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31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앙드레 지드는 1869년 파리에서 출생했다. 그러나 1951년에 타계했으니 그를 세기별로 분류하자면 20세기의 작가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 싶다.  

 <좁은 문>은 지드가 3년 간 무수한 포기와 재시도를 통해  완성킨 작품이었다. 고투를 거친 이 작품으로 인해 지드는 유명 작가가 되었으며 비난과 찬사 속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실히 다졌다. 작가의 이런 고통은 너무나 개인적인 일에 그치지만 그로 인해 명작이 탄생된 후에는 그 고통조차 작품의 기저에 흐르는 어떤 기반이 되는 것 같다.  거기에다 내용이나 분위기가 중세의 신앙심과  차원높은 귀족적인 사랑을 담고 있어(물론 주인공들은 귀족은 아니었고 신앙심 깊은 부르주아 집안의 자녀들이었다) 왠지 20세기의 작품같지 않고 17,8세기의 문학작품을 보는 느낌이었다. 

 주인공 제롬은 어릴 때 이미 외사촌 누이인 알리사를 사랑하게 된다. 나이에 비해 열정적이지만 진지한 제롬은 자신의 사랑을 그대로 알리사에게 고백하지 않는다. 그러나 서서히 제롬의 사랑은 알리사와 그 가족들에게 전달되고 친지들은 둘의 사랑을 인정한다. 

 그러나 알리사는 제롬의 사랑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녀는  엄마가 없는 집안의 장녀이고  제롬을 남몰래 좋아하는 동생 줄리에트 때문에 곤란에 빠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둘의 사랑은 기쁘고 환희에 찬 교감을 이룰 수 없게 된다. 알리사는 제롬의 사랑을 붙들어 두고 싶은 유혹과 연하의 제롬을 떠나보내야 한다는 압박을 동시에 느끼는 괴로움을 늘 안고 있다. 이에 반해 제롬은 오직 알리사만을 향한 사랑을 갈망한다. 둘의 사랑은 제롬의 열정과 알리사의 고뇌에 찬 갈등으로 인해 언제나 완전하지 못한 정신적인 부분에서만 이루어진다. 그러나 둘의 사랑이 너무나 지대하기에 서로는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더구나 그들에게는 신이 있다. 하느님은 그들의 사랑을 더 원숙하고 거룩하게 만들어주는 지고한 존재로 끝까지 개입한다.

 줄리에트가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해 행복해졌음에도 제롬과 알리사의 사랑은 지상에서 이루어지지 못하고 천상에서의 합일을 위해 늘 유보된다. 그리고 마침내 알리사는 인간적인 그리움에 목말라하면서 하느님을 바라보며 죽는다. 알리사가 죽고 줄리에트에 의해 알리사의 일기가 제롬에게 전해진다. 그들의 사랑은 지고지순했지만 언제나 슬픔과 외로움을 깔고 걸어가는 고통스런 길에 다르지 않았다.

 신을 향한 성스런 신앙심과 연결된 남녀의 사랑, 그것은 정말 미덕일까, 아니면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또다른 야만일까. 전자에도 후자에도 그렇다고 답을 할 수 없다.

 이 작품이 지드의 자전적 소설이라하는 데 충분히 공감되었다. 순수하고 두려움이 많은 어린 시절, 사랑에 빠지면 열정은 타오르지만 어떤 행동도 할 수 없는 까마득한 절망에 홀로 몸부림치는 청춘이 얼마나 많은가. 첫사랑은 모두 실패요 그래서 그리움으로 남는다.

 이 작품을 읽고 '독일인의 사랑'이나 '골짜기의  백합'이 연상되었다. 이런 유형의 사랑은 의외로 과거에 많았다고 여겨진다. 많은 사람들이 그래서 이런 작품들을 읽고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신앙이 특수한 사람들의 삶으로 여겨지고 사랑이 수많은 매체를 통해 소비되는 현재, 더이상 알리사나 제롬은 명작에서나 만나는 인물들이 되어간다. 현 시대는 사랑을 위해, 거룩하고 완전한 사랑을 향해. 금욕을 당연시하지 않는다. 아니 하지 못한다. 그럴만큼 신앙을 우러르지 않으며 사랑을 성역으로 여기지 않는다. 사랑은 향유하는 것, 기쁘게 공유하고 이 삶에서 이루어야 하는 것으로, 천상에서 이루기 위해 유보하고 인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 때문에 아파하고 몸져 누워 본 사람들에게 <좁은 문>은 여전히 가슴을 울리는 가치있는 고전이 될 것이다. 

