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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의 희열
존 파이퍼 지음, 윤종석 옮김 / 두란노 / 2019년 7월
평점 :
강해로 진리를 구현하고 희열로 기쁨을 구현한다 p131
우리 삶 전체에서 하나님을 풍성희 누리기 하시려 예수께서 죽으셨다 p328
이 책을 받아든 나에게 기대와 염려가 찾아왔다. 그의 저서들을 탐닉했던 나이기에 자연스레
그의 거침없는 문체와 깊은 영성에서 나오는 우회와 같은 외침에 대한 기대감과 여타 강해에
관한 책들이 그렇듯이 설교의 기법이나 방법들에 대한 조악한(이 표현이 거칠다면 용서하길
바란다) 나열식 기술이면 어쩌나 하는 염려가 생겼다. 그러나 존 파이퍼 그는 역시 그다. 설교의
본질과 우리가 받아 누리는 수많은 특권들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더도 덜도 아닌 딱 그답게
벅찬 감동으로 진술한 이 책은 추천사의 어느 목사님의 말씀처럼 '최고'라고 칭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 같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역시 강력하다. 마치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재단하고 주물러서 본인 입맛에 맞게 사용하는 이들에게
들으라는 듯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장난치지 않은' 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에게 헌정한다. 어쩌면 이 책은 이 말 한마디로 끝나도 무방할 것 같다.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고 속임으로 행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설교를 자신들의 무기로 삼아 성도를 억압하고
공격하고 심지어 저주까지 퍼 부어대는 이들도 무수히 많다. 말씀으로 장난치는 그들에게 던지는
파이퍼의 준엄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왜 예배 하는가?'
예배는 교회가 모이는 이유이며 사실은 근본적인 이유다. 예배의 본질은 '마음에서 경험한 사랑에
이끌려 하나님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칭송하는 것이다'는 파이퍼의 말은 편리함을 추구하는 제멋대로의
신앙을 하는 우리에게 너무 많은 제한을 가져온다. 먼저 '마음에서 경험한'인데 마음에서 경험하기
위해서는 먼저 '고백'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 우리의 신앙에는 고백이 별로 없다. 맹목적이고 현실적이다
못해 작위적인 신앙이 너무 많다. 이렇듯 고백이 없다보니 회개와 용서의 간절함도 보이지 않는다.
다음이 '사랑에 이끌려'인데 그 사랑을 노래만 하지 도통 행하지 않는다. '너도 이와 같이 행하라'고
말씀하시는데 '저 사람이 이와 같이 행해야 하는데'가 되어 정작 자신은 쏙 빠지고 다른 사람을 보며
비판하고 정죄한다. 그러다보니 시쳇말로 '예수쟁이'는 별로 보이지 않고 '교회 다니는 사람'만 즐비하다.
끝까지 참으시고 죽기까지 사랑하셨지만 우리는 조금 참다 그만두고 자기 살 만큼만 사랑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사랑에 이끌릴 수가 없다. 이런 우리의 현실은 본질적 예배에 접근하기가 어렵게 만든다.
주님께서는 있는 모습 그대로 오라고 하셨는데도 말이다.
이 책의 제목은 '강해의 희열'이다. 파이퍼는 존 스토트(John Stott)의 말을 빌어 강해의 의미를 밝힌다.
'강해는 설교 방식(주해의 연속)이 아니라 설교 내용(성경 진리)를 가르친다. 성경 강해는 본문에 있는
내용을 끄집어 내어 보여주는 일이다. 강해자는 닫힌듯한 데를 비집어 열고, 애매한데를 명확히 밝히고,
엉킨데를 풀고, 꽉찬데를 펼친다. 메시지의 내용이 본질상 성경본문이 아니라 본문이 전달하려는
실체라는 것이다. 설교 내용이 '성경 진리'라는 스토트의 말에서 '진리'라는 단어가 가르키는 것은
문법적이고 역사적인 명제만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실체 즉 그것의 본질과 가치며 현재 실 생활에
미치는 의미다. 강해는 본문이 짧든 길든 이를 파헤쳐 본문 스스로의 메시지를 분명하고 알기 쉽고
정확하고 시의성있게 가감이나 왜곡 없이 말하는 것이다.
