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일 때도 괜찮은 사람
권미선 지음 / 허밍버드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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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그런 날이 있다. 세상 가운데 혼자 내버려진 듯한, 아무도 내편이 없다는 막막함이 드는,

함께 있지만 여전히 외로운 그런 날이 있다. 저자는 이럴때 마음의 커튼을 친다고 말한다. 나는

무작정 밖으로 나간다. 목적지도 정하지 않고 그냥 달린다. 그렇게 참을 달리다 보면

때론 바다에 있고, 때론 깊은 산중에 있고, 때론 강가에 있으며 정말 가끔은 앞인

경우도 있다. 


아무리 끝을 세우고 걸어도, 고개를 숙이고 조용조용 숨을 쉬어도 어디든 불쑥 찾아오는

불운처럼 우리의 인생은 불확실성의 연속이다. 어느것 하나 정해진 것이 없기에 그때 그때의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삶이 비록 나를 힘들게 하고 정신없게 만들지라도 우린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저자의 말처럼 양이 정해져 있으면 얼마나 좋겠냐만 그것 마저도 미정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전체를 휘감을 만한 크기이지만 어느 누구에게는 언제 왔었는지도 모를

만큼의 생채기만을 남긴다. 불운을 견디고 견디고 견뎌내면 좋은 미래가 있을것이라는

확신 마저도 분명하지 않다. 다만 견딜 뿐이고 다만 버틸 뿐이다. 그래서 '오래 버티는 사람'

이기는 사람인가보다. 


그렇게 버티다 우리는 기차를 놓친다. 물론 지나가는 시간이지만 시간은 결코 다시 오지 않는다.

그렇기에 기차는 내내 아쉽다. 기차를 놓치듯 우리는 속에서 수없이 많은 것들을 놓치고 산다.

그것들이 그리 아픔과 상처가 아니면 좋으련만 아쉽게도 남겨진 흔적은 너무 크다. 우린

상처를 덮고 보듬으며 시간을 보낸다. 보내진 시간들이 모여 하나의 순간이 되고 순간은

우리의 삶의 작은 조각으로 남는다. 우린 그렇게 살아 간다. 


'혼자 일때도 괜찮은 사람' 분명 좋은 사람이다. 자신 혼자의 시간에서도 괜찮은 사람은 타인과의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는다. 자신과의 시간에 최선이기에 타인과의 시간에도 역시 최선이다. 자신

혼자만의 공간에서 괜찮은 사람은 타인과 함께하는 공간에서도 괜찮은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는

함께하는 것에 대한 기쁨과 맛을 알기 때문이다. 종교적 질문 '아무도 없는 곳에서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라는 질문이 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이 없는 순간 그리스도인일 있다면

사람은 누구와 함께 있어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의미의 질문이다. 왜냐하면 스스로를 지키는

사람은 어느누구와 함께 있어도 당당하기 때문이다. 


책은 진솔하다. 그만큼 작가의 마음이 그대로 묻어난다. 아픔과 외로움과 안타까움이 그대로

들어 있다. 아픈 생채기를 드러내면서 자신보다 아파하고 힘들 사람들에게 던지는 작은

외침이다. '여러분 힘내세요'라는. 책은 투박하다. 만들어지고 짜여진 글처럼 세련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마음이 간다. 자신의 이야기인양 감정이입이 되고 같이 우울해지기도 한다.

무심코 '' 던지는 한마디가 아주 오랜 여운을 남긴다. '그렇게 돌아오는 나를 상상하는' 저자처럼

옛날 어느곳으로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나를 상상해 보기도 했다.

 

저자가 우리에게 던지는 자조 섞인 마디를 적어 본다. 