 

알리사의 일기에서 잊을 수 없는, 내 마음을 그대로 표현한 것 같은 명구절들을 옮겨본다.

 

그이 없이 내가 살아가야 할 것들 가운데서 어느 것도 나에게 기쁨이 되지는 못한다. 나의 모든 미덕도 오직 그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의 곁에서는 나의 미덕이 스러져가는 것을 느낀다.(171쪽) 

 

아무리 행복하더라도 진보가 없는 상태를 나는 바랄 수 없다.(171쪽) ...그래서 언어의 유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진보'하지 않는 기쁨 따위를 나는 경멸한다고 말할 수 있다(172쪽) 

 

 우리의 미덕이 애를 쓰는 것은 미래의 보상에 대해서가 아냐. 자기의 고통에 대한 보상이라는 생각은 착하게 태어난 영혼에게는 상처를 입히는 것일 거야. 덕이라는 것도 그런 영혼을 장식하는 패물은 아니야. 아냐, 덕이란 그런 영혼의 아름다움이 지니는 형태 바로 그거야. (173)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완덕으로 향했던' 것은 오로지 그를 위해서만이었다. 그런데 이 완덕은 오로지 그가 없어야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 이것은 오, 나의 주여! 당신의 모든 가르침 중에서도 가장 저를 당황케 하는 것이옵니다.(175)

 

오! 사랑의 힘으로 우리 두 영혼을 한꺼번에 사랑 저 너머로 이끌어갈 수만 있다면!(176)

 

그 어떤 영혼인들 그의 영혼보다 더 당신에게 값한 적이 있사옵니까? 저를 사랑하기 위해서보다는 더 훌륭한 일을 위해서 태어난 그가 아니옵니까?(176)

 

내가 내 눈, 내 입, 내 영혼에 부과하는 구속이 너무도 힘들기에, 너와 헤어진다는 것도 내게는 해방이며 또 쓰디쓴 만족이 된다.(177)

 

두 순례자처럼 인생의 길을 따라 걷게 하여주시옵소서. 아니옵니다!...주여, 좁은 길이옵니다. 좁아서 둘이서 나란히 걸을 수도 없는 길이옵니다.(178)

 

저는 아옵니다. 이 모든 것이 제롬에게서가 아니라 당신에게서 온다는 것을. 하지만 어디에나 당신과 저 사이에 그의 모습을 두심은 어찌된 일이옵니까.(180)

 

제롬, 곁에 있으면 마음이 저려오고, 멀리 있으면 죽을 것만 같은 나의 애달픈 벗, 내가 아까 하던 모든 말 가운데서 내 사랑이 네게 이야기하던 것 외에는 아무것도 듣지 말아줘.(188)

 

저의 사랑을 달랠 수 없을 만큼 부추기는 이 집, 이 정원, 오직 당신만을 뵙게 될 곳으로 달아나고 싶습니다.(188)

 

이제 더 이상 삶에 대하여 바라는 게 없기 때문이다. 이제는 다만 하나님만으로 만족해야 하기 때문이고,(189)

 

 

주여, 제 자신이 필사적으로 도달하려고 했던 미덕의 정상에까지 그를 밀어올리려고 미칠 듯이 원하던 이 마음의 어설픈 표현을, 이 일기에서 그가 때때로 찾을 수 있도록 해주옵소서.(191)

 

 

 

 

 

 

 

 

 

 

 

 

 

 

 

 

 


댓글(1)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pipaltree 2018-12-03 20: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좁은 문을 읽던 시절이 떠오르네요. 사춘기 시절, 누구나 앙드레 지드를 끼고 좁은 문을 읽고 배덕자를 얘기했지요. ‘신의 세계에는 예술이 없다‘던 지드는 그래서 누구에게나 추억으로 남나봅니다.
 

 

한 달 전 쯤  목로주점을 읽었다. 에밀졸라의 필력과 그 사유의 세계, 그리고 세세하고 생생한 묘사와 이야기에 완전히 함몰됐다. 받은 감동과 경탄을 내 안에서 사라지게 하고 싶지 않아 짧은 글로나마 남겨두어야겠다.

 

선입견이란 가당치 않다. 목로주점이라는 제목 때문에 그럴싸한 낭만적인 연애소설이나 에세이적이고 목가적인 풍경이 그려진 소설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책을 펼쳐보니 그 목로주점이 아니었다. 낭만이나 애수는 유치한 선입견이고 일일 노동자들이 간신히 저녁시간 잠시 노동의 피로를 잊고 술을 마시다 주머니를 다 털어내는 불량스런 주점이라고 하면 온당할 주점이었다. 더구나 결말은 너무나 참혹한 여주인공 제르베즈의 죽음으로 끝나기 때문에 제목에 대한 반감을 떨칠 수 없었다.

