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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여자
아니 에르노 지음, 김계영 외 옮김 / 레모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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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약의 논리로 설명되는 사회의 권력 구조와 전반적인 분위기는 시대를 불문하고 수많은 여성들에게 맹목적이며 획일화된 ‘완벽한 여성성’의 이미지와 의무를 부과해왔다. 어디서 태어나 무엇을 배우고 경험하며 살아왔든지 결국 사회가 대다수 여성에게 바라는 궁극적 요구는 충실한 “가정의 수호자, 집안의 유지보수 담당자(p.205)”로 사는 것이었다. 자신의 개인적인 성향과 다양한 가능성을 억누르고 살 수 밖에 없었던 여성들. 어린 시절부터 가정과 학교와 사회와 국가가 주입시켜 왔던 여성들의 생존전략은 ‘남이 원하는’ 모습을 갖추어 순응하는 삶이었다. 아니 에르노가 써내려간 ‘나’의 이야기는 오랜 세월동안 자신을 희생하고 잃어버림으로 살아왔고 살아올 수 밖에 없었던 수많은 ‘여성’들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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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32
자기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에는 성별이 없고, 정답도 없다.
성별의 구분 없이 동등한 위치와 흐름 위에서 살아간 부모를 보고 자란 ‘나’. 사회의 통상적 관점에서 비정상적인 영역으로 비춰지는 ‘나’의 가정은 ‘나’로 하여금 해야할 일, 중요한 일의 구분과 결정에 성별이 관여할 수 없음을 체득하도록 이끌었다. 그러나 집 담장을 벗어난 외부의 세계는 사회의 보편적인 흐름 위에서의 인생의 결을 끊임없이 주입하며 이를 따르기를 요구한다. 개인의 외모와 태도, 행동까지 하나 하나 검열하고 개인의 선택(학업, 취업, 결혼, 출산 등)에 획일화된 정답을 제시하는 사회에 소속된 ‘나’는 ‘나’를 규정지으려는 외부의 입김과 손길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기에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도 조금씩 변해간다. 외부의 요구와 나의 욕구가 점점 겹쳐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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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69
“이건 카뮈가 한 말이지, 어떤 존재를 사랑하는 것은 그와 함께 늙어가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정확한 말이야, 너는 그렇다고 생각 안 하니?” 나는 숨을 참았다. “우리 결혼해야겠지? 넌 어떻게 생각해?”
‘함께 늙어간다’는 말은 당사자 모두에게 동일한 의미를 갖지 않는다. ‘함께 살고 있는 공간’ 또한 당사자 모두에게 동일한 의미를 갖지 않는다. 동일선상에서 함께 걸으며 삶의 유지를 위한 모든 노력과 희생을 같이 하는 것과 거리가 먼, 결혼 후의 ‘나’의 일상. 두 사람은 똑같은 시간과 공간에서 숨을 쉬고 있으나, 모든 공기 입자 하나 하나에 달라붙어 있는 “우월성”의 지배 하에 서로 다른 시간과 다른 공간에서 살아간다. 일방적인 책임과 의무로 점철된 ‘쇠락’의 기운 위에서 변함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전진’의 기세가 이어지는 시공간에서 두 사람은 결코 ‘함께’ 늙어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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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19
삶, 세상의 아름다움. 모든 것이 나의 외부에 있었다. 이제 발견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p.222
그러나 여러 번, 공원에서, 유모차를 밀면서, 나는 나의 아이가 아닌, ‘그의 아이’를 산책시킨다는 이상한 느낌을, 남편이자 아빠인, 그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그를 안심시키는, 위생적이고 조화로운 시스템 속에서 움직이는 말 잘 듣는 하나의 부품이라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한 남자와 평생을 함께 하기로 약속하는 결정의 순간. 한 지붕 아래서 가정의 안정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시간. 임신과 출산 과정을 거쳐 한 생명을 길러내는 기간. 그 모든 타임라인에서 ‘나’는 소멸되어 간다. (사회를 뒷받침하는) 나의 가정, (사회인으로 살아가는) 나의 남편, (사회인으로 살아갈) 나의 아이가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모습을 갖출 수 있도록 전적으로 지원해야 하는 ‘나’. 성(性)을 떠나 한 개인으로서 내 가치관, 생각, 욕구, 희망, 꿈을 드러내지 못 한 채 고독한 침묵 속에서 누군가의 ‘무엇’으로만 존재하는 ‘나’는 사회의 유지를 책임지며 사회와 점차 단절되어간다.
———
📚p.205
나는 안시를 싫어한다. 내가 매몰된 곳이 바로 거기다. 나는 그곳에서 날마다 그와 나의 차이를 경험했고, 옹졸한 여자의 세계에 빠졌고, 자질구레한 걱정들로 질식할 것 같았다. 고독.
나를 비춰주는 거울과 같은 문장 속에서 한참을 벗어나올 수가 없었다. 결혼과 동시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에서 지내게 되며 수개월간 경험했던 (그리고 수년이 지난 지금도 완전하게 극복하지 못 한) 우울의 감정은 이 곳에서 나 자신이 ‘매몰’되고 있다고 느끼는 것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이전의 내가 나 자신으로서 가졌고, 누렸고, 지키려고 노력했던 모든 것을 내려놓음으로 남편의 직장 생활과 우리 가정의 평안은 유지될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 모두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언제나 나를 향한 전폭적인 지지를 보냄과 동시에 나를 위한 자신의 수많은 노력과 행동을 마땅히 해야 할 의무로 여기는 사람이 내 옆에 있었다는 것. 그렇기에 나는 더 깊은 곳으로 매몰되지 않을 수 있었다.
책을 읽고 나서 남편과 긴 대화의 시간을 가지며 다시 한 번 되새김한 사실은, 내 인생의 밧줄은 내가 만들 수 있고 내가 만들어야 하며 내가 직접 쥐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만, 나의 가치관을 존중하고 나의 행동의 중요성을 정확하게 인지하며 앞으로도 내가 내릴 모든 선택과 결정을 지지할 사람이 곁에 있다면 내 밧줄의 내구성은 더 강해질 수 있다. 그렇기에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흠집을 내며 심지어 끊어버리려 했던 ‘얼어붙은 여자’의 밧줄을 내내 분노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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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45
여자로서의 나의 모든 이야기는, 투덜거리면서 내려가는 계단의 이야기다.
이 책의 ‘나’와 현실의 ‘나’는 살아가는 시대와 환경이 몹시 다르다. 그렇다고 하여 내 삶에서 직접 겪어본 적이 없었던, 책 속의 여러 ‘장면들’이 내게 결코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책장을 넘길 수록 분노에 휩싸이고 울적해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성이라면 필연적으로 안고 갈 수 밖에 없는 수많은 우려가 나를 움츠러들게 하여 소극적으로 행동했던 인생의 여러 기점이 내 삶에서 분명 존재했기 때문이다. 내 영육을 모두 소멸시키는 듯한 극심한 고통으로 생의 끈을 놓아버리고 싶었던 순간들도 내 삶에서 분명 존재했기 때문이다. 책 속의 장면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의 삶에서 분명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과거와 현재, 세계 곳곳에서 얼어붙어 있는 수많은 ‘나’와 이 책을 함께 읽으며 꿈을 꾸고 싶다. 한없이 깊은 곳으로만 내려갔던 그 계단에서 뒤돌아 다시 지상으로 올라올 수 있기를. 암흑에서 빛으로 돌아선 그 순간의 눈부심을 함께 견뎌줄 이들이 곁에 있기를. 빛으로의 등반을 막는 모든 검열과 통제, 억압의 손길이 점차 사라져 모든 이들이 ‘나’에 의한 ‘나의 구원’을 마음껏 희망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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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재난 국가
이철승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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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인하여 사회 구성원간의 격차가 몹시 심화되고 있음과 더불어 직업과 세대, 성별과 지역 등 여러가지 사회의 범주 안에서 각기 다른 의견간의 갈등과 소외 현상 또한 심화되고 있는 2021년. 이 책을 통해 우리 사회의 불평등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한 명의 사회 구성원으로서 어떠한 사고 과정을 거쳐 판단하며 행동해야 할지를 돕는 ‘명확한’ 근거를 얻고 싶다.”

