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가 이긴다
이재훈 지음 / 두란노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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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에 만연한 병폐중에 하나가 "은혜"가 아닌가 싶다.

은혜란 '하나님의 불변의 사랑이며 과분한 혜택'인데 그 주체는 분명 주는 사람에게 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주체가 받는 사람 즉 본인으로 바뀌어서 본인에게 이익이 되면 은혜고

손해가 되거나 피부로 와 닿는 것이 없으면 은혜를 받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큰 은혜는 구원임에도 이것에 대해서는 망각하고

다른 현실적인 무언가를 기대하는 어리석음 마저도 가지고 있다.

저자는 작금의 이러한 상황을 조목 조목 설명한다.

그중 눈길을 끄는 구절이 있다.

새벽이 오는 것과 봄비는 일정하며 변함이 없는데 이와같이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고 일정하다는 말이다.

예전에 어느 정치인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라고.

그렇다. 아무리 막으려해도 새벽은 찬연한 태양과 함께 변함없이 오게 마련이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이 아무리 막으려하고 피하려 해도 온다.

결코 그분은 자신의 선택과 행동에 후회하심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의 조급함과 맘몬은 그 은혜의 절대적 가치를 상실하고 망각한다.

점점 기복신앙으로 빠져 모든 은혜의 척도가 자신이 되어 버렸다.

그러다 보니 타인의 유익이나 그의 나라와 그의 의는 존재를 찾을수 조차도 없다.

말로는 무소부재하시는 하나님을 부르며 정작 그분의 존재를 잊고 살아 가며

자신의 눈을 가린채 주님을 찾는다.

호세아 6:4의 말씀처럼 주님은 여전히 우리를 향해 "내가 무엇을 해줄까?하고

말씀하고 계시는데 우리는 눈과 귀를 꼭 막은채 여전히 "주님 나를 도와주세요"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우리의 신앙을 향해 눈과 귀를 열고 온 몸으로 반응하라고 촉구한다.

그렇다. 우리에게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들으려는 자세가 필요하다며 진정한 은혜가 무엇인지 발견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는 겸손한 그런 신앙인들이 많아 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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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을 위한 오늘의 기도 -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아홉 가지 기도
김형준 지음 / 두란노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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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아주 잘 하는 말이 하나 있다.

"기도해야죠."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아닌 자신혹은 자신과 관계된 번영과 나음과 명예등을 위해
서슴없이 기도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저자는 이러한 우리들의 기도에 대해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인 주기도문을 통해
바른 기도의 모습을 알려준다.

그분 앞에서 나라는 존재는 분명 죽었음에도 여전히 나를 주장하고
그분 앞에서 이미 주인이 아닌 종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주인 행세를 하려고 하는
우리의 거짓과 위선의 신앙에 대한 저자의 목소리는 단호하다.
"하나님 앞에서는 나라는 주체가 없습니다."
많이 들어 본 소리다. 강단에서 성경공부를 통해 혹은 개인적인 권면을 통해
아마 수도 없이 들어봤을 소리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의 삶에 주인이 누군지 묻고 싶다.
하나님이 주인이라고 하면서 여전히 우리는 내 의지와 이성이 더 강하다.
내 마음에 들면 주님의 뜻이고 내 마음에 안들면 나와 관계없는 소리가 된다.
그러면서 여전히 우리는 주님을 부른다.
요즘 한국교회가 지탄과 염려의 대상이 되어 버린 이유도 여기에 있는것 같다.
내것이 아닌데 내것인양 가지려하고 챙기려 하다 보니 욕심만 많아진 결과인 것이다.
세상을 향해 뻗어야 할 손이 자신의 주머니로 향하다 보니

나눌것도 베풀것도 없어져 버렸다.

그래서 세상을 걱정하고 염려하며 기도하던 교회가 세상의 걱정거리가 되어버린것이다.
이제 다시 주인에게 돌려 드려야 하지 않을까?
달란트를 맡기고 출타했다 돌아온 주인에게 다시 돌려 드린 종들처럼
우리 스스로 차지했던 주인의 자리를 진짜 주인에게 돌려 드려야 할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목 놓아 부르지 않았는가.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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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에 죽고 예수와 살다 - 종교 게임을 끝내고 사랑을 시작하다
스카이 제서니 지음, 정성묵 옮김 / 두란노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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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인인가 신앙인인가라는 주제를 가지고 열띤 논쟁을 벌인 기억이 있다.

