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다.
시계는 여섯시를 지나지 못한 채 힘겨워 하고 있었고,
나도 새벽과의 조우를 반복하며 아침을 맞을 준비가 안된 채 힘겨워 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는 눈을 감았고,
요 며칠 동안은 잘 베어진 얇은 순간마냥 깜빡이며 사라지던 꿈에서 나는 다시 그녀를 만났다.
다시 만난 그녀와 나는 어느새 손을 부드럽게 잡고 있었고, 허리와 허리를 밀착한 채 걷고 있었다. 나는 저 멀리 하늘을 거쳐 다녀온 땅의 이야기를 해주었고 그녀는 따스한 미소로 나의 말을 놓치지 않고 담아주고 있었다. 높은 천장과 견고한 나무가 편안함을 안겨주며 서있는, 들어갈수록 따스할 것만 같은 층층의 건물로 들어가다, 나는 눈을 떴다.
따스한 안김과 뜨거운 안음을 흐르는 내 몸에 뚫린 온갖 구멍에 밀어넣고 싶었지만,
현실의 시간은 나를 깨워 어서 이 세계의 옷을 입을 것을 주문했다.
급하지만, 여유롭게 씻었다. 아침을 먹지 않아 생기는 여유로 집을 나섰다.
나가는 길에는 어쩔 수 없이 시집을 들고 나섰다. 심보선이었다.
다른 시들을 뒤적이다, 설잠이 들었고, 올라오는 에스컬레이터에서 아마도 오늘 마지막으로 보게 될 시를 잡아 읽었다. 제목대로, 슬픔이 없는 십오초 였다.
슬픔이 없는 십오초
아득한 고층 아파트 위
태양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지 오래다
가끔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난다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
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
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내는 오후
과거가 뒷걸음질 치다 아파트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
현재는 다만 꽃의 나날 꽃의 나날은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이어서 슬프다
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먹고 있다
여자가 카모밀 차를 홀짝거리고 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듯도 하다
나는 길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
남자가 울면서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궁극적으로 넘어질 운명의 인간이다
현기증이 만발하는 머릿속 꿈 동산
이제 막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났다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커피를 마셔야겠다.
지붕위에서 태양을 맞는 눈이 괜히 부럽고 자꾸만 바라보게 되는 아침이다
이 순간을 놓치기는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