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과 작업 - 나를 잃지 않고 엄마가 되려는 여자들 돌봄과 작업 1
정서경 외 지음 / 돌고래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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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이 책의 제목이 돌봄과 ‘직업’이었다면, 나는 이 책을 쉽게 집어들 수 있었을까. 어떠한 직업과 소속으로 스스로를 설명할 수 없는 비경제활동인구 중 한명인 나를, 그리하여 무직/가정주부라는 좁은 칸 안에만 머물러 있어야 하는 나를 그 안에 더 가둬두려는 책이라 생각했겠지. 그러곤 바로 서글픈 마음으로 등 돌렸겠지.

서두에 위치한 ⌜editor’s note⌟를 읽으며, 이 책이 ‘작업’의 자리에 ‘직업’이 올 수 없는 책임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작업이란 외부의 기대나 규정과 무관하게 스스로의 필요에 따라 하는 일(p.18)”이며 취미 및 직업과 다를 수밖에 없음을 정의내린 문장 앞에서, 나는 한참을 떠날 수 없었다. 책의 뒷표지에 적힌 <아이를 돌보는 일과 내 것을 만드는 일 사이에서 시도하고 실패하고 성장하는 여자들의 이야기>라는 문장은, 이 책이 ‘나같은’ 사람(엄마/여자) 또한 끌어안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직’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붙여 ‘작’이 되자 더 깊고 넓어진 ‘우리’의 범위. 그 안에 내가 속할 수 있었다. 아니, 이미 내가 속해 있었다.

직업도, 소속도, 자녀의 수도, 양육 환경도 제각기 다른 이들이 써내려 간 글은 “식물을 키우든, 반려동물과 함께 살든, 아이를 양육하든(p.163)” 그 누구에게라도 가닿고 와닿을 진심 어린 고백들이었다. “보이스피싱 같은 것에 낚여 20년 할부로 무시무시한 물건을 주문한 듯(p.40)”해서 섬뜩했던 시간, “신체적 차원의 고됨뿐 아니라 이 모든 갈등과 어려움을 혼자 감내해야 한다(p.112)”는 압박으로부터 어떻게든 도망치고 싶었던 시간, “아이의 성취와 실패를 나의 책임으로 내가 통제해야 할 일로 생각(p.74)”했기에 불가능한 이상 앞에서 불필요하게 좌절했던 시간・・・・・・ ‘엄마’로서 괴롭고 힘든 시간 속에서도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의 지난한 타협을 쉼없이 이어가야하는 ‘나 자신’들의 이야기들은 “누가 더 힘든지 경쟁하거나 양육을 하며 일하는 사람들의 고통과 고난을 자랑하려는(p.23)” 넋두리도 하소연도 아니었다. 돌봄과 작업 전반을 아우르는 과정의 이야기는 성공이나 실패라는 단순한 결과로 치부할 수 없는 현재진행중인 ‘삶’, 그 자체였다. 아이의 인생만큼이나 나 자신의 인생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 나의 삶. 아이와 나는 서로에게 독립된 타인임을 아는 당신의 삶. 그러나 인간이라면 그 누구도 홀로 살아갈 수 없기에 타인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인류 공통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는 우리의 삶. 그렇기에 독립된 타인들의 필연적 공존 방식이 바로 수많은 형태로 이뤄지는 ‘돌봄’이라는 것을 체득한 모두의 삶.

공동의 지향점을 두고서 각자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이들은 그 존재만으로도 앞으로의 내게 든든한 격려가 될 것 같다. 직업, 소속, 자녀의 수, 양육 환경 등 나와 많은 것이 다른 이들의 이야기에 기꺼이 공명하고 응원하고 연대하려는 마음을 품는 것은, ‘달라진’ 나의 ‘달라진’ 충전 방법이다. 돈을 채워주진 않지만 체력과 정신력은 가득 채워줄. 그렇기에 내 곁에 <아이를 돌보는 일과 내 것을 만드는 일 사이에서 시도하고 실패하고 성장하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계속 두려고 한다. 내 안을 읽고 쓸 때마다 따듯한 용기를 얻도록. 내 밖을 읽고 쓸 때마다 단단한 지지를 받도록.

이를 위해 나 자신이 가장 굳세게 믿어야만 하는 사실.
지금 내가 보고 만지고 읽고 쓰고 만들어내는 모든 과정이 나의 ‘삶’이고, 나에 의한 ‘작업’이며, 나를 위한 ‘돌봄’이라는 것.