'내가 나에게 괜찮다고 말해 주지 않으면 누가 나에게 괜찮다고 말해 줄까' 그렇다 우린 괜찮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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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의 숨겨진 얼굴 - 러시아의 미국 대통령 선거 조작부터 은밀한 섹스 토이까지
라이나 스탐볼리스카 지음, 허린 옮김 / 동아엠앤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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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지금 우리에게 인터넷은 하루에 인터넷을 시간 하는지를 묻는 것이 무색하리만치 일상이 되어버렸고

대부분은 거의 하루 종일 온라인 상태이다. 저자는 이와 같은 상황에서 평범한 이용자의 눈을 피해 일어

나는 , 일반 인터넷 이용자가 보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설명한다. 특별히 저자는 인터넷 해킹,

프로파간다, 마약 판매(실제로 프랑스의 국회의원은 어둠의 경로에서 마약을 구입하여 국회로

배송하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같은 불법 활동 뿐만 아니라 아직 개념이 불분명한 '다크넷'

대해서도 이야기 한다. 


흥미롭다. 사실 우리는 인터넷을 사용하기는 하나 그것이 어떤 구조로 되어 있으며, 어떻게

운용되고, 어떤 방법으로 구동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진화되고 있는지에 대해 별로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한다. 단지 편리성에 의해 사용할 뿐이다. 저자는 이러한 우리의 무지와 무관심이 인터넷의 어둠을

만들고 '숨겨진 얼굴' 갖게했다고 설명하며 책은 전문서가 아니라 일반 상식으로 분류되는

주제와 관련된 '총서'라고 규정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변화는 인간이 기술을 이용하는 방식 뿐만 아니라 기술과 인간 사이에서 형성되는

관계를 반영하며 속도는 이미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고 있다. 일상적인 상황에서 다른 방법 또는

대안을 찾거나 기계에 어떠한 조치를 하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 '해크(hack)'에서 파생된 '해커' 영어

약자인 Q&D(Quick & Dirty, 빠르고 간편하게) 의미와 양식이 대변될 정도로 빠르게 움직인다.

이런 해커들에게도 윤리라는 것이 존재하는데 대표되는것이 바로 '모든 정보는 무료'이다. 그들은

정보를 사람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치에 대항하여 정보 자체에 가격을 정하거나

판매하는 것은 부당하고 이를 막거나 제한하는 것에 반발하여 그것을 뚫고 해체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 저자는 소위 '자물쇠 따기 활동' 관여하는 이들을 '좋은 , 나쁜 , 회색을 입은 '으로

분류한다. ' 모자' 지칭되는 좋은 , '검은 모자' 불리는 나쁜 놈까진 어느정도 이해가 된다.

문제는 '회색모자'이다. 회색모자(grey hats) 정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불법행위를 하는 사람을

가르치는데 우리가 핵티비스트라 부르는 부류가 그들로 법이 금지하는 활동을 불사하면서 인본주의

또는 인도주의적인 가치를 지향하는 해커들이다. 약리학에서 독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입하는

물질의 양에따라 만들어진다고 가르치듯이 해커들이 발견한 취약점 자체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취약점을 가지고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문제가 되고 특혜가 일어나는 것이고 여기에서 모자의

색깔이 달라진다.


비록 저자가 책은 전문서가 아니라 '총서'라고 밝혔지만 아무리 봐도 책은 기본 지식을 가진이를

대상으로 책이다. 수없이 등장하는 생소한 단어들과 들어는 봤으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어들은 검색을 필요로 만큼 쉽지 않은 책이다. 어쩌면 책은 인터넷에 대한 기본 지식 이상을 가진

람들을 대상으로 '총서'라고 하는게 정확할 같다. 


궁금해했던 다크웹(어둠의 경로) 대한 글은 나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했고 사실에 입각한

설명이나 이해를 돕기 위한 적절한 예들은 훌륭한 지침서가 된다. 그러나 아직 길이 멀다. 적어도

책에 있는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넓은 지식의 습득과 배움이 있어야 같다. 이제

걸음마를 준비했으니 이제 시작해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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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의 눈물 - 한국 사회의 갑질 보고서
이철환 지음 / 새빛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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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불공평하고 불평등하다.