 

도대체 왜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불행이 여러가지로 겹쳐서 오는 걸까.

한쪽 다리를 살짝 절고, 어린 나이에 임신을 하고, 파리로 올라온 후 남편은 다른 이웃집 여자와 도망을 가고, 다정하고 살뜰했던 재혼한 남자는 다리를 다친 후 전혀 다른  인간이 돼 버리고, 하나 밖에 없는 딸은 불량스럽고 음란하며, 동네 사람들과 친척은 비웃고 조롱하고, 진정으로 사랑했던 구제와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지요? 이 말이 생각난다.

왜 막가는 거지? 왜 되는 일이 없지? 왜 이렇게 비루하지, 인생이?

제르베즈가 뭘 잘못했다고, 그녀가 무슨 원한을 지게 했다고, 그녀가 언제 나태하고 타락했다고 세상은 그녀를 그렇게 못살게 군걸까.

 

에밀 졸라는 정말 인간의 유전적 요인과 환경적 요인이 인간의 삶을 지배한다고 믿었던 것 같다. 

나 또한 그렇게 믿는다. 그러나 백프로 그렇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살면서, 성숙하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차츰차츰 깨닫게 되고 자신을 더 고고한 자리에 올려놓기 위해 애쓰기도 하는 게 인간이 아닌가.

 

하지만 졸라의 시각은 너무나 훌륭하다. 실제로 자신의 태생과 지리적 환경적 제한 때문에 자아를 완성하지 못하고, 자기를 실현하지 못하고 죽은 사람이 지구 위에 얼마나 많았던가. 가난 때문에 몇 십 년을 오직 돈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니 자연주의적 이론, 결정론 등이 많은 사람들의 생을 설명해 준다고 생각한다.

 

목욕탕에서 제르베즈와 나쁜 그 여자(이름을 벌써, 아니 책 덮자마자 잊었다)와의 광란적인 싸움,

제르베즈 결혼식 날, 초라하고 촌스런 지인들이 떼지어 루브르 박물관을 헤매는 모습,

개업한 세탁소에서 저녁부터 흐드러진 잔치를 벌이는 모습,

구제를 찾아가 어마어마하게 큰 철공소에서 남자들과 기계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는 장면,

아내를 폭행해 숨지게 하고, 자신의 첫째 딸에게 인형에게 하듯 쉼없이 때리고 학대하는 다른 층 알콜중독자의 소름끼치는 공포스런 장면,

눈이 날리는 파리의 외곽지역을 몸을 팔기 위해 헤매는 제르베즈의 모습,

그리고 거기서 하필 우연히 만나게 된 구제, 구제의 집에서 따듯한 음식을 먹고 이제 정말 구제와는 모든 게 끝난 상황이 되고,  구제는 침대에 쓰러지며 운다.

너무나 가슴이 아려오는 이 장면 등등.....

모든 장면이 선명하고 생생하게, 확실한 이미지를 남기는 묘사였다.

 

에밀졸라에게 영원한 경의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돈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5
에밀 졸라 지음, 유기환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최근 졸라의 작품을 연이어 읽고 있다. 자의는 아니고 로쟈샘의 프랑스문학 읽기에 따라가는 형태다. 이 강좌를 수강하기 잘했다는 확신이 다시 한 번 각인되었는 바, 이는 어젯밤 읽기를 마친 <돈>때문이었다. 나 혼자서라면 564p에 달하는 이 책을 읽어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바로 전의< 여인들의 행복백화점>도 그렇고, 그 전의 발자크도 마찬가지였으며 지난 학기 독일문학 역시 그렇다.
정말 몇 백 페이지를 구준히 읽어내는 일은 체력과 인내를 요한다. 물론 책을 읽으며 몰입되는 과정에서 작품 자체가 나를 견인하기도 하지만 어느정도의 목적의식이 있어야 독서도 가능하다.
물론 내겐 목적이 있다. 단순한 책읽기는 아니다. 나는 배우기를 멈출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에밀 졸라는 경탄과 존경을 자아낸다.이 대작가는 아마도 인간사 전체를 꿰뚫고 있었던 것 같다.인간들의 유형과 그들의 본성, 그들의 환경과 그 속에서의 고투와 작태, 심리, 그리고 그 여러 요인들이 빚어낸 인생과 그 결말.... 자연주의적 작품들이니, 그의 사상을 실험한 소설들이니 오죽 더 할까.

