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로서의 미술 - 치매 가족 돌봄이야기
김지혜 지음 / 글로벌콘텐츠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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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 '막막함에 차마 입을 떼기 어렵다'고 말하는 저자의 마음이 백분 이해된다. 이야기를 하고

또 해도 화수분 처럼 솟아나는 이야기들은 눈시울을 젖게 만들고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저자도

말했듯이 인지능력과 사회적 관계 능력 저하가 발생하는 치매라는 질병에 따라 붙는 사회적

낙인은 분명 존재한다. 저자는 그런 치매 환자들을 돌보며 겪은 일들을 이야기로 전한다.

세계보건기구는 치매란 뇌의 만성 또는 진행성 질환에서 생긴 복합적인 증후군으로, 정상적인 노화에서

예상되는 것 이상으로 인지기능이 저하되어 나타나는 기억력과 사고력, 지남력, 이해력, 계산력, 학습능력,

언어능력, 판단력을 포함한 고도의 대뇌피질기능의 다발성장애로 규정한다. 국제질병분류(ICD-10)상

치매는 그 원인과 증상에 따라 알츠하이머형 치매와 혈관성 치매, 기타 질병으로 오는 치매, 불분명한

치매로 규정되며 알츠하이머형 치매(50-60%)와 혈관성 치매(20-30%)가 전체의 80-90%를 차지하며

두가지가 동시에 오는 경우도 15%에 이른다.

돌봄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게 하는 그 무언가의 힘이다. 소중한 사람을 위해 자신이 가진 능력의 일부

혹은 전부를 내어주는 일인 돌봄은 가족 돌봄부터 제도화된 사회적 돌봄까지 이어지며 여기에는 책임과

사명이 따른다. 돌봄은 개별 가정 차원에서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이 이루어져야 하는 국가적 책무이고

이는 '인간의 기본권' 문제이다. 인지장애와 더불어 행동장애, 성격 변화 등이 수반되어 사회적, 직업적

기능이 저하되는 치매의 특성상 일상 생활을 영위하려면 필연적으로 보호자에게 의존해야 하고 결국

독립적인 생활이 불가능하게 되므로 돌봄제공자의 부담이 커지게 된다. 부양 부담은 시간적 부담, 발달상

부담, 신체적 부담, 사회적 부담, 정서적 부담으로 구분 되는데 부양 부담은 돌봄제공자가 경험할 수 있는

신체적, 심리적, 사회적, 경제적 문제를 포괄하는 총체적이고 다차원적 개념이다. 이런 상황 속의 스트레스는

돌봄 제공자의 치매 발병이나 자살, 치매노인학대, 간병 살인 같은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이어지기도 한다.

2017년 7월에 치매특별등급인 장기요양 5등급이 신설되었지만 여전히 치매 노인의 돌봄은 가족이 주된

책임을 지고 있는 실정이며 국내 지역사회에서 치매 환자를 돌보는 가족 돌봄 제공자는 약 35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치매 가족은 '숨겨진 환자(hidden patient)'로 불릴 만큼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경제적 영역에서 부담을 경험하고 있으며, 부양 스트레스로 인해 치매환자의 주변인이면서 동시에 치매

고위험군이 된다.

이 책에는 저자가 어머니와 할머니를 돌보면서 그린 몇장의 그림이 들어 있다. 그 중 'Blue and Blue'라는

그림이 유독 눈에 들어 온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작업한 것으로 우울과 내면으로

향하는 구심점 심리를 표현한 파란색이 유난히 슬퍼 보인다. 큰 종이 위에 파란 물감을 뿌리고 흘러내리게

한 작업으로 불안감과 역동성을 표현했고 웨트온웨트(wet-on-wet)의 기법의 물감 중첩으로 축축해진

표면에 티슈를 얹기도 하는 등 슬픔을 보듬는 작업을 통해 우울의 두꺼운 질감을 표현했다는 저자의 설명이

없었다면 미술에 문외한인 나는 그냥 '느낌 좋고 편안한 그림이다'라고 생각할 뻔 했다. 사실 나는 이 그림을

보며 편안함을 느꼈다. 동일한 작품을 보면서도 다른 생각을 가진다는 것은 자유로운 발상인데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는 얕은 수준의 감상 능력은 그저 아쉬울 뿐이다.