고대부터 지금까지 평등한 세상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사람의 생각과 사고가 완전히

바뀌지 않는 불평등은 존재할 밖에 없다. 부의 대물림이 어김없는 사실이듯이 가난의

대물림 역시 존재한다. 이런 불평등의 사회 속에서 평등을 말하는 금기와도 같았다. 그러던

것이 어느 순간 거대한 둑에 균열이 생기더니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온다. 그래서 등장한 단어가

'갑질'이다. 이미 여기에서부터 평등하지 않다. 갑과 을이라는 명확한 신분 구조가 드러난다. 


땅의 대부분의 사람은 ''이다. 상대적일 있지만 분명 대부분은 을이고 그들은 고통스럽다.

아프다. 힘들고 지쳐있다. 어쩌면 악순환을 끊고 싶은 욕망에 우리는 '로또' 사는지도 모른다.

그래봐야 강남의 아파트 채도 사지만 말이다. 저자는 '을의 눈물'이라는 책을 통해 한국 사회의

아픔을 보여준다.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는 갑질논란과 구조적 갈등현상에 대해 적나라한 속살을

드러낸다. 

나는 특별하다는 자아 도취에서 나오는 '갑질' 출발 부터가 잘못되어 있다. 만민은 앞에

평등하다가 맞지만 법은 철저히 권력의 편이고 권력은 돈에서 나온다. 결국 법은 앞에 평등할수가

없는 구조다. 갑질의 자아도취는 병적이다. 정말 자신들이 대단하고 특별한 안다. 그리고 그렇게

왔기에 아님과 다름을 모른다. 그들의 인식 속엔 자신은 별나라 사람이다. 너와 나는 다른 족속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기에 공평과 평등은 그들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 이런 잘못된 사고 방식은 계급 문화의

산물이다.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엄격히 구분 되었던 옛날부터 존재하는 차별이다. 이때 갑은 영원한

갑이었고 이때 을은 영원한 을이었다. 신분의 변화가 거의 없이 몇백년 이상을 살다보니어느새 자신이

정말 을인줄 알게 되고 반항도 저항도 없이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우리 선조들이 그렇게 살아 왔고 우린

그것을 거의 그대로 답습한다. 


갑질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벌어진다. 그리고 그것들은 언어 폭력과 구타행위, 성추행과 성폭력, 인사상

불이익과 따돌림, 경제적 수탈행위, 노동력 착취등의 양상을 띠는데 이는 경중의 차이가 있을 우리

사회 전반적인 부분에서 자행되고 있다. 


최근 들어 갑질에 대응하는 제도적 장치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정부가 운영중인 국민신문고, 옴부즈만,

스튜어드십 코드(국민연금, 자산운용사 같은 기관투자자들이 투자한 기업에 대해 주주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함으로써 주인의 자산을 맡아 충실하고 선량하게 관리하는 집사(steward)처럼 고객의 자산을

관리하도록 하는 자율지침)등이 있고 민간 단체에서 운영하는 24시간 갑질 피해 센터, 직장갑질 119등이

있다. 물론 이런 제도적 장치들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근본적인 사람의 인식과 가치관이 변해야

한다. 어떤 제도적 장치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허점은 가지고 있고 놀랍게도 값들은 허점을 노려 그들의

'갑질' 자행한다. 


갑질의 유형은 다양하다. 개인 간의 갑질, 단체간의 갑질, 개인에 대한 단체의 갑질, 단체에 대한 개인의

갑질등 유형이 다양한데 저자는 '노조 갑질' 대해 이야기한다. 아이러니 하게도 같은 을중에서

갑과 을로 나뉜다. 거대 권력으로 성장한 노조는 노조원들 위에 군림하고 그들을 움직이며 막대한 이권을

챙기고 심지어 채용에까지 관여한다. 여기에 더해 사용자에게까지 자신들의 권력을 이용한 갑질을 하는

형편이다. 무엇보다 투명해야 노조 운영에서도 비리를 심심치 않게 발견할 있고 그들은 자신들의

성역을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 공정한 사회, 신뢰할 있는 사회와는 거리가 멀다. 사회 전반에 불신도

