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었는가, 죽어 가는가, 아니면 진정 살았는가? P82
'오직 예수'의 믿음으로 살아야 생깁니다. P241
"모든것을 다 버리고도 넘치는 기쁨이 있습니까?"
사실 이 질문은 신대원시절 이후 줄곧 나에게 물음표를 던진다. 어떤 때는 '정말 그렇다'라고 말하다가
금새 뒤돌아서면 '정말 그럴까?'가 되어 버리는 '조삼모사'인 나의 신앙이 부끄럽다. 저자는 요한걔시록을
묵상하면서 성령의 감동으로 많이 울었다고 하는데 나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기 어려운
때가 너무 많았다. 그런 계시록에 대해 천국 소망을 가진 사람의 심정으로 한자한자 적어 내려간 저자의
글이 그래서 더욱 기대된다.
모든 성경의 핵심은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이다. 이것을 벗어 날수도 벗어 나서도 안된다. 특별히
요한계시록의 핵심은 주 예수님이다. 당시 교회는 혼란스러웠다. 핍박과 죽음의 공포가 엄습하던 시기라
어떤 교회는 속절없이 무너졌고, 어떤 교회는 세상과 타협해 다른 길로 갔고, 어떤 교회는 이단과 싸우다
사랑을 잃어 버렸고, 어떤 교회는 침묵했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상황이다. 지금 한국 교회의 현실이다.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 주님은 요한에게 자신을 드러내시며 결코 교회를 포기하지 않고 있음을,
여전히 붙잡고 계시고 끝까지 놓지 않으실 것을 보여주신다. 이 벅찬 감격과 두려움이 계시록에 그대로
녹아 있고 저자는 그것을 이야기 한다.
처음 위에 나온 질문을 대할 때 떠오른 것이 '천국의 비유'였다. 밭에 보화가 감춰진 것을 발견한 농부가
자신이 기진 모든 것을 팔아서 그 밭을 산 것 같이 기쁠까였다. 사라지고 없어질 보화를 발견했는데도
그렇게 기쁜데 정작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천국을 얻었는데도 여전히 냉랭하고 벅차오르지 않는
이 마음은 저자의 말처럼 '소망 없음'이 아닐까하는 생각에 미치자 잠시 멈춰 서게 됐다. 우리에게 있어
천국은 무엇일까? 이 세상 삶이 힘들어 빨리 죽어서 가고 싶은 곳이 천국일까? 분명 아닐것이다. 믿음의
눈이 떠지고 소망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곳이 천국이고 이런 사람들이 누리는 삶이 천국의 삶인데 아쉽게도
우리에게 천국의 삶은 '그림의 떡'이다.
요한이 소개하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계1:8). 이 구절에는 천국 소망의 본질이 들어 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곳'이 천국이라고 말한다.
요한은 그 천국을 이렇게 말한다. '지금도 계시고'. 그렇다면 지금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 그것이 천국의
삶이다. 현재가 강조된 것이다. 막연한 미래의 '보랏빛 꿈'이 아니라 지금 이순간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누려야하며 지금 우리에게 미래를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래서 요한은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이 '언제'인지는 관심이 없다. 오직 '어떻게' 맞을 것인가에 집중할 뿐이다.
우스개 소리로 신학생들이 가장 부르기 꺼려하는 찬송이 '부름 받아 나선 이 몸'(323,통일355)이라고 한다.
