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1 코기토 총서 : 세계 사상의 고전 1
장자 지음, 이강수.이권 옮김 / 길(도서출판)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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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강남 譯本과 안동림 譯本을 읽었었지만, ‘이강수, 이 권’의 공역본이 훌륭하다는 기사를 보고 다시 일독을 했다. 오강남 본은 내편 전부와 외편 잡편 중 발췌한 부분을 엮은 것인데, 현대어에 맞추어 쉽고 정확하게 번역되어 있다. 읽기에 가장 편하다. 그리고 각 부분 해설이 있어 유익할 수도 있지만 내게는 오히려 거슬리는 부분이 많았다. 서양 철학과 사상 등을 비교 설명하는 부분이 많기도 하여 글의 핵심을  향해 가는 것을 방해 받는 느낌이었다. 안동림 본은 내,외,잡편의 완역본으로, 각 편 한자에 대한 주를 친절하게 달아 놓고 직역 중심으로 하되 [ ]부분에 의역적 요소를 넣어 독자의 이해를 구했다. 가장 편하고 정리가 잘 되는 독서였다. 
 

 그런데 이 번의 이강수 본은 생각보다 별로였다. 각 부분 역자 주를 치밀하고 정확하게 달아놓아 학문적 성취를 이룬 것은 같은데, 우리 글의 번역이 매끄럽지 못하고 가독성도 떨어진다. 직역 중심으로 한 것 같은데, 읽고도 그 뜻을 정확히 취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한자를 그대로 번역한 것도 있고, 문장이 자연스럽지 못한 것도 있고...  . 원래 장자 글이 그렇더라도 한글 독자들이 그 뜻이 알 수 있게 하는 것이 번역 아니던가.  기대했던 것에는 한 참이나 못 미치는 책이었다. 더욱이 내편만으로 22,000원이라니! 너무 하지 않은가! 외편과 잡편을 다 사면 6만원을 넘지 않겠는가.  인쇄된 부분보다는 인쇄되지 않은 흰 종이부분이 더 많아 (독서의 용이함을 살렸다고 하기에는 너무 용렬하고 그래도 비싸다!) 이 책의 가격 책정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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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라리요 2024-10-09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강남 역 장자를 즐겁게 읽었는데 다음권으로 안동림 역으로 해도 될까요? 안동림 역은 리뷰를 찾기가 힘드네요.
 
서양미술사 (반양장)
E.H.곰브리치 지음, 백승길 외 옮김 / 예경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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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향유한다는 것은 나름의 지식과 경험에 바탕 하여야 한다.  예술을 직업으로 하는 창조적 작업은 물론이거니와 그 작품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수용자도 일정부분 그 예술의 語法을 익혀야만 가능하다.

 원론적으로 ‘우리 삶 자체가 예술’이라느니,  ‘고급 예술과 대중 예술의 구분은 없다’는 포스트 모던적 모토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예술은 그 장르만의 관점과 해석의 작동 방법이 분명 있다.  누구나 현대무용, 오페라, 발레 같은 예술을 즐길 수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는 그 예술들이 대중적 접근을 하지 못한다는 계급적 특징도 있지만, 역으로 대중에게 접근하기 힘든 양식적 요소가 분명 있음을 역설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모두가 예술작품을 즐기지만 무엇이 ‘뛰어난’ 예술적 성취인가는 또 별개의 영역으로 남는 것이다.

  ‘미술’이라는 장르를 어떻게 이해하고 즐길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내게 등대 같은 길잡이가 되어 준 책이 Gombrich의 ‘서양 미술사’이다. 내가 미술을 모른다는 사실에 기초하여, 최소한 ‘미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미학적 정리가 필요한 때에 이 책을 알게 되었다.

 1950년대에 최초로 출간되어 32개 국어로 번역된 서양미술사의 고전으로 선사시대동굴벽화부터 시대와 양식, 작품명이나 작가들 이름에 따라 정리하고 각 사회문화와의 상관관계를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미술 ‘작품’이라는 것이 그 시대의 사회적 상황과 맞물려 돌아가고 있음을 날과 씨로 짜서 보여준다는 것이다. 즉 미술과 사회사의 관계를 작품 창조와 이해의 일관된 관점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작품의 양식’과 ‘사회적 양식’의 관계를 얽고 있어서, 이 책을 정독한 후 미술이라는 것이 굉장히 친근하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미술(Art)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라는 도발적 문장이 始終 이 책을 관통하고 있다.

