 그런데도 난

선배의 노래를 들으면 그냥 좋다. 마음이 편안해 지고 숨이 쉬어진다. 선배의 곡을 리메이크한 젊은 가수들의

곡들은 참 맑고 깔끔하고 세련되었지만 난 여전히 선배의 노래가 좋다. 마치 가을이 되면 편지를 써야 할 것

같아 진다.

​

단숨에 읽었다. 나와 비슷한 시대의 사람이 비슷한 환경에 살며 비슷한 생각과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담겨서

그런지 흐뭇하다. 저자가 금요일이 되면 둘러싼 모든 일에 함구무언하며 가방을 싸는 것 처럼 나는 목요일

오후에 가방을 챙긴다. '시골에 들어와 나무를 제대로 보려면 한 3년은 걸려'라고 말씀하시는 20여년차

선생님의 말씀을 나는 앞집 어르신에게 들었다. 그렇게 이 책은 나와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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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인가, 제자인가 에센셜 에디션 ㅣ 팬인가, 제자인가
카일 아이들먼 지음, 정성묵 옮김 / 두란노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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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수치와 죄책감과 두려움의 이유였던 얼룩이 이제 사랑과 은혜와 포용의 증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P115

그분은 우리의 단 하나 뿐인 애인이 되고자 하신다. P53

일요일이되면 습관적으로 교회에 간다. 그리고 의무적으로 헌금을 내며 한 시간을 잘 버틴 댓가로 일주일의

위안을 얻는다. 다른 어떤 교회의 모임도 개인적인 경건생활도 없다. 혹은 교회에도 꼬박꼬박 나가고

성경공부 프로그램에도 참여하고 봉사도 꽤 하지만 정형화된 종교 생활이 굳어져서 자신이 정한 기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이 책에서는 이런 이들을 팬이라고 하고, 성경과 다른 책에서는 바리새인이라고

하며, 세상은 이런 이들을 종교 생활만 하는 종교인이라고 부른다. 이 책은 그런 종교인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분명한 위치를 정하라고 주문한다. '경기가 끝나면 쉴 수 있다. 하지만 아직 안 끝났다.'

(Don't Give Up중에서)라고 말하며 지치고 힘겹고 어려워서 포기하려고 하는 우리에게 강렬한 재도전 의지를

불어 넣었던 저자의 강한 믿음과 견고한 신앙을 기억하며 책장을 연다.

'친밀감'. 참 어려운 단어다. 형식적이고 의식적인 친밀감이 아니라 가슴으로 다가오고 마음으로 인정되는

그런 친밀감을 말한다. 저자는 이러한 친밀감을 주님과 가지라고 이야기한다. 단순히 모여서 지적 충만함에

도취되어 배우는 그런 성경 공부가 아니라 몸이 따라주고 행동이 동반되는 그런 친밀감을 말하는데 사실

어렵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나 외에 다른 어떤 것도 네 앞에 두지 말라'고 말씀하시며

우리의 약한 믿음에 경고를 보내신다. 이 말을 잘 생각해야 한다. 내가 첫번째 자리에 앉을게가 아니다. 다른

어떤 것에도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나만 믿고 따라오라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죽을 각오를 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라고 말한다. 자녀가 우선이 되지 않고, 돈이 우선되지 않고, 출세와 성공이 우선되지 않고 모든

것에 앞서 하나님이 우선이 되는 것이 바른 믿음이라고 말한다. 우리에게는 현재의 혹은 과거의 위치와 자리,

상황에 관계없이 딱 두 부류의 크리스천이 존재한다. 팬인가 제자인가?

'와서 죽으라'는 충격적인 초대 앞에 어떻게 할것인가? 음, 죽으라는 초대가 너무 과한가. 그러면 가진 것의

절반을 내놓으라는 초대는, 혹은 누군가처럼 사랑하는 자녀를 내놓으라는 초대는 어떤가? 사실 주님은

우리에게 '쉼'을 허락하시는 초대에서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라는 한정을 두신다. 그만큼 삶에 치열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라는 말이다. 이러한 초대는 결국 우리의 믿음과 신앙의 결단을 요구한다.

