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행복하지 않다고 했다
김미향 지음 / 넥서스BOOKS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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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여년을 시대의 딸로서, 누이로서, 여성으로서, 장애인으로서, 아내로서, 엄마로서

그대로 사회적 최약자의 삶을 살다 떠난 최여사(최정숙, 엄마) 그리며 작정하고

엄마편을 들기로 저자의 글을 통해 시대의 어머니들의 모습을 다시금 떠올리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엄마를 부르면 엄마 냄새가 난다'

엄마는 그런가 보다. 나도 가만히 있다가도 엄마 생각이 나면 괜히 눈물이 나고

가슴 한켠이 아려 온다. 저자가 느낀 회환과 자책이 추억과 함께 밀려오는데 주체할

수가 없다. 이름 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엄마'. 엄마에게선 엄마 냄새가 난다.

뭐라 말로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엄마에겐 분명 엄마 냄새가 난다. 냄새는 푸근하다.

(포근하다고 말하면 왠지 작아 보여 일부러 푸근하다고 쓴다) 그래서 따뜻하고 편안하다. 

저자에게 엄마가 '영원한 히어로'이듯 우리 모두에게 엄마는 '슈퍼 히어로'. 따뜻하고

푸근한 마음을 가진 언제나 내편이고, 어느 노래의 가사처럼 내가 부르면 무조건 달려오는

슈퍼히어로 그런 엄마가 보고 싶다. 


죽음은 지속적으로 삶을 환기 시킨다. 이것이 많이 고통스럽더라도 엄마를 그리는

일을 멈출 없는 이유이다. 그런 엄마의 죽음도 서서히 기억에서 지워져 간다. 인간이

망각의 동물이고 지금 우리가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하지만 불과 얼마가 지나지

않았는데 조금씩 흐려져 가는 엄마의 기억에 저자는 흠칫 놀란다. 자신만의 상실이 아닌

모두의 상실이라고 애둘러 말하지만 분명 우리의 기억에서 조금씩 지워져 간다. 죄책감도,

슬픔도, 안타까움도, 그리움도 어느새 강을 건너 버렸다. 그렇게. 이런 현실 앞에 저자는

다시 한번 엄마의 딸로 태어나 엄마와 함께할 있다면 기꺼이 다시 태어나 영원히 엄마의

딸이고 싶다고 말한다. 그래서 잠을 잔다. 꿈에서라도 제발 엄마를 만날 있기를 간절히 빌며.


책은 힘겹게 살다 엄마에 대한 저자의 자기고백이다. 아니 어쩌면 대한민국에서 엄마라는

이름으로 불리다 가신 모든 이들에게 드리는 감사의 글이다. 정작 자신은 위축되고 억압받고

천대받는 삶을 살았지만 자식에게 만큼은 세상에 지배 당하지 말고 당당하게 살길 당부하는

커다란 따뜻함과 다정함을 가진 그런이가 우리의 엄마다. 죽음은 삶의 뒤편에 있고 삶은

언제나 죽음의 양면이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매일 아주아주 씩씩하게, 아주아주 훌륭하게

살아야하며 또한 그렇게 죽어야 하는 것이다. 

엄마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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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로역정 고전의 숲 두란노 머스트북 1
존 번연 지음, 정성묵 옮김 / 두란노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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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하기 어려워도 지금 여러분이 옳은 길로 가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려 책을

원하시나요?'

번연의 초대이다. 우리는 신앙의 위기 시대를 살고 있다. 너무 가혹하게 폄하하는것

아니냐고 항변해 보아야 소용 없다. 현실속에서 만나는 이들에게 '예수' 전해 사람이면

알것이다. 그들의 냉랭하고 차가운 시선과 말을. 세상을 향해 존재하며 세상을 위해 기도하던

교회가 이젠 세상의 근심거리가 되어 있는 현실 앞에 번연의 '순례자의 '로의 초대는

적절하며 그와 함께 여행이 기대가 된다.