나는 오늘도 나의 작업을 하며 나아가는 중이다.


***
마지막으로 이 책을 쓰고 만들고 가꾼 모든 분들께 드리고픈 말.
일상의 숱한 면면이 서로 교차되거나 중첩되지 않아도 각자의 각자다운 수고를 인정하고 인정받는 208페이지의 공간을 안전하게 마련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누군가 저에게 육아育兒서를 추천받길 원한다면, 저는 이 책을 육아育我서로 건네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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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 필요한 시간 - 다시 시작하려는 이에게, 끝내 내 편이 되어주는 이야기들
정여울 지음, 이승원 사진 / 한겨레출판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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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 내어주는 ‘사이’의 시공간에서 자신과 타인의 삶을 관조해온 정여울 작가의 신작. 마치 “문학이라는 현미경(p.159)”의 체험기처럼 느껴졌던 이 책을 통해 내가 얻은 위로는, 누구나 ‘문학한다’라는 동사의 주어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종이를 엮어 만든 책의 형태와 소설이나 시의 모습으로만 문학을 한정 짓지 않도록, 작가는 기꺼이 문학의 경계를 해체한다. 그러고는 다시 모은다. 일상 속의 무수한 ‘문학적’인 순간들을. 내 빛을 스스로 찾아가도록 돕는 모든 것들. 내 빛을 스스로 저버리지 않도록 붙잡아 주는 모든 것들. 나의 목소리를 듣고, 나를 만나고, 나를 격려하고, 나를 담금질하고, 나를 일으켜 세우는 모든 것들. 나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남의 불행을 무시하지 않고, 가만히 서로의 곁을 지킬 용기를 얻게 하는 것들. 그 모든 것이 문학이며, 그 모든 것에 등지지 않는 삶이 바로 ‘문학하는 삶’이다.


“타인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는 연대와 공감이 있는 자리에 비로소 문학이 있다(p.255)”는 것을 아는 이가 써 내려간 모든 기록과 사진이 말한다. 언제 어디서든 나와 너의 삶은 교차될 수 있다고. 하나의 천에서 얼마든지 함께 직조될 수 있다고. 그러기 위해서 가끔 아니 자주 우리가 절실히 구득해야 하는 것이 바로 ‘문학’이라고.




이 책의 단점 아닌 단점은 딱 하나. 다 읽고 난 후, 온라인 서점 사이트의 장바구니와 위시리스트가 풍성해진다는 것. 동네 도서관 사이트에서의 검색 횟수가 늘어난다는 것. 그뿐이다.




📚p.17-18 /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중에 오직 작은 부분만을 살아낼 수 있다면, 그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내게는 이 문장이 던지는 화두가 '문학은 왜 여전히 우리에게 필요한가' 라는 질문에 대한 아름다운 대답처럼 들린다. 우리 안에 1000개의 가능성이 있다면 수많은 사람이 그 중에 10개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야 한다. 그 나머지 990개의 가능성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십중팔구 미처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 안타깝게 사라져 버리지 않겠는가. 우리는 환경이 어렵다는 이유로, 재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우리 안에 숨 쉬고 있는 1000개의 가능성을 하루하루 버리며 살아간다. 문학은 그 '나머지'의 소중함, 990개의 아름다운 꿈을 일깨운다. 세상에 나오지도 못하고 안타까이 사라져 가는 모든 잠재적 가능성이 곧 우리 자신임을 문학은 끊임없이 일깨운다. 그리하여 마침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아갈 권리'를 깨닫게 하는 존재가 바로 문학이 아닐까.


📚p.76-77 / 

문학에는 전혀 실용성이 없다고, '문학 하는 사람' 되면 굶기 십상이라고 타박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피비의 따스함과 홀든의 순수함을 보여주고 싶다. 문학은 홀든처럼 세상에 이름 붙이기 힘든 꿈을 지닌 사람들을 끌어안는다고. 문학은 피비처럼 세상에 기댈 없는 사람들을 따스하게 감싸 안는다고. 누군가의 절망을 보듬어 희망으로 바꿔내는 힘은 어떤 화려한 실용성보다 아름다운 가치니까. 문학은 언제 절망이라는 벼랑 아래로 추락할지 모르는 우리를 온몸으로 떠받쳐 주는 호밀밭의 파수꾼이니까.




