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수치와 죄책감과 두려움의 이유였던 얼룩이 이제 사랑과 은혜와 포용의 증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P115
그분은 우리의 단 하나 뿐인 애인이 되고자 하신다. P53
일요일이되면 습관적으로 교회에 간다. 그리고 의무적으로 헌금을 내며 한 시간을 잘 버틴 댓가로 일주일의
위안을 얻는다. 다른 어떤 교회의 모임도 개인적인 경건생활도 없다. 혹은 교회에도 꼬박꼬박 나가고
성경공부 프로그램에도 참여하고 봉사도 꽤 하지만 정형화된 종교 생활이 굳어져서 자신이 정한 기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이 책에서는 이런 이들을 팬이라고 하고, 성경과 다른 책에서는 바리새인이라고
하며, 세상은 이런 이들을 종교 생활만 하는 종교인이라고 부른다. 이 책은 그런 종교인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분명한 위치를 정하라고 주문한다. '경기가 끝나면 쉴 수 있다. 하지만 아직 안 끝났다.'
(Don't Give Up중에서)라고 말하며 지치고 힘겹고 어려워서 포기하려고 하는 우리에게 강렬한 재도전 의지를
불어 넣었던 저자의 강한 믿음과 견고한 신앙을 기억하며 책장을 연다.
'친밀감'. 참 어려운 단어다. 형식적이고 의식적인 친밀감이 아니라 가슴으로 다가오고 마음으로 인정되는
그런 친밀감을 말한다. 저자는 이러한 친밀감을 주님과 가지라고 이야기한다. 단순히 모여서 지적 충만함에
도취되어 배우는 그런 성경 공부가 아니라 몸이 따라주고 행동이 동반되는 그런 친밀감을 말하는데 사실
어렵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나 외에 다른 어떤 것도 네 앞에 두지 말라'고 말씀하시며
우리의 약한 믿음에 경고를 보내신다. 이 말을 잘 생각해야 한다. 내가 첫번째 자리에 앉을게가 아니다. 다른
어떤 것에도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나만 믿고 따라오라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죽을 각오를 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라고 말한다. 자녀가 우선이 되지 않고, 돈이 우선되지 않고, 출세와 성공이 우선되지 않고 모든
것에 앞서 하나님이 우선이 되는 것이 바른 믿음이라고 말한다. 우리에게는 현재의 혹은 과거의 위치와 자리,
상황에 관계없이 딱 두 부류의 크리스천이 존재한다. 팬인가 제자인가?
'와서 죽으라'는 충격적인 초대 앞에 어떻게 할것인가? 음, 죽으라는 초대가 너무 과한가. 그러면 가진 것의
절반을 내놓으라는 초대는, 혹은 누군가처럼 사랑하는 자녀를 내놓으라는 초대는 어떤가? 사실 주님은
우리에게 '쉼'을 허락하시는 초대에서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라는 한정을 두신다. 그만큼 삶에 치열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라는 말이다. 이러한 초대는 결국 우리의 믿음과 신앙의 결단을 요구한다.
말로만 하는 것은 안된다. 지금까지 말로만 예수를 믿었기에 가장 높임을 받아야 할 분을 세상의 놀림거리와
근심거리들의 우두머리로 전락시켜 버렸다. 이제 우리는 위선과 허영으로 가득찬 종교 생활을 걷어 내고
'야다'의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세상의 모든 것이 배설물처럼 여겨진 바울에게 예수님 때문에 죽는 것은
오히려 '기꺼이 받아들임' 이었다.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의 죽음은 하나님과의 또다른 동행이기에
도망하지고 반항하지도 않고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것이 제자의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