말로만 하는 것은 안된다. 지금까지 말로만 예수를 믿었기에 가장 높임을 받아야 할 분을 세상의 놀림거리와

근심거리들의 우두머리로 전락시켜 버렸다. 이제 우리는 위선과 허영으로 가득찬 종교 생활을 걷어 내고

'야다'의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세상의 모든 것이 배설물처럼 여겨진 바울에게 예수님 때문에 죽는 것은

오히려 '기꺼이 받아들임' 이었다.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의 죽음은 하나님과의 또다른 동행이기에

도망하지고 반항하지도 않고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것이 제자의 삶이다.

사진 설명을 입력하세요.

'미친 사람의 이야기 중 최고는 하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돌아 가셨다는

이야기다'. 맞는 말이다. 우리가 그분을 먼저 쫓은 것이 아니라 그분이 먼저 우리를 쫓으셨다. 우리가 그분을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으며 우리가 먼저 그 길을 간것이 아니라 그분이

먼저 그 길을 가시고 우리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다. 그렇게 따르는 것이 제자이다. 팬은 멀찍이

떨어져서 지켜만 봐도 무방하다. 앞에서 미친듯이 열광하다 뒤돌아 서면 적이 되어도 된다. 그러나 제자라면

그 곁을 지켜야 하며 멀리 있어도 그 마음이 변해서도 안되며 그가 따라오라고 하신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야

한다. 그렇게 그 길을 가신 그 길의 끝은 모든 것을 다 내어놓은 죽음이었다. 그리고 우리를 그 길로

초대하신다. 주님은 항상 우리를 부르시지만 우리는 잃고 싶지 않은 것들이 많기에 주저하고 머뭇거린다.

그런데 더 놀라운것은 이런 우리를 그래도 기다려 주신다는 것이다.

사진 설명을 입력하세요.

이 책에는 제자의 본을 보여주는 여러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중 가장 눈에 들어 오는 두명이 있다. 니고데모와

윌리엄 보든이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니고데모는 공회 출신의 엘리트라는 신분적 제약으로 한밤중에 예수남을

찾아 왔던 사람이다. 그밤에 그는 예수님을 만나 가르침을 받아 들이고 제자가 된다. 그후 무도한 법정에 선

예수님을 홀로 변호하다 공회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나 그의 믿음은 결코 굽혀지지 않았다. 비어 있던 무덤에도

찾아가고 평생을 복음을 전하다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제자는 이런것이다. 배웠기에 그 배움대로 살려고

생명을 건다. 저자는 자신을 '예수님의 제자'라고 분명히 말한다. 자신이 저지른 어떤 실수도, 어떤 성공도,

이 사실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예수님의 정체성을 받아 들이면 예수님을 따를 수 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윌리엄 보든(William W Borden)의 신앙 고백이자 제자의 삶에 대한 세 개의 문장을 적어 본다.

No Reserves.

No Retreats.

No Regrets.

주님께서 그리스도인을 부르실 때 주님을 알고(Knowing God), 주님으로부터 배우고(Learning from God),

주님을 아는 지식에까지 자라게(knowledge of God) 하시려 부르셨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히-야다,

헬-기노스코)은 단순히 머리로만 아는 정보적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통해 얻게되는

경험적, 체험적, 실재적, 관계적인 앎이다. 이 책은 제자의 길을 걷길 원하는 모든 이들과 신학도의 길을

걸으려고 마음 먹은 모든 이들이 꼭 읽어 봤으면 좋겠다. 그들을 향한 부르심에 'Here I am'이라고 응답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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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생존 수업 - 인공지능 시대가 불안한 사람들에게
조중혁 지음 / 슬로디미디어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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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토마스 모어(Thomas More)를 인용해 인공지능에 대해 설명한다. 모어는 인간이 신에게 벗어나

스스로 아름답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의 저서 '유토피아'에서 인간의 이성과

덕성을 통해 세상을 더 발전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며 유토피아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힘든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 노예제도를 인정했는데 저자는 여기에서 착안하여 우리를 힘든 노동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방법이 '인공지능'이라고 말한다. 인공지능은 만능이 아니다. 대화로 상대를 설득하는 것도,

융합적인 사고를 하는 것도, 상황을 파악하여 융통성을 발휘하는 것도, 무엇보다 일을 만드는 일과 일을

해결하는 것은 아직 가야할 길이 멀다. 그래서 저자는 인공지능에 대해 제대로 알고 이해하면 인공지능을

통해 훨씬 좋은 미래를 맞이할 수 있게 될것이라고 말한다.

