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는 원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가 믿고 있는 산타는 루돌프 사슴과 함께 모르는 어떤 곳에서 크리스마스 날에 맞추어 나타나는 사람이다. 그 이야기는 거짓이다. 칠레에 사는 어떤 수도사가 원형이다. 세 딸을 둔 부모가 너무 가난해 아이를 사창가에 팔 결심을 했다고 한다. 그걸 알게 된 니콜라우스는 그들을 도와주고 싶었지만 낯을 가리는 성격 때문에 밤에 창을 통해 금이 든 주머니를 던져 놓고 갔다고 한다. 그 이야기는 진실이지만 산타와 루돌프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그럼에도 빨간 옷을 입은 산타와 빨간 코에 사슴 뿔 이야기는 온 세계에 매년 이 맘 때마다 계속된다.

 

딸들이 영국 학교에서 대여섯장 카드를 받아온다. 보낸 이는 말렉모하메드혹은 말릴라. 이들은 모든 아이에게 카드를 보낸다. 감정은 없고 형식만 있다. 영국에 사는 아랍권 사람이라면 청첩장을 보내듯 그래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만들어 낸 거짓말은 이렇게 매년 사용된다. 어떤 사람이 만든 거짓은 마음을 녹이지만 어떤 사실이 아닌 행동과 이야기는 기억됨으로써 반면교사 대상이 되기도 한다. 어떤 이는 가짜를 통해 영원히 존경받는다. 소설가는 가짜 이야기를 만들지만 그로 인해 명성을 얻는다. 다른 이는 사기꾼과 세상을 농단시킨 죄인으로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회자되기도 한다. 스탠포드 MBA출신 어떤 여성은 피만 뽑아도 많은 유전 정보와 치료 기술을 얻을 수 있다며 사업체를 만들고 많은 유명 인사들이 이 이야기를 철석같이 믿었다. 결국 이건 거짓이었다. 뉴욕 MBA 출신들은 자신이 만든 펀드를 굴리며 끊임없이 수익을 내는 화수분이 될 거라며 많은 투자자를 꼬드겼지만 결국 그 결과는 처참했다.

 

 

이야기는 참이 아니다. 허구다. 그 거짓은 칼과 같다. 분노로 칼을 쓰면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준다. 반대로 사용하면 이를 통해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

 

 

나는 사실인 이야기가 좋았다. 진실을 말해야 하는 사람이 침묵으로,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이야기로 진실을 가리는 모습을 너무도 많이 봤기 때문이다. 15년 전, 어떤 이의 죽음을 아침 드라마로 만든 어떤 신문 기사를 봤다. 그 때부터다. 나는 그 이후 이야기에 대한 결벽증을 갖게 됐다.

 

필립로스는 소설가다. ‘에브리맨이라는 거짓말은 거짓말 같지 않았다. 그 근원이 무엇일까 궁금한 나는 아버지의 유산이라는 그의 논픽션을 읽었다. 영국으로 떠나오기 전 친정 가족들과 근교에서 캠핑을 하기로 했던 날이었다. 일박 이일로 계획했던 여행은 즉흥적으로 하루를 더했다. 모험을 좋아하는 아버지는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웠다. 어느 순간 친정 엄마는 평소답지 않게 히스테릭한 모습을 보였다.

 

 그 당시 친정 엄마는 필립 로스의 어머니와 많은 부분 유사했다. 집에서 없어서는 안 될 분이었다. 항상 엄마가 하는 일은 완벽했기에 누구나 엄마를 믿었다. 그 믿음은 마치 공기가 우리 생명을 책임지듯 엄마 손길은 우리 가족에게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필립로스의 모친은 아버지가 계획한 외식을 하러 간 후 즉사한다. 외식을 하러 가지 말자는 작가 엄마와 우리 엄마 모습이 너무나 많이 닮아있었다. 결국 필립 로스의 아버지처럼 엉엉 울지는 않으셨지만 나에게 많이 화를 내셨다. 그 화는 언젠가 터져야 할 것이었다. 필립 로스 아버지가 아들 앞에서 엉엉 울었던 것처럼 말이다.