<돈>을 읽고 느낀 점을 대강 적어보면,

주인공 사카르에 대한 작가의 관점이 사실은 돈에 대한 작가의 관점과 일치할 것 같다. 그 점은 작가가 카롤린의 심리를 설명하는 데에서 여러번 언급되는데 작가는 카롤린을 통해 자신의 가치관을 내보이고 있다해도 그닥 틀리지 않으리라 본다. 모든 작가는 자기가 긍정하는 인물을 통해 자신의 사유를 드러내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카롤린은 은행을 설립하고 주식을 발행하는 사카르에게 처음에는 동의와 찬사를 보내지만(사실 그녀는 감사의 마음까지 지녔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카르의 공격적인 증자와 주가의 상승세에 불안과 불신을 갖게된다.
결국 그녀의 불길했던 예감은 사카르와, 그와 주식을 함께 나눴던 수많은 사람들의 파산으로 끝나고 그녀는 사카르를 증오한다. 그러나 오빠의 권유로 그를 마지막으로 찾아갔을 때 그녀는 사카르를 용서하게 되고 그의 끝없는 생명력에 오히려 매혹당한다. 그녀는 방탕하고 무분별한 사카르를 왜 여러번 용서하고 참았던가?
그것은 무엇보다 언제나 생기를 지니고 세상을 정복하려는 그의 넘치는 생명력에 감동하기 때문이었다.
이건 추론인데 사람른 누구나 어린아이같은 순수성과 그 뛰노는 행동에 저도 모르게 마음이 빠져드는 게 상식적이지 않을까 싶다. 누구나 행동하는 사람, 노력하는 사람, 무언가에 열중하는 사람에게 매혹당한다.
그러나 마조의 비극, 보빌리에의 참혹함,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의 파산을 생각하면, 그래도 사카르가 인간적 매력으로 그 죄를 환치할 수 있을까.
없다고 본다. 그가 인간적인 또는 남자로서의 매력, 더구나 세상을 잠시 환하게 밝혔던 그 재능에도 불구하고 숱한 사람들의 파멸을 불러온 책임에서 자유로워서는 안되니까.

또 이 작품에서는 인물을 다면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여러 장면에서 한 인물의 상반되는 모습을 그렸다.
사카르의 면면은 말할 것도 없고 카롤린조차 가끔 이랬다저랬다 한다. 그러나 이 점에서 가장 확실하게 떠오르는 인물은 아마도 뷔슈일 것이다.
그는 시기를 놓쳐버리고 주인을 잃은 채권들을 모아두었다가 끝내 그 행방을 찾아내 어떻게해서라도 돈을 받아내는 치밀한 악덕브로커이다. 그러나 그런 그가 자신의 동생을 보살필 때는 너무나 지순하고 자애와 서글픔이 가득한 행위를 보여준다. 동생을 위해 그렇게 극악스럽게 살고 있다는 인상까지 줄 정도이다
졸라는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닐까. 진정한 악인은 몇 되지 않는다. 진정한 선인도 아주 드물다,라고......
사실 뷔슈같은 인물은 의외로 많다. 우리는 악인들이 자신의 가족에게 하는 행동들을 미루어 알고 있다.
그들은 돈을 벌기위해 어쩔 수 없이 악인이 되어 가족을 지키려 함일까, 아니면 정말 나쁜 사람인데 가족에게만 상냥한 사람들일까, 둘 다 일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내 생각은 이렇다. 뷔슈는 악인이다. 메솅도 아주 악질적인 인간이다.
이 작품 속에서 끝까지 진실한 사람은 아믈랭과 뷔슈의 동생뿐이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진실대로 살기 어려운 비극성을 띤 사람들이다.
나머지 인물은 모두 상황에 따라 자신을 바꾸는, 야비하고 기회주의적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애처로운 사람들이다.

<돈>의 인물들이 21세기 지금도 여전히 이 땅에 즐비하게 살고 있다. 그들은 타락하고 실패하고 성공하고 욕망의 끝에서 아둥바둥 살아간다. 그러나 그들의 완전하지 못한 열정과 욕망이 문명을 이루고 사회를 건설한다는 것에 공감한다. 그리고 그들의 탐욕과 비도덕적인 행위가 세상을 후진시키기도 하며 다수를 공포에 떨게 하기도 한다. 나도 그들 중 하나이다. 한 번도 완전히 도덕적이었던 적이 없었고 완전히 타락에 맡겼던 적도 없었던, 평가를 내릴 수 없는 과정 속에 있다.

시간이 된다면 에밀 졸라를 다 읽고 싶다.
읽어야할 책은 무궁하고 볼 수 있는 책은 유한하다. 너무 유한해서 문제다.

에밀졸라에게 경의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31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