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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여자
아니 에르노 지음, 김계영 외 옮김 / 레모 / 2021년 3월
평점 :
강약의 논리로 설명되는 사회의 권력 구조와 전반적인 분위기는 시대를 불문하고 수많은 여성들에게 맹목적이며 획일화된 ‘완벽한 여성성’의 이미지와 의무를 부과해왔다. 어디서 태어나 무엇을 배우고 경험하며 살아왔든지 결국 사회가 대다수 여성에게 바라는 궁극적 요구는 충실한 “가정의 수호자, 집안의 유지보수 담당자(p.205)”로 사는 것이었다. 자신의 개인적인 성향과 다양한 가능성을 억누르고 살 수 밖에 없었던 여성들. 어린 시절부터 가정과 학교와 사회와 국가가 주입시켜 왔던 여성들의 생존전략은 ‘남이 원하는’ 모습을 갖추어 순응하는 삶이었다. 아니 에르노가 써내려간 ‘나’의 이야기는 오랜 세월동안 자신을 희생하고 잃어버림으로 살아왔고 살아올 수 밖에 없었던 수많은 ‘여성’들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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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32
자기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에는 성별이 없고, 정답도 없다.
성별의 구분 없이 동등한 위치와 흐름 위에서 살아간 부모를 보고 자란 ‘나’. 사회의 통상적 관점에서 비정상적인 영역으로 비춰지는 ‘나’의 가정은 ‘나’로 하여금 해야할 일, 중요한 일의 구분과 결정에 성별이 관여할 수 없음을 체득하도록 이끌었다. 그러나 집 담장을 벗어난 외부의 세계는 사회의 보편적인 흐름 위에서의 인생의 결을 끊임없이 주입하며 이를 따르기를 요구한다. 개인의 외모와 태도, 행동까지 하나 하나 검열하고 개인의 선택(학업, 취업, 결혼, 출산 등)에 획일화된 정답을 제시하는 사회에 소속된 ‘나’는 ‘나’를 규정지으려는 외부의 입김과 손길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기에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도 조금씩 변해간다. 외부의 요구와 나의 욕구가 점점 겹쳐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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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69
“이건 카뮈가 한 말이지, 어떤 존재를 사랑하는 것은 그와 함께 늙어가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정확한 말이야, 너는 그렇다고 생각 안 하니?” 나는 숨을 참았다. “우리 결혼해야겠지? 넌 어떻게 생각해?”
‘함께 늙어간다’는 말은 당사자 모두에게 동일한 의미를 갖지 않는다. ‘함께 살고 있는 공간’ 또한 당사자 모두에게 동일한 의미를 갖지 않는다. 동일선상에서 함께 걸으며 삶의 유지를 위한 모든 노력과 희생을 같이 하는 것과 거리가 먼, 결혼 후의 ‘나’의 일상. 두 사람은 똑같은 시간과 공간에서 숨을 쉬고 있으나, 모든 공기 입자 하나 하나에 달라붙어 있는 “우월성”의 지배 하에 서로 다른 시간과 다른 공간에서 살아간다. 일방적인 책임과 의무로 점철된 ‘쇠락’의 기운 위에서 변함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전진’의 기세가 이어지는 시공간에서 두 사람은 결코 ‘함께’ 늙어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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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19
삶, 세상의 아름다움. 모든 것이 나의 외부에 있었다. 이제 발견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p.222
그러나 여러 번, 공원에서, 유모차를 밀면서, 나는 나의 아이가 아닌, ‘그의 아이’를 산책시킨다는 이상한 느낌을, 남편이자 아빠인, 그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그를 안심시키는, 위생적이고 조화로운 시스템 속에서 움직이는 말 잘 듣는 하나의 부품이라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한 남자와 평생을 함께 하기로 약속하는 결정의 순간. 한 지붕 아래서 가정의 안정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시간. 임신과 출산 과정을 거쳐 한 생명을 길러내는 기간. 그 모든 타임라인에서 ‘나’는 소멸되어 간다. (사회를 뒷받침하는) 나의 가정, (사회인으로 살아가는) 나의 남편, (사회인으로 살아갈) 나의 아이가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모습을 갖출 수 있도록 전적으로 지원해야 하는 ‘나’. 성(性)을 떠나 한 개인으로서 내 가치관, 생각, 욕구, 희망, 꿈을 드러내지 못 한 채 고독한 침묵 속에서 누군가의 ‘무엇’으로만 존재하는 ‘나’는 사회의 유지를 책임지며 사회와 점차 단절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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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05
나는 안시를 싫어한다. 내가 매몰된 곳이 바로 거기다. 나는 그곳에서 날마다 그와 나의 차이를 경험했고, 옹졸한 여자의 세계에 빠졌고, 자질구레한 걱정들로 질식할 것 같았다. 고독.