책을 읽으면서 치매라는 질병이 나와 주변 사람들에게는 다가오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지만누구도

장담 할 수 없는 일이기에 어느 정도의 준비는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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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론의 역사 - 홀연히 사라진 4천 년 역사의 위대한 문명도시를 다시 만나다 더숲히스토리
카렌 라드너 지음, 서경의 옮김, 유흥태 감수 / 더숲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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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586년 신바빌로니아는 예루살렘을 무력으로 정복한 후, 유대인들을 강제로 바빌론으로

이주시켜 살게 하는 이른바 '바빌론 유수'혹은 '바빌론 유폐'라고 하는 조치를 감행한다. 구약성경

시편 137편은 이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하며 바빌론에 강제 이주당한 유대인들의 고통과 슬픔을

이야기한다. 조지 고든 바이런(George Gordon Byron)이 시편 137편의 내용을 자신의 시로 다시

옮겨 놓은 것이 '바빌론 강가에 앉아 우리는 울었네(By the rivers of Babylon we sat down and

wept)이다. 이 시를 보니 엠(Boney M)이 '바빌론 강가에서'(River of Babylon, 1978)라는 곡으로

노래했으며 파울로 코엘류(Paulo Coelho)의 소설 '피에드로 강가에 앉아 나는 울었네'의 제목도

여기서 인용되었다. 성경에 무자비한 침탈자로 주로 묘사되며 역사학자들에게는 숨겨진 미지의

대륙으로 알려진 바빌론에 대해 소개하는 이 책은 무척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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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론은 생소하다. 그리고 바빌론은 익숙하다. 어쩌면 이 표현이 가장 적합할지 모른다. 그만큼

익숙하면서도 낯선 곳이 바빌론이다. 지역적으로 '여기가 바빌론이다'라고 말할 근거나 자료도 별로

없고 역사적인 인물도 생소하고 그럼에도 고대 근동지방의 패주였던 바빌론은 '세 강이 만나는 지역'에

위치한다.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디얄라강이 만나는 비옥한 농경지를 끼고 있던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중심이며 전략적 요충지에 있었다. 특이한 것은 바빌론의 왕권은 세습제가 아닌 마르두크(태양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구약성경에 나오는 '마르둑' 혹은 '벨'과 같다)의 대리인이라 불릴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차지할 수 있었다. 바빌론 도시 문명을 정점에 올려 놓은 사람은 네부카드네자르2세

(느부갓네살2세)였고 그는 이미 기원전 7세기 경에 바빌론을 인구 18만이 거주하는 거대 도시로

만들었으며 지금은 남아 있지 않지만 바벨탑 모양의 지구라트와 공중정원, 거대한 문과 건축물을 만들어

국제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췄다. 자연적, 지리적 혜택이 있는 지역에 위치한 탓에 전쟁으로 지속적으로

다양한 종족이 유입되어 다양성을 갖췄고 바빌론은 이 다양성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정치, 종교, 문화를

꽃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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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론은 에산길라 신전에 거하는 마르두크 신의 도시였다. 신상은 신성한 신전 작업장에서 정결의식을

거친 장인들이 의해 제작되었고 '입 열기 의식'을 통해 지각 있는 존재로 깨어났다. 사제들이 매일 수행하는

제례를 통해 신이 모습을 드러낸다고 믿었기에 사제들은 신을 씻기고 먹이고 입히고 즐겁게 하는 일을

했으며 신을 만족시키기 위해 신중하고 정확한 과정을 통해 신을 섬겼고 신은 도시와 백성을 보호했다.