팽배하다. 이런 구조 속에서는 을일 밖에 없다. 을은 아무리 눈물을 흘려도 을이다. 이런 사회는

결코 건강하지 않다. 건강한 사회는 서로가 행복한 사회인데 우린 지금 너무 행복하다. 많은 이들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한다. 인성교육부터 다시 시작하고 품성교육도 하고 사람 냄새 나는

사람을 만들고 키워야 한다. 비록 지금 우리 세대가 그것을 누리지 못한다 할지라도 새롭게 시작하지

않으면 영원히 구호 속에 그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갑과 을의 간극은 너무 깊고 너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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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소망 - 바벨론 세상에서 만왕의 왕이신 예수를 바라보다 요한계시록
유기성 지음 / 두란노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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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었는가, 죽어 가는가, 아니면 진정 살았는가? P82

'오직 예수' 믿음으로 살아야 생깁니다. P241


"모든것을 버리고도 넘치는 기쁨이 있습니까?"

사실 질문은 신대원시절 이후 줄곧 나에게 물음표를 던진다. 어떤 때는 '정말 그렇다'라고 말하다가

금새 뒤돌아서면 '정말 그럴까?' 되어 버리는 '조삼모사' 나의 신앙이 부끄럽다. 저자는 요한걔시록을

묵상하면서 성령의 감동으로 많이 울었다고 하는데 나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기 어려운

때가 너무 많았다. 그런 계시록에 대해 천국 소망을 가진 사람의 심정으로 한자한자 적어 내려간 저자의

글이 그래서 더욱 기대된다. 


모든 성경의 핵심은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이다. 이것을 벗어 날수도 벗어 나서도 안된다. 특별히

요한계시록의 핵심은 예수님이다. 당시 교회는 혼란스러웠다. 핍박과 죽음의 공포가 엄습하던 시기라

어떤 교회는 속절없이 무너졌고, 어떤 교회는 세상과 타협해 다른 길로 갔고, 어떤 교회는 이단과 싸우다

사랑을 잃어 버렸고, 어떤 교회는 침묵했다. 어디서 많이 들어 상황이다. 지금 한국 교회의 현실이다.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 주님은 요한에게 자신을 드러내시며 결코 교회를 포기하지 않고 있음을,

여전히 붙잡고 계시고 끝까지 놓지 않으실 것을 보여주신다. 벅찬 감격과 두려움이 계시록에 그대로

녹아 있고 저자는 그것을 이야기 한다.

 

처음 위에 나온 질문을 대할 떠오른 것이 '천국의 비유'였다. 밭에 보화가 감춰진 것을 발견한 농부가

자신이 기진 모든 것을 팔아서 밭을 같이 기쁠까였다. 사라지고 없어질 보화를 발견했는데도

그렇게 기쁜데 정작 그것과는 비교도 없는 천국을 얻었는데도 여전히 냉랭하고 벅차오르지 않는

마음은 저자의 말처럼 '소망 없음' 아닐까하는 생각에 미치자 잠시 멈춰 서게 됐다. 우리에게 있어

천국은 무엇일까? 세상 삶이 힘들어 빨리 죽어서 가고 싶은 곳이 천국일까? 분명 아닐것이다. 믿음의

눈이 떠지고 소망으로 바라볼 있는 곳이 천국이고 이런 사람들이 누리는 삶이 천국의 삶인데 아쉽게도

우리에게 천국의 삶은 '그림의 '이다. 


요한이 소개하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1:8). 구절에는 천국 소망의 본질이 들어 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 천국이라고 말한다.

요한은 천국을 이렇게 말한다. '지금도 계시고'. 그렇다면 지금 하나님과 함께하는 , 그것이 천국의

삶이다. 현재가 강조된 것이다. 막연한 미래의 '보랏빛 ' 아니라 지금 이순간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누려야하며 지금 우리에게 미래를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래서 요한은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이 '언제'인지는 관심이 없다. 오직 '어떻게' 맞을 것인가에 집중할 뿐이다. 


우스개 소리로 신학생들이 가장 부르기 꺼려하는 찬송이 '부름 받아 나선 '(323,통일355)이라고 한다.

