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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갈리아의 딸들
게르드 브란튼베르그 지음, 히스테리아 옮김 / 황금가지 / 1996년 7월
평점 :
남녀의 성역할을 전도시켜, 현재의 가부장제 사회를 낯설게 보게 한다. 그래서인지 1부 도입부에는 가독성이 떨어졌다.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기 어려운 이름들, 오직 서술과 행동에 의해서만 성별을 확인할 수 있었기에 사건의 진행을 빨리 이해하지 못하곤 했다. 이는 현실에서 우리가 사람의 이름만으로 성별을 즉각 인지하면서, 그 성별 선입견에 의지해 사건을 이해해 왔음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할 테다.
움(여성)이 직업수행과 출산 등에서 맨움(남성)을 희생시키며 사회를 지배한다는 발상은 일차원적인 상상력일 수 있다. 그런데 곳곳에 기발한 상상과 세밀하게 배치된 언어들이 소설을 풍성하게 해 준다. 맨움의 작은 페니스와 뚱뚱한 몸이 매력이라는 이갈리아의 미적 관점은, 현실 세계 남성 페니스 신화와 여성의 날씬한 몸에 대한 전도적 비판으로, 웃음을 머금게 했다. 맨움의 페호 착용이라는 기발한 상상력은 놀라웠다. 대머리와 털 난 가슴이 맨움의 생물학적 열등성을 증거하고, 생리와 출산이 움의 우등성을 증거하는 것은, 현실세계에서 성별 인지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학습의 결과라는 것을 강변한다.
교사인 노총각 ‘올모스’의 수업 장면은 인상적이다. 그는 맨움 억압의 역사를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이를 수업에서 적극 드러내지 못하는데, 이는 교장권력의 개입과 맨움조차도 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의식’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 “언어를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정말 중요해. 그러면 움들이 사회를 통제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모든 말들을 체계적으로 뿌리 뽑을 수 있을 테니까.” ”(210)처럼 이갈리아의 언어(의식)은 철저히 움을 위한 것이었다. 이처럼, 1부는 곳곳에 뒤바뀐 성역할에 따른 세부 서술이 독자로 하여금 낯선 경험을 하게 한다.
2부는 훨씬 쉽게 읽힌다. 성억압을 깨닫고 해방 운동을 결심한 ‘페트로니우스’의 결단과 각종 실천이 서술되어 있다. 맨움 해방을 위한 실천과 이론의 팜플랫이기도 하다. 현실세계의 여성해방 운동의 그것처럼! 그래서 오히려 쉽게 읽힌다.
특별한 것은 스파크스주의(마르크스주의 계급투쟁 역사관)와의 관계였다. “노동자 계급이 억압받고 있다고 지적하는 것보다 맨움이 억압받고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 훨씬 더 지독하고 극단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그것은 성적 억압이 계급 억압보다 훨씬 더 지독하고 극심하기 때문일 거야”(247) “스파크스주의는 오직 계급 적대에 대해서만, 그리고 갑싼 노동력의 착취에 대해서만 말한다.”(367)
마르크스 이론에 기댄 계급해방보다 성해방이 더 근본적 해방이라는 선언이다. 이는 페미니즘 논쟁에서 항상 일어나는 계급해방과 성해방의 충돌 혹은 선후 다툼에, 성해방을 분명하게 앞세우는 것이다. 이는 소설 처음부터 끝까지 견지하는 입장이다.
“여러분들이 목격한 것은 성적 반란이 아닙니다. 그것은 경제적 불공평에 대한 하나의 반란입니다. 우리는 가난하고 자립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당신들의 성적 노예가 되도록 강요받습니다. 우리의 존재는 섹스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로 우리들이 경험하는 성적 억압에 대한 저항으로부터 우리의 반란을 시작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반란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맨움은 살아 있습니다! 이것은 노예 반란입니다. 노예 주인이 노예에게 의존하는 것은 노예 국가의 특징입니다. 노예는 주인에게 의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노예는 열심히 일하고 노예 주인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죠. 주인은 사회적 기생충이며 노예는 실제로 사회를 유지하는 사람입니다”(319~320)처럼, 오히려 맨움 해방이 곧 계급해방을 아우르는 것으로 선언한다. 맨움이 움에 의존하지 않고 해방되는 것은, 맨움의 노동을 주체적으로 세우고 확보하는 것에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움이야말로 맨움에 기생하고 있으니까!
이러한 사회적 차별은 가장 개인적인 것 즉 성관계 방식과 맞닿아 있다. “갑자기 그들은 “너는 성관계를 어떻게 하니?”라는 단순한 질문이 사회가 총체적으로 기능하고 있는 방식을 보여주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265)처럼 곳곳에 서술되는 맨움과 움의 성관계 양상(움이 맨움을 지배하는 관계)이 사회 지배 방식임을 간파하고 있다.
또 동성애도 시종 다루고 있다. “움들이 아름다운 요트와 움 전용 클럽과 회사에서, 스포츠 경기장에서 그들의 신성한 자매애를 추구하고 그것에 집착하는 동안에 말이에요. 그래서 신체적으로 동성애자인 것과 정신적으로만 동성애자인 것 사이에는 별 차이가 없다구요. 왜냐하면 내게는 움들이 서로 사랑하고 맨움을 경멸하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모두 동성애로 보이기 때문이에요”(341) 맨움과 동성애자는 소수자 해방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가질 뿐 아니라, 성별 구분 자체를 무화(無化)시키는 전위성을 확보하는 것이기도 하다.
성차별이든 동성애든 모든 억압의 해방은, 억압의 인식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이 억압의 언어를 정당한 것으로 주입하고, 피억압자도 그것을 상식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들이 맨움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맨움들 자신이 편견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 그들은 말했다”(299)처럼, 여성 억압은 결국 여성의 의식에 기초하고 있다. 모든 억압은 그 억압이 정당하다는 사회적 상식, 즉 피억압자의 동의 가 있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해방은 의식 해방이기도 하다.
이 소설이 1975년 발간되었다는 것이 놀랍다. 이런 전복적인 발상과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것은, 성차별과 해방에 대한 고단한 성찰없이는 불가능할 테다. 이 소설이 단지 남성과 여성의 성 역할을 뒤바꾸어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폄훼도 있겠지만, 곳곳에 배치된 기발한 언어와 발칙한 상상은, 가부장제에 익숙한 우리 감각을 흐트러 놓기에 충분하다. 성차별과 억압을 , 이론언어로 접하는 것보다 소설언어로 접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가 있다. 그만큼 생경/생생하고도 구체적이기 때문에 말이다. 일독할 가치가 충분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