슈트루크나훈테 2세가 기원전 1158년 처음으로 바빌론은 공격한 이 후 수십 년 동안 여러차례 엘람의

침입이 있었고 마르두크 신전을 약탈해 조각상을 가져가는 일도 벌어진다. 이같이 다사다난한 시기에

마르두크의 역할은 재 해석 되었고 바빌론 왕과의 관계가 점차 단순히 '주인'(벨)에서 세상을 지배하는

독보적 통치자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왕권은 타고난 권리가 아닌 신이 바빌론 왕으로 인정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왕국이 점차 분권화되고 분열되어 감에 따라 왕권의 영향력은

유지되면서도 절대적인 권위는 약화되어 갔고 이 시기에 마르두크를 최고의 신으로 추앙하는 서사시 가

쓰여졌다. 이 시는 아카드어로 쓰여진 긴 문장으로 '아키투'(바빌론 신년 축제, 일년에 3월 춘분과 9월

추분에 12일 동안 치러짐) 동안 바빌론의 마르두크 신전 에산길라에서 낭송 됐다. 바빌론 주민의 입장에서,

특히 실질적으로 마르두크가 선택한 승자를 확정짓는 에산길라 제사장들의 관점에서 보면 왕을 뽑는 것은

도박과 같았다. 때문에 기원전 2천년대 후기에 이미 왕과 신전 공동체 간의 잠재적 갈등은 심화되었고

후일 왕국 붕괴의 원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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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대부분이 특이하고 생소한 것들이지만 '내장점'은 정말 낯선 광경이다. 신과의 소통을 믿고 신에게

양을 제물로 바치는 사회라는 문화적 맥락으로 보거나 신을 대하는 바빌론의 원칙이 '네가 주니까 내가

준다'(라틴어 do ut des와 동일)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얼핏 이해는 되지만 여전히 낯설다. 겉보기에 양의

간은 점토판과 비슷하다. 한 손에 쏙 들어가는 크기이며, 한쪽은 매끄럽고 다른 한 쪽은 독특한 무늬가

있다. 네 개의 위장과 오른쪽 콩팥을 밀어 낼 때 매우 독특한 무늬를 만들어 내는데 바빌론 사람들은

이 무늬를 통해 문자에 견줄만한 복잡한 기호 체계를 읽어 냈고, '바루'라고 불리던 전문적 점술가들에

의해 신들의 메세지를 이해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쌀의 흩어지는 모습이나 물결이 갈라지는 모습을

보고 점괘를 읽어 내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 책 재미있다. 새로움에 대한 충족이라는 부분도 그렇고, 막연함에 대한 해소라는 부분도 그렇다.

옮긴이가 그동안 한국에서 중동 고대사를 소개하는 책이 전무하다시피 하다고 말한 부분이 이해가

된다. 읽는 내내 20여년전 '고대근동사'에 대해 딱 한 권의 책으로 머리 터져가며 공부하던 그 시절이

생각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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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바꾸는 나만의 능력 백서
차희연 지음 / 베프북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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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바꾸고 싶은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희망사항이다. 희망사항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단지 희망일뿐 실현 가능성이 지극히 낮고 어렵다는 의미를 가진다. 저자는 이러한 우리에게

자신만의 능력을 발휘하며 그 능력으로 자신의 인생 마저도 바꾸는 방법들을 신입사원, 주임,

대리, 과장, 부장의 위치를 예로 들어 실제의 상황들과 문제점과 그 해결책들을 제시한다.

특별히 이 책은 직장 생황 속에서 느끼는 스트레스에 대해 직접적으로 다룬다. 직장 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상황들을 예로 들며 하나 하나의 문제점들을 나열하고

적극적이고 현명한 해결책을 제안하며 보다 더 현명한 직장생활을 할 것을 주장한다. 그러면서

스트레스를 공통적인 스트레스, 시간 스트레스, 대인관계 스트레스, 상황 스트레스. 등을 통해

그것이 업무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며 어떻게 그것들을 해결하며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한다. 또한 스스로 스트레스 수치를 측정할 수 잇는 자가 진단 스트레스 측정표를

통해 현재 자신의 스트레스 지수를 특정하고 대처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준다. 물론 사람에

따라 받는 스트레스의 량과 무게가 다르지만 일단 기본을 알게 되면 현명한 대처와 예방이 가능해

지기 떄문에 현실 적용이 가능해 진다.

조금 의외의 장면도 있다. 신입사원들에게 하는 조언 부분에서 전화 위치, 서랍정리 방법 , 메모하는

방법 등과 같은 것들은 디테일하다. 사실 이런 부분을 알려주는 책이나 선배들은 별로 없다. 대충

눈치로 때려 맞추거나 선배들이 하는 것을 흉내내서 따라한다거나 하는게 대부분인데 저자는

친절하게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 알려준다. 팩을 읽으면서 '이런 선배가 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헤보있디.

