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옳은가 - 궁극의 질문들, 우리의 방향이 되다
후안 엔리케스 지음, 이경식 옮김 / 세계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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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복잡한 시대에 당신만의 무기가 돨 것이다'는 얼마전 소천하신 이어령 선생의

글이 눈에 들어 온다. 하버드 경영대학원 최고의 교수라는 타이틀이 증명하듯 미래학자

후안 엔리케스의 글은 명쾌하다. 그는 '옳고 그름'이라는 윤리적 달래마에 상식적으로

선택해야 하는 수없이 많은 질문들을 쪼개고 나누고 부수며 우리의 게으르고 나태해진

윤리 의식을 깨운다.

동성애를 이야기하는 저자의 글은 어느덧 다양한 젠더로 확장 된다. 페이스북에는 무려

71개의 젠더옵션이 존재하며 이를 통해 사용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낸다. 이에 대해

현실감각이 뛰어난 저자는 베스킨 라빈스와 비교하여 '인간은 어쩌면 31+a의 맛을 가진

존재인지도 모른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영어에는 남성도 여성도 아닌 제 3의

성을 가르키는 단일 단어는 없다.

마이클 센덜(Michael Sandel)이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해답은 없다. 앞으로도 해답은

없을 것이고 지금까지도 해답이 없었다. 이것이 인생의 유일한 해답이다'는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의 글을 인용하여 현실을 마주할 때 마다 흔들리고 또 흔들릴것이며

그 흔들림 속에서 점점 더 굳건해질 것이라고 이야기했던 것 처럼 '무엇이 옳은가'라는 질문

역시 우리를 흔들고 다지고 뭉쳐서 더욱 단단하게 만들 것이다. 기술은 우리의 믿음을 바꾸어

놓고 윤리라는 척도는 우리의 기준을 예전과는 다른 자리에 서게 만들었다. 이곳에 있던 것을

다른 곳에 옮겨 놓고 처음의 시각이 아닌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기에 세대간 가치관의 충돌이

벌어지게 되고 많은 사람들은 혼란스러워지고 분노하며 두려워하게 되었다.

현재 우리는 '공포의 시대'이자 '위대한 확실성의 시대'를 살면서 보다 안전한 편에 서서 자기

편을 보호하는 바리케이드를 친 다음 자신들이 가진 믿음이나 자신들이 하는 말의 신뢰성은

이미 확증되었다고 선언하며 이것을 기준으로 상대를 평가하고 결정한다. 본질적으로 가장

잘못된 믿음인 '윤리라는 것은 절대 변하지 않아. 그래서 나는 옳고 그름을 잘 분별할 줄

알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든다. 오늘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여지는 일들이

내일도 그럴것이라 생각하면서 말이다. 우리가 절대적이라 여기는 믿음은 이 순간에도 바뀌고

있다. 윤리적 변화를 급격하게 추동하는 가장 큰 동력들 중 하나는 기술이며 우리는 기술이

기하급수적으로 바뀌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 말은 우리가 사는 현재는 윤리 역시 기하급수

적으로 바뀌고 있음을 의미한다.

'옳고 그름'은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우리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깨달아야 하고 또 그 어리

석음을 비웃을 수 있어야 한다. 나중에 돌아 보면 너무도 분명한 그리고 비극적인 실수를

우리는 지금까지 많이 저질러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에 저자의 이 말에 유독 눈길이

머물렀다. '우리는 그저 미래 세대의 판단이 과거 세대를 재단하는 우리의 판단 보다 덜

가혹하기만을 가대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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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원전으로 읽는 움라우트 세계문학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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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의 영화를 봤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주연을 한 이 영화는 192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한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은 때아닌 전쟁 특수를 누린다. 전쟁의

포화를 비껴 있었기에 미국의 주말은 술과 재즈로 넘쳐났다. 당연히 여기에 남여간의

농밀한 사랑은 필연이다. 전쟁 후 상실감과 정서적 공허감에 더해진 넘쳐나는 돈으로

인해 혼란과 퇴폐 그 자체의 시기를 이 영화에서 엿볼 수 있었다.