 

 

영국 생활은 쉽지 않았다. 아니, 죽을 만큼 힘들었다. 차라리 아프리카나 남미 같은 곳에 간다고 한다면 힘듦을 이해할 수 있을까. 어쨌든 우리나라가 아닌 곳에 산다는 건, 이방인이 된다는 건 어디든 쉽지 않은 일이었다. 30년 내내 영어를 배웠건만 입을 떨어지지 않았다. 좋은 대학을 나오고 나름 교양있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생각했지만 여기서는 그저 단어나 던져 겨우 의사소통을 하는 동양 여성에 지나지 않았다.

 

 학교 다니는 아이 둘, 남편 하나 그리고 나와 한 몸 같은 젖먹이 아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공포가 몰려왔다. 이 때 읽은 책은 더 걸 비포였다. 영국이란 나라에 정착하며 집주인과 주변 분위기에 압도되는 두 주인공 이야기가 꼭 내 이야기 같았다. 내 주변 누군가도 믿을 수 없고 의료시설조차 완벽하지 않은 이곳에서 버텨내는 이야기. 이 이야기를 통해 책이 주는 공포가 나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됐다. 이야기를 통한 공포의 연대는 현실을 버티는 힘이 되었다.

 

 

 

 

그 와중에 나는 엄마의 암이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엄마는 두 번째 암수술을 받았지만 두 번 다 수술실을 지키지 못했다. 몸은 영국에 있으나 마음만은 한국에 있었다. 엄마 수술 날, 운명처럼 한국에서 소포 두 개를 받았다. 소주와 시집 슬픔이 오시겠다는 전갈그리고 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 마치 그 날을 기다렸다는 온 두 권 책을 정신없이 읽었다. 나는 울지는 않았다. 대신 내 세 아이들이 많이 울었다. 한 명은 언니가 물건을 안 준다고, 한 명은 동생이 나를 때렸다고,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그냥 울었다. 그게 다 내 얼굴이었다.

 

 

 

얼빠진 얼굴을 하고 하염없이 걷는 여자 아이 얼굴을 한 그 책은 상자를 연 후 단숨에 읽어버렸다. 어쩔 수 없었다. 왜 지은이는 울 때 엄마 얼굴을 논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엄마가 아닌 다른 여성으로서 인격을 부여해 주려고 안간 힘을 다 쓰고 있었다. 나도 엄마가 내 엄마가 아닌 다른 인생을 살기 바라는 사람이다. 엄마가 되니 알게 됐다. 오랜 기간 누군가 엄마가 되면 그게 익숙해지지 않는다는 걸. 아이를 키우면서 자유를 꿈꾸면서도 정작 자유가 왔을 때 가장 겁내할 사람은 다름 아닌 엄마다. 그래서인지 그 책 마지막은 딸이기도, 엄마이기도 한 나에게 강하게 다가왔다. 다른 나라에서 없어진 다 큰 딸을 찾아 헤매는 엄마. 그건 내 모습이기도, 내 엄마 모습이기도 했다. 이제 엄마는 괜찮다. 항상 전화로 건강에 대한 설교를 늘어놓는 것만 뺀다면.

 

 

 이 곳 맨체스터는 겨울 해가 짧다. 오후 4시면 저녁 9시처럼 세상이 칠흙 같이 어두워진다. 가을에 인사가 이랬다.

“Winter is coming.”

어두워지는 밤을 조심하라는 이야기다. 나는 여기 살기 전까지 어느 미드에서 멋있으라고 반복하는 대사쯤으로 알았다. 겨울을 경험하니 알겠다. 얼마나 잔인한 겨울인지. 덕분에 사람들은 더 웃고 더 만나고 더 모인다. 다만 이방인에게는 더 우울한 날씨에 더 바보가 되는 마음만 쌓인다. 이때는 그냥 이불 뒤집어쓰고 책으로 도망간다. 마음이 어지러우니 새로운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익숙하지만 조금 다른 책을 시도한다. “일러스트 자기 앞의 생”.

 

 

망각은 신이 인간에게 준 축복일까, 저주일까. 어슴푸레 뚱뚱한 사람과 장난꾸러기 화자가 나온다는 것만 기억날 뿐 나머지 내용은 내게 너무도 새로웠다. 그래서 기록이 필요하다. 그림은 내 상상력 속 등장인물과 비교를 할 수 있는 새로운 재미를 선사한다. 사실 내 생각에서보다 예뻐서 다행이었다. 내 머릿속 상황은 그림보다 더욱 처참했다.