자신에게 선포된 저주와 멸망에 대해 아무도 믿어주지 않아 비통한 절규를 쏟아 내며 크리스천이

길을 떠나며 만나게 되는 첫번째 인물이 고집(obstinate) 변덕(pliable)이다.  대학 시절

은사님에게 선물 받아 읽었을 장면에서 오랜 시간을 멈췄었는데 이번에도 장면을

그냥 넘기지 못하고 다시 멈춰섰다. 그때보다 훨씬 고집스러워지고 변덕스러워진 나의 모습에

한숨이 나온다.

고집스럽게 집으로 돌아갈 것을 말하고 있는 '고집' 상대방을 살피지 않고 자신의 주장만을

말한다. 다른 사람의 생각은 틀렸고 자신만 옳다고 말한다. 관용도 배려도 없다. 그저 자신의

생각과 주장만 존재한다. 비록 짧게 등장하지만 고집은 자극을 준다. 우리는 신앙 생활

곳곳에서 또다른 형태의 '고집' 만나게 된다. 신실함과 그리스도를 향한 고집이 아니라 처절하리

만치 이기적인 고집이다. 여기에는 사랑도 없고 희생도 없이 오직 자신만 존재한다. 누가? 바로

나와 여러분이다. 


뿐인가. '변덕'이라는 동반자는 어떤가. 처음에는 동반자인것 같은데 어려움 앞에 마음을

바꿔버린다. 조금만 어려워도, 조금만 힘들어도 돌아선다. 나간 탕자에게 제물이 많을

모여 들었던 사람들이 재산을 모두 탕진하자 떠나버렸던것 같이 고난과 고통 앞에 뒤도 안돌아

보고 떠나 버린다. 갈테면 그냥 가지 굳이 속을 뒤집어 놓고 기운 꺾는 소리를 하며 떠난다.

우리는 현실 속에서 수없이 많은 변덕들을 만난다. 마음에 조금 맞는다고 수시로 교회를

옮기고, 삶에 어려움이 생기면 쪼르르 점집이나 신기 있다는 누군가를 찾아가고, 신앙에

문제라도 생길라치면 교회를 끊어버리는(무슨 학원도 아니고, 요즘 아이들은 이렇게 표현한다)

이들이 부지기수다. 이번에도 친구 때문에 나는 한참을 멈춰 있었다.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많이 노력을 했음에 속에 자리한 '교만' '변덕' 여전히 나를 괴롭힌다. 


그렇게 길을 가던 그가 도착한 자만(conceit)이라는 마을에서 만난 무지(ignorence)라는

청년과의 대화 '선한 생각'이라는 내용은 우리가 깊이 생각해 부분이다. 길을 걷는

내내 선한 생각만을 하고 걸었다는 무지에게 크리스천은 선한 생각은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 생각이고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자기 자신을 판단 가능한 것인데

이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3:10),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악할

뿐임을 보시고(6:5),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8:21)

근거로 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어리석은 무지는 여전히 무지하다. 마치 우리처럼 말이다.

없이 많은 선한 권고를 듣지만 대부분 흘려 버리고 자기 입맛에 맞는 것만 붙잡고

그것이 믿음이라고 말하는 우리의 무지와, 스스로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도움이라도 청해야 하는데 지독히 이기적이고 잘나서 여전히 자기 팔을 흔들고 다니는

우리의 거만함은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는 의롭지 않지만 의롭게 하셨음을 잊어 버리고

마치 스스로 의인인양 거들먹 거리는 종교인들에게 크리스천은 멋지게 먹인다.

"자네는 무지라는 이름이 정말 어울리는 사람이군".

그런데 아쉽게 소망의 말처럼 지금 우리가 사는 이곳에도 무지와 같은 사람들이 아주 많고

집집마다 거리마다 넘쳐나고 그들은 어떻게든 죄의식을 억누르고 괜찮다며 최면을

무지를 누리고 있다. 

천성까지 함께 무지에게 천국에 들어 증표가 없자 두손과 발을 묶어 내치라고 명하시고

지옥에 던져 버리는 장면에서는 내가 성경에서 제일 두려워 하는 구절이 생각났다.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7:23). 


