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누군가의 글에 '날 것 그대로'라는 단어를 썼던 기억이 있는데 이 책에서 다시 한번 '날 것
그대로'라는 단어가 생각 났다. 처음부터 운다. 히말라야 트레킹(어쩌면 우리는 평생 꿈도 꿔보지
못할)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대고 한참을 운다. 모두를 잃어 버린
이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기에 주저앉아 통곡할 뿐이다. 그리고 그 눈물은 멈출 줄 모른다.
예전 교회에서 사역할 때 이런 자매를 본 적이 있다. 청년부 예배 시간에 말씀을 전하는데 중간
정도에 앉아 있던 자매가 갑자기 울기 시작한다. 주변에서 달래려는걸 그냥 두라고 하고 말씀을
마치고 예배를 마쳤는데 여전히 울고 있다. 우리 모두는 자매를 위해 조용히 자리를 비웠고
세 시간여를 그렇게 울던 자매가 교역자실에 찾아와 이렇게 말한다. '갑자기 눈물이 났고 주체할 수
없었고 시간이 이렇게 많이 흘렀는지 몰랐다'. 그리고 그렇게 울어서 창피해서 어쩌냐며 부끄러워
하던 그 자매, 지금은 선교사가 되어 현장에 있다.

지금 우리 현실은 그냥 암담하다. 우는 능력도 잃어 버렸고, 사용하라고 주신 폭탄은 폼으로 가지고만
있어 녹슬어 버렸고, 세상이 교회를 향해 외치는 소리엔 귀를 막아 버리고 자기들만의 축제에 열광한다.
저자는 이에 대해 더 많은 수치, 더 많은 설교로는 우리에게 필요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리 주변 사람들이 겪는 극심한 고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아야 하며 '세상 속에서' 말씀을 경험하여
그 말씀이 우리 가슴 깊은곳까지 파고드는 일이 필요하다. 이대로는 안된다. 무언가 바뀌어야만 한다.
복음, 복된 소식, 기쁜 소식이 어디에서는 흉기로 자신들을 위협하는 날카로운 무기로 때론 권력과 힘의
상징으로 보여져 척결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왜곡과 오해가 뒤 섞여 하나님에 대해 멀어지고 반감만
가득하다. 정작 보여줘야 하는 '예수'가 아닌 정복자요 오만하고 욕심많은 괴물로 비쳐지기도 한다.
복음의 최전방에 나선 우리는 '진짜 예수'를 전해야 한다. 진짜 하나님을 전해야 한다. 오염되고 타락하고
인색하기 그지없는 변질된 복음이 아니라 죽음으로 값주어 산 '진짜 복음'을 전해야 한다.
900만명의 주민 중 예수님의 제자는 채 100명도 되지 않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에 대해 들어 보지
못한 영적 빈곤과 아이들의 열에 다섯은 여덟살을 넘기지 못하는 육체적 빈곤마저 지닌 그곳, 예수라는
이름을 들어 본적이 있냐는 질문에 근처 어느 마을에 사는 누군가를 묻는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
저자는 이들을 위해 기도했다.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그래서는 안되는데 '딱 거기까지라고' 생각하며
기도했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의 사역 현장에서도 그래서는 안되는데 정말 그래서는 안되는데
그냥 거기까지라는 의무감으로 기도할 때가 있다. 물론 이내 돌아서서 다시 하긴 하지만 저자도 그랬던
것 같다. 사역자의 이런 고백이 낯설지만 반갑다. 날 것 인것 같은 이런 사실적 묘사가 좋다.
물을 걸러 마실 간단한 필터가 없어 세 가족과 마을 주민 60명이 몰살당한 시잔,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7살의 나이에 산으로 도망쳤다 붙잡혀 헛간에 갇혀 산 나빈, 마을에 열두살에서 스무살 사이의
여자아이들이 모두 성노예로 팔려나갔지만 그래도 이곳 보다는 잘 살 것이라는 묘한 믿음을 가진 부모들과
그 아이들이 팔려간 '오두막 식당'의 참상을 읽으며 가슴이 아파오고 우리의 할머니들이 생각이 났다.
배낭에 먹을 것이 있음에도 주지 못하는(아니 줄 수 없는) 가난의 민낯 앞에서 무기력한 저자의 모습은
소수에게 베풀어 다수가 배제되지 않도록 하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적나라하다. 가난한 자들에게 전할
복음은 과연 무엇일까?
저자는 각각의 상황을 맞이하며 계속해서 주님께 묻는다. 'why'와 'how' 사이에서 고민하며 묻는다.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선택 할 길이며 방법인지에 대해.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향한 진짜 사랑은 종교적 학습만 해서는 절대로 만들어 낼 수 없는데 우리는 미친듯이 학습에 목을 맨다.

"답은 '무엇'이 아니라 '누구'입니다."
잠시 멍해졌다. 무엇을 하였느냐에 집중하다 정작 '누구'를 잃어 버린 사역 앞에 고개가 숙여진다. 정작
그분이 행하시는 일임에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 자신이 한것인양 한껏 폼을 내는 우리들 앞에
주님은 여전히 허리를 숙여 뭔가를 적고 계실 것 같다.
이들의 예배에서 중국 선교사에서 드렸던 예배가 기억났다.그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이 년을 기다리고
준비했다는 자매들, 그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삼일을 기차를 타고 왔다는 형제, 그 집회에 참석하려고,
참석하려고, 참석하려고... 히말라야 그 곳에서도 그랬다.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살을 애는 추위 속에서
삐끗하면 낭떠러지로 떨어질 비좁은 산길을 칠흑같은 어둠속에서 올라왔다 세상 가장 불편한 자세로
세상 가장 행복한 예배를 드리고 돌아가는 그들. 무엇이 이것을 가능케 하는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지만 그 즉시 가족에게 버림 받고 쫓겨났으면서도 '예수님은 가족을 잃어도 따를
만한 가치가 있는 분'이라고 담대히 말하는 목사, 그냥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하고
싶을 뿐이라고 말하는 간호사, 아이들의 육체적 필요와 영적 필요를 위해 자원해서 오지 중에 오지로 온
선생들, 자신들 부부가 이 곳으로 온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당연한 응답이라고 말하는 송어 똥
전문가 부부. 이들에게 예수면 된다. 예수 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예수 이외에도 필요한
것이 너무나도 많은 우리의 현실이 부끄럽고 그런 그들이 부럽다.
이 책은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하고 저자의 깊은 고민과 가슴 설레는 묵상의 감동을 날 것 그대로
전해 준다. 궁극적으로 그 분을 위해서, 죄에서 구원하고 가장 깊은 상처를 치유하고 영생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으로 세상에 알려져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이들이 그곳에 있다. 끝으로
저자의 당부 한마디를 적어 본다.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하고 매일을 복음의 절박감으로 살아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