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의 눈물 - 한국 사회의 갑질 보고서
이철환 지음 / 새빛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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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불공평하고 불평등하다.

고대부터 지금까지 평등한 세상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사람의 생각과 사고가 완전히

바뀌지 않는 불평등은 존재할 밖에 없다. 부의 대물림이 어김없는 사실이듯이 가난의

대물림 역시 존재한다. 이런 불평등의 사회 속에서 평등을 말하는 금기와도 같았다. 그러던

것이 어느 순간 거대한 둑에 균열이 생기더니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온다. 그래서 등장한 단어가

'갑질'이다. 이미 여기에서부터 평등하지 않다. 갑과 을이라는 명확한 신분 구조가 드러난다. 


땅의 대부분의 사람은 ''이다. 상대적일 있지만 분명 대부분은 을이고 그들은 고통스럽다.

아프다. 힘들고 지쳐있다. 어쩌면 악순환을 끊고 싶은 욕망에 우리는 '로또' 사는지도 모른다.

그래봐야 강남의 아파트 채도 사지만 말이다. 저자는 '을의 눈물'이라는 책을 통해 한국 사회의

아픔을 보여준다.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는 갑질논란과 구조적 갈등현상에 대해 적나라한 속살을

드러낸다. 

나는 특별하다는 자아 도취에서 나오는 '갑질' 출발 부터가 잘못되어 있다. 만민은 앞에

평등하다가 맞지만 법은 철저히 권력의 편이고 권력은 돈에서 나온다. 결국 법은 앞에 평등할수가

없는 구조다. 갑질의 자아도취는 병적이다. 정말 자신들이 대단하고 특별한 안다. 그리고 그렇게

왔기에 아님과 다름을 모른다. 그들의 인식 속엔 자신은 별나라 사람이다. 너와 나는 다른 족속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기에 공평과 평등은 그들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 이런 잘못된 사고 방식은 계급 문화의

산물이다.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엄격히 구분 되었던 옛날부터 존재하는 차별이다. 이때 갑은 영원한

갑이었고 이때 을은 영원한 을이었다. 신분의 변화가 거의 없이 몇백년 이상을 살다보니어느새 자신이

정말 을인줄 알게 되고 반항도 저항도 없이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우리 선조들이 그렇게 살아 왔고 우린

그것을 거의 그대로 답습한다. 


갑질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벌어진다. 그리고 그것들은 언어 폭력과 구타행위, 성추행과 성폭력, 인사상

불이익과 따돌림, 경제적 수탈행위, 노동력 착취등의 양상을 띠는데 이는 경중의 차이가 있을 우리

사회 전반적인 부분에서 자행되고 있다. 


최근 들어 갑질에 대응하는 제도적 장치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정부가 운영중인 국민신문고, 옴부즈만,

스튜어드십 코드(국민연금, 자산운용사 같은 기관투자자들이 투자한 기업에 대해 주주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함으로써 주인의 자산을 맡아 충실하고 선량하게 관리하는 집사(steward)처럼 고객의 자산을

관리하도록 하는 자율지침)등이 있고 민간 단체에서 운영하는 24시간 갑질 피해 센터, 직장갑질 119등이

있다. 물론 이런 제도적 장치들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근본적인 사람의 인식과 가치관이 변해야

한다. 어떤 제도적 장치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허점은 가지고 있고 놀랍게도 값들은 허점을 노려 그들의

'갑질' 자행한다. 


갑질의 유형은 다양하다. 개인 간의 갑질, 단체간의 갑질, 개인에 대한 단체의 갑질, 단체에 대한 개인의

갑질등 유형이 다양한데 저자는 '노조 갑질' 대해 이야기한다. 아이러니 하게도 같은 을중에서

갑과 을로 나뉜다. 거대 권력으로 성장한 노조는 노조원들 위에 군림하고 그들을 움직이며 막대한 이권을

챙기고 심지어 채용에까지 관여한다. 여기에 더해 사용자에게까지 자신들의 권력을 이용한 갑질을 하는

형편이다. 무엇보다 투명해야 노조 운영에서도 비리를 심심치 않게 발견할 있고 그들은 자신들의

성역을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 공정한 사회, 신뢰할 있는 사회와는 거리가 멀다. 사회 전반에 불신도