영상으로 먼저 접한 후 읽게 되는 책이라 조금은 방심했다. 아뿔싸. 좀 난해하다. 책 장이

무척이나 안 넘어가는 책이다. 사람과 사람간의 이야기 임에도 그냥 막막하다. 읽으며

저자(스콧 피츠제랄드)는 무엇을 이야기 하고 싶은걸까 하는 생각을 계속하게 된다.

경제적 부의 축적이 성공이 상징은 아닐텐데 인간의 욕망은 끝없이 부를 쫒고 그것에

몰입한다. 물론 어릴적 가난했던 기억은 경제적 성공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질 것이고

그 집착이 결국 자신을 파멸로 이끌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다들 고장난 폭주 기관차

마냥 앞만 보고 달린다. 그런면에서 자신의 모든것을 걸고 앞만 보고 달린 개츠비는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할 만 하다.

이 책에는 '위대한 사랑'이라 표현해주길 바라는 개츠비의 이야기가 있다. 자신의 연인

데이지와 재회하기 위해 밀주를 만들어 팔면서 돈을 모았고, 그녀를 위해 주말마다 분에

넘치는 파티를 열었고, 오직 그녀를 위해 거대한 저택을 마련했고, 결국 그녀를 위해 살인

누명까지 쓰게 되고 결국 죽음에 이르는 개츠비. 그의 사랑은 적어도 순수했던것 같다.

다른 무엇보다 그녀의 행복이 최우선이었고 그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 주는 그런

남자였다. 이렇게 데이지를 사랑하면서도 억지로 사랑을 요구하거나 강요하지 않는 개츠비,

나름 멋있는 남자다.

작가는 자신의 글에서 자신을 표현한다고 한다. 피츠제럴드가 개츠비라는 인물을 묘사하면서

'나를 닮은 한 인물에서 출발하여 내 자신이 되어 버렸다'고 말한 것 처럼 사랑하던 부유한

집안의 딸 젤다와의 결혼을 위해 글쓰기를 수단으로 사회적 부와 명예를 거머쥔 피츠제랄드와

사랑하는 여자를 되찾기 위해 탐욕과 불법으로 돈을 쓸어 담는 개츠비, 둘은 묘하게 닮아 있다.

피츠제럴드는 젤다가 속한 계층을 보며 압도 당했던 순간을 개츠비가 데이지를 보며 '범접할

수 없는 부의 보호막 안에서 안전하게 세상 사람들을 내려다 보는 시선을 느꼈다'라고

표현한다. 개츠비와 피츠제럴드 둘은 자신들이 사는 그 세상이 '돈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돈이 자신의 욕망을 채워줄 유일한 기회라고 생각했다. 둘은 분명 닮았다.

물질은 유한하다. 그리고 그 물질은 언제나 내것이 아니다. 피츠제럴드는 방탕하고 무질서한

당시의 시대상과 물질주의 앞에 파문을 던지길 원했다. 그리고 그 돌멩이로 개츠비를 사용한다.

마치 당신들이 꿈꾸는 그것은 '허상이요'라고 말하는 듯이 들뜬 기대감 속에 가려진 공허감과

절망을 표현한다. 그 절망의 끝은 결국 죽음이다. 이 죽음을 통해 미국 사회가 가진 허무한

낙관주의에 경고를 보낸다. 이 책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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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먼 라이트의 마음 처방전 - 코로나 이후 일상 회복, 어떻게 할 것인가
H. 노먼 라이트 지음, 정성묵 옮김 / 두란노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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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하나님은 만져라하고 말씀하신다. P52

소망은 맹목적인 낙관론이 아니라 현실적인 낙관론이다. P144

노먼 라이트는 미국에서 가장 권위있는 기독교 가정 상담가이자 행복한 부부 생활

프로그램의 개척자이다.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을 근간삼아 그 위에 전문적인 지식을 함께 쌓는다.(출판사 리뷰 인용) 그래서인지 그의 글은 간결하면서 섬세하고 단순하면서 명확하다. ' 이 사람과 결혼해도 될까?'를 읽고 지도하던 청년 중 하나가 '아! 저는 그럼 혼자 살아야 할 것 같아요'라고 고백을 하게 만들기도 했던 그의 책을 다시 만난다. 언제나 그렇듯이 만남은 설레고 기대된다. 특별히 이번책은 코로나로 무너진 일상과 앞이 보이지 않는 삶과 멈춰버린 세상을 바라보는 석학의 지혜가 담겨 있어 더욱 기대된다. 이 책의 원제는 'Restarting The World, A New Normal After a Pandeamic'이다.