​

뉴턴 이후 최고의 물리학자라고 이야기 하는 스티븐 호킹 박사는 '생각하는 로봇 개발을 위한 완전한

인공지능의 등장은 인류의 멸망을 가져 올지 모르며 컴퓨터가 사람을 지배하는 세상이 올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지금까지의 초기 인공지능 기술은 유용성을 충분히 입증했지만 인간의 능력에 필적하거나 이를

뛰어 넘는 인공지능이 등장한다면 어쩌면 우리는 영화나 소설에서나 보아 왔던 기계에 지배당하는 상황을

맞닥뜨릴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의 진화는 매우 느리나 기술은 어느 순간 임계점에 도달하면 폭발적으로

발전하기 때문에 기계가 사람을 뛰어 넘을 수 있다는 가정은 가정이 아니라 현실이 될 수도 있다.

​

인공지능 시대에는 '창의성'이 생존을 위한 가장 중요한 능력이 될 것이다. 개인은 창의성을 가지고 스스로

살아 남을 수 있어야 하며 기업 입장에서도 인공지능으로 대부분의 일이 자동화, 정형화되면서 이전과는

차별된 가치를 제공해야 한다. 인공지능으로 무장한 로봇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로봇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해야 한다. 인공지능 시대에 누구나 알고 있는 지식,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생각을 통해서는

결코 살아 남을 수 없다. 세계경제 포럼은 현재 7세 이하 아이의 65%는 지금 존재하지 않는 직업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 한다. 변화하는 세상에서 살아 남을 무기는 '창의성'이다. 창의적 생각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창의적인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창의적 생각을 하기 위해 깊은 고민을 오랫동안 하지 않기

때문이다. 태어날 때부터 창의적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의지만 가지고 어떤 일을 오래 지속하기는

어렵다. 즐거움이 있어야 그 일을 오래 할 수 있다. 창의성은 구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움에서

나온다. 이를 통해 문제해결을 가능케하는 생산적인 창의성이 나온다.

​

인공지능의 발달하면서 사회의 변화 속도는 더욱 빨라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분야만 계속 고집하는

전략은 특수한 분야를 제외하고는 위험성이 커질수 밖에 없다. 사회의 빠른 변화 속도를 이기기 위해서는

파도를 헤쳐 나가려는 바이킹이 아니라, 파도를 타고 다니는 서퍼가 되어야 한다. 인공지능 시대에서는

직업의 유연성이 매우 중요하다. 즉 언제라도 변신 할 수 있는 전략적 무기를 두개 이상은 가져야 한다.

이미 와 있는 인공지능시대를 살아가기 위한 우리의 준비와 노력이 필요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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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신뢰 - 인생의 모든 답은 내 안에 있다 ㅣ 현대지성 클래식 36
랄프 왈도 에머슨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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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은 좋은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자신에게 주어진 경작지를 자기 자신의 노동으로 갈지

않으면, 단 한 알의 옥수수도 그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요즘 들어서 비슷한 문장이 계속 보인다.

데일 카네기는 그의 인간관계론에서 '모두가 꿈을 꾼다. 그러나 그 꿈을 이루는 이는 아주 적다. 그들

대부분은 꿈만 꾼다'고 말했고, 괴테는 삶의 어려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쉬운 일이고 행동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생각대로 행동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결국

자신에게 달린 것이다. 변화도 수확도 심지어 삶까지도 자신에게서 출발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다. 우리의 첫번째 생각은 최후 심판의 나팔 소리가 울릴 때 우리에게 되돌아 온다.

​

인간의 행위가 아무리 다양하다고 해도 제때 맞추어 정직하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면 합치가

이루어진다. 여러 행위가 서로 닮지 않은 것처럼 보여도 하나의 의지에서 나왔으므로 죄를 이루는

까닭이다. 우리의 진정한 행동은 스스로 설명할 것이고 다른 진정한 행동들도 거기에 동참할 것이다.

