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의 감춰진 얼굴 - 지혜로운 삶의 안내
나병주 지음 / 한국경제신문i / 2019년 8월
평점 :
절판


역사는 흐르고 반복된다. 그리고 역사의 대부분은 '협상' 의해 결정되고 움직여왔다. 

협상에 일정한 룰은 없다. 그곳은 정글이며 먹고 먹히는 먹이 사슬의 연속이다. 그렇기에

이런 현장에서 치열한 전투를 거치고 살아남은 저자의 이야기는 살아있는 교과서다. ''

중시하는 유교적 사상의 국가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 '전략적'으로 상대를 다루기 위해

서슴없이 자행되고 얼마나 전략적으로 대응하느냐에 협상의 성패가 달라지기도 한다.

MBA과정에서 기업에 대한 '케이스 스터디(case study) 하듯 협상 역시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길을 보는 눈이 열린다. 어쩌면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많은 고난과 역경을

겪으며 조금씩 알아가는 것이고 한발씩 앞으로 나가게 되는 것이다. 


협상은 모든 사회적 관계속에서 발생한다. 보통 이해 당사자들 간에 Give &Take 발생하면

협상으로 보는데 부모와 자식간, 상사와 부하, 선생님과 제자 같은 관계에서도 서로 주고 받는

(유형이든 무형이든) 관계가 이루어 진다. 감나무에서 입을 벌리고 있는다고 감이 떨어지지는

않는다. 감을 먹고 싶으면 나무에 오르든 장대를 준비하던지 해야 한다. 한국인들이 유독 협상에

약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나치게 '' '경험' 의존한다. 진실은 눈을 크게 떠야 보이는

것이고 귀를 열어야 들리는 것인데 막연한 '' 과거의 '경험' 의지하다보니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준비를 상대방에게 매번 주도권을 넘겨주고 질질 끌려가는 것이다. 패는

보여주고 상대의 패는 한장도 보지 못하는 고스톱을 치는 형국이나 다를바 없다.

 

저자는 중국인, 프랑스인, 유대인, 독일인, 미국인들과 수없이 많은 협상을 하며 느낀바를 토대로

그들의 역사를 통해 협상의 저력들을 살펴보고 각자가 가진 장점들을 조목조목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협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준비다'


보통 우리는 협상에서 힘들게 하는 사람을 '지독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스타일은 다르지만 비지니스

업계에서 자기들이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상대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들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요구하는 중국인과 유대인을 '지독한 사람들'이라고 표현한다. 이솝 우화의 '낙타와 주인' 생각나는

대목이다. 조금만, 조금만에 넘어가 양보하다 결국 텐트 밖으로 쫓겨 나버린 주인과 같이 우리는

협상 테이블에서 '조금만'이라는 함정에 자주 빠진다. 저자는 이에 대해 이런것은 '협상' 아니라

'승자 독식 게임'이라고 말하면서 집요하지는 말고 집요함에 지지는 말라고 주문한다. 


일정 시간 집중해서 보면 신기하게 그림이 보이는 매직아이처럼 집중하고 상대방의 말과 행동에서

'why'라는 문제를 제기하면서 본인들이 준비해온 바를 검증해 나가면 협상을 제대로 있다. 

협상은 주고 받기이다. 상대방에게 무엇을 줄지와 내가 무엇을 받을지를 분명하게 정하고 협상에

임해야 제대로 협상을 있다. 그만큼 준비가 중요한 것이다. 협상 테이블(혹은 자리) 앉기

전에 미리 체계적이고 심도 깊은 준비를 통해 협상판을 짜고, 시나리오를 구성하고, 반복적이고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된다면 우리는 훌륭한 협상가가 있을 것이다. 