1절은 그럭저럭 넘기겠는데 2절에 가면 목이 메여 온다. '아골골짝 빈들에도 복음들고 가오리다 소돔 같은
거리에도 사랑안고 찾아가서 종의 몸에 지닌 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라'. 성공 일변도와 대형교회, 어느정도
재정 자립 된 교회를 찾다 보니(사실 이 부분 어느정도는 이해가 된다) 아골골짝 빈들을 가긴 가야겠는데
나 말고 다른 사람이 갔으면 좋겠고, 빈들에서 복음을 외쳐야 하는데 나는 목소리가 작으니 목소리
큰사람이 하면 좋겠다는 식이 되어 버렸다. 다음 가사는 더욱 심각하다. 소돔 같은 거리에 사랑 안고
찾아가야 하는데 그곳은 황폐하고 거칠고 더럽기에 도통 갈 엄두가 안나고 주님께 받은 사랑은 어느새
슬그머니 등 뒤로 감춰 버린다. 몸에 지닌 것 조차 아낌없이 드려야 하는데 더 가지려 더 챙기려 하다보다
욕심과 탐욕으로 가득차 버린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죽도록 충성하라'(계2:10)고 한다. 지금도 힘들어
죽을것 같은데 말이다. 임직식이나 헌신예배에서 많이 사용하는 구절인데 많은 이들이 이 질문 앞에
별 의미없이 '아멘'이라고 대답한다. 그리고는 잊어버린다. '죽도록'인데 '적당히'가 되어 버린다. 죽을
각오로 해야 하는데 대충대충 시늉만 한다. 수 없이 많은 집회에서 수없이 많은 이들이 '헌신'을 다짐하고
서원하지만 정작 현실은 지금이다. 매주 벌어지는 집회의 현장에서 두손들고 무릎꿇고 눈물 흘리며
소리질러 주님을 사랑한다고 외쳤지만 그때 뿐, 여전히 우린 제자리다. 저자가 소개하는 전도하다가
공안에게 체포돼서 일년 반 동안 옥살이를 한 중국교인의 말이 가슴을 찌른다. '억울하긴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섰다면 당연히 감사히 해야죠' 당연하고 감사한게 맞는데 왜 이렇게 우리에겐 낯설게
들리는지 모르겠다. 언제부턴가 우리에게 '고난의 영성'은 다른 나라 이야기가 되버렸다.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은 운명도 팔자도 아니고 자원하여 가는 길이다. 히브리서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은 믿음으로
고난을 자처한 이들이며 끝까지 그 길을 걸었던 이들이다. 그들의 삶이 바로 '죽도록 충성하라'이다.

'실상은 죽은 것이다'
교회에는 많은 이들이 나온다. 그리고 그 많은 이들이 흩어져 세상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정작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을 찾아 보기 어렵다. 그 많은 이들은 다 어디에 있는 것일까? 주님은 사데교회를 향해 '너는
살아 있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사실 사데교회는 버가모교회나
두아디라 교회처럼 음란하고 세상 풍조에 물들고 방탕하고 우상 숭배를 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위사람들에게 '믿음이 좋다', '열심이 있다', '모범적이다'는 칭찬을 받았다. 그런 사데 교회에 주님은
'나는 네 행위를 안다'고 말씀하신다. 세상이 보는 눈과 주님이 보는 눈은 분명 다르다. 세상은 속일 수
있을 지 몰라도 주님을 속일 수는 없다. 마치 바리새인처럼 '회칠한 무덤'이요 '독서의 자식'이요 '위장의
달인'인 그들의 중심을. 아니 우리의 중심을 보시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내가 네 행위를 안다'" 우리의
모습도 이와 같다. 자신들만의 잔치에 취해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우리, 위장과 기만에 능하다 보니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우리, 그러나 정작 주님 앞에 설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마7:23)하는 말씀을 들을까 두렵다.

이런 우리에게 주님은 친히 말씀하신다. '내가 네 행위를 안다'
그 내용이 하나님 앞에 펼쳐진 책들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고 그것으로 심판을 받는다. 그 옆에 또 하나의
책이 있는데 '생명책'이다. 여기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은 마지막 심판을 받지 않고 영생을 얻는데
그 방법이 아주 쉽고 간단하다. 자신이 지은 죄를 진정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이 자신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음을 믿고, 예수님을 영접하면 된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생명을
가졌다는 말이고 그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다시말해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고 그와 함께 살아간다는 말이다. 이것이 '천국 생활'이다.
이런 사람은 기쁨으로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담대히 말할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요즘 '다시 마주하는 십자가' 모임에서 신앙의 재기전을 펼치고 계시는 장로님들께서 읽어 보시면
좋을것 같다. 평생을 교회와 함께 하셨지만 어느새 식어버린 열정과 무뎌진 심장을 다시 뛰게 하시려고
부단히 애쓰시는 그분들에게 도전과 소망을 줄 것이라는 생각에 다음 주 모임에 선물로 드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