* 하니포터 5기 자격으로 한겨레출판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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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토피아 1 : 잡학 상식 - 꼬리에 꼬리를 무는 400가지 사실들 팩토피아
케이트 헤일 지음, 앤디 스미스 그림, 조은영 옮김 / 시공주니어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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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주일 동안 우리 가족의 일상에 흥겹게 스며들었던 책. 이제 혼자서 술술 글을 읽어나가고, 만물에 관한 호기심을 안고 재밌게 세상을 읽어나가길 원하는 우리 집 만 5세 어린이를 위해 우리의 세계에 들인 첫 학습 만화다. 여덟 살 사촌 형아를 만날 때마다 어깨너머로 슬쩍슬쩍 보았던 세상으로 이제는 이 아이가 직접 걸어 들어가고 싶어 하는 걸 느끼면서. 


그렇기에 처음에는 아이만의 감탄과 재미를 예상하고 기대했었다. 그러나 어른인 나조차 살면서 처음 마주한 사실들이 늘어날수록, 이러한 부류의 책은 아이에게도 어른에게도 ‘습득’의 쾌감을 안겨주는 통로임을 깨달아갔다. 그 통로는 앞으로 똑바로 가다가도 다시 한참 전의 앞장으로, 혹은 한참 후의 뒷장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점선을 따라 이리저리 길을 따라가다 보면, 이 세상의 모든 사실이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물듯’ 연결되어 있다는 신기하면서도 당연한 ‘진실’을 알아차리게 된다.





물론 책 속의 모든 사실들이 (2022년 기준 한국 나이) 여섯 살인 아이에게 완벽하게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이는 자신이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직접 자신의 작은 손가락으로 쫓아가며 마주해 갔다. 자신만의 해석과 상상을 마음껏 덧붙이면서. 갓 태어난 아기가 어른보다 뼈가 많다는 이야기에 아이는 ‘점점 어른이 되면서 뼈들이 합체하는 건가?’라고 말했고, 목성의 하루는 고작 열 시간이라는 이야기에는 ‘목성 그렇게 빨리 돌면 어지러워서 맨날 토하는 거 아닐까?’라는 다소 엉뚱하지만 일리 있는 의문을 내비쳤다. 오늘날 지구의 1년은 약 365일이지만, 공룡 시대에는 1년이 370일이었다는 문장을 읽고 나서는 등원길 내내 아빠와 5일의 차이를 만들어낸 원인을 상상하며 두 남자만의 가설을 열심히 세워갔다.





우리 가족은 책장을 넘기는 손을 자주 멈출 수밖에 없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레고 타워, 페루의 어느 절벽에 매달려있는 유리 캡슐 호텔의 사진을 직접 찾아보며 탄성을 자아내야 했으니까. <헬로 카봇> 만화에서 본 적이 있는 이야기홍게의 안전한 이동을 위해 숲과 바다 사이에 터널과 다리를 만들어준 주민들를 발견하고서 환호해야 했으니까. 일란성쌍둥이도 지문이 다르다는 사실을 접하곤 같은 반에 있는 쌍둥이 친구들의 지문을 직접 확인해보고 싶다는 아이의 말에 힘껏 고개를 끄덕여야 했으니까. 무한에 이르는 수數의 단위를 배워가고 있는 아이가 ‘경(10)’의 정도를 실제 사례로 깨우치는 과정을, 아빠가 하는 일과 관련된 부분이 나온 페이지 앞에서 그와 관련된 자신의 지식수준을 뽐내는 과정을 흐뭇하게 바라봐야 했으니까.


초등학생이 되면 훨씬 쉽게 와닿을 사실들은 그때를 기약하며 휙휙 넘겨버리고, 지금 당장의 감탄을 자아내는 사실들 앞에서는 한참을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아이와 함께 만난 팩트의 세계.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식들처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과 대답들이 우리의 식사, 외출, 휴식 시간을 에워싼다. 사회, 문화, 경제, 과학, 예술, 지리 등 다양한 분야를 망라하지만 순서대로 읽을 필요도, 모든 사실을 다 기억할 필요도 없는 자유로운 팩토피아. 이곳에서 계속해서 이어갈 여행이, 더불이 앞으로 계속해서 만날 또 다른 팩트의 세계(2권과 3권)들이 어찌 기대되지 않을 수 있을는지!