이 책을 읽기 전, 이 책을 향한 나의 기대평은 위와 같았다. 책장을 덮은 후, 나의 기대평에 부응하는 아니 그 이상의 책을 읽었음에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구의 이론으로 한국 사회의 구조와 정체성을 설명하는 것은 많은 사회학자들 조차 어느 단계에 이르게 되면 손을 떼게 될 만큼 한계가 있음을 인정한 저자는 자신의 연구와 언어로서 한국 사회를 적확하게 해석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 노력의 통찰물은 저자의 전작 #불평등의세대 와 바로 이 책 ‘쌀 재난 국가 - 한국인은 어떻게 불평등해졌는가’ 이다. (3부작의 피날레를 장식할 저자의 다음 저서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이 책은 한국인의 사고와 한국 사회 구조를 이루는 것들의 총체적 기원인 ‘쌀 농사 체제’의 구조 및 특징과 산업사회로 이어지는 이식 과정, 그리고 현재 코로나 펜데믹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 또한 어떻게 지배하며 굴복시키고 있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즉, ‘벼 농사 경작 시스템’이라는 독립 변수에 의해 다양한 종속 변수(불평등, 비교문화, 교육열, 부동산 과열 투자, 연공 문화, 노동시장의 이중화, 여성 차별과 낮은 출생률, 청년 실업 등)들이 어떻게 영향받아 왔는지, 그로 인해 우리 사회가 (속된 말로) ‘대체 왜 이 모양 이 꼴인지’를 명확하게 설명한다. 방대한 양의 데이터 수집과 분석을 담아낸 수많은 그래프와 표, 수식들은 이 책 전반에 걸쳐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의 직관적인 이해를 돕는다. (이는 곧 이 책의 존재 가치와 의미, 신뢰도를 나타낸다). 더불어 저자의 상세하며 친절한 설명은 독자의 이해의 깊이와 너비를 넓힌다. 