팽배하다. 이런 구조 속에서는 을일 밖에 없다. 을은 아무리 눈물을 흘려도 을이다. 이런 사회는

결코 건강하지 않다. 건강한 사회는 서로가 행복한 사회인데 우린 지금 너무 행복하다. 많은 이들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한다. 인성교육부터 다시 시작하고 품성교육도 하고 사람 냄새 나는

사람을 만들고 키워야 한다. 비록 지금 우리 세대가 그것을 누리지 못한다 할지라도 새롭게 시작하지

않으면 영원히 구호 속에 그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갑과 을의 간극은 너무 깊고 너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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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소망 - 바벨론 세상에서 만왕의 왕이신 예수를 바라보다 요한계시록
유기성 지음 / 두란노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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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었는가, 죽어 가는가, 아니면 진정 살았는가? P82

'오직 예수' 믿음으로 살아야 생깁니다. P241


"모든것을 버리고도 넘치는 기쁨이 있습니까?"

사실 질문은 신대원시절 이후 줄곧 나에게 물음표를 던진다. 어떤 때는 '정말 그렇다'라고 말하다가

금새 뒤돌아서면 '정말 그럴까?' 되어 버리는 '조삼모사' 나의 신앙이 부끄럽다. 저자는 요한걔시록을

묵상하면서 성령의 감동으로 많이 울었다고 하는데 나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기 어려운

때가 너무 많았다. 그런 계시록에 대해 천국 소망을 가진 사람의 심정으로 한자한자 적어 내려간 저자의

글이 그래서 더욱 기대된다. 


모든 성경의 핵심은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이다. 이것을 벗어 날수도 벗어 나서도 안된다. 특별히

요한계시록의 핵심은 예수님이다. 당시 교회는 혼란스러웠다. 핍박과 죽음의 공포가 엄습하던 시기라

어떤 교회는 속절없이 무너졌고, 어떤 교회는 세상과 타협해 다른 길로 갔고, 어떤 교회는 이단과 싸우다

사랑을 잃어 버렸고, 어떤 교회는 침묵했다. 어디서 많이 들어 상황이다. 지금 한국 교회의 현실이다.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 주님은 요한에게 자신을 드러내시며 결코 교회를 포기하지 않고 있음을,

여전히 붙잡고 계시고 끝까지 놓지 않으실 것을 보여주신다. 벅찬 감격과 두려움이 계시록에 그대로

녹아 있고 저자는 그것을 이야기 한다.

 

처음 위에 나온 질문을 대할 떠오른 것이 '천국의 비유'였다. 밭에 보화가 감춰진 것을 발견한 농부가

자신이 기진 모든 것을 팔아서 밭을 같이 기쁠까였다. 사라지고 없어질 보화를 발견했는데도

그렇게 기쁜데 정작 그것과는 비교도 없는 천국을 얻었는데도 여전히 냉랭하고 벅차오르지 않는

마음은 저자의 말처럼 '소망 없음' 아닐까하는 생각에 미치자 잠시 멈춰 서게 됐다. 우리에게 있어

천국은 무엇일까? 세상 삶이 힘들어 빨리 죽어서 가고 싶은 곳이 천국일까? 분명 아닐것이다. 믿음의

눈이 떠지고 소망으로 바라볼 있는 곳이 천국이고 이런 사람들이 누리는 삶이 천국의 삶인데 아쉽게도

우리에게 천국의 삶은 '그림의 '이다. 


요한이 소개하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1:8). 구절에는 천국 소망의 본질이 들어 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 천국이라고 말한다.

요한은 천국을 이렇게 말한다. '지금도 계시고'. 그렇다면 지금 하나님과 함께하는 , 그것이 천국의

삶이다. 현재가 강조된 것이다. 막연한 미래의 '보랏빛 ' 아니라 지금 이순간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누려야하며 지금 우리에게 미래를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래서 요한은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이 '언제'인지는 관심이 없다. 오직 '어떻게' 맞을 것인가에 집중할 뿐이다. 