 


* 시공주니어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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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마리의 겨울나기 14마리 그림책 시리즈
이와무라 카즈오 지음, 박지석 옮김 / 진선아이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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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마리 그림책 시리즈와 함께 계절을 지나가고, 계절을 떠올리고, 계절을 기다리는 우리집 여섯살 어린이. 올해 이 아이가 가장 사랑한 그림책이 무엇이었냐고 묻는다면, 단연 ‘14마리’ 시리즈라고 답할 수 있겠다.


작금의 시대에서 쉽게 보기 힘든, 대가족에서의 항상성 짙은 일상. 계절과 함께 보내야 하고 계절과 함께 보낼 있는 주기성 짙은 일상. 모든 일상의 면면이 14마리 시리즈 책들의 페이지마다 아름다운 그림체와 편안한 색채로 담겨 있다. 더불어 페이지 하단에 위치해있는 문장 남짓의 간결한 묘사와 대사는, 그림 속에 빠져든 아이들의 다채로운 감상을 저해하지 않는 사려 깊은 장치로 작용한다. (참고로, 지난 여름부터 조금씩 한글을 떼기 시작한 아이가 첫장부터 마지막장까지 스스로 소리내어 읽은 바로 열네마리 시리즈였다. 자신에게 읽는 이로서의 뿌듯함 선사한 책이니, 아이는 책들을 더욱 깊이 사랑할 밖에 없겠구나 싶다.)


아홉찌와 열찌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찾아내는 굉장히 좋아하는 아이. 자신보다 어리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아이는 매번 아가 생쥐들의 모습에 어쩔 몰라하며 귀여워한다. 책을 펼칠 때마다 곳곳에 새겨진 가족 간의 따스한 배려와 웃긴 장난을 찾아내는 아이의 얼굴은 해사하다. 그런 아이의 모습을 지켜보는 나에게는, 모두가 귀엽고 사랑스럽다. 아이도. 생쥐들도



하얀 눈이 가득 쌓인 창밖의 풍경을 마주하고 나서야이야, 이제 진짜 겨울이 왔어!’ 하고 소리치며 좋아했던 아이는, 때맞춰 받아든 14마리의 겨울나기』 책과 함께 안팎에서 있는 겨울 놀이들을 배우고 따라했다. 친구와 함께 노는 즐거운 기분을 고사리손으로 만끽하며


14마리 시리즈 그림책을 통해 만나고 모을 있는 또다른 기쁨을 소개하자면, 바로 책을 감싼 띠지 안쪽  그려진 열네마리 생쥐 가족을 소개한 그림들. 시리즈가 완간될 때까지 고이 띠지들을 모아놓고, 이후 모든 띠지들을 액자 안에 넣어 집안 한쪽 벽에 소중히 걸어두고 싶은 마음이다




매 계절마다 만난 열네 마리 생쥐 가족의 일상은 아이뿐만 아니라 함께 하는 어른의 계절까지 아름답게 물들인다. 우리의 곁에 있으나 바로 바라보지 못한 계절과 자연의 색, 향, 음을 소개하면서. 더불어 내 곁에 있으나 자주 바라보지 못한 소중한 이들을 애틋한 마음으로 떠올리게 하면서.


다가올 계절을 기다리며 매번 새로 비우고 채우는 우리집 책장. 그곳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14마리 생쥐가족의 이야기. 아이 뿐만 아니라나의그림책이라고도 단언할 있는 14마리 그림책 시리즈. 아이에게도, 어른에게도 권이 계절의 선물 같은 책들이기에, 내년에도 계속해서 출간될 여러 권의 14마리 생쥐가족의 이야기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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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 익스프레스 비룡소의 그림동화 316
크리스 반 알스버그 지음, 정회성 옮김 / 비룡소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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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겨울밤은 한국의 그것보다 좀 더 일찍 찾아왔다. 하늘이 완전히 눈을 감아버리는 시간, 오후 네시 반. 이내 하늘 아래 곳곳에서 뜨인 크고 작은 눈들이 각자의 빛을 발하며 이르게 찾아온 겨울밤을 환히 밝혔다. 그곳의 겨울은, 겨울의 그곳은 화려한 불빛에 에워싸인 누구라도 황홀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마법 같은 시공간이었다.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수많은 이들의 설렘과 기다림이 거리 가득 빛나고 있는 그때의 그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북극으로 가는 특급 기차’를 만나게 되었다. 