10여년 만에 다시 읽어 천로역정은 여전히 두렵고 떨림으로 다가왔다. 살아야 될것 같다.

앞에 섰을때 도무지 알지 못하는 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제대로 살아야겠다.

책은 우리 청년들과 함께 읽을 것이다. 청년의 때에 크리스천과 함께 떠나는 '순례자의 '

그들 인생에 분명 시금석이 될것이다. 놀랍게도 지난 예배 시간에 물어보니 34명의 청년

명만 책을 읽었다고 한다. 나도 놀랐지만 정작 본인들도 놀라는 눈치였다. 부디 우리

청년들이 '무지'에서 벗어나 진리이신 예수를 만나는 행복을 누리길 기대하며 기쁜 마음으로

서점에 두권을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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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절반쯤 왔을 때 읽어야 할 도덕경 - 삶의 순리를 깨달을 때면 도덕경이 들린다 인생의 절반쯤 왔을 때 읽어야 할 시리즈
노자 지음, 박훈 옮김 / 탐나는책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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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은 5000, 81장으로 되어 있으며 상편 37장의 내용을 도경, 하편 44장의 내용을

덕경이라고 한다. 도덕경의 기본 사상은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다. 무는 '도는 언제나

무위하지만 하지 않는 일이 없다'의 무의이고, 자연은 '하늘은 도를 본 받고 도는 자연을

본 받는다'의 자연을 의미하는 것으로 모든 거짓됨과 인위적인 것에서 벗어나려는 사상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 발췌)


역설(逆說, paradox) 가르침인 도덕경이 오히려 순리로 다가온다.

도덕경에는 수없이 많은 욕설들이 나온다.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설들이 지금 우리에게는 순리이며 금언으로 다가온다. 혼탁하고 어지러운 세상 앞에

던지는 노자의 소리를 들어 보자. 


天下萬物은 生於有하나 有生於無니라 

도에서 나온 만물이 다시 도로 되돌아가고, 무에서 나온 유가 다시 무로 되돌아 가는 것과

같이 유가 유이기 위해서는 항상 무로 되돌아 필요가 있다. 살기 위해 아둥바둥 거리며

발버둥치는 우리에게 노자가 던지는 금언이다. 물은 없이 약하고 부드럽고 결코 자기를

내세우거나 상대에게 강요하지 않지만 모든 어려움을 견디고 아무리 단단하고 억센 것이라도

결국 이겨 내는것 이것이 자연의 이치인것을 깨닫게 해주는 말이다. 부드럽고 약함은 모든

단단하고 강한 것을 이길 있는 참다운 강함이요, 진정한 부드러움인 것이다. 결국 유와

무는 무한한 것을 의미하고 무한함은 다시 유한한 인간 앞으로 다가온다. 노자의 이러한

사상은 얼핏 불교의 윤회와도 이어지는 같다. 뒤에 글귀가 붙으면 좋을

같아 적어 본다. 


故로 知足目足이면 常足突이니라.

도무지 만족 모르는 우리에게 던지는 노자의 다른 화두이다. 화로 말하자면 만족

모르는 보다 것이 없고, 허물로 말하자면 갖고자 하는 욕심보다 것이 없다. 그러므로

만족함을 아는데서 얻는 만족이야말로 참된 만족인 것이다. 만족할 모르기에 끊임없이

심을 부리고, 만족함을 모르기에 끊임없이 남의 것을 탐하고, 만족함을 모르기에  계속해서

다른것을 향해 눈을 돌린다. 하나를 가지면 두개를 가지고 싶고 두개를 가지면 네개를 가지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지만 정말 우리는 만족을 모른다. 노자는 이러한 우리에게 만족함을

알라고 주문한다. 군주가 욕심이 많으면 백성이 고통을 받고, 가장이 욕심이 많으면 가족이

힘들어지기 마련이다. 안분지족(安分知足)이야말로 평안함의 비결이다. 그래서 성서에도 '내

은혜가 내게 족하다'라는 말이 있나 보다. 