 그럼에도 저자가 책의 끝에 밝힌 것처럼 현대미술의 다양한 실험양식에 대해 일정부분 곤혹스러운 면을 내비치는 것에 이르면, 나 같은 문외한은 현대미술에 더더욱 소원해질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문학이나 음악과는 또 다르게 분명 미술은 아직 대중과는 친숙한 단어가 아니다. 우리는 이미 도처에 너무 친숙하게 ‘미술 속에서’살고 있건만, 이를 깨닫지 못하고 저 다른 곳에 미술을 찾다보니 그런 것은 아닌지.

 질 좋은 외제 화보집은 비싸고, 단행본 출간은 대중적 작가들에게만 집중되고, 그나마 시공사나 한길아트에서 출간된 책들은 미술을 ‘설명만’하고 있어 무척 곤혹스럽다. 그나마 재원출판사 시리즈가 손에 맞는다.  

  언제 눈 밝은 문화인(?)인 되려는지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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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 개념의 비판 - 데리다.라캉.알튀세.푸코, 20세기 문명연구총서 14 20세기문명연구 총서
윤효녕 외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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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 철학은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이들 데리다, 라캉, 알튀세, 푸코는 소위 후기 구조주의자들로 불린다. 이들의 주목할 만한 공통점이 ‘주체’의 문제이다. 근대철학에서 주체란 ‘사유주체의 절대주체’인데 반해, 이들에게서는 ‘타자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주체’이다. 즉 주체는  ‘나’의 바깥에 의해 ‘구성되어지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특히 이들은 구조주의적 방법을 사용하기에 언어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지은이들은 이들 4명의 후기 구조주의자들이 근대적 자기 동일적 절대 주체를 해체하면서도 주체의 절대부정이라는 위험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는 이중의 의식을 갖고 있다고 하지만 그런 구체적 성과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이 책은 4명의 후기 구조주자들의 사상을 ‘주체’라는 코드로 기존의 내용을 정리 설명한 것일 뿐 더 이상의 학술적 진전도 없고, 새로운 담론의 예지도 없다. 기껏 각 장의 말미마다 이미 확인된 4명 사상가의 한계를 언급한 것을 마치 저자의 새로운 업적인 것처럼 치장하고 있다. 시중에 유통되는 정보를 조합 가공한 것에 불과하다. 이 책이 연구비 지급에 따른 합동 저작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이 정도 수준이라는 것이 안타깝다.