하지만 순응하는 태도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므로 홀로 행동해서 스스로를 정당화해야 한다. 오늘

바른 일을 할 만큼 확고하며 남의 이목을 상관하지 않을 수 있다면 이전의 기억들을 통해 스스로를

변호할 수 있다. 어떻게 행동하든 지금 바르게 행동해야 한다. 겉모습을 무시한다면 언제나 옳은 일을

할 수 있다. 타인의 시선과 말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걷는 것, 이를 통해 스스로에 당당할 수

있고, 타인에게 당당할 수 있으며, 사물의 중심에 우뚝 설 수 있다.

​

에머슨은 삶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삶은 지금 이 순간의 것, 이미 살아가면서 지나가 버린 세월은

지나간 것이다.' 자꾸 뒤를 보며 과거를 떠올리며 현재를 망가뜨리는 우리에게 주는 고언이다. 그렇다.

삶은 지금 바로 이순간이다. 휴식을 취하는 순간에 힘은 정지한다. 힘은 과거의 상태에서 새로운 상태로

이전하는 순간, 심연을 뛰어 넘는 순간, 목표를 향해 날아가는 순간에 존재한다. 영혼은 이처럼 '되어감

'(becomes)을 지향한다. 이제는 가슴이 시키는 일을 해야 한다. 누군가에 의해 이끌리는 삶이 아닌 자신의

가슴이 쿵쾅거리고 심장이 두근거리는 그런 일을 해야 한다. 굳센 의지를 내세우며 일하고 얻고 운명의

바퀴에 체인을 감고 멈춰 세워서 나를 향해 움직이도록 만들어야 한다. 운명의 회전을 두려워하지 말고

당당히 맞서고 내편으로 만들어 운명이 나를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운명을 결정하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

​

에머슨은 인간은 자신을 타인에게서 떼어낼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하며 인간은 자기 신뢰를

실천함으로써 새로운 힘을 얻는 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육신이 된 말씀이며, 온 세상을 치유하기 위해

태어나 인간의 생명을 영광으로 회복시키고 인간의 이름을 모든 역사에 소중한 것으로 만드는 '예수'를

소개하며(그의 글의 대부분은 이렇듯 종교적 관점과 이어진다), 자기 신뢰의 네 가지 실천방안을 제시한다.

그 첫번째는 가장 높은 관점에서 인생의 피할 수 없는 사실들을 관조하게 하는 기도이다. 이것은 사물을

관조하며 기뻐하는 영혼의 독백이다. 두번째는 조금은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어디를 가든지 자신이

되라'는 소제목까지는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싶은데 내용에 나오는 여행에 대한 부분(영혼은 여행자가

아니다. 어떤 필요에 의해 집 밖으로 나가도 여전히 집에 머문다. 즐거움을 얻으려고 자신에게 없는 것을

얻으려고 여행을 하는 사람은 자신에게서 도망치는 여행을 하는 것이다. 여행은 어리석은 자의 낙원이다.

여행은 폐허에 또다른 폐허를 더할 뿐이다.)위대한 철학자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인지 여행에

관한 그의 견해에는 선뜻 동의가 안된다. 세번째는 자신을 믿고 결코 모방하지 말고 매 순간 자기 재주를

내보이고 평생에 걸쳐 쌓아온 누적된 힘을 보여줄 것을 요구하는 독창적인 사람이 되라이다. 그러면서

소박하고 고상한 생활을 이어가면서 심장이 시키는대로 복종하라고 말한다. 나는 곧 나다(I am that I am)

라고 말하며 세상 속에 당당히 서야 한다. 어짜피 인생은 자신의 길이다.

마지막이 세상과 문명의 본 모습을 파악하라인데 에머슨은 사회는 결코 진보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전진과 후퇴의 반복을 이야기한다. 뭔가 득을 보는 쪽이 있다면 반드시 잃는 쪽도 존재한다. 문명인들이

마차를 만들어냈으나 그 대신 두다리를 많이 사용하지 않는것 처럼 새 기술을 획득한 사회는 오래된

본능을 잃어 버린다.