함께 성탄을 준비하는 교회 사람들 명이 영화 <폴라 익스프레스> 목소리 출연을 배우라는 사실은, 자리에 함께 모든 이들을 자연스레 단체 감상의 시간으로 이끌었다. 홀로 동양인인 동네에서 한글 자막은 기대하기 힘든 친절이었기에, 영화를 보는 내내 긴장을 놓치지 않았던 기억이 여전하다. 영화 모든 대사를 완벽하게 이해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번역이 필요없는 영롱한방울소리만큼은 이십 초반 이방인의 마음에도 선명히 울리고 충분히 퍼져나갔다. 산타가 아닌 믿고 따르는 공동체 안에서 어른이든 아이든 산타의 썰매에 달린 은방울 소리에 모두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음이 어쩐지 배덕(?) 행위처럼 느껴졌던 어느 겨울밤. 인종과 언어를 초월해 울리는 하나의 소리가 인종과 언어를 초월해 연결되는 하나의 마음처럼 느껴진, 마법 같은 시공간이었다.




그 후로 열두 번의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동안 나는 ‘방울 소리’를 까맣게 잊고 살아왔다. 여섯 살 아이와 함께 크리스마스를 손꼽아 기다리는 이 겨울, 이 그림책을 만나기 전까지 말이다. 아주 어릴 때부터 산타의 존재를 믿을 기회를 박탈당한 채로 살아온 엄마. 아주 어릴 때부터 산타의 존재를 굳건히 믿고 살아온 아이. 우리 두 사람을 연결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야기를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가운 마음으로, 아이와 함께 책장을 넘겨나갔다.


크리스마스 전날 밤. 산타가 없다고 믿는 친구의 말에도 굴하지 않고, 산타의 썰매에 매달려 딸랑딸랑 울릴 방울 소리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는 한 아이가 있다. 그런 아이의 집 앞에 커다란 기차가 끼익 소리를 내며 멈춰 선다. 북극으로 향한다는 그 기차에 떨리는 마음과 걸음으로 올라타니, 이미 그 안에는 산타의 존재를 믿고 기다리는 친구들이 많이 자리하고 있었다. 캐럴을 부르고, 따듯한 코코아를 나눠 마시며 아이들은 쉬이 잠들 수 없는 밤을 함께 지나갔다. 하나의 마음으로.


기차가 달리는 높고 험한 길 주변에는 으스스한 어둠과 무시무시한 공포가 가득하다. 산타와 크리스마스를 기다리고 믿는 모든 마음을 움츠러들게 만드는 장면들이 이어진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아이들을 태운 기차는 흔들림 없이 나아간다. 마침내 아이들은 산타와 그를 돕는 요정들이 살고 있는 북극 도시에 도착하게 된다. 이후 이어지는 이야기는 오래도록 크리스마스를 기다려온 모든 아이들을 울고 웃게 할, 꿈같은 현실이자 현실 같은 꿈이다.


엄마와 함께 몇 번을 기차에 올라타고 내릴 때마다 아이는 계속 어리둥절한 모습을 보였다. 상상해 본 적 없는 낯선 모습으로 묘사된 북극 도시에. 더불어 더는 방울 소리를 믿지 않는 어른들의 이야기에. 전자에 대한 당황은 기존에 수많은 매체나 그림책 등에서 접해왔던 산타 마을과는 ‘다른’ 이미지에서 기인했고, 후자에 대한 당황은 자신은 살며 한 번도 품어본 적 없는 어른들의 (제 기준에서) ‘틀린’ 의심에서 기인했다. 


그럼에도 아이는 매일 저녁 계속해서 책장 너머의 특급 기차를 기다린다. 위에 힘차게 올라탄다. 나도 아이와 함께 올라탄다. 그리고 아이와 함께 기다린다. 서너밤 뒤에 곳곳에서 널리 울려 퍼질 준비를 마쳤을, 맑고 아름다운 방울 소리를. 현실의 어둠과 공포를 없앨 없어도, ‘지금, 여기에 함께 있다 마음을 느낄 있도록 도울 반가운 방울 소리를. 그리하여 서로의 곁에서 잠시나마 함께 웃을 있도록 누구의 마음 문이라도 환하게 두드릴, 마법의 소리를.



*비룡소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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