1절은 그럭저럭 넘기겠는데 2절에 가면 목이 메여 온다. '아골골짝 빈들에도 복음들고 가오리다 소돔 같은

거리에도 사랑안고 찾아가서 종의 몸에 지닌 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라'.  성공 일변도와 대형교회, 어느정도

재정 자립 교회를 찾다 보니(사실 부분 어느정도는 이해가 된다) 아골골짝 빈들을 가긴 가야겠는데

말고 다른 사람이 갔으면 좋겠고, 빈들에서 복음을 외쳐야 하는데 나는 목소리가 작으니 목소리

큰사람이 하면 좋겠다는 식이 되어 버렸다. 다음 가사는 더욱 심각하다. 소돔 같은 거리에 사랑 안고

찾아가야 하는데 그곳은 황폐하고 거칠고 더럽기에 도통 엄두가 안나고 주님께 받은 사랑은 어느새

슬그머니 뒤로 감춰 버린다. 몸에 지닌 조차 아낌없이 드려야 하는데 가지려 챙기려 하다보다

욕심과 탐욕으로 가득차 버린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죽도록 충성하라'(2:10) 한다. 지금도 힘들어

죽을것 같은데  말이다. 임직식이나 헌신예배에서 많이 사용하는 구절인데 많은 이들이 질문 앞에

의미없이 '아멘'이라고 대답한다. 그리고는 잊어버린다. '죽도록'인데 '적당히' 되어 버린다. 죽을

각오로 해야 하는데 대충대충 시늉만 한다. 없이 많은 집회에서 수없이 많은 이들이 '헌신' 다짐하고

서원하지만 정작 현실은 지금이다. 매주 벌어지는 집회의 현장에서 두손들고 무릎꿇고 눈물 흘리며

소리질러 주님을 사랑한다고 외쳤지만 그때 , 여전히 우린 제자리다. 저자가 소개하는 전도하다가

공안에게 체포돼서 일년 동안 옥살이를 중국교인의 말이 가슴을 찌른다. '억울하긴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섰다면 당연히 감사히 해야죠' 당연하고 감사한게 맞는데 이렇게 우리에겐 낯설게

들리는지 모르겠다. 언제부턴가 우리에게 '고난의 영성' 다른 나라 이야기가 되버렸다.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은 운명도 팔자도 아니고 자원하여 가는 길이다. 히브리서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은 믿음으로

고난을 자처한 이들이며 끝까지 길을 걸었던 이들이다. 그들의 삶이 바로 '죽도록 충성하라'이다. 

'실상은 죽은 것이다'

교회에는 많은 이들이 나온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흩어져 세상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정작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을 찾아 보기 어렵다. 많은 이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주님은 사데교회를 향해 '너는

살아 있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사실 사데교회는 버가모교회나

두아디라 교회처럼 음란하고 세상 풍조에 물들고 방탕하고 우상 숭배를 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위사람들에게 '믿음이 좋다', '열심이 있다', '모범적이다' 칭찬을 받았다. 그런 사데 교회에 주님은

'나는 행위를 안다' 말씀하신다. 세상이 보는 눈과 주님이 보는 눈은 분명 다르다. 세상은 속일

있을 몰라도 주님을 속일 수는 없다. 마치 바리새인처럼 '회칠한 무덤'이요 '독서의 자식'이요 '위장의

달인' 그들의 중심을. 아니 우리의 중심을 보시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내가 행위를 안다'" 우리의

모습도 이와 같다. 자신들만의 잔치에 취해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우리, 위장과 기만에 능하다 보니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우리, 그러나 정작 주님 앞에 설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7:23)하는 말씀을 들을까 두렵다. 

이런 우리에게 주님은 친히 말씀하신다. '내가 행위를 안다'

내용이 하나님 앞에 펼쳐진 책들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고 그것으로 심판을 받는다. 옆에 하나의

책이 있는데 '생명책'이다. 여기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은 마지막 심판을 받지 않고 영생을 얻는데

방법이 아주 쉽고 간단하다. 자신이 지은 죄를 진정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이 자신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음을 믿고, 예수님을 영접하면 된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생명을

가졌다는 말이고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다시말해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고 그와 함께 살아간다는 말이다. 이것이 '천국 생활'이다. 