  이 책은 4명의 후기 구조주의자에 대한 기본적 지식이 있어야 읽을 수 있기에 초보자의 입문서로는 적당하지 않고, 그렇다고 새로운 내용도 없기에 수준 있는 공부도 되지 않는다. 참으로 어정쩡한 책이다. 단지 각 철학자들을 ‘주체’의 코드로 정리하는 정도로 만족해야 한다. 제 3장 라캉과 제 5장의 푸코 편은 그들 사상의 정리 차원에서 읽어볼만 하다. 제 2장 데리다는 보통이다. 제 4장 알튀세 부분은 정리 자체가 잘 안고 심지어 지은이가 핵심을 알고나 있는지 의심스럽다. 제 6장 부분은 굳이 읽지 않아도 된다. 6장은, 5장까지 정리한 반휴머니즘적 주체형성의 대척점으로 몇몇 사상가를 소개, 비판하는 장으로 할애했다. 이는 자신들이 서두에 밝힌 주체의 절대부정의 위험에 빠지지 않겠다는 언급에 대한 해결책쯤으로 제시한 것 같은데, 이도 지은이의 연구가 아닌, 기존 사상가를 아주 간략히 소개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연구를 대신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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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시와 처벌 나남신서 29
미셸 푸코 지음, 오생근 옮김 / 나남출판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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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셸 푸코, 이미 고전이 되어버린 철학자를 다시 읽는다.  『말과 사물』의 충격 이후 ,  내게 그는 니이체 이후 내게 가장 흥미로운 책읽기가 되었다. 『감시와 처벌』은 가장 대중적인 책이지만 , 이제야 이 유명한 책을 완독하게 되었다. 
  다른 저서들에 비해 읽기가 수월하고 말하고자하는 바도 명확하다. 번역도 잘되었다. 다만 제 4부 <감옥> 부분은 번역의 매끄러움에 문제가 있다. 공역자였던 ‘이규현/김무경’의 초고를 다시 오생근이 손질한 것 같은데, 문장이 명확하지 않다. 내용면에서도 제 4부는 없어도 괜찮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푸코는 권력이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권력은 어떻게 행사되는가? / 권력과 지식간의 관계를 문제 삼는다. 이 책에서 <규율/처벌>의 담론에서 권력과 지식간의 관계를 분석하는데, 감옥/공장/학교/군대 등이 기본적으로 동일한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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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놉티콘- 정보사회 정보감옥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63
홍성욱 지음 / 책세상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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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푸코를 읽다가, 벤담의 원형 감옥과 감시 세계에 대한 것으로 가볍게 이 책을 집었다.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 제레미 벤담이 1791년 제안한 원형 감옥인 파놉티콘은, 그리스어로 ‘다 본다’는 ‘Pan(All) + Opticon(Seeing)’의 합성어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는 시선의 비대칭성으로 피감시자가 스스로 감시의 내면화 기능을 수행하게 하여 효율적 감시 체계를 구축한 감옥이다. 푸코는 이 파놉티콘이 18C 이후 사회 전반의 통제와 규율의 원리로 확산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벤담의 파놉티콘을 연구한 학자에 의하면, 푸코가 파놉티콘을 상징적인 메커니즘으로 변형시키는 과정에서 해석의 오류를 일으켰다고 한다. 벤담의 원형 감옥은 하난의 계획안으로만 존재하여, 18C ~19C 동안 파놉티콘의 핵심적 요소가 실제 채택된 경우는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푸코는 벤담의 원형 감옥이 학교, 병원, 공장 등에도 이용될 수 있다고 했지만, 기원적으로 볼 때 오히려 그러한 공간 배치는 공장에서 감옥으로 넘어온 것이 사실이라는 것이다.  또한 강제적 감옥과 합법적인 학교, 공장의 감시 메커니즘이 동일하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비판한다.

 벤담의 파놉티콘에 비해 이제는 ‘전자’ 파논티콘의 시대에 접어 들었다. 이 때 전자 감시는 피 감시자의 자발적 협조에 의해 이루어진다. 인터넷의 각종 회원 가입에 자신의 정보를 스스로 제공해야만 사이버 공간에서 활동이 가능한 것처럼. 전자 신분증제도, 생체 인식, GPS , 휴대폰 위치 추적 시스템, 몰카, 인공위성 에셜런 시스템 등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게, 치밀하게 우리는 감시의 체제 안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감시 체제가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파놉티콘처럼 소수자에 의한 다수의 감시가 아니라, 오히려 다수가 소수의 권력자를 감시하는 시놉티콘(Synopticon)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제 권력에 대한 역감시가 가능해졌다. 시민운동의 정치 권력 감시, 인터넷의 쌍방향 기능이 가져다준 기능 등으로, 권력 감시가 새롭게 가능해졌다.

 읽기는 쉽지만, 현재 우리의 감시 문화를 다시 확인한다는 점에서 결코 기분 좋은 책읽기는 아니다. 현재와 같은 감시 사회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어떻게 답할 것인가? 예를 들어, 개인의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는 신용카드를 발급받을 수 없고, 모든 사이버 활동 자체가 불가능하지 않는가? 주민번호를 입력하지 않는 사이버 회원가입 등이 논의되고 있지만 그 역시 개인 정보의 내용은 그대로 유지될 뿐 아니라, 과연 그런 변화 자체를 이끌어 낼 수 있는지도 의문스럽다. 현실 세계에 대한 냉철한 인식은 필요하지만 뚜렷한 대안이 없다는 점에, 단지 각 개인이 자신의 정보 노출을 조심하는 수준의 실천 외에는 무엇이 가능한가하는 의문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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