우스개 소리로 신학생들이 가장 부르기 꺼려하는 찬송이 '부름 받아 나선 '(323,통일355)이라고 한다.

1절은 그럭저럭 넘기겠는데 2절에 가면 목이 메여 온다. '아골골짝 빈들에도 복음들고 가오리다 소돔 같은

거리에도 사랑안고 찾아가서 종의 몸에 지닌 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라'.  성공 일변도와 대형교회, 어느정도

재정 자립 교회를 찾다 보니(사실 부분 어느정도는 이해가 된다) 아골골짝 빈들을 가긴 가야겠는데

말고 다른 사람이 갔으면 좋겠고, 빈들에서 복음을 외쳐야 하는데 나는 목소리가 작으니 목소리

큰사람이 하면 좋겠다는 식이 되어 버렸다. 다음 가사는 더욱 심각하다. 소돔 같은 거리에 사랑 안고

찾아가야 하는데 그곳은 황폐하고 거칠고 더럽기에 도통 엄두가 안나고 주님께 받은 사랑은 어느새

슬그머니 뒤로 감춰 버린다. 몸에 지닌 조차 아낌없이 드려야 하는데 가지려 챙기려 하다보다

욕심과 탐욕으로 가득차 버린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죽도록 충성하라'(2:10) 한다. 지금도 힘들어

죽을것 같은데  말이다. 임직식이나 헌신예배에서 많이 사용하는 구절인데 많은 이들이 질문 앞에

의미없이 '아멘'이라고 대답한다. 그리고는 잊어버린다. '죽도록'인데 '적당히' 되어 버린다. 죽을

각오로 해야 하는데 대충대충 시늉만 한다. 없이 많은 집회에서 수없이 많은 이들이 '헌신' 다짐하고

서원하지만 정작 현실은 지금이다. 매주 벌어지는 집회의 현장에서 두손들고 무릎꿇고 눈물 흘리며

소리질러 주님을 사랑한다고 외쳤지만 그때 , 여전히 우린 제자리다. 저자가 소개하는 전도하다가

공안에게 체포돼서 일년 동안 옥살이를 중국교인의 말이 가슴을 찌른다. '억울하긴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섰다면 당연히 감사히 해야죠' 당연하고 감사한게 맞는데 이렇게 우리에겐 낯설게

들리는지 모르겠다. 언제부턴가 우리에게 '고난의 영성' 다른 나라 이야기가 되버렸다.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은 운명도 팔자도 아니고 자원하여 가는 길이다. 히브리서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은 믿음으로

고난을 자처한 이들이며 끝까지 길을 걸었던 이들이다. 그들의 삶이 바로 '죽도록 충성하라'이다. 

'실상은 죽은 것이다'

교회에는 많은 이들이 나온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흩어져 세상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정작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을 찾아 보기 어렵다. 많은 이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주님은 사데교회를 향해 '너는

살아 있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사실 사데교회는 버가모교회나

두아디라 교회처럼 음란하고 세상 풍조에 물들고 방탕하고 우상 숭배를 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위사람들에게 '믿음이 좋다', '열심이 있다', '모범적이다' 칭찬을 받았다. 그런 사데 교회에 주님은

'나는 행위를 안다' 말씀하신다. 세상이 보는 눈과 주님이 보는 눈은 분명 다르다. 세상은 속일

있을 몰라도 주님을 속일 수는 없다. 마치 바리새인처럼 '회칠한 무덤'이요 '독서의 자식'이요 '위장의

달인' 그들의 중심을. 아니 우리의 중심을 보시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내가 행위를 안다'" 우리의

모습도 이와 같다. 자신들만의 잔치에 취해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우리, 위장과 기만에 능하다 보니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우리, 그러나 정작 주님 앞에 설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7:23)하는 말씀을 들을까 두렵다. 