자기계발이란 자신의 강점을 기르는 것이다. 자신의 강점이란 누가 보아도 자신있는 면이다.

그런 면을 발견하고 육성하고 나아가 더 발전시킨다면 타인을 향한 경쟁력 보다 더 강력한

자신만의 강점 즉 '경쟁력'이 생기는 것이다. 이 책은 그런면에서 개인 스스로가 정리하고,

질문을 던지면서 선택할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준다. 이책에 나오는 내용 중 좀 뻔한 이야기지만

'잘 키운 직원하나 열 직원 안 부럽다'는 내용은 리더의 부재를 보이는 우리 사회를 향한

저자의 조용한 반항으로 보여진다. 지금 우린 그런 시대를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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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우면 비로소 깨닫는 것들 - 발상의 전환으로 독특한 사고를 하는 장자
천인츠 지음, 문현선 옮김 / 미래문화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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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를 소개하는 책은 서점의 서가 하나를 다 차지할 정도로 넘친다. 실제 장자는 사마천의 서기의

한 귀퉁이에 아주 잠깐 소개된 것이 다임에도 오늘날 우리는 '장자'에 열광한다. 기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상은 사람 '장자'라기 보다는 '장자'라는 책인데 말이다.

때로는 '의미'보다 '언어' 그 자체가 더 많은 것을 알려 준다. 저자는 '장자의 언어'에 집중한다. 글 자체가

주는 울림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에서의 의미를 찾는다. 언어는 인간 소통에서 가장

근본적인 매개(media)이다. 장자의 언어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결국 장자라는 '의미'에 도달하기

위해서다. 장자의 글은 언뜻 쉬워 보인다. 그러나 그 쉬움은 결국 오래가지 못하고 이내 그 깊이에 손을

들고 만다. 시간의 차원을 넘나드는 그의 광활함과 공간의 차원을 주무르는 그의 상상력은 가히 혀를

내두르게 한다. 세상의 모든 사물은 시간과 공간 사이에 존재하며 사람들이 지닌 한계는 여기에서 온다.

소요유의 첫면을 장식하는 '곤'과 '붕'이 그렇고 '영지'와 '매미'가 그러하다. 시간에 대한 유한한 의식은

매일같이 잃어가는 시간과 비례하여 기회와 인연을 지키기 위해 기다리는 만큼 성장하는 것이다.

루쉰이 '세상에는 원래 길이 없었다.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지니, 그대로 길이 된 것이다'고 말하기 훨씬

전에 장자는 '길이라는 것은 사람이 다녀서 만들어지는 것이다'고 말했다. 비록 지금은 '문을 열고

나서면 그대로 길이 있는' 상황이지만 이러한 길도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다니기

시작하면서 길이 된 것이다. 비록 지금 우리는 길을 만들어 가기 보단 걸어야 할 길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우리가 가는 어떤 길이라도 다른 사람이 이미 밟은 것과 같은 길을 걸을 수는 없다. 각자에겐

각자의 길이 주어지고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 삶이고 인생이다.

장자는 '말로는 뜻을 다하지 못한다'는 관점에서 언제나 언어에 회의적이었다. 그는 '고갱이와 쭉정이'라는

단어를 통해 말로 할 수 있는 것은 사물의 쭉정이이고, 뜻으로 전할 수 있는 것은 사물의 고갱이라고

말한다. 고갱이란, 언어로 정확하게 전달하기 매우 어렵고 다만 뜻으로 전달할 수 있는것, 즉 사유를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도의 관점에서 보면 만물에는 귀천이 없지만, 사물의 관점에서 보면

자신과 가까운 것은 귀히 여기고 남에 가까운 것은 천히 여긴다.

몸의 죽음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슬퍼할만한 것이지만 이것은 불가항력적인 자연의 일이다. 그래서 장자는

천자방에서 '슬픔 가운데 마음이 죽은 것보다 더한 것이 없으며 사람이 죽어도 또한 그보다 못하다.'라고

말한다. 마음이 죽었다는 것은 자아에 대해 긍정하는 마음을 잃었다는 것이고 자아의 자각적인 의식을

잃고, 생의 의지나 생의 추구를 잃었다는 것이다. 더 이상 이 세상에서의 삶은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진다는 말이다. 장자는 이에 대해서 '마음이 재처럼 식은 것'이라는 표현을 통해 번잡한

욕망이나 넘치는 지식등을 일절 배제하고 마음을 완전히 비워서 평정의 극치에 이른 상태라고 말한다.