인생은 협상의 연속이고 정글에서 살아 남은 자만이 전리품을 소유할 자격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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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뻔FUN한 예술가로 살고 싶다 - 절벽 인생, 아트하라
이영주 지음 / 한국경제신문i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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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꿈꾸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멋진 말이다. 그러나 멋진 말도 그렇게 되어질때 멋진 것이지 말만 해서는 아무런 효과도

영향력도 없다. 인생이라는 도화지 위에 어떤 그림을 그리느냐는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 있고

그림에 책임도 내가 져야 한다. 


'특별함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특별한 사람 역시 따로 있지 않고 예술적 삶도 정해져 있지

않다. 상황 속에서 가장 빠르게 스며드는 감성이 예술이다'라고 말하는 저자의 생각에 고개가

끄덕여 진다. '예술'이라 하면 뭔가 거창하고 대단해 보이는데 실상 예술은 우리 일상 속에 가장

흔하게 산재해 있고 속에 잠재해 있다. 그것을 깨우는 노력(예술혼) 여하에 따라 예술적

가치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3 안에 가슴 설레게 만드는 것은 예술이 주는 즐거움 밖에

없다는 저자의 단언이 오히려 정설로 들리는 순간이다. 


어느덧 나이를 먹어가면서 노후와 은퇴이후를 생각하게 되었다. 노년의 삶을 풍요롭고 멋지게

살려면 미리미리 준비를 해야 하는데 저자가 던지는 한마디가 눈에 들어 온다. 

'10 미치면 50년이 행복한 ART'

럭키 박스가 쌓여 있어도 내가 선택하지 않으면 내것이 없듯이 속이 잠재된 끼와 본능은

스스로 발견하고 끄집어 내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캄보디아 여행 가이드의 클로버 잎에 대한

행운과 행복이 주는 교훈처럼 말이다. 럭키 박스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아무도 알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박스를 여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뭔가에 미쳐야 제대로 있다. 언젠가 TV 프로그램에서(아마도 진짜 사나이 였던 같다)

경례구호로 사용한 '정통해야 통한다' 말처럼 자신의 분야에 정통해야만 영향력을 미치고 인정

받을 있다. 우리에게 발견되는 예술혼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10년은 분야에 매달려야 하고

이런 삶의 도전은 계속되어야 한다. 오르는게 힘들다고 시도를 멈춘다면 그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경험은 성장의 자양분이 된다. 그것이 성공이든 실패든 경험을 토대로 재도약이 가능해진다.

이렇게 한발씩 성장해가며 새로운 인생의 명함 하나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목표에 다가갈수록

고난은 더욱 커진다' 괴테의 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조금만 정말 조금만 참고 견디면 된다.

포기하지 않는 자가 결국 이기는 것이다. 


오랜만에 좋아하는 그림 점을 만났다. 빈센트 고흐(Vincent Van Gogh) 5명의 등장 인물의

시선이 무척 흥미로운 '감자 먹는 사람들'이다. 밀레의 영향으로 농민 화가가 되어 구차하고 초라한

농민들의 일상을 그대로 표현하고 그림에 진심을 담은 그의 작품들은 아쉽게도 일생동안 점도

팔리지 않았다. 고흐는 힘겨운 순간마다 자신의 영혼의 등짝을 두들겨 주던 위로의 손길이며, 마음의

갈등을 거짓말처럼 가라앉게 해준 원동력인 '예술' 통해 자신을 불사르며 인생을 살아냈다. 그에게

그림이 있었기에 그의 삶은 외롭지 않았고 버텨낼수 있었다. 


무엇이든 상관없다. 가슴을 울리는 것을 찾아내어 최소한 10년은 미쳐보는거다. 몸과 마음을 움직여

가며 무언가에 미친 10년이 노년의 인생을 오히려 황금기로 만들 것이다.