이런 우리에게 주님은 친히 말씀하신다. '내가 행위를 안다'

내용이 하나님 앞에 펼쳐진 책들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고 그것으로 심판을 받는다. 옆에 하나의

책이 있는데 '생명책'이다. 여기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은 마지막 심판을 받지 않고 영생을 얻는데

방법이 아주 쉽고 간단하다. 자신이 지은 죄를 진정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이 자신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음을 믿고, 예수님을 영접하면 된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생명을

가졌다는 말이고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다시말해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고 그와 함께 살아간다는 말이다. 이것이 '천국 생활'이다. 

이런 사람은 기쁨으로 '아멘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담대히 말할수 있는 것이다. 


책은 요즘 '다시 마주하는 십자가' 모임에서 신앙의 재기전을 펼치고 계시는 장로님들께서 읽어 보시면

좋을것 같다. 평생을 교회와 함께 하셨지만 어느새 식어버린 열정과 무뎌진 심장을 다시 뛰게 하시려고

부단히 애쓰시는 그분들에게 도전과 소망을 것이라는 생각에 다음 모임에 선물로 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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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를 말하다 - 이규현 목사의 목회론
이규현 지음 / 두란노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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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성건성하는 목회는 안됩니다. P44

그리스도께 집중하십시오.  P38


책을 접하며 겁이 났다. 나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도 생겼다. 그러면서

편으론 '다시 일어섬' 떠올랐다. 다시 일어섬은 기대를 갖게 한다. 회복이며 앞으로 나아감이며

간절함을 가지기에 두려움과 설레임으로 기대하게 된다. 그런 기대감으로 책을 대한다. 


목회자는 복음 장사꾼이 아니라 진리를 살아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이어야 한다.'

책의 뒷면에 나오는 글귀에 한참을 책장을 넘기고 멍하게 있었다. '복음 장사꾼', '진리를 살아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 나는 어디에 속하는 사람일까. 알량한 지식 복음을 무기로 주님이 내어쫓는

자리에서 성도들을 착취하며 등골이나 먹는 파렴치한 목회자인가 아니면 자신의 등골마저

내주면서도 기쁨으로 길을 걸어가는 치열한 목회자인가 잠시 동안 깊은 생각에 빠졌다. 


목회는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다. 무슨 재주를 피운다고 해서 되는 일이 결코 아니다. 목회는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여기까지가 전형적인 목회론이다. 목회자들은 누구나 부흥을 꿈꾸며 기대한다.

하지만 부흥은 쉽지 않다. 애둘러 영적 부흥을 말하지만 이건 어렵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버티기

싸움을 하는 중이고 사실 이마저도 지는 싸움을 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한국 교회를 지탱해온 목회론이

뿌리채 흔들리는 시대를 살고 있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목사스러움' 아닌 '목사다움' 관건이다.

목사가 목사여야 하는데 세상과 별반 다르지 않고 때론 성도들 보다도 못한 때가 많다. 이런 위기 속에

목회자는 점점 고립되고 결국 선로를 이탈한다. 그냥 목사면 목사다우면 되는데 꾸미고 변장하고

포장하느라 정작 자신의 신분 마저 망각해 버리는 때가 너무 많다. 


부터 강력하다. 모두가 주인공이길 원하는 시대에서 '나는 주인공이 아닙니다' 선포한다.

고백을 진심으로 있다면 적어도 가능성은 살아 있는 것인데 진심과 진정을 찾아보기 어렵다.

고백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담겨있다. 먼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나는 주인공이 아니고 주인공을

드러나게 하는 존재이다. 주인공이 주님이시기에 우리는 오직 주님만 드러내면 된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주인공은 한명이면 족하기에 내가 드러나면 순간 주인공은 죽게 된다. 다시 말해 목회,

교회가 드러나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죽는다. 성공 일변도의 목회를 지향해온 우리에게 말은

사형선고와도 같다. 그러나 죽어야 산다.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죽어야 그리스도가 영광되게 사시는

것이다. 사도 요한이 고백한 '그는 흥하여야겠고'(3:30) 정답이다. 안에 십자가의 도가 있고

들러리 영성이 있다. 