 

 

한국에서 읽던 모모는 그저 안 좋은 환경에 있어 왜곡된 성격을 갖게 된 한 소년에 지나지 않았다. 로쟈 아줌마는 몸을 팔 수 없자 아이를 키우게 된 여인에 지나지 않았다. 이방인이 된 나는 모모가 모하메드라는 이름을 아랍 새끼청소부양아치랑 동일 이름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를 안다. 로쟈 아줌마가 자신이 유태인이면서도 모하메드를 회교도인으로 키운 이유와 흑인 아이를 일부러 흑인들이 사는 곳에 꼭 가서 익숙하게 만들기 위한 노력이 어떤 건지 안다.

 

 예전 나는 너무도 무식하고 뻔뻔했다. 이 나이가 돼서야 로쟈 아줌마가 얼마나 대단한 엄마였는지 알게 됐다. 로쟈 아줌마는 모모에게 너무도 멋진 산타였다. 신이 준 산타. 또 반대로 모모는 로쟈 아줌마에게 산타였다. 마지막을 함께 할 수 있는 산타. 그렇기에 로쟈 아줌마가 모모에게 한 거짓말은 정말 사소하다.

 

 

이 책들을 덮으며 마음이 좀 더 따뜻해졌다. 이야기가 주는 힘은 실로 대단하다. 아무 것도 아무도 모르는 어떤 섬에 들어 온 나에게 버틸 힘을 주는 건 이 책들 덕분이었다. 어쩌면 산타는 진짜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독한 겨울날에 엄마라는 이름으로, 이방인이란 신분으로, 혹은 책이라는 물건으로. 그게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상관없다. 진심이면 그것으로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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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8-12-16 13: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좋은 책들과 함께 영국 생활에 적응해 가시는 것 같아
다행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곳도 사람 사는 곳 아니겠습니까?
때가 되면 마음 나눌 좋은 사람들도 만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힘내십쇼.
어느 정도 적응하면 영국 생활기도 가끔 올려주시구요.ㅎ
어머니가 건강 설교하시다는 건 건강하시다는 증거일 겁니다.
이 또한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문동 리뷰대회 출전 페이퍼로군요.
좋은 성과 있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곳은 캐롤 많이 들을 수 있나요?
한국은 이제 캐롤 듣는 사람이 없다고 하더군요.
예전엔 12월 하면 캐롤이었는데...
암튼 얼마 남지 않은 크리스마스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꿀꿀이님!^^

책한엄마 2018-12-16 16:15   좋아요 1 | URL
스텔라님~반갑습니다.^^

이 곳 알라딘 블로그를 쓰면서 이 년 독서 달인이었는데 2018년은 패쓰해야할 것 같아요.그래도 책이 나왔으니까(공저이긴 하지만요.^^) 나름 의미는 있었네요.ㅎ
2019년 다시 열심히 달려서 다시 도전해 보려고 합니다.

여기는 캐롤 엄청 불러요.
그것 때문에 사실 스트레스 많이 받았답니다.
저도 아이도 영어 캐롤은 무리인데 자꾸 부르라고 해서 다들 붕어됐어요.
완벽주의 첫째는 붕어한 후에 밤에 소리소리를 지르더군요.흑흑..ㅜㅜ스트레스가 심한 것 같아요.
저는 캐롤 없는 한국이 그립습니다.
청첩장 보내듯 의무적으로 성탄 카드를 보내는 아랍계 친구들도 딱하고요..

서니데이 2018-12-19 21: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꿀꿀이님, 서재의 달인 선정되신 것 축하드립니다.
올해도 좋은 이웃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따뜻하고 좋은 연말 보내세요.^^

책한엄마 2018-12-19 21:18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떨어질 줄 알았는데 얼떨떨하네요~

얄라알라 2018-12-20 0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더욱 축하드립니다^^ 한국 밖에서도 이렇게 열심히 알라딘 블로그 운영해주신 거였군요^^ 더욱 멋지세요

책한엄마 2018-12-20 07:34   좋아요 0 | URL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읽고 짧아도 제 느낌을 남기고 싶어 계속 사용했는데 이렇게 또 용기를 얻네요.모두 모두 감사드립니다.
얄라알라북사랑님 새해에도 자주 글로 만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