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나의 빈센트 - 정여울의 반 고흐 에세이
정여울 지음, 이승원 사진 / 21세기북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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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절함의 기원은 어디일까?'

스스로도 이해할 없는 열정으로 때론 몰입으로 한차례 격렬한 폭풍이 지나면 찾아오는

탈진을 즐기는것 처럼 우리는 또다시 무언가에 빠지게 된다. 대부분이 그렇다. 한가지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찾는다. 그런데 저자는 조금 달랐다. 한결같다. 한결같이 인물을

갈망하고, 한결같이 인물을 찾고, 한결같이 인물의 길을 걸어 간다. 마치 파랑, 노랑,

빨강의 빛이 만나면 다시 하얀 빛이 되는 처럼 저자의 문학과 여행 그리고 심리학이

만나는 교집합에서 인물을 만나게 된다. 그의 편지는 아름다운 문학 작품으로 다가왔고,

그의 그림을 통해  동료와 사람들 심지어 부모에게까지 무시와 배척을 당하고 비난의

대상이었던 자신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심리학적 몸부림을 느꼈고, 오직 '그릴 있는

자유' 찾기 위한 처절한 싸움과 대립은 자신의 영역에 만족하면 결코 보이지 않는

' 너머의 세계' 꿈꾸는 여행이다. 비극적일 정도로 짧은 삶을 그는 Vincent

Van Gogh(1853-1890)이다. 

누군가가 좋아지면 가리지 않는 성격은 저자와 내가 아주 많이 닮았다. 일본손보재팬

건물에 빈센트의 작품 '해바라기' 소장되어 있음을 알고 무작정 여행을 떠나 이른 아침

건물 앞에서 전시관 문이 열리기를 한참을 기다렸으나 하필 날이 휴관일임을 뒤늦게

저자나, 대학 한눈에 반한 그녀를 만나기 위해 무작정 일주일을 같은 시간대에

그곳을 서성였던 나나 오십보 백보다. 이렇듯 정말 좋아하는 무언가는 사람을 그곳으로

이끈다. 저자가 뉴옥현대미술관에서 빈센트의 그림을 펑펑 울었던것 같이 나는

그녀를 다시 그냥 그자리에 멈춰서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리움은 그런것이다.

대상이 무엇이든 가슴절이게 그리워하는 앞에서는 자동으로 무장해제가 된다.

그렇게 빈센트를 사랑하게 저자는 그의 작품을 따라 그리기도 하고 색칠도 한다. 마치

내가 다시 그곳에서 그녀를 만나기 위해 기약없는 기다림을 시작한것 처럼.


빈센트. 그는 고독한 사람이었다. 동생 테오를 제외하면 제대로 그의 진가를 알아봐주는

이도 없는 평생 타인의 오해, 비판, 멸시, 조롱 속에서 혼자였다. 심지어 가족조차도 등을

돌려 버리는 환경에서 벌이는 사투는 어느덧 그의 영혼을 갈아 먹기 시작한다. 타인의

끊임없는 오해와 싸우는 소모전은 빈센트에게 짧은 기간 동안 많은 작품을 남기게 하는

승리를 거두는가 싶었지만 자신의 삶을 남김없이 태워 하나뿐인것, 가장 빈센트적인 무언가를

창조한 그는 정작 텅빈 부스러기가 되어있었다.

책에는 수많은 빈센트의 작품이 나온다. 그럼에도 유독 눈길이 가는 작품은 얼굴 표정을

전혀 보여주지 않고도 슬픔과 절망을 남김없이 드러내는 '영원의 '(1890)이라는 작품이다.

눈에 보이는 얼굴을 그리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보이지 않는 영혼의 얼굴을 그리는 , 얼굴의

눈코입이나 표정이 아닌 그림 자체가 전달하는 분위기나 묘사 하나하나에서 '인물의 슬픔'

자체를 표현한 작품은 전율을 느끼게 한다. 투박하게 색칠 인물의 옷과 주름에서

느껴지는 삶의 굴곡과 아픔이 그렇고, 바랜 벽의 볼품없음으로 느껴지는 인생의 무게가

그렇고, 닳고 닳은 구두에서 느껴지는 하루의 고단함이 그렇고, 얼굴을 감싸쥔 거친 손에서

느껴지는 고된 삶이 그렇고, 모든 것을 덮어주듯 타고 있는 벽난로의 불길이 그렇다. 저자의

표현처럼 작품은 사람의 '마음의 지문' 같은 절망의 속살을 드러낸다.