그때 주로 나눈 이야기는 왜 우리는 종교라는 틀을 만들고 
그 안에서 그것이 진리인양 믿고 따르고 숭배하는것인지에 대해서이다. 
우리는 교회라는 건물안에 존재하는 종교인인 경우가 너무 많다. 
그러면서 약간의 움직임으로 마치 대단한 신앙을 소유한 사람인것처럼 으시대기도 한다. 
저자는 이러한 우리의 모습을 분명하게 지적하며 두권의 성경에서 자신이 싫어하는 
부분을 제거하고 단 10% 정도의 성경만을 남긴 토마스 제퍼슨 대통령의 일화를 소개한다. 
우리도 그렇지 않을까? 내가 좋아하는 부분은 취하고 나에게 조금은 거슬리는 부분은 
마치 다른 사람을 향한 소리인양 흘려버리는 그런 편협한 신앙을 가진 종교인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지극히 자기 중심적이며 지극히 이기적인 신앙으로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하나님을 재 창조하고 있지는 않은가?
말씀도 기도도 찬양도 심지어는 봉사도 자기 입맛에 맞는 것만 취하는 현실의 교인들을 보면 
저자의 자판기식 예배라는 표현이 적절하기까지 하다. 
자판기를 생각해 보자. 자기가 원하는 품목을 고른다. 그리고 그 품목에 맞는 현금을 투입한다.
그러면 어김없이 자신이 원하는 물건이 나온다. 그대로 우리의 예배에 대입해 보자.
내가 원하는 말씀만 듣는다. 그리고 거기에 적당한 헌금이나 봉사를 한다. 
그러면 나는 훌륭한 신앙인이라는 우월감에 빠진다. 
별반 다르지 않다. 
그래서 저자의 일성인 "같이 살고 싶어서 오신 예수"라는 구절이 마음에 위안이 된다.
주님은 우리와 같이 살고 싶어서 오셨다. 
멀지감치 떨어져서 구경하기 위해 오신것도 아니고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며 한없이 걸어가는 그런 삶을 위해 오신것도 아니고
우리와 함께 숨쉬고 함께 먹고 마시고 잠자고 그렇게 살기 위해 오셨다. 
그렇게 오신 주님을 누리면 된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함께 살자"라고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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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도하는가?
조정민 지음 / 두란노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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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을 가진 사람은 기도한다. 그러나 교회만 다니는 사람은 기도하지 않는다.

믿는 사람은 기도한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기도하지 않는다.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무엇을 구하고 무엇을 바라며

무엇을 소망하는가 이다.

세상의 것을 구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 조차도 기억하지 못한채

그것이 마치 전부인양 그것을 구하면서 기도한다라고 말한다.

물론 우리는 세상에 살기에 그것 역시 중요하다. 그러나 근본적인 목적이 틀리다.

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이 구하는 것은 분명 다르다.

눈 앞에 있는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올것들에 대해, 우리를 향한 그분의 계획을

향해 구한다.

요즘 많은 분들이 기도를 잃어 버렸다고 말한다. 기도하고 싶은데 기도할 수가 없고 

기도가 안된다고 한다.

이에 대해 저자는 단호하다.

믿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고 우선순위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우리는 믿는다고는 하는데 믿음을 잃어버린 사람과 같은 행동들을 한다.

눈에 보이는 것이나 겨우 믿으려하고 그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믿음 조차 가지려

하지 않는다.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을 그렇게 강조하셨건만 우리의 나약한 믿음은 그러한 말씀 조차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면서 믿는다고 말한다. 모순이다.

기도는 주님과의 대화라고 주문을 외우듯 말하지만 정작 언젠가 TV에서 했던

개그 프로처럼 대화가 없다. 가족인데 연인인데 친군데 대화가 없다.

왜인가?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호기심도 관심도 아무런 기대도 없기에 대화가 필요 없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의 문제인것 같다.

그런데 감사하고 다행인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를 향해 계신다는 것이다.

듣기를 원하시고 이야기하기를 원하시고 함께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이 사랑이 결국 우리를 살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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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피心 - 창세기 4 김양재의 큐티 노트
김양재 지음 / 두란노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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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우린 넘어집니다. 오늘 하루 또 실수 합니다."라는 찬양이 있다.

날마다 살아 가면서 넘어지기도 하고 실수하기도 하고 힘겨워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날마다 살아 내야 하기에 우린 주님을 의지 할 수 밖에 없음을 노래한다.

그렇다 우린 그렇게 연약한 존재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겐 누군가의 보살핌,

내지는 은혜가 필요한 것이다.

저자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 그러한 살피심을 이야기 한다. 때를 기다리기도 하고

좌충우돌 부딪히기도 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통해 우리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되기도

한다.

책을 읽으며 유난히 눈길이 가는 대목이 있다.

교회 홈페이지에 올라온 글을 소개한 것인데 '여기가 바닥이다 더이상 내려갈 곳이

없다라는 글을 보고 힘을 냈더니 또 지하가 있어서 다시 한번 힘을 내서 억지로 버텼는데 계속해서 지하 2층과 3층이 나와서 그 끝없는 고난에 몸과 마음이 마치 총 맞은것 처럼 아팠다'는 글이다. 그러면서 아브라함과 연관지어 말한다. 자녀를 준다는 말만 믿고 기다렸는데 24년간이나 주시지 않는 하나님. 과연 우린 이 약속을 얼마나 붙잡고 기다릴 수 있을까? 요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질문에 아주 자랑스럽게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한다. 하나님이 약속 하셨으니 당연히 기다리죠라고. 솔직히 두렵다.

그 상황에 처해 보지 않은 사람은 그렇게 자신있게 말 할 수 있겠지만 막상 현실로 맞닥뜨린 사람은 조심스러워지고 두려워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러한 두려움 조차 버리라고 하시고 믿으라고 하신다. 여기서 우리의 믿음이 결정되는것 같다. 무언가 눈에 보이는것, 드러나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그 자체를 믿고 신뢰하라는 것이다. 무엇을 해주셔서 믿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 이러한 저러한 유익이 있어서 믿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기에 믿는 믿음 그런 믿음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 같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이다.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렘3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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