심장 밑에 숨겨진 예술 본능으로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뻔펀(fun fun) 예술가로 살아가는 노년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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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심 권하는 사회 - 내가 부족하다는 생각은 어디에서 오는가 자기탐구 인문학 3
브레네 브라운 지음, 서현정 옮김 / 가나출판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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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타인의 시선에 민감하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에 관심이 많고 시선을 의식해서

작위적인 행동도 서슴없이 한다. 그런데 시선엔 비교의식이라는 괴물이 존재하는데 끊임없이

타인과 나를 비교한다. 분명 서로 다른 인격체이고 서로 다른 존재임에도 다름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상대방과 비교하여 스스로 박탈감과 수치심을 가진다. 


물론 수치심을 전혀 느끼지 않고 수는 없다. 특히나 정도는 다르지만 모든것이 완벽해야하고

남과 다르면 안된다는 사회 속에서 살아 남기란 정말 힘들다. 저자는 이런 상황에 대해 '수치심

회복 탄력성(shame resilience)이라는 용어를 들어 두려움, 비난, 단절과 같은 수치심의 부작용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사는데 필요한 용기, 연민, 그리고 유대감은 얻을 있는 방법이

있다고 말한다. 


용기(courage) 어근 cor 라틴어로 심장(heart) 뜻한다. 처음에 용기는 '자기 마음을 솔직하게

이야기 한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현재 우리는 영웅적이고 용감한 행동에 단어를 사용하는데

저자는 여기에는 좋든 나쁘든 어떤 경험을 했는지를 솔직하게 말할 있는 내면의 힘과 용기가

빠져 있고 마음 이야기를 하는 것이야 말로 '평범한 용기(ordinary courage)'라고 말한다. 


수치심은 외부에서 온다. 우리는 문화가 주입하는 메세지와 기대에서 기인한 특성이고 문화는

우리에게 수치심을 가르치고 무엇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구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수치심을 유발하는 기재로 사용된다. 수치심은 타인과의 관계를 깨버린다. 저자는 이를

'단절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표현하는데 솔직히 이건 두려움을 넘어서 공포다. 단절에 대한

두려움이란 자신이 문제가 있고 쓸데가 없어서 남들한테 외면 당하고 무리에 소속되지 못하는

두려움을 말한다. 두려움은 수치심을 자극하며 자신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게 만들뿐

아니라 타인이 솔직하게 하는 이야기에도 귀를 막게 만든다. 단절에 대한 두려움으로 우리는

침묵하고 비밀을 깊이 감추고 타인이 수치심에 대해 말하면 자신이 불편해 지는 것이 두려워서

오히려 그들을 비난한다. 


수치스러운 상황에서 공감으로 나아갈 있는 능력이 '수치심 회복 탄력성'이다. 누구나 능력을

가지지는 못하지만 높은 수준의 회복 탄력성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네가지의 공통점이 있다.

수치심을 느끼게 만드는 자신만의 '수치심 촉발제' 파악하고 이해할 있는 능력, 자신을 둘러싼

수치심 거미줄에 대한 높은 수준의 비판적 인식, 타인에게 손을 내밀려는 의지, 수치심에 대해

말할 있는 힘이 그것인데 저자는 이를 통해 어느정도 수치심을 극복할 있고 이는 훈련으로

가능하다고 말한다.

 

수치심은 무의식 속에서 우리의 생각, 감정, 행동을 조종하기에 단순하게 정의하기 힘든 아픔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들키지 않아야 살아 남을 있기에 침묵과 비밀을 좋아한다. 수치심을 불러

일으키는 말은 직접적일때도 간접적일때도 의도적일때도 의도적이 아닐때도 있다. 우리는 말에

아파하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가 수치심에

대항할때 사용하는 방법의 대부분은 오히려 무력감을 증폭시키고 수치심에 깊게 빠져들게 한다.

이것이 바로 수치심 중에서도 아주 깊숙히 숨어 있거나 감쪽같이 위장하고 있어 가장 알아보기

힘들고 대응하기 어려운 수치심의 (shame trap)이다. 