나를 비춰주는 거울과 같은 문장 속에서 한참을 벗어나올 수가 없었다. 결혼과 동시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에서 지내게 되며 수개월간 경험했던 (그리고 수년이 지난 지금도 완전하게 극복하지 못 한) 우울의 감정은 이 곳에서 나 자신이 ‘매몰’되고 있다고 느끼는 것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이전의 내가 나 자신으로서 가졌고, 누렸고, 지키려고 노력했던 모든 것을 내려놓음으로 남편의 직장 생활과 우리 가정의 평안은 유지될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 모두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언제나 나를 향한 전폭적인 지지를 보냄과 동시에 나를 위한 자신의 수많은 노력과 행동을 마땅히 해야 할 의무로 여기는 사람이 내 옆에 있었다는 것. 그렇기에 나는 더 깊은 곳으로 매몰되지 않을 수 있었다.
책을 읽고 나서 남편과 긴 대화의 시간을 가지며 다시 한 번 되새김한 사실은, 내 인생의 밧줄은 내가 만들 수 있고 내가 만들어야 하며 내가 직접 쥐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만, 나의 가치관을 존중하고 나의 행동의 중요성을 정확하게 인지하며 앞으로도 내가 내릴 모든 선택과 결정을 지지할 사람이 곁에 있다면 내 밧줄의 내구성은 더 강해질 수 있다. 그렇기에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흠집을 내며 심지어 끊어버리려 했던 ‘얼어붙은 여자’의 밧줄을 내내 분노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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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45
여자로서의 나의 모든 이야기는, 투덜거리면서 내려가는 계단의 이야기다.
이 책의 ‘나’와 현실의 ‘나’는 살아가는 시대와 환경이 몹시 다르다. 그렇다고 하여 내 삶에서 직접 겪어본 적이 없었던, 책 속의 여러 ‘장면들’이 내게 결코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책장을 넘길 수록 분노에 휩싸이고 울적해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성이라면 필연적으로 안고 갈 수 밖에 없는 수많은 우려가 나를 움츠러들게 하여 소극적으로 행동했던 인생의 여러 기점이 내 삶에서 분명 존재했기 때문이다. 내 영육을 모두 소멸시키는 듯한 극심한 고통으로 생의 끈을 놓아버리고 싶었던 순간들도 내 삶에서 분명 존재했기 때문이다. 책 속의 장면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의 삶에서 분명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과거와 현재, 세계 곳곳에서 얼어붙어 있는 수많은 ‘나’와 이 책을 함께 읽으며 꿈을 꾸고 싶다. 한없이 깊은 곳으로만 내려갔던 그 계단에서 뒤돌아 다시 지상으로 올라올 수 있기를. 암흑에서 빛으로 돌아선 그 순간의 눈부심을 함께 견뎌줄 이들이 곁에 있기를. 빛으로의 등반을 막는 모든 검열과 통제, 억압의 손길이 점차 사라져 모든 이들이 ‘나’에 의한 ‘나의 구원’을 마음껏 희망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