오래 전부터 ‘쌀’을 주식으로 살아온 조상들의 피를 이어 받아 우리의 주식 또한 여 전히 ‘쌀’인 것을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여온 우리의 삶에 이 책은 여러 의문과 생각할 거리를 가득 던진다.

- 우리의 조상들은 왜 쌀에 갇히고 중독되었는가?
- ‘벼농사 체제’에서 재난의 방비와 즉각적 대처를 요구받은 ‘국가’의 역할은 오늘날에도 유효한가?
- ‘공동으로 생산’하지만 그 수확물은 ‘개별 소유’하는 벼 농사의 이중구조 시스템의 장단점(비교와 질시의 문화, 관계에 좌우되는 행복과 불행, 집단주의적 위계구조와 연공문화, 협업과 조율 시스템의 발전, 평준화 및 표준화의 추구로 인한 경쟁력과 생산력 증가)은 우리 세대에까지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 코로나 펜데믹에 대처하는 우리 국민들의 문화적 DNA는 어디로부터 왔는가? 무엇이 생존을 위한 국민들의 ‘자발적인’ 행동과 협력을 유도하는가?
- 벼 농사 체제부터 현대까지 이어지는 ‘불평등의 기제’는 무엇이며 누가, 이것을, 어떻게 이용하여 재산을 축적하고 성공을 보장받았는가? 
- 보편적인 복지국가로의 전환을 가로 막고 있는 ‘자산 취득 경쟁’ 의 기원은 어디서 왔으며, 부동산은 ‘사적 안전망’의 역할로 우리를 어떻게 지배하고 있는가?
- 한국 사회에 팽배한 불평등 문제의 핵심인 ‘연공제’는 어떻게 불평등을 ‘영속화’시키는 제도로 작동하고 있는가? 생애 주기 전체에 걸친, 세대 간의, 세대 내의, 젠더 간의 불평등의 공고화는 해결할 방법이 정녕 없는가?
- 왜 우리는 ‘여전히’ 쌀, 연공제, 시험, 땅(부동산)에 갇혀있고 중독되어 있는가?

수많은 질문을 던지는 책의 흐름을 따라가며 자연스럽게 저자의 논리와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좁게는 나 자신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넓게는 우리 사회의 불평등의 기원과 구조, 작동 기제를 파악하며 나와 내가 속한 사회 시스템 모두를 ‘객관화’하여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코로나 펜데믹에도 흔들리지 않고 부를 쌓아가는 이들과 최소한의 삶의 요건조차 충분히 보장받지 못 하게 된 이들 간 괴리의 심화는 그저 인수공통감염병에 의해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조상들과 우리의 부모 세대와 우리 세대까지 지배해 온, ‘벼 농사 체제’로부터 비롯된 구식의 관념과 룰은 코로나 펜데믹과 힘을 합쳐 오늘날의 다양한 불평등과 갈등, 소외 현상을 유발 및 심화시키고 있다. 