단절에 대한 다른 유형인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단절'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영향을

많이 받고 남들이 바라는대로 되고 싶은 욕구가 지나치면 자신감을 잃게 되면서 오는데 존재의

근거인 '진짜 (authenticity)' 잃어 버리는 것이다. 진짜 나야말로 모든 의미 있는 변화를

가능케하는 밑바탕이기 때문에 그것을 잃는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학자들은 '진짜 '

대해 '자연스럽고, 진심 어리고, 참되고, 마음에서 우러나고, 개방적이고 진실된 태도로 자기 자신을

남들과 공유 하는 '이라고 정의한다. 수치심은 수치심을 낳는다. 남들의 시선을 신경쓰느라

'진짜 ' 숨기고 희생하면 결국 자신을 허약하게 만든다. 


우리에겐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낼 권리가 있다. 인정받고, 어딘가에 속하고, 소중한 존재로 받아

들여지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인것처럼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변화는 대단한 영웅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사람 사람이 '평범한 용기' 실천할

변화는 시작되는 것이고 우리는 수치심을 힘껏 버릴 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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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치 - 전민식 장편소설
전민식 지음 / 마시멜로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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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초(民草). 백성을 질긴 생명력을 가진 잡초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로 힘없고, 빽없고, 줄없는

그런 백성들을 통칭하는 말로 사용된다. 나라가 위기에 처하고 국력이 쇄하여 남에 손아귀에

넘어가는 상황에 잘난 양반들과 어깨 힘깨나 주던 것들은 어느새 자취를 감춰버리고

그랬듯이 그들의 짓밟힘의 대상이던 이들이 잘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 땅인데

굳이 지켜야 필요도 없는 땅인데 그걸 지켜야 하는 아이러니와 인간의 내면속 깊은

감정의 생채기가 줄줄이 엉켜 있는 . 그냥 가볍기만 소설이 아닌 묵직한 울림을 주는

그런 책이다.


제목부터 특이하다. '강치' 독도 가제바위 부근에 서식하던 바다사자의 일컫는 말인데 수명은

20 정도이고 길이는 2.5m, 수컷의 경우 것은 몸무게가 470kg 육박했다고 하는데

일본인들의 무차별 포획으로 인해  1994 완전 멸종됐다. 


주인공인 '안용복' 실존인물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무려 11번이나 등장하는 어쩌면 조선 조정의

입장에서 보면 문제아(?)였다. 도해금지령을 어기고 울릉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범법자이며

일본인 뺨칠 수준의 일본어 능력을 가진 상인이며 선대의 역모죄로 노비가된 외거노비 출신의

천민이며 쇼군으로부터 일본인들의 울릉도와 독도 출입을 금한다는 서계를 받을 정도의

협상가이자 지략가이며 일본의 약탈과 수탈에 맞서 싸운 맹장이기도 안용복.

그런 그가 일본에 납치되고 갖은 고초를 겪은 조선으로 돌아왔을때 그를 기다린것은 어처구니

없게도 범법자의 신분으로 압송되어 결국 유배형을 받는 것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소위 힘있는

자들의 하는 형태는 별반 다르지 않다. 격식과 예의를 차린답시고 정작 보호하고 아껴야 하는

백성은 제대로 돌보지도 않고 백성의 공에 숫가락을 얹고 논공행상을 하는 몰염치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작가의 상상속 인물인 토착왜구 '이상용' 등장은 조금 작위적인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정도로

시의적절하다. 밀무역과 살인을 일삼으며 조정의 느슨하고 어이없는 대응을 비웃기라고 하는듯한

그의 괴랄한 행태는 읽는 내내 짜증을 유발했다. 


세상은 소수의 강한자들의 논리로 흘러가고 역사는 항상 승자의 편이었기에 민초들은 언제나

억울하다. 옛날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그저 가진것 없는 백성은 따시고 굶지않고 살아가는

세상을 바라지만 이것 역시 소원하고 세상은 여전히 모난돌이 맞고 바른 놈이 주리돌림을

당하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숙연한 마음으로 소설 내용 일부를 적어 본다.