가득채우면 흘러 넘치는 것처럼 모든것은 '적당함' 필요하다. 물론 적당함은 어렵다.

넘치거나 모자람 없는 중용의 덕을 가장 표현한 '적당한'이라는 단어는 어쩌면 노자가

우리에게 전해주고 싶은 한마디가 아닐까 싶다. 부디 안분지족하는 '적당한'마음으로 세상을

바르게 살아가면 좋겠다. 


끝으로 ''하기 좋아하는 우리에게 던지는 노자의 한마디를 적어 본다.

知足知는 上이오 不知足은 病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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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트 말고 직관적 식사 - 다이어트가 힘들 때 시작하는 10가지 원칙
에블린 트리볼리.엘리스 레시 지음, 정지현 옮김 / 골든어페어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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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세계 인구중 20억명이 과체중이고 그중 6 정도가 비만이며 여기저기서

다이어트에 대한 비법 아닌 비법들이 우후죽순 처럼 생겨나는 다이어트 홍수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한것은 많은 사람들이 다이어트에 도전하지만 99% 실패 한다는

것이고 성공한 1%마저도 현상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다이어트 절대 하지 마라'

다이어트 홍수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던지는 저자의 말이다. 각종 음식의 칼로리와 지방 함유량을

줄줄 외우고 어떤 음식이 좋은 음식이며 일일 영양 권장 섭취량을 고려한 식단도 훌륭하게

있으나 결국 다이어트에는 실패하고 마는 다이어트 전사들에게 말은 폭탄선언이며 날씬함과

균형 잡힌 몸매라는 신기루를 쫓아 헤매는 다이어트 방랑자들에게 '다이어트는 효과가 없을

아니라 여러가지 문제의 근원이다' 저자의 말은 선전포고이다. 체중을 빨리 쉽게 안전하게

빼는 방법은 사실상 없다. 대부분 어느정도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지만 어떤 다이어트 프로그램도

이에 대해 경고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책은 다이어트의 허구와 역설을 설명하며 제대로 먹는

방법을 제시한다. 

직관적 식사는 뇌를 존중하는 식사법이다. 뇌는 몸의 일부이기 때문에 배가 고프면 배고픔의

정도를 평가하고 배고픔과 미각을 만족시켜줄 음식에 대해 생각하고 여러가지 맛과 식감,

온도등을 고려해서 적절한 음식을 제안한다. 물론 처음 방법을 시작할 때는 의도적으로 포만감,

만족감, 생각들을 긴장시켜 뇌가 위장과 혀와 긴밀하게 이어지도록 해야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렇듯 직관적 식사법은 뇌를 이용한 식사법이다.

 

직관적 식사로의 여정은 장거리 하이킹과도 같다. 길을 나서기 어디로 어떻게 가야하며 어디서

쉬어야 하며 어느정도의 속도로 가야 하는지 면밀히 준비해야 하는 처럼 직관적 식사법도

철저한 계획에 의한 체계적인 준비가 필요하다. 다이어트를 해온 시간, 뿌리 박힌 다이어트 사고

방식, 음식을 대체 수단으로 이용해온 기간, 자신을 신뢰하려는 의지, 체중 감량을 제쳐두는 정도

등을 고려해서 방법을 결정한다. 방법은 다이어트와는 완전히 다르다. 일반적으로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은 정해진 길을 정확히 따르지 않으면 좌절감을 느끼지만 방법은 장거리 여행이기에

실수가 용납된다. 조금 삐걱거렸으면 바로 잡으면 되고, 잠시 쉬었으면 다시 움직이면 된다. 경쟁이

아니기에 너무 빨리 필요도 없다. 그래서 부담감과 압박감이 없다.명심할것은  '빨리, 편하게,

안전하게' 살이 빠지는 방법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직관적 식사는 건강을 개선 뿐만 아니라 섭식의 자유에 이르는 길이고 우리에게 힘을 주는

과정이다. 음식의 횡포와 몸에 대한 불안에서 해방되어 꿈과 삶의 목적을 추구하는 에너지를

재충전하게 준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의 생활 방식을 바꾸는 결단과 의지가 필요하다. 물론

처음에는 힘들지만 꾸준히 하다보면 결국 새로운 삶을 맞이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것이다.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면서' 장거리 여행을 시작해 보자. 먹는 방법만 바꿔도 인생이 바뀐다. 