어른 세대의 교만과 과오로 인한 극심한 환경 문제로 고통받고 고통받을 우리 자식 세대에게는 이 ‘불평등의 기제’만큼은 유산으로 물려주지 않기를. 그리하여 우리의 아이들은 개인의 다양성을 존중받고 개인의 능력과 노력을 정당하게 평가받는 동시에 국가가 제공하는 공적 보험 혜택을 노년까지 충분히 누리는 ‘더 나은 세상’에서 살 수 있길 간절히 바란다. 이를 위한 노력에는 개인과 사회의 강력한 인식 전환과 국가의 적극적인 계획 수립 및 능동적인 대처가 모두 해당될 것이다. 이 노력의 의지를 모두 함께 다질 수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 써내려 갔을 저자의 글이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최대한 많은 곳에서 읽히길 바란다. 우리 모두의 역할이, 우리 모두의 책임이 이 책에 담겨져 있다.

책을 다 읽은 어제 오후, 길을 지나가다가 노인 및 한부모 수급권자를 대상으로 한 생계급여 ‘부양 의무자 기준’이 폐지된다는 내용의 현수막을 발견했다. ‘복지 체제 또한 씨족과 가족 단위로 발달한’(p.257) 한국의 가족 중심 복지 체제는 병 들고 노쇠할 때 국가의 복지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자식과 친척을 ‘안전망’으로 삼아온 벼농사 공동 생산 시스템의 유물과도 같다. 부양 능력이 있는 가족이 있더라도 (고소득, 고재산 제외) 국가의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된 위와 같은 변화는 선별복지 국가에서 보편적 복지 국가로 나아가는 하나의 발걸음이 될 것이다. (참고로 내년부터는 전체 가구를 대상으로 생계급여 부양 의무자 기준이 폐지된다고 한다.)

* 이 리뷰는 문학과지성사 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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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쿵 네버랜드 우리 걸작 그림책 69
경혜원 지음 / 시공주니어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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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의 윗집과 옆집, 대각선 집에는 모두 어린이들이 살고 있거나 그들의 조부모가 살고 있다. (참고로 우리 집은 1층) 그래서 모두가 가정보육을 택했던 시기에는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종일 온 천장과 벽이 울려댔다. 서로의 눈치를 그나마 덜 보고 살 수 있는 환경(너도 나도 할 것 없이 모든 어린이들이 뛰어다니니)이라 서로 충분히 이해하고 배려하며 지냈지만, 집 안에서만 한 달 넘는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의 답답함은 집 안에서 뛰어다니는 걸로는 절대 해소되지 않았을 것이다.
전 세계를 휩쓴 역병으로 인해 부모의 업무 환경이 바뀌고 아이의 사회 생활이 순탄하게 이뤄지지 못 하게 되어 집 안에서 온 가족이 머무르는 경우가 많이 늘어났다. 재택근무중인 엄마, 심심한 일상에 핸드폰을 붙잡고 동영상만 보는 오빠. 그런 오빠와 함께 옷장 속에서 들리는 소리의 주인을 찾아 함께 옷장 문을 열어보자고 말하는 동생. 옷장 속에서 튀어나온 공룡들과 함께 신나게 놀다가 만나는 반전까지. 집 안에서 아이들이 느낄 답답하고 힘든 상황을 공룡과 함께 신나게 노는 유쾌한 재미로 그려낸 경혜원 작가님의 그림책 ‘쿵쿵’을 시공주니어의 지원을 받아 만나볼 수 있게 됐다.
경혜원 작가님의 전작 #엘리베이터 처럼 수많은 공룡들을 만날 수 있는 ‘쿵쿵’책. 정체를 숨긴(?) 공룡들을 하나씩 만나는 그 과정은 작가님의 공룡책 시리즈가 갖는 최고의 재미 포인트다. 공룡과 주인공들의 표정, 옷이나 피부의 색까지 유심히 살피며 한 장 한 장 넘겨보는 재미 또한 놓칠 수 없다. 숨은 그림 찾기 하듯 작가님이 숨겨놓은 즐거움을 찾아가는 그 기쁨은 엄마에게도 유효했다.
하지만 아직 세심하게 그 모든 포인트를 찾아내고 이해하기 힘든 우리 집 다섯살 어린이는 그저 엄마가 실감나게 읽어주는 것만으로도 이 책과 사랑에 빠질 수 있었다. 평소 집에서 뛰어다닐 때 ‘우리 집 공룡이 어딜 그렇게 바쁘게 뛰어가나~’ 하고 엄마와 공룡 흉내를 내며 함께 놀던 아이였기에, 책 속의 친구들이 수많은 공룡들과 함께 집 안에서 쿵쿵거리며 즐거이 노는 모습만으로도 다섯 살의 눈길과 마음을 사로잡는 건 충분했다. 덕분의 엄마의 성대는 며칠동안 이 책과 함께 열심히 일해야 했지만.
#엘리베이터, #촛불책에 이어 우리 집 책장에 자리잡게 된 작가님의 세번째 그림책. 아무래도 작가님의 그림책들을 언젠가는 다 모으지 않을까 싶다. 어느 한 작가의 작품이 마음을 사로잡는다면, 그 작가의 모든 작품을 소장하고싶은 욕구가 드는건 줄글로만 채워진 문학작품이나 아이의 시선에서 그린 (그러나 어른들도 충분히 읽고 사유할 수 있는) 그림책이나 같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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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을 읽다
서현숙 지음 / 사계절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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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정과 교화를 목적으로 하는 특수교육기관 ‘소년원’. 그 곳에서 지내는 아이들 중에 의무교육을 마치지 못 한 이들을 대상으로 1년 간 국어수업을 진행한 서현숙 선생님의 기록이 담긴 책을 사계절출판사로부터 좋은 기회를 제공 받아 출판 전 먼저 읽게 되었다.