'굳이 설명하거나 주장하지 않아도 독도는 조선의 땅이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조선의 것이었으니 조선의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건 당연하다.

일본인들은 당연하지 않기에 자꾸만 독도가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했다.'


이것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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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의 희열
존 파이퍼 지음, 윤종석 옮김 / 두란노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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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로 진리를 구현하고 희열로 기쁨을 구현한다 p131

우리 전체에서 하나님을 풍성희 누리기 하시려 예수께서 죽으셨다 p328

 


이 책을 받아든 나에게 기대와 염려가 찾아왔다. 그의 저서들을 탐닉했던 나이기에 자연스레

그의 거침없는 문체와 깊은 영성에서 나오는 우회와 같은 외침에 대한 기대감과 여타 강해에

관한 책들이 그렇듯이 설교의 기법이나 방법들에 대한 조악한( 표현이 거칠다면 용서하길

바란다) 나열식 기술이면 어쩌나 하는 염려가 생겼다. 그러나 파이퍼 그는 역시 그다. 설교의

본질과 우리가 받아 누리는 수많은 특권들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더도 덜도 아닌 그답게

벅찬 감동으로 진술한 책은 추천사의 어느 목사님의 말씀처럼 '최고'라고 칭해도 부족함이

없을 같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역시 강력하다. 마치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재단하고 주물러서 본인 입맛에 맞게 사용하는 이들에게

들으라는 듯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장난치지 않은' 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에게 헌정한다. 어쩌면 책은 한마디로 끝나도 무방할 같다.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고 속임으로 행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설교를 자신들의 무기로 삼아 성도를 억압하고

공격하고 심지어 저주까지 부어대는 이들도 무수히 많다. 말씀으로 장난치는 그들에게 던지는

파이퍼의 준엄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예배 하는가?'

예배는 교회가 모이는 이유이며 사실은 근본적인 이유다. 예배의 본질은 '마음에서 경험한 사랑에

이끌려 하나님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칭송하는 것이다' 파이퍼의 말은 편리함을 추구하는 제멋대로의

신앙을 하는 우리에게 너무 많은 제한을 가져온다. 먼저 '마음에서 경험한'인데 마음에서 경험하기

위해서는 먼저 '고백' 있어야 하는데 지금 우리의 신앙에는 고백이 별로 없다. 맹목적이고 현실적이다

못해 작위적인 신앙이 너무 많다. 이렇듯 고백이 없다보니 회개와 용서의 간절함도 보이지 않는다.

다음이 '사랑에 이끌려'인데 사랑을 노래만 하지 도통 행하지 않는다. '너도 이와 같이 행하라'

말씀하시는데 ' 사람이 이와 같이 행해야 하는데' 되어 정작 자신은 빠지고 다른 사람을 보며

비판하고 정죄한다. 그러다보니 시쳇말로 '예수쟁이' 별로 보이지 않고 '교회 다니는 사람' 즐비하다.

끝까지 참으시고 죽기까지 사랑하셨지만 우리는 조금 참다 그만두고 자기 만큼만 사랑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사랑에 이끌릴 수가 없다. 이런 우리의 현실은 본질적 예배에 접근하기가 어렵게 만든다.

주님께서는 있는 모습 그대로 오라고 하셨는데도 말이다. 


책의 제목은 '강해의 희열'이다. 파이퍼는 스토트(John Stott) 말을 빌어 강해의 의미를 밝힌다.