'아무도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빈센트가 가장 깊은 슬픔을 느낄때 말이다. 고갱과의 갈등이 극에 달했을때 자신의 귀를

잘랐던 것도 '제발 들어줘'라고 절규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니

제발 마음의 귀를 열어 말을 들어 달라고. 그리고 그는 그렇게 귀가 잘린 자신의 자화상을

그린다. 고독과 외로움에 정면으로 맞서던 그는 결국 자살을 선택하고 그렇게 죽어 갔고 유일한

지지자였던 동생 테오와 오베르쉬르위아즈의 양지 바른 곳에 나란히 묻혀 있다. 


책을 읽는 내내 눈이 행복했다. 수도 없이 나오는 빈센트의 그림과 해설은 개인전에 초대 받아

작가에게 직접 작품에 대한 설명을 듣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런 훌륭한 작품집을 제작한 작가에게

무한한 경의를 표하며 빈센트의 사랑에 대한 마디를 전한다. 

"아름다움이 가져다 주는 행복은, 우리를 단번에 무한으로 이끌어 준다. 마치 사랑에 빠졌을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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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영성 - 내 마음의 주인 찾기
폴 트립 지음, 최요한 옮김 / 두란노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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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영성 글 냄새 2019 / 2019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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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영성

작가
폴 트립
출판
두란노서원
발매
2019.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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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예수님은 고통받는 사람을 무시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도와 달라고 할때 절대

롱하거나 비난하지 않으신다. P45

하나님의 후하심을 힘입어 지갑을 열라 p176



', '하는 세상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어쩌면 불가능하다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주님은 하나님보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죄라고 말씀하시고 주인을

섬길 없다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그냥 냉혹한게 아니라 비정하리 만치

냉혹하다. 이러한 현실 앞에 '경외' 통해 만났던 저자의 강력하고 날카로운 메시지가

떠올라 책이 궁금해졌다. 경외의 부제목은 '뒤틀린 삶을 바로잡는 '이다. 제목과 같이

강력한 메세지와 날카로운 말씀을 전하지만 역시 저자는 '결국은 하나님'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물론 이런 결론에 식상할 수도 있지만 이상의 대안은 없다. 아니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의 메세지는 옳다는 것이다.

 

'우리 주님께는 불가능이란 없다.' 

불가능과 없음에 자포자기하는 우리 모두에게 도전하는 저자의 말이다. 우리는 찬양으로

말씀으로 혹은 묵상으로 사실을 분명 알고 있다. 문제는 알기만 한다는 것이다. 신앙은 지식이

아니고 믿음이고 아는것이 아니고 그렇게 사는 것이다. 지적충만함이라는 괴이한 병에 걸려 뭔가

유식하고 있어보이는 말을 늘어 놓는게 신앙이 아니라 부족하고 어리숙해도 말씀대로 사는게

신앙이다. 불가능을 가능케하시는 분이 주님이시다. 우리는 여기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 대해

자신있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특히나 가난이라는 것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조금의 넉넉함이나 생각지 않은 수익이 때론 그런 우리를 병들게 하고 죄의 속성을 실천하게 만든다.

이때 다윗은 이렇게 고백한다. 

'하나님이여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51:10)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기에 다윗은 하나님께 '창조' 요청한다. 새로 만들어

달라고 한다. 우리에게도 '' 대할 이런 기도가 필요하다. 너무 쉽게 넘어지고 너무 쉽게

굴복하는 앞에 당당할 있는 정한 마음이 필요한 것이다. 철저히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고백하고 새롭게 창조되기를 소망하는 마음 이것이 영성이다. 저자는 돈을 사랑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마음의 문제이고, 정체성의 문제이고, 타락한 세상의 문제이고, 예배의 문제라고

정의한다. 불만이 있는 사람은 겸손한지 않고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분에 넘치는 요구를 당연히

여기는 뻔뻔함을 가진다. 그러다보니 자신의 정체성을 망각하고 자연스레 창조주를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을 예배하고 섬기게 되는 것이다. 맘몬을 주인으로 섬기며 예배를 빙자한

돈놀이에 열중하고 온갖 악에 빠지고 하나님께 바쳐야 마땅할 사랑과 기도와 예배와 봉사를

그에게 돌리는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것이 지금 우리의 돈에 관한 영성이다. 