소년들은 일주일에 한 번 듣는 국어 수업에서 ‘환대’를 받으며 사람이 사람을 반갑게 맞고 정성껏 대하는 마음을 배웠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받아 본 경험이 없는 환대. 삭막한 소년원에 들어와서야 처음으로 환대가 무엇인지 배운 것이 슬펐고, 지금이라도 환대가 무엇인지 체득하게 된 것이 다행으로 여겨졌다.

소년들은 수업을 통해 여러 책을 읽으며 타인의 이야기에 호기심을 갖고, 그들의 마음을 공감하고 이해하며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저자의 말처럼 그들의 영혼이 뿌리까지 썩은 것이 아니라면, 그 영혼이 사회에 해를 끼치지 않는 방향으로 살아갈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는 곳이 우리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개인의 의지 문제로만 다루기에는 수많은 아이들이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그러나 소년들에게는 항상 결핍되어 있는 ‘무엇’들이 너무나 많기에.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나를 울게 했던 아이는 17살의 민우였다. 17년을 살면서 단 한번도 민우에게 책을 읽어준 사람이 없었던 민우. ‘어른이 책을 읽어준 기억이 전혀 없는’ 이 아이의 삶은 얼마나 슬프고 아팠을지. 책의 결핍은 곧 사랑의 결핍일테고, 그 결핍은 결국 민우를 이 곳으로 이끌었을 터. 이 결핍을 가정이 채워줄 수 없다면, 학교와 사회가 체계적인 제도를 갖춰 아이들의 결핍을 채워주어야 한다. 사회의 구성원인 아이들은 결코 혼자 자라는 것이 아니므로. 

이전과 다르게 살고 싶지만, 과연 내가 그럴 수 있을까. 자신을 제대로 알기 전부터 필터링하는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 돌아가더라도 돌아갈 곳이 없는 가정 환경. 죄를 짓고 문제를 일으켰으니 그저 투명인간처럼 어딘가에서 (혹은 소년원에서) 지내길 바라는 사회의 분위기. 살면서 누군가로부터 환대를 받아본 경험이 없는 소년들은 이 모든 걸 알고 있었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나쁜 짓’을 저지르고 이 곳에 들어온 소년들. 자신의 죄를 부끄러이 여기고, ‘형량’으로 죄값을 치루는 동안, 하나의 구성원으로서 사회에 기여하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곳이 학교로서의 ‘소년원’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책을 한 장씩 넘기며 소년원에 대해 막연하게 가졌던 부정적인 감정을 조금은 배제하고, 그 역할과 기능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었다.