이런 사람은 기쁨으로 '아멘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담대히 말할수 있는 것이다. 


책은 요즘 '다시 마주하는 십자가' 모임에서 신앙의 재기전을 펼치고 계시는 장로님들께서 읽어 보시면

좋을것 같다. 평생을 교회와 함께 하셨지만 어느새 식어버린 열정과 무뎌진 심장을 다시 뛰게 하시려고

부단히 애쓰시는 그분들에게 도전과 소망을 것이라는 생각에 다음 모임에 선물로 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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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를 말하다 - 이규현 목사의 목회론
이규현 지음 / 두란노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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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성건성하는 목회는 안됩니다. P44

그리스도께 집중하십시오.  P38


책을 접하며 겁이 났다. 나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도 생겼다. 그러면서

편으론 '다시 일어섬' 떠올랐다. 다시 일어섬은 기대를 갖게 한다. 회복이며 앞으로 나아감이며

간절함을 가지기에 두려움과 설레임으로 기대하게 된다. 그런 기대감으로 책을 대한다. 


목회자는 복음 장사꾼이 아니라 진리를 살아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이어야 한다.'

책의 뒷면에 나오는 글귀에 한참을 책장을 넘기고 멍하게 있었다. '복음 장사꾼', '진리를 살아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 나는 어디에 속하는 사람일까. 알량한 지식 복음을 무기로 주님이 내어쫓는

자리에서 성도들을 착취하며 등골이나 먹는 파렴치한 목회자인가 아니면 자신의 등골마저

내주면서도 기쁨으로 길을 걸어가는 치열한 목회자인가 잠시 동안 깊은 생각에 빠졌다. 


목회는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다. 무슨 재주를 피운다고 해서 되는 일이 결코 아니다. 목회는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여기까지가 전형적인 목회론이다. 목회자들은 누구나 부흥을 꿈꾸며 기대한다.

하지만 부흥은 쉽지 않다. 애둘러 영적 부흥을 말하지만 이건 어렵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버티기

싸움을 하는 중이고 사실 이마저도 지는 싸움을 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한국 교회를 지탱해온 목회론이

뿌리채 흔들리는 시대를 살고 있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목사스러움' 아닌 '목사다움' 관건이다.

목사가 목사여야 하는데 세상과 별반 다르지 않고 때론 성도들 보다도 못한 때가 많다. 이런 위기 속에

목회자는 점점 고립되고 결국 선로를 이탈한다. 그냥 목사면 목사다우면 되는데 꾸미고 변장하고

포장하느라 정작 자신의 신분 마저 망각해 버리는 때가 너무 많다. 


부터 강력하다. 모두가 주인공이길 원하는 시대에서 '나는 주인공이 아닙니다' 선포한다.

고백을 진심으로 있다면 적어도 가능성은 살아 있는 것인데 진심과 진정을 찾아보기 어렵다.

고백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담겨있다. 먼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나는 주인공이 아니고 주인공을

드러나게 하는 존재이다. 주인공이 주님이시기에 우리는 오직 주님만 드러내면 된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주인공은 한명이면 족하기에 내가 드러나면 순간 주인공은 죽게 된다. 다시 말해 목회,

교회가 드러나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죽는다. 성공 일변도의 목회를 지향해온 우리에게 말은

사형선고와도 같다. 그러나 죽어야 산다.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죽어야 그리스도가 영광되게 사시는

것이다. 사도 요한이 고백한 '그는 흥하여야겠고'(3:30) 정답이다. 안에 십자가의 도가 있고

들러리 영성이 있다. 