바로 이때 사람의 마음 속은 죽은 듯 적막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빛을 찾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어렵다. 처음엔 그냥 읽기 쉬운 교양서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읽어 갈수록 한계를 느끼고 배움과 앎에

대한 막연함이 생긴다. 이 책은 그런 책이다. 그래서인지 저자는 장자의 '의미'를 얻은 뒤에는 장자의

'언어'를 잊어도 좋다고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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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죽음을 곁에 두고 씁니다
로버트 판타노 지음, 노지양 옮김 / 자음과모음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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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다. 그렇기에 누구도 죽음 앞에서 당당할 수는 없다. 죽음 앞의 유한한 날들,

어쩌면 이곳은 또 다른 고통 일수도 있다. 그 죽음을 맞이하며 담담히 써 내려간 그녀의 글은 그래서

더 갚은 울림을 준다.

나쁜 소식의 마지막 문장, 마지막 단어를 듣기 전까지는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을 구별할 수 없다고

애둘러 말하지만, 비록 그 사실을 아는 것과 마주하는 것이 하늘과 땅 만큼 다른 일이지만, 막연했던

느낌이 현실이 되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고통이다. 그리고 그녀는 '내 생이 짧아지고 있었다'고 말한다.

우리는 가끔 삶을 피하기 위해 삶의 막대한 부분을 쓰기도 한다. 절망과 슬픔을 마주하기를 피하고

서로의 인생을 감춘다. 마치 자기 안에서 울리는 굉음을 듣지 않기 위해 억지로 귀를 틀어 막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 소리는 가슴 깊은 곳에서 울려난다. 설명할 수 있는 슬픔, 불안, 불행은

오히려 쉽다. 그러나 특별한 이유가 없는 슬픔과 불안은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간다. 탈출구가 없는 동굴

속에서 스스로를 가망 없이 소진시키며 그렇게 병들어 간다. 그녀도 그랬다. 그래서 더 아파했고

더 고통스러웠다.

사람들은 내가 나로 산다는 일이 얼마나 힘겹고 처절하고 악몽 같은지 좀체로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잘 지내는 것과 전혀 상관 없는 삶을 살면서도 '어떻게 지내요?'라는 질문에 '잘 지네'라고

대답한다. 그녀는 이런 우리에게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나로 살아가는 일'을 이야기 한다. 그녀는

'절대적인 고독의 시간'을 찾는다. 세상의 소음이 충분히 잠잠해지면 머릿속에 지속적으로 들려오는

소리들을 제대로 들을 수 있기에 자아의 속삭임을 들으려 한다. 무엇이 나 다운지를 발견하고 그 발견을

일상에서 드러내려 한다.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살면서 머릿속을 스쳐가는 모든것을 경험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뿐이다.

모든 사람들은 개별적으로, 두뇌마다 다르게, 한 번이자 영원토록 홀로 경험한다. 인생은 0으로 곱하기를

해야 하는 등식이다. 그 삶에 아무리 많은 것을 더하고 보태도, 아무리 큰 숫자가 된다해도 결국 0이 된다.

그녀는 이 사실을 깨달으며 희망을 본다. 진실을 직시하고 그 진실 앞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시도를 하는 것, 적어도 자신이 진실이라 생각하는 것 앞에서 자신의 신념대로 행동하는 것, 그런 사람이

자신이 진정 어떤 사람이고 인생이 무엇인지를 인식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 글은 그녀의 노트북에서 발견되었다. 그녀는 호스피스 병동에 들어 가기 전까지 자신의 삶에 대해

흔적을 남겼다. 그런 그녀의 마지막 문장은 '물론 자신의 마지막이 언제가 될지는 누구도 모르지만'이다.

누구에게나 동일하고 공평하게 찾아오는 죽음을 앞에 두고 조금은 진지해질 필요가 있다. 아직 남아 있는

삶이 어디까지인지 모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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