성장에 빠져 방법론의 귀재는 되었을지 몰라도 신학이 없기에 소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제대로 듣지

못한다. 그러다보니 점점 말씀을 대하는 시간이 줄어 든다. 그렇게 좋아하는 커피를 마시는것 만큼,

자신의 몸을 단련하기 위해 하루도 빼먹지 않는 운동 만큼, 의미 없이 웃고 떠들며 보내는 황당한

교제 시간 만큼만 말씀을 가까이 해도 말씀의 질이 바뀔것인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너무 바쁘다.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 '천천히, 천천히 성경을 읽으세요'라는 말이 떠오른다. 

"뭣이 중헌디"

사역한다면 현장에 있어야 한다. 말로만 때우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부딪치고 움직여야 한다. 의미없이

'기도해 드릴게요' 아니라 죽을 힘을 다해 기도해야 한다. 교인들의 삶에 조금 깊이 들어가야 한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안주하고 만족하지 말고 깊은 곳에 들어가 그들의 내면을 보아야 한다.

알량한 심리학이나 상담학의 학문적 접근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읽고 위로하고 감싸주어야 한다.

속에서 겸손함을 배워야 한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서 주님만 붙잡고 의연하게

살아가는 그들의 앞에 겸손해질수 밖에 없다. 경쟁하고 의식하고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열심을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에게 집중해야 한다. 


'십자가를 지켜라'

십자가를 잃어 버리면 보상과 격려를 바라게 된다. 십자가는 ' 내어줌' 상징인데 십자가를

버리면 자기것과 내것을 찾게 마련이다. 십자가로 돌아가면 안전한데 무겁다고 거추장스럽고

힘들다고 자꾸 십자가를 벗고 세상을 활보한다. 세상과의 전투에 필요한 갑주를 모두 벗고 맨몸으로

세상과 부딪치니 밖에 없다. 이미 주님이 이겨 놓으신 전쟁에 나가서 맨날 패배만 맛보니 삶은

힘들고 우울하다. 십자가를 잃어 버리면 모든 사역이 일이 된다. 은혜에 감사해서 드리는 헌신이

아니라 받고 하는 일이 되다보니 건성건성 대충대충이다. 건성건성해서는 아무것도 없다.

복음의 변화 앞에서 목회자가 먼저 서야 한다. 그래야 십자가로 돌아갈 있다. 


예전에는 엉덩이가 공부를 했다. 그래서인지 책상에 오래앉아 있던 대부분이 공부를 잘했다. 책에서

오랜만에 말을 만난다. '목회는 엉덩이로 합니다' 설교를 이야기하면서 저자는 목회자들의 노력에

대해 이야기 한다. 완성된 설교를 위해 얼마의 시간을 투자하고 있으며 얼마나 준비하고 있는가에

대해 말하며 '굉장히, 오랫동안' 강조한다. 홀로 준비하는 고독을 받아 들여야하며 고독을 즐겨야

한다. 설교는 쉽게 하는 것이 아니고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영적 고통과 고민과 깊은 묵상을

통해 탄생되는 생명이다. 설교에 생명이 없으면 설교자는 자신을 잃게 되고 듣는 이는 감동을 받지

못한다. 자기 스스로에게도 자신이 없는 설교를 성도들에게 수는 없다. 생명을 불어 넣는 작업이

묵상이고 기도고 연구다. 그러기 위해 목회자는 끊임 없이 공부해야 한다. 목양실 책장을 가득 채운

기선 제압용 전시가 아니라 한권 한권을 통해 얻어내는 귀중한 결실들을 설교로 연결하는 공부를

해야 한다. 생각하는 힘을 길러 사고의 폭을 넓혀야 하며 성경이라는 마르지 않는 샘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물을 길어 올리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러려면 엉덩이의 도움을 받아야 하며 스스로의 임계점을

돌파하는 '영적 폭발' 필요하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마음의 근육'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목회자에게는 무엇보다 '영적 근육' 키워야 한다. 그래야 버틸 있고 견딜 있다. 