삶은 모순이고 성경의 가르침대로 완벽하게 사는 사람은 없다. 다만 자신이 변하고 생활이

바뀌는 것이 성경이 추구하는 목표이다. 저자도 말하듯이 영생이 있다는 사실을 일상의 중심에

두고 '사는 '보다 믿는다고 '말하는 ' 훨씬 쉽다. 영생이 주는 자유함을 모르기에

형식적

로나마 그렇게 보이고 싶어 연극을 하는 것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에 하리라'

말씀처럼 바른 진리를 알게되면 속박과 구속이 아닌 진정한 자유를 경험하게 되는데 이를 모르니

연극을 하는것이다. '' 마찬가지다. 진리 안에 들어 있는 돈의 목적을 바로 안다면 물질의

주인이 내가 아니고 나는 다만 청지기이므로 주인의 목적에 맞게 '선용'하는 것이 내가 해야

일이고 돈에 대한 바른 가치관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돈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지는 것이다.

이것이 돈에 대한 영성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삶과 죽음 부활을 통해 나를 ''라는 굴레에서 해방시키셨기에  이상

욕망의 노예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의 자유인으로서 살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개인의 쓰임새'라는

렌즈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낌없는 베푸심'이라는 렌즈로 돈을 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돈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너그러움을 드러나게 하는 수단이고 넉넉한 공급의

은혜를 만천하에 알리는 대리인이다. 


책을 읽으며 청년들이 생각났다. 이제 경제활동을 시작한 청년들이 읽는다면 맘몬이

판을 치는 세상 속에서 바른 그리스도인의 경제관과 돈에 대한 바른 시각이 생겨 맡기신 재물을

주인의 뜻에 맞게 선용하는 충성된 청지기들이 될것 같다. 그래서 책도 권을 동네 서점에서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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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ing Somebody - 배우가 되고 싶다
양성민 지음 / 큐리어스(Qrious)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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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에는 끝이 없다. 아직도 어렵고 새로움을 추구해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연기를 60년을 넘게 이순재 선생의 말이다. 연기에 완성은 없고 다만 빈칸을 조금씩

채워가는것이다는 말처럼 연기는 어렵다. 그런데 연기자는 연기를 잘해야 한다. 이것은

어찌보면 숙명이다. 연기자에게 있어서 연기를 못한다는 소리는 치욕이고 수치다. 그런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지금도 수많은 이들이 현장에서 혹은 연습실에서 자기와의

싸움을 하고 있다. 그렇다고 연기를 한다고 해서 수입이 많은것도 아니다. 극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곤 시쳇말로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게 현실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무수히

많은 이들이 연기판에 뛰어드는 것은 연기할 느끼는 벅찬 감동이나 희열 때문이다.

자신의 몸짓 하나 대사 한마디에 신경을 집중하는 관객들과의 호흡이 그들을 아직

그곳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다. 


연기는 공동작업이다. 말은 주연배우라서 튀어야 하고 조연이나 단역이라 병풍이나

튀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합을 맞춰 하나를 이루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배우는

인간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직업이기에 상대방에 대한 배려는 매우 중요하다. 시간을

지킨다거나 약속을 끝까지 책임진다거나 하는 작은 것에서부터 연기를 하는 순간 자신

보다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이 배려이다. 이런 배려를 요즘은 '개념'이라고

부른다.


생각은 말이 되고 말은 행동으로 드러나며 인격은 운명이 된다는 말처럼 항상 준비된

자세가 필요하다. 언제 어떤 배역이 맡겨지더라도 감당할 있는 체력을 기르기 위해

수만보씩을 걷는 하정우나 촬영이 있든 없든 하루에 줄넘기를 천개씩하는 설경구나

체력과 지구력이 연기의 기본이기에 운동을 하루도 없다고 말하는 장혁이 그렇다.

그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혹은 맡겨질 배역을 위해 끊임없이 준비하고 노력한다. 이것이

자기관리다. '먼저 소설가가 되어야만 소설을 있는게 아니라 먼저 무엇을 써야만

소설가가 있다' 말처럼 자신을 준비하지 않으면 결코 기회를 잡을 없고 기회가

오더라도 그것은 이미 내것이 아니다. '백년가게' 처럼 꾸준히 자신의 일을 계속해야 명인이

있는것같이 연기도 꾸준히 연습해야 먹을 있다.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장거리

경주(어쩌면 평생이다)이기에 반복과 습관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루고 완성하는 것보다 '참고 기다리면서 계속하는 ' 중요하고 이것보다 중요한

것은 '한다. 하고 있다'이다. 완성이 없기에 계속 그곳으로 가는 것이다. 어딘가에 도착하는

것보다 그곳을 향하여 가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실망과 기대가 반복되는 시간이 길어

질수록 체념의 시간은 빨리 온다. 뭔가 될것 같다는 희망고문으로 스스로를 다독여 보고

최면을 걸어 보지만 이내 한계를 느끼게 되고 많은 이들이 대열에서 떨어져 나간다. 이때

일희일비하지 않고 결과에 상관없이 '하고 있다'라는 마음가지는게 중요한데 이것이 마음을

비우는 길이며 쉽게 지치지 않는 방법이다. 결과는 아무도 모른다. 결과가 나올 까지의

모든 상황은 과정이다. 결과를 떠나서 방향이 맞다면 오롯이 과정에 집중할 있고 그럴때

비로소 마음을 비우게 된다. 