두려움. 우리 모두는 두려움과 공포를 가진다. 두려움이 얼마나 가람을 힘들게

하며 의지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지 알기에 사람들은 점점 더 깊은 두려움에 떤다. 앞이 보이지 않고 깊이 어두울수록 두려움의 힘은 점점 더 커져간다. 쥐꼬리 만큼 가졌던 '용기'는 어느새 뒷문으로 도망쳐 버리고 후회만 가득하다. 온 세상을 멈춰 세웠던 끝이 없어 보이던 펜데믹은 개인과 공동체 모두에게 상실과 두려움이라는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봉쇄는 인내의 한계를 보였고 이로인한 감정적 손실과 심리적 슬픔과 우울등이 남긴 트라우마는 우리의 작은 희망마저 빼앗아 갔고 우린 이제 다시 '회복'을 기대하지만 여전히 우리 가운데 펜데믹은 존재한다.

이에 저자는 우리에게 '삶의 주도권'에 대해 이야기 한다. 누가 쥐고 있느냐에 따라 삶의 질과 방향이 달라진다. 우리의 주도권은 누구에게 있는가? 라는 질문에 즉각적인 대답이 아닌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말로만이 아닌 진정 주도권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교히를 다니기에, 늘 들어왔던 말이기에, 입에 주님을 달고 살기에 생각없이 대답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한참을 머뭇거렸다. 그리고 한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치열했던 20대 이후에 이런 고민을 해 본적이 없다. 저자는 펜데믹의 상처를 가진 우리에게 해결 방안을 제시하며 우리의 주도권을 원래 주인이신 하나님께 완전히 돌려 드리길 주문한다. 익숙함이 아닌 순전함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상실을 겪을 때마다 성경의 진히에 의지했다고 한다. 슬퍼하고 애통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 믿음을 지켰고 이를 토대로 시련 속에 있는 남들을 돌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이런 저자는 우리에게 '소망은 맹목적인 낙관론이 아니라 현실적인 낙관론이다'고 말하며 오늘의 가능성을 보라고 주문한다. 오늘의 가능성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존재하며 이는 절대적이고 확실한 사실이다.

이 책은 펜데믹이라는 예상치 못한 상황 앞에 힘들어하고 신음하는 이들에게 권하고 싶다. 눈 앞에 보리는 것이 아닌 그 이면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길 기대하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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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를 탄 소년 - 인생은 평온한 여행이 아니다
네스토어 T. 콜레 지음, 김희상 옮김 / 나무생각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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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를 탄 소년'. 이 책의 제목이다. 처음 접하면서 언뜻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타셨던 어린 나귀가 생각났다. 그 어린 나귀에 앉아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자신의

옷을 길에 깔며 '호산나 호산나'를 외쳤던 백성들이 불과 며칠 후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광기를 보일것을 아셨던 그 분의 마음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물론 이 책에는 그런 종교적 의미는 별로 없다.

죽음. 소중한 이의 죽음은 깊은 절망이다. 침잠의 고통이며 숨이 막힐것 같은 질식감이다.

톰이 그랬다. 소중한 아버지의 죽음이 그의 삶의 전반을 뒤 흔들어 놓았다. 톰 뿐만 아니라

우리 대부분이 그렇다. 그리고 그 절망과 질식감은 탈출구를 찾는다. 톰이 네판테에서

안식을 찾기 시작하는 것처럼 우리도 쉴만한 '그곳'에서 평안을 회복해 간다. 어쩌면 죽음은

살아남은 이의 또다른 삶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톰은 회복되어 간다.

쉼. 인생에 있어 '쉼'은 '나아감' 만큼이나 중요한 요소이다. 아이와 나귀가 함께 하는 순례는

익숙하지만 어려운 부분을 지적한다. 앞으로 나아가기에 급급한 우리에게 '잠시 멈춰섬'은

그 자체로 생명이 된다. 멈출 수 있는 용기는 아무나 가지지 못한다. 멈춰선 소년을 스치고

지나가는 다른 아이들의 시선이 우리를 멈추지 못하게 만든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서서히

궤도를 이탈하거나 강제로 그 자리에 멈추게 된다. 자신을 앞질러 가는 아이들과 다른

나귀들의 모습을 보며 아이가 나귀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하는 말이 깊게 마음에 남는다.