저자의 글 중 '희열은 커녕 자신이 믿지도 않는 본문으로도 강해는 할 수 있다'는 문구가 유독 눈에
들어 온다. 사실 여기에 조금 더 붙이고 싶다. 설교자의 양심에 묻고 싶다. '우리는 얼마나 'ctrl C'와
' ctrl V'에 빠져 있는지 .' 솔직히 나도 여기에 자유롭지 못하다. 넘쳐나는 설교의 홍수 속에 본문을
정해 놓고(정말 미안하지만 본문도 남이 정하기도 한다) 인터넷과 설교집을 뒤져 온갖 좋은 말과
쓸만한 문장들을 골라 적당히 눈치 채지 못하게 섞어서 마치 자신의 것인양 사용하는 이들에게
과연 '강해의 희열'이 있을까. 그뿐인가. 본문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다 마치기
몇 분전에 본문 이야기를 슬쩍 비추고 설교를 마치는 경우도 있다. 파이퍼는 이러한 우리에게 '성경의
참 뜻을 밝히는 강해와 그 의미 속에 담긴 하나님의 영광을 공공연히 중시하는 희열이 합해지면
설교다운 설교가 나온다'고 말한다.

파이퍼가 소개하는 예배가 예배가 되고 내가 설교하지만 내가 아닌 성령이 하시는 일이 되며 그것을
통해 기적이 일어나는 방법이 'APTAT'이다. 먼저 인정하는(Admit) 것이다. 자신의 무익하고 도움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님과 초자연적인 돌보심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들이고 이어서
도움이 필요하다고 기도(Pray)하는 것이다. 그냥 '도와주세요'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필요를
구하는 것이다. 세번째 단계가 결정적인데 갈3:5에 기인하여 '듣고 믿을 때' 그리하시는 주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능력을 뭉뚱그려 생각하는 우리에게 '내 잔이 넘치도록' 부으시는 은혜를
신뢰하며 피로 사신 약속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신뢰를 선포하는 행동(Act)을 한다.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벧전4:11)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저자는 직접 의식되지 않는 실체를 의지하는 이 행위를
'신비'라고 표현한다. 마지막으로 신뢰의 행동을 모두 마친 후 그렇게 행하신 주님께 감사(Thanks)한다.
이는 비단 파이퍼 만의 아니 설교자들만의 방법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삶에서 매순간마다 적용해야할
방법이다. 각자의 삶에서 주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그분께 자신의 아뢸바를 아뢰며, 전적으로
그 분만을 신뢰하고, 들은 말씀을 행하며, 이후의 모든 삶에 감사하는 삶, 이러한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이다.
설교의 정수는 본문 속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회중들에게 감동을 주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억지로
어조를 달리하고 우수꽝스러운 행동을 하고 손짓은 어떻게 하며 시선은 어디로 둬야 하는지가 중요한게
아니라 성경이라는 창을 통해 회중의 사고와 마음을 영광의 세계로 이끄는 것이 설교자의 궁극적
목표이고 하나님으로 흠뻑 적혀진 실체를 회중들이 성경말씀의 창을 통해 지각하고 경험하게 하는것이다.
설교의 무대 중앙은 오직 하나님의 자리이다. 다른 어느것도 넘 볼 수 없고 양보할수도 없는 그 자리를 지
키는 우리는 '거룩한 사명감'과 '두려움'을 가져야 할 것이다. 바울이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한다'고
말한것처럼 우리의 설교와 삶에도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자랑되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말씀을 선포하는 모든 사역자들이 꼭 한 번 읽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