성장에 빠져 방법론의 귀재는 되었을지 몰라도 신학이 없기에 소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제대로 듣지

못한다. 그러다보니 점점 말씀을 대하는 시간이 줄어 든다. 그렇게 좋아하는 커피를 마시는것 만큼,

자신의 몸을 단련하기 위해 하루도 빼먹지 않는 운동 만큼, 의미 없이 웃고 떠들며 보내는 황당한

교제 시간 만큼만 말씀을 가까이 해도 말씀의 질이 바뀔것인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너무 바쁘다.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 '천천히, 천천히 성경을 읽으세요'라는 말이 떠오른다. 

"뭣이 중헌디"

사역한다면 현장에 있어야 한다. 말로만 때우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부딪치고 움직여야 한다. 의미없이

'기도해 드릴게요' 아니라 죽을 힘을 다해 기도해야 한다. 교인들의 삶에 조금 깊이 들어가야 한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안주하고 만족하지 말고 깊은 곳에 들어가 그들의 내면을 보아야 한다.

알량한 심리학이나 상담학의 학문적 접근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읽고 위로하고 감싸주어야 한다.

속에서 겸손함을 배워야 한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서 주님만 붙잡고 의연하게

살아가는 그들의 앞에 겸손해질수 밖에 없다. 경쟁하고 의식하고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열심을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에게 집중해야 한다. 


'십자가를 지켜라'

십자가를 잃어 버리면 보상과 격려를 바라게 된다. 십자가는 ' 내어줌' 상징인데 십자가를

버리면 자기것과 내것을 찾게 마련이다. 십자가로 돌아가면 안전한데 무겁다고 거추장스럽고

힘들다고 자꾸 십자가를 벗고 세상을 활보한다. 세상과의 전투에 필요한 갑주를 모두 벗고 맨몸으로

세상과 부딪치니 밖에 없다. 이미 주님이 이겨 놓으신 전쟁에 나가서 맨날 패배만 맛보니 삶은

힘들고 우울하다. 십자가를 잃어 버리면 모든 사역이 일이 된다. 은혜에 감사해서 드리는 헌신이

아니라 받고 하는 일이 되다보니 건성건성 대충대충이다. 건성건성해서는 아무것도 없다.

복음의 변화 앞에서 목회자가 먼저 서야 한다. 그래야 십자가로 돌아갈 있다. 


예전에는 엉덩이가 공부를 했다. 그래서인지 책상에 오래앉아 있던 대부분이 공부를 잘했다. 책에서

오랜만에 말을 만난다. '목회는 엉덩이로 합니다' 설교를 이야기하면서 저자는 목회자들의 노력에

대해 이야기 한다. 완성된 설교를 위해 얼마의 시간을 투자하고 있으며 얼마나 준비하고 있는가에

대해 말하며 '굉장히, 오랫동안' 강조한다. 홀로 준비하는 고독을 받아 들여야하며 고독을 즐겨야

한다. 설교는 쉽게 하는 것이 아니고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영적 고통과 고민과 깊은 묵상을

통해 탄생되는 생명이다. 설교에 생명이 없으면 설교자는 자신을 잃게 되고 듣는 이는 감동을 받지

못한다. 자기 스스로에게도 자신이 없는 설교를 성도들에게 수는 없다. 생명을 불어 넣는 작업이

묵상이고 기도고 연구다. 그러기 위해 목회자는 끊임 없이 공부해야 한다. 목양실 책장을 가득 채운

기선 제압용 전시가 아니라 한권 한권을 통해 얻어내는 귀중한 결실들을 설교로 연결하는 공부를

해야 한다. 생각하는 힘을 길러 사고의 폭을 넓혀야 하며 성경이라는 마르지 않는 샘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물을 길어 올리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러려면 엉덩이의 도움을 받아야 하며 스스로의 임계점을

돌파하는 '영적 폭발' 필요하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마음의 근육'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목회자에게는 무엇보다 '영적 근육' 키워야 한다. 그래야 버틸 있고 견딜 있다. 


책은 나를 포함한 모든 목회자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특별히 영적 매너리즘이나 무기력에 빠진 분들이

읽으면 좋겠다. 어깨를 짖누르는 계급장 떼고 처음 신학교 들어 갔을 때를 기억하며 진지하게 읽어

보면 좋을 같다. 최소한 나에게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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