​

이 책을 읽다 보면 소로(Hanry David Thoreau)의 월든(Walden)이 떠오른다. 윌든에는 에머슨의자연관이

들어 있는데 에머슨의 '자연'이라는 에세이는 추상적인 이야기로 그 뜻을 명백하게 파악하기 어렵지만

소로는 구체적 사물과 사건으로 자연이 인간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이 책은

어렵다. 그래도 다행인것은 니체가 여행길에 항상 이 책을 가지고 다녔고 '자기 신뢰'를 읽으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구상했다고 하니 내가 조금 덜 이해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위안(?)을

가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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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생활 건강
김복희 외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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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공백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 싶다. 내가 실제로 띄워서 비운 '의 지 의 이 따 위 공 백 이 아

니 라' 마침표로 생략되거나, 괄호로 비워둔 거기 그 세계'. 이소호 시인의 글에 나오는 글귀인데 한참을

보며 마음에 울컥함을 받았다. 먹먹해진다. 억지로 의도해서 마지 못해 비워 놓은 그 공간이 아닌 마침표와

괄호를 부여하여 처음부터 준비한 그 공간. 아마도 우리에겐 이러한 삶의 여백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마침표도 쉼표도 없이 앞만 보고 내달려 온 우리에게 시인은 잠시 멈춰섬을 제안한다. 그 공간은 우리에게

'숨'을 준다. 들숨과 날숨으로 거칠게 내어 뱉는 우리에게 조금은 편안하고 조금은 여유로운 휴식응

제공한다. 이 휴식이 우리를 숨쉬기 하고, 다시 걷게 하고, 다시 뛰게 한다. 작가에게 쓴다는 것은 아픔이다.

그래서 '당신의 글은 아파요. 쓰는 것도 읽는 것도 아파요'라고 말하는 독자에게 '저도 아파요. 쓰는 것도

읽는 것도 아파요. 하지만 쓰지 않는 것은 더 아파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도 글을 쓰고 있다.

​

이 책에서 소개하는 열 명의 작가 중 나와 비슷한 인간(나는 나를 인간이라 부르기에 나와 비슷한

작가에게도 동일한 호칭을 부여한다)을 만났다. 나는 건강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성다영 시인도 그런것

같다. 건강에 좋으니 먹으라고 하면 병적으로 멀리하고 몸이 좋은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이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살았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동질감은 고통을 겪지 않기 위해 뭔가를 한다는 것이다. 건강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과 고통을 겪지 않기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은 아주 많이 다르다. 건강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되기에 나의 삶에 그리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시인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이건 마치 두 눈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곳에 홀로 외로이 살던 외눈박이가 평생 처음 또다른 외눈박이를 만난 기분이랄까.

고통을 느끼지 않음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있지만 원하지 않는 고통은 괴로운 것이다. 그럼에도 원하지

않는 고통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은 진정한 고통이란, 원치 않는 고통이라 말한다. 물론 나는

이 정도는 아니다. 나에게 고통이란 단지 귀찮은 것이다. 몸의 아픔은 고통이지만 정신적 괴로움은 쾌락에

가깝다. 그래서인지 장켈레비치와 파스칼 뒤퐁과의 대화는 고통과 존재에 관한 우리의 생각의 폭을 넓혀

준다. '희망은 존재하는 사실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지요. 존재 안에는 자연히 존재의 연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존재의 중단은 밖에서 오는 것입니다. 존재는 그 자체의 부정을 함축하지 않지요. 부정은 다른

곳에서 오는 것이므로 당신이 병에 걸린다면 불운을 만나는 것이지요.' 아마도 어쩌면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고 살지 않았나 싶다. 고통의 최고의 긍정은 죽음이다. 건강한 사람들이 견디는 혹은 견딜 만한

절망은 진정한 절망이 아니다. 절망은 진실 할 수 없다. 그래도 지금 우리는 그 절망 가운데서 희망을 보고

있다.

​

'지금의 나는 좋아하는 일을 자주 하고자 노력하는 잔잔하게 망가진 인간이다'라는 김복희 시인의 이야기는

지금의 우리를 대변한다. 자잘하게 망가진 몸과 정신이란, 인간으로서나 생명으로서나 평범한 상태이다.

누구에게서 나든 어떻게 나든, 난 것은 제 나름대로의 속도로 망가지게 되어있다. 그러니 받아들이고

순응하면 된다. 억지로 버팅기려 할 필요도 없고, 억지로 거스르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 좋아하는 일을 많이

해두는 것으로 자신을 준비시키면 된다. 혼자 할 수 있는 일도 함께 할 수 있는 일도 다 해보고 시인의

말처럼 '굴러 가는 동안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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