책은 나를 포함한 모든 목회자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특별히 영적 매너리즘이나 무기력에 빠진 분들이

읽으면 좋겠다. 어깨를 짖누르는 계급장 떼고 처음 신학교 들어 갔을 때를 기억하며 진지하게 읽어

보면 좋을 같다. 최소한 나에게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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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讀 기記 행行 다이어리 - 읽고 쓰고 행동하면 인생이 바뀐다!
유근용 지음 / 코쿤아우트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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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읽고, 쓰고, 행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대체로 읽기까지는

능하다. 그러나 쓰기부터는 엄청난 의지와 노력을 필요로 한다. 하기만 이것도 쓰기까지만이다.

행동 한다는 것은 여기에 용기와 인내를 수반해야만 가능해진다. 솔직히 이렇게 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고 이렇게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느분야에서든 리더들이다.


상상 속에서나 가능했던 일들을 정리하고, 체계화하고, 그것을 통해서 현실을 마주하는 , 어쩌면

저자가 말하는 '절박함' 이것을 가능케했을지도 모른다. 절박함은 사람을 긴장시키고 긴장이

강한 폭발력을 가질때 현실이 된다. 주어진 삶에 끌려 다니는 수동적 삶에서 삶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능동적 삶으로의 변화 시작은 발상의 전환에서 출발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자신도

했으니 우리도 있다고 강조한다. 


'습관'

어떤 행동을 일정기간 반복하면 습관이 된다고 한다. 책의 내용은 십여 페이지에 불과하다.

짧은 만큼 간결하고 강조하는 바가 분명하다. 저자는 '습관'이라는 단어를 언급하지는 않지만

책의 내용을 단어로 정리하면 '습관'이다. 읽기부터 습관을 들이는 것이다. 날마다 꾸준히

읽어 나가는 것이다. 한장이라도 좋고 권이라도 좋다. 분량의 문제가 아니라 꾸준함의 문제이다.

이렇게 읽는 내용들이나 생각나는 것들 혹은 자투리 시간을 보낼 킬링 타임용 글자라 할지라도

보는 습관을 들여 보는 것이다. 처음에는 낯설고 힘들겠지만 어느정도 익숙해지지 시작하면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펴고 깊은 생각의 샘에 빠질 있게 된다. 이것은 시간 낭비가 아니라

자신의 것을 축적하는 지혜의 샘이 된다. 이를 토대로 해야할것과 하지 말아야 할것이 구분되며

우선순위가 결정된다. 


이제 남은 것은 '실천'이다.

실천에서 중요한 것은 'Retry'. 세워둔 계획과 목표가 달성되지 못했다 하더라도 실망할 필요가

없다. 다시 목표를 세우고 다시 실천하면 된다. 뒤에 땅이 단단해 지는 처럼 다시

시도하면 그만큼 수월해지고 멀리 있다. 저자는 이를 대나무의 성장에 비유한다.

대나무가 한마디 한마디 성장하듯 우리의 실천력과 의지도 한단계씩 성장할 것이다. 


모든것에 앞서서 해야 것이 있다. 지금의 자신의 모습에 대한 점검이다. 자신과의 점검이니

감출것도, 숨길것도, 보탤것도, 뺄것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밝혀야 한다. 그래야 다음이

가능해진다. 지금 현재 모습을 통해 미래의 나를 발견하게 되고 나아갈 지향점으로 설정할

있으며 정확한 목표 수립이 가능해진다. 변화를 꿈꾼다면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발견해야 한다. 


시작은 어렵다. 그러나 한걸음 한걸음 내딛다보면 어느새 만치 앞서 걸어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것이다. 지금 바로 시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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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과 신호 - 당신은 어느 흔적에 머물러 사라지는가?
윤정 지음 / 북보자기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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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학문적 스펙트럼은 넓고 다양하다. 정신분석상담학자이면서도 자신의 수업은 철학,

회학, 윤리학, 심리학, 정신분석학 이외에도 물리학, 분자 생물학, 세포학, 면역학등의 기초적

개념을 필수적으로 이수해야 한다는 광오함에 ' 그렇게까지'라는 나의 생각은 이내 그래야

한다고 설득당한다. 이렇듯 현상적인 학문에 비중을 두는 이유는 우주의 현상과 우리 몸의 세포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다르지 않음에서 기인한다. 저자는 책을 인간의 사유와 존재에 대한

역사적 흐름을 바라보고, 우리가 어디에 머물고, 걸어가고, 사라지고 있는지에 대한 성찰적 힘을

키우기 위해 저술한다고 밝힌다. 책에는 39명의 물리학자, 철학자, 정신분석학자등이 등장하며

이들을 추적하여 흔적, 신호, 정보, 시선의 갈래를 통해 증명해 나간다. 