책을 덮으며 눈에 들어 오는 구절이 있어 비록 연기는 아니더라도 어떠한 일에든

도전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 

'두려움은 생각만큼 두려운 존재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생각보다 당신은 강인한

사람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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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대 처세 수업 - 어떻게 나를 지키며 성장할 것인가?
쉬원쥐안 지음, 나진희 옮김 / 글담출판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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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는 사용하는 것이지 자랑하는 것이 아니다' 

목표가 분명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칭찬이나 무시를 크게 마음에 두지 않는다.

평상시엔 생각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아 어리석어 보일 수도 있지만 이에 개의치

않고 섣불리 행동하지도 않고 다른 사람의 이목을 끌려고도, 헛된 명성을 모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지혜는 그런 것이다. 함부로 사용해 천박해 보이는것도 아니고, 도무지

사용할 몰라 곤경에 처하는 것도 아니고, 적소에 사용하여 모두를 이롭게 하는 것이

지혜다. 세상은 이런 현자를 기다리는데 기다려도 오지 않는 '고도'처럼 아직 오지

않은것 같다. 


운명이 길을 가로 막을 운명은 당신을 위한 다른 출구를 마련해 놓는 법이다.

그것을 발견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좌절과 실패를 겪는다. 하지만

이때 절대 실망하지 않는 삶의 태도가 성공의 핵심이다. 삶의 변화는 생각의 변화에서

시작된다. 현실적으로 기회는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 존재하며

준비된 자만이 기회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있다. 


귀머거리 청개구리의 고층건물 오르기는 우리에게 많은 메세지를 던져준다.  모두들

시합을 포기하고 중도에 돌아가는데 청개구리만 유일하게 성공할 있었던 이유는

그가 귀머거리이기에 다른 이들의 조롱과 비난과 야유와 회유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정상정복이라는 목표에만 집중할 있었기 때문이다. 성공의 비결은 따로 없다. 자신이

해야 일을 해내는 것이 성공이다. 자신의 목표에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붓고 집중하는

이것이 시작이고 끝이다.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말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걷는

이것이 바른 삶이고 성공하는 길이다. 물론 여기에는 명확한 목표가 있어야 한다. 목표가

결국 나를 이끈다. 


'세상에는 완벽한 순금도 없고 완벽한 사람도 없다' 

완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각자에게는 나름의 장점들이 있을 뿐인데 우리는

완벽주의라는 덫에 갖혀 정작 본인도 하지 못하는 완벽을 요구하며 자신을 혹은 타인의

목을 조인다. 다른 사람의 단점을 찾는것은 장점을 찾는 것보다 훨씬 쉬운 일이다. 실수를

하지 않는 사람이 없듯이 단점만 갖은 사람도 없다.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만의 장점을

가지는데 문제는 이것을 발견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기가 무엇을

잘하는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도 모른채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사실 회사가 원하는

사람은 단점이 없고 모든일을 해내는 사람(사실 말도 맞다) 아닌 사람만이

있는 무언가를 갖춘 사람이다. 


'인생의 짐이 무거울수록 밟고 지나 길은 단단해진다.' 

책의 제일 마지막 챕터의 제목이다. 짊어진 짐이 가벼워 편안한 삶이 좋은 것만은

아니고 오히려 평범하고 재미없는 일이 수도 있다. 인생의 의미는 무거운 짐을 지고서

한걸음씩 자신의 길을 걷는데 있고, 어려움과 역경 속에서 앞에 놓인 장애물을 헤쳐 나가야

찾게 되는 것이다. '개인에게 닥친 중압감과 부담은 충분히 감당할 있는 것들이다.

이것들은 평탄하고 알찬 인생을 살게 한다. 오히려 감당할 없는 것은 가벼움이다.'라는

밀란 쿤데라의 말처럼 각자에게 놓여진 자신의 길을 걷다 보면 어느새 만치 앞서 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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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신영복 - 우리 시대의 지성 신영복을 읽는 10가지 키워드
이재은 지음 / 헤이북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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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암울했던 시기를 살아낸 이들에게 희망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현실 앞에 던져진 선생님의 외침은 커다란 울림을 가졌다. 짤막한 글귀

하나에 감격하기도 했고 묵직함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던 시대의 젊은이들이 이젠

반백의 나이를 훌쩍 넘겨버린 중년의 되었지만 아직 우리가 가야할 길은 멀고 선생님은

계시지 않는다. 영어에 몸에서 풀려나신 성공회대에서 강의를 하실 실제 수업정원보다

훨씬 많은 386세대들이 선생님의 강의를 듣기 위해 도강을 했고 나도 중에 하나였다. 