이 책은 소년원에 있는 아이들을 무작정 긍휼히 여기거나 그들의 죄값을 가벼이 여기는 책이 아니다. 저자는 아이들을 만날 때 느꼈던 두렵고 무서운 감정을 솔직하게 담아냈고, 자신의 감정을 제어하지 못 함으로 인해 소년원 안에서 또 다른 징벌을 받는 아이들의 과오 또한 꾸밈없이 밝혔다. 갇힌 곳에서 각자의 죄값을 치르며 지내는 동안 소년들의 손에 쥐어진 책 몇 권으로 삶의 의지를 다지고 나 자신과 다른 사람을 돌보는 마음을 품길 소망하는 선생으로서의 마음도 담담하게 고백했다. 

사회에 나가면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하게 만들고, 그 일을 꿈꾸며 자신을 무작정 방치하지 않게끔 하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해 어떤 노력이든 하게끔 자신의 마음을 올바르게 품을 수 있도록 도와 준 ‘책’. 여러 권의 책으로 자신의 마음을 다질 수 있는 아이들이라면, 우리 사회가 그들에게 내어줄 수 있는 마음의 너비도 조금 더 넓어져야 하지 않을까. 그저 안 보이는 곳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투명인간처럼 소년들이 숨어있길 바랐던 나의 마음 한 구석을 되돌아보게 하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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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
강경수 지음 / 창비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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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구에는 수많은 생명이 함께 살아가지만, 이 세계를 지배하는 질서는 오로지 ‘인간’이라는 생명체만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인간 외의 생명들은 인간이 마음대로 세워놓은 질서에 굴복 당하며 지구에서 이뤄진 크고 작은 결정의 우선순위에서 자연스레 밀려났다. 많은 생명들은 인간의 이기심으로 인해 자신들의 보금자리나 존재 자체를 잃어버리게 됐고, 오늘날에도 이 멸종의 흐름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 모든 것에 책임을 져야 할 인간은 과연 충분한 부끄러움과 미안함을 느끼며 살고 있는지.
점점 녹고있는 빙하 위에서 생존을 위협받는 북극곰 ‘눈보라’. 이 가엾은 곰이 먹을 거리를 찾아 인간의 마을로 내려온 이유는 응당 인간에게 있거늘, 인간은 이를 미안하게 여기며 따스하게 품어주기는 커녕 눈보라를 인간을 해치는 ‘골칫거리’로 여기고 내쫓는다.
오래 이어진 삶의 터전과 생을 유지하게 하는 먹거리가 사라지고 있는 것은 인간의 잘못이지만, 눈보라는 인간을 ‘말썽꾸러기’로 여기며 그들을 위협하지 않았다. 인간이 버린 쓰레기 사이에서 먹을 거리를 찾으려는 안쓰러운 북극곰 눈보라. 그러나 인간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협한다는 핑계를 내세우며 영원히 그들의 세계에 발을 들이지 못 하도록 눈보라를 위협한다. 그 위협에 반항할 수 없는, 눈보라와 같은 수많은 존재들은 지금도 인간에 의해 천천히 ‘살해’당하고 있다.
인간 중심의 질서를 하루아침에 바꿀 수 없다면, 적어도 직간접적 가해자로서 죄책감을 안고 수많은 생명의 생존을 위협하지 않을 방법을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속죄일 터. 나부터 익숙함과 편리함에 기대어 환경과 지구를 해치는 행동의 유혹에 빠질 때마다, 눈보라의 슬픈 눈빛을 떠올릴 수 있기를 다짐해본다.
자신의 본래 얼굴을 숨기고 인간이 좋아할 모습으로 변장할 수 밖에 없던 눈보라의 마음은 어땠을까. 흙으로 변장한 자신의 얼굴을 좋아하는 것 마저 철저히 인간의 필요에 의한 ‘이기적인 선호’임을 깨달은 눈보라. 나의 존재의 이유가 다른 이에 의해서 부정당하고, 그로 인해 진짜 내 모습을 숨기며 세상에 존재하기 위해 애쓸 수 밖에 없는 눈보라. 존재 그 자체로 인정받고 사랑받길 원하나 존재 그 자체로만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눈보라의 모습 속에서 자신의 애달픈 현실을 발견할 것이다.
전 세계를 혼란에 빠트린 전염병과 기후 이상 징후 등은 인간의 이기심을 향해 지구가 보내는 참혹한 경고일지도 모른다. 그 경고를 무시하지 않기를 바라며 간절한 마음으로 그려냈을 강경수 작가의 그림책 ‘눈보라’. 엄마의 마음을 다잡고, 아이가 한 살씩 성장할 때마다 아이의 마음 또한 넓혀줄 이 멋진 그림책을 접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
(출판 전 가제본을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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