'강해는 설교 방식(주해의 연속) 아니라 설교 내용(성경 진리) 가르친다. 성경 강해는 본문에 있는

내용을 끄집어 내어 보여주는 일이다. 강해자는 닫힌듯한 데를 비집어 열고, 애매한데를 명확히 밝히고,

엉킨데를 풀고, 꽉찬데를 펼친다. 메시지의 내용이 본질상 성경본문이 아니라 본문이 전달하려는

실체라는 것이다. 설교 내용이 '성경 진리'라는 스토트의 말에서 '진리'라는 단어가 가르키는 것은

문법적이고 역사적인 명제만이 아니라 속에 담긴 실체 그것의 본질과 가치며 현재 생활에

미치는 의미다. 강해는 본문이 짧든 길든 이를 파헤쳐 본문 스스로의 메시지를 분명하고 알기 쉽고

정확하고 시의성있게 가감이나 왜곡 없이 말하는 것이다. 


저자의 '희열은 커녕 자신이 믿지도 않는 본문으로도 강해는 있다' 문구가 유독 눈에

들어 온다. 사실 여기에 조금 붙이고 싶다. 설교자의 양심에 묻고 싶다. '우리는 얼마나 'ctrl C'

' ctrl V' 빠져 있는지 .' 솔직히 나도 여기에 자유롭지 못하다. 넘쳐나는 설교의 홍수 속에 본문을

정해 놓고(정말 미안하지만 본문도 남이 정하기도 한다) 인터넷과 설교집을 뒤져 온갖 좋은 말과

쓸만한 문장들을 골라 적당히 눈치 채지 못하게 섞어서 마치 자신의 것인양 사용하는 이들에게

과연 '강해의 희열' 있을까. 그뿐인가. 본문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다 마치기

분전에 본문 이야기를 슬쩍 비추고 설교를 마치는 경우도 있다. 파이퍼는 이러한 우리에게 '성경의

뜻을 밝히는 강해와 의미 속에 담긴 하나님의 영광을 공공연히 중시하는 희열이 합해지면

설교다운 설교가 나온다' 말한다. 

파이퍼가 소개하는 예배가 예배가 되고 내가 설교하지만 내가 아닌 성령이 하시는 일이 되며 그것을

통해 기적이 일어나는 방법이 'APTAT'이다. 먼저 인정하는(Admit) 것이다. 자신의 무익하고 도움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님과 초자연적인 돌보심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들이고 이어서

도움이 필요하다고 기도(Pray)하는 것이다. 그냥 '도와주세요' 아니라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필요를

하는 것이다. 세번째 단계가 결정적인데 3:5 기인하여 '듣고 믿을 ' 그리하시는 주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능력을 뭉뚱그려 생각하는 우리에게 ' 잔이 넘치도록' 부으시는 은혜를

신뢰하며 피로 사신 약속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뢰를 선포하는 행동(Act) 한다.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벧전4:11)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저자는 직접 의식되지 않는 실체를 의지하는 행위를

'신비'라고 표현한다. 마지막으로 신뢰의 행동을 모두 마친 그렇게 행하신 주님께 감사(Thanks)한다.

이는 비단 파이퍼 만의 아니 설교자들만의 방법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삶에서 매순간마다 적용해야할

방법이다. 각자의 삶에서 주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그분께 자신의 아뢸바를 아뢰며, 전적으로

분만을 신뢰하고, 들은 말씀을 행하며, 이후의 모든 삶에 감사하는 , 이러한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이다. 


설교의 정수는 본문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회중들에게 감동을 주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억지로

어조를 달리하고 우수꽝스러운 행동을 하고 손짓은 어떻게 하며 시선은 어디로 둬야 하는지가 중요한게

아니라 성경이라는 창을 통해 회중의 사고와 마음을 영광의 세계로 이끄는 것이 설교자의 궁극적

목표이고 하나님으로 흠뻑 적혀진 실체를 회중들이 성경말씀의 창을 통해 지각하고 경험하게 하는것이다. 


설교의 무대 중앙은 오직 하나님의 자리이다. 다른 어느것도 없고 양보할수도 없는 자리를

키는 우리는 '거룩한 사명감' '두려움' 가져야 것이다. 바울이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한다'

말한것처럼 우리의 설교와 삶에도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자랑되어야 것이다. 

 

책은 말씀을 선포하는 모든 사역자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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