시대 속에서 고민하며 번민하는 그들의 삶은 정보적 신호로 남아 지식으로 우리에게 전달 된다.

신호란 시대를 변화시킬만한 의미와 기호라 있다. 광대한 우주 우리는 하나의 점도

되지 않는 무의미한 존재이면서 유일한 하나로서 가치를 가지는 유의미한 존재들이다. 물론 아직

우리는 무지하고,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존재이다. 그래서 적어도 아직까지는 아름답고 모든것이

가능한 존재이다. 


'삶은 쉼표, 느낌표, 의문표 사이에서 마침표를 찍지 않는다.'

그렇다. 삶은 순간이라는 점의 연속이다. 그리고 점은 끊임없이 이어지며 죽음 이후에도 다른

사람의 기억 속에 살아 존재하기에 우리는 '지금' 살아내야 한다. 버겁다고 포기하지 말고,

힘들다고 돌아서지 말며 당당히 세상앞에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 우리는 그렇게 세상 속에 시선을

맞추며 산다.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아는 존재는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존재보다 나은 존재이다.

그를 통해 성숙해지고 현명해질 기회를 갖게 되어 진리에 다가 설수 있다. 진리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초월해서 가질 있는 유일한 것인데 사람들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도달하지

못하는 진리를 찾고 있다.


상상의 간증은 실제를 억압하는 유일한 독재자의 모습이라 말하는 저자는 '있다' 존재와 '없다'

사유의 구획이 없는 그곳은 새로운 맑은 바람이 머무는 영원한 안식처라고 말한다. 그곳에는 모든

생명의 어머니가 머문 흔적이 남아 있다. 그곳은 태고의 순결함과 정직함이 깃든 곳이며 거역할

없는 진리가 숨쉬는 공간이다. 


'우리는 불완전하기에 모든것이 가능하다.'

불완전은 완전으로 나아갈 가능성이다. 비록 개념은 석양의 아름다움에 관심이 없지만 불완전한

우리는 석양의 아름다움에 빠져 잠시라도 시간을 멈춰서 그것을 누린다. 그러나 이내 석양은

다른 불완전함을 채우려 사라진다. 텅빈 어둠의 본질을 깨닫는 불완전한 우리는 다시 개념의

노예가 되어 완전함으로 치닫는다. 나타났다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는 모든 것들은 아무것도 담을

없는 구멍난 냄비 같은 우리를 위해 그대로 흘러 내린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Werner Heisenberg,

1901-1976) 의해 등장한 '불확정성의 원리'처럼 우리의 삶은 어느것 하나 정해진 것이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무엇이든 있는 가능성을 가지는 것이다. 가로등빛 사이를 걸어가는 사람이 가로등 불빛

아래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다음번 가로등 아래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통해 '전자의 역동성'

대해 깨달은것 처럼 우리는 불확정함 속에서 확정된 무언가를 끊임없이 발견해 나가는 존재들이다.

하이젠베르크의 양자역학 속에 입자와 광자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지 않는다. 다만 사물이

어떻게 나타나고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만 기술한다. 이처럼 삶은 우리에게 내가 어디에 있는지 묻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을 어떻게 다른것에게 드러내는지를 말하는 존재다. 모든 삶속에 존재하는 결여와

소외는 우리의 속에 존재하는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모든 물음은 소외와 결여의

빈공간으로 향한다. 


어렵다. 정말 억지로 겨우겨우 읽었다. 지적 자유의 충만함이 최고조에 달한 쏟아 내는 언어의

유희와 지식의 분출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럼에도 책은 번이고 읽어 충분한 가치를

지녔다.

'흔적은 상상을 낳고, 신호는 의미를 낳아 우리의 존재를 성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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