"NO DI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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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쓰기 핵심
임병식 지음 / 해드림출판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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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도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감동을 전하는 것이다" 조선 시대 문인인 서포 김만중의

글이다. 글에는 의미와 감동이 담겨 있어야 한다. 글은 자신의 인성이 표현되고 들어 있고

자신의 삶이 녹녹히 녹아 있는 것이므로 바른 심성과 가치관을 가지고 써야 한다. 


중국 남송 사람 홍매(1123-1202) '용재수필'에서 처음 사용된 '수필'이라는 단어는

1780 연암이 '열하일기' 속에 '일신수필'이라는 항목을 넣어 글을 쓰면서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사용됐고 서양에서는 몽테뉴의 저서 '수상록'에서 'essai'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다. 


'수필은 문학이다'

흔히 수필을 ' 가는대로 쓰는 '이라 생각하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저자는 이에 대해

수필은 소설처럼 허구에 바탕을 문학이 아니고 생활 속에서 직접 겪은 일을 가지고 쓰는

체험 문학이며 자신의 마음을 발가벗겨서 독자 앞에 진솔하게 드러내는 심적나상(心的裸像)을

기반으로 한 문학이라고 소개한다, 옛 말에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다. 수필이 그렇다.

잘 모를 때는 무턱대고 뛰어 들거나 손대기 쉬운게 수필인데 쓰면 쓸수록 어렵고 힘든 과정이라

웃고 들어갔다 울고 나오기 일쑤인게 수필이다. 저자는 이에 대해 '치열함'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치열하게 살아 온 자신의 인생이 담겨있고, 열정을 다한 삶이 살아 있고,

목표를 향한 집념이 숨쉬는 것이 수필이기에 수필은 치열함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필은

진솔하다. 거짓과 위선이 아니라 진실하고 바른 글이어야 한다. 인격과 인품이 뭍어 나기에 좋은

수필은 겸손하다. 1인칭 주체가 되어 자기가 체험한 것을 써야 하기에 자신을 돌아 볼 줄 아는

겸손함이 필요하다. 이러한 겸손함은 독자로부터 거부감을 없애주고 마음을 차분하게 안정시켜

준다. 여기서 꼭 짚을 것이 있는데 과공비례(過恭非禮)이다. 지나치게 겸손하면 오히려

가식적으로나 과시로 비쳐져서 독자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할 수도 있으니 중용이 필요하다.

작가는 누군가를 가르치기 위해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나누는 작업을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수필을 쓰는 사람은 적어도 '괜찮은 사람'으로 인정 받을 정도의 자리 매김은 되야 한다.

 

예전에 '연암에게서 글쓰기를 배우다'에서 읽은 문장을 쇼펜하우어의 글을 통해 만났다. '쓸데 없는

사족은 문제와 문장의 명료함을 흐린다'. 글을 쓰다 보면 자꾸 길어지게 된다. 왠지 이 말을 더

넣으면 글이 훨씬 세련되어 보일 것 같고 이 단어를 첨가하면 고급져 보일 것 같다는 착각속에

하나둘씩 첨부하다 보면 본질을 흐리기도 하고 주제나 논점에서 벗어나기 일쑤다. 대학때 김형석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떠오른다. '보고서를 쓸 때 더 줄이고 더 뺄것이 없는 보고서가 제일

잘 된 보고서다.' 맞는 말이다. 사족은 사족일 뿐이다. 


저자도 말했듯이 글쓰기는 연습이다. 꾸준한 습작을 통해 글의 맥과 흐름을 잡고, 끊임없는 수정과

교정을 통해 바른 글을 쓰며, 지속적인 사고를 통해 글의 넓이를 넓혀가는 것이 글쓰기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기억 속 한켠에 자리 잡은 행복한 국어 수업을 받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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