책은 선생님의 강의를 실천, 자유, 차이, 공존, 화화, 공부, 존재, 연대, 변방, 관계의

개의 주제를 가지고 풀어 나간다. 익히 들었던 내용들임에도 여전히 날카롭고 깊다.

그리고 새롭다. 무뎌진 가슴을 들어 내며 새순이 돋게 하는 마력도 있다. 


'여름 징역 살이'

여름 교도소의 타인과 겨울 교도소의 타인을 예로 설명하시는 '타인이라는 가능성과 한계'

각박하고 삭막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도전이 된다. 상황에 따라 타인이 전해주는 온기도

다르게 느껴지고 동일한 존재임에도 환경에 따라 전혀 다른 존재가 되는 타인이지만 '타인은

나의 가능성이다' 말하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그대로 전해진다. 5년이라는 왕따의 시간을

보내며 생각이 변화했고 자신이 변화한다는 것이 동료 재소자들의 경험을 목발로 삼아 서툰

걸음을 시작하는 것임을 발견하신 선생님은 강의에서도 이런 말씀을 하셨다. 


' 걸음'

걸음은 다리 하나로 걷는 걸음이다. 불편하기 그지없는 불완전한 걸음걸이를 완전한

걸음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다른 사람의 삶이다. 혼자가 아닌 누군가 타인에 기대어

존재하는 '비스듬히' 내가 걷기 위해 '목발' 의지하지 않을 없음을 말하는 ' 걸음'

모두 우리의 삶이다. 그렇기에  타인 없는 나는 존재 불가능하며 타인은 나의 존재를

가능케하는 근거이다.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해 있는 유일한 방법은 타자와의 관계를

맺는 것이며 이는 묵자의 '겸애'이며 예수의 '사랑'이다. 이에 대해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우리 시대의 삶은 서로 만나서 () 되지 못하고 있는 외딴 (點)입니다.

더구나 ( ) 이루지 못함은 물론입니다.'


우리가 한참 도강을 하던 시절 선생님의 화두는 변방(邊旁)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중심에서고

싶어하고 중심에 서기 위해 악도 서슴지 않는다. 주변으로 밀려 나는 것은 패배이기에 어떻게든

버티려고 몸부림을 친다. 이게 본능이다. 이에 대해 '누구도 변방이 아닌 사람이 없고 어떤 곳도

변방이 아닌 곳이 없고, 인간의 자체가 변방이다'라고 말씀하시는 선생님의 강의는 분명

혁명이었다. 중심유지가 최고의 덕목이고 중심지향이 최선의 목표라고 생각하던 우리에게 변방

마이너리티가 되라는 주문은 받아들이기 힘든 주장이었기에 우리는 도강을 하는 주제임을

망각한채 서슴없이 질문을 하기도해 조금 난처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런 우리에게

변방은 자유세계이며 가변적이고 유연한 가능성을 가진 씨앗을 품은 대지이기에 탈주(脫走)

세계가 변방이니 억울하고 부자연스럽고 답답함을 벗어나 변방의 자유함을 누리라고 말씀하셨

었는데 책의 곳에서 이를 발견하게 되니 그때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당신 스스로

중심에 갇히지 않는 자유함을 누리셨기에 당대의 지배질서이자 이데올로기인 '중심' 별반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는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노자의 '비움과 채움'과도

괘를 같이 한다. 이렇게 변방이 창조적 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중심부에 대한 열등의식

콤플렉스가 없어야 한다. 이것이 극복되지 못하면 변방은 그야말로 '변방' 지나지 않는다.

사람도 이와 다르지 않다. 삶의 중심이 자기에게 있지 않고 바깥에 있는 사람은 상대방에 대한

콤플렉스를 갖게 되고 이런 사람은 발전 없다. 


책을 덮으며 생각이 났다. 꼿꼿이 서서 강의를 하시며 학생들의 질문에 대답하시는 선생님이

그려졌다. 비록 그때 우리는 이미 사회로 뛰어든 뒤였고 같은 학교도 아니었지만 수업을 마치고

온수역 뒤편의 돼지갈비집에서 밤이 늦도록 강의 강의를 들었던 시절이 그립다. 그때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산다는 것은 많은 처음을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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