'우리는 쉬었다 가자. 편하게 쉬렴. 너는 휴식을 누리는게 마땅해' 여행. 인생은 긴 여행이다.

이 길은 '산티아고의 순례길'처럼 끝이 보이거나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수 있는 길이 아니다.

오래전 이 길을 걸으며 발견한 나의 생각이 그것이다. '인생은 평온한 여행이 아니다'. 정말

힘들었다. 물을 갈아 먹고 난 복통과 접질린 다리는 그 길을 걷는 여정 내내 나를 괴롭혔다.

그나마 다행인것은 이 길이 끝은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 삶의 길은 누구도 모른다.

그래서 잘 준비해야 하며, 잘 쉬어야 하며, 잘 견뎌야 한다.

'Do ut Des'. 라틴어 격언으로 '네가 주니까 나도 준다'로 해석할 수 있다. 이 말은 내가 어떤

사람을 얻기 위해서는 내가 그 사람이 필요한 것을 먼저 준비하라는 의미를 가진다. 먼저

받으려는 관계는 오래가지 못한다. 내가 먼저 줄 준비를 하고 있어야 그 관계가 오래가고

이를 통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역자는 이를 '내가 주는 것은 너로 하여금 베풀게 하기

위함이라'로 표기하였다. 아버지의 마지막 질문의 대답으로는 잘 어울린다. 인생은 그렇게

살아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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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바꾸는 인문학, 변명 vs 변신 - 죽음을 말하는 철학과 소설은 어떻게 다른가?
플라톤.프란츠 카프카 지음, 김문성 옮김 / 스타북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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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모든 인간에게 공평하다. 누구도 거스를 수 없고 누구도 예외 없이 맞이한다.

이 방문이 두려운 이도 반기는 이도 그저 받아 들여야 한다. 이 책은 죽음에 대한

철학과 소설의 만남을 시도한다. 소크라테스의 '변명'과 카프카의 '변신'은 분명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기나긴 시간을 초월해서 두 죽음은 '가치'라는 공통주제를

가지며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지킬만한 고결함으로 이해되며 다가온다.

고대 그리스 젊은이들을 현혹하고 타락시키고 신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고발당해

죽음을 선고 받는 소크라테스, 어느날 갑자기 벌레로 변한 채 가족으부터 버림 받고

죽어가는 청년 그레고르, 두 이야기 모두 죽음을 배경으로 하나 접근 방법과 양식에

차이를 보인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옳은 일이기에 한 없이 당당한 소크라테스의

모습에선 현인의 풍모가 느껴진다. 비록 아테네 시민들과 법정은 그에게 등을 돌리면서

그의 의지와 행동 모두가 거절 당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여전히 당당하게 '지혜를

사랑하고 타인을 가르치며 자신의 생각을 전하는 것을 그만두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는 자신이 벌레로 변했다는 사실보다 가족에게 버림

받았다는 현실에 절망하며 이제 더 이상 인간일 수 없음을 자각하며 스스로 목숨을

단념하기 시작한다. 죽음 앞에선 두 사람은 모두 패배자이지만 딛고 선 공간이 너무

다르다. 그래서인지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여러분의 비위에

맞도록 바라는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중략... 지금도 이렇게 변명하는 방식을

후회하지 않으며 남들처럼 여러분이 원하는 말을 하면서 살기 보다 떳떳한 말을 하고

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죽음 앞에서 누군가의 죽음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다만 죽음의 순간 '품위'에 대해 말하고

싶다. 지금 이 순간의 나에 대한 품위도 가져야겠지만 죽은 후 남겨진 이들에게도 품위는

전해져야 한다. 그렇게 살아왔으며 그렇게 죽었다고 기억되어야 한다. 그래서인지

그레고르의 죽음을 맞이하는 가족들이 이야기하는 '새 희망'은 낯설고 어색하기만 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산사람은 살아야지.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말을 전한다. '이제 떠날 시간이 되었습니다. 각자의 길을 갑시다.

나는 죽기 위해, 여러분은 살기 위해 갈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쪽이 더 좋은 길을 만나게

될지는 신 외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잘 살아야겠다. 잘 죽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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