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준비의 기술
박재영 지음 / 글항아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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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영 작가의 [여행준비의 기술]을 읽었다. 세상에 읽어야 할 책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아직 알지 못하는 글을 잘쓰는 작가들이 얼마나 많은지 새삼 다시 한번 알게 되었다. 좀 더 일찍 이 책을 만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코로나로 인해 안식년의 해외체류 계획이 망가진 시점에 읽었더라면 아마도 코로나를 더욱 원망하며 한탄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나마 위안을 얻는다. 여행을 그렇게 즐기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이상하게도 여행계획을 짜기 시작하면 설렘이 밀려오며 촘촘한 시간표를 준비하기 시작한다. 


여행도 어찌보면 개인적 성향과 관련이 있어 좋아하는 스타일도 여러가지고 교통과 숙박과 식당에 대한 개취도 각양각색이라 동행하는 이의 의견도 배려해야 하는 조금은 피곤한 시간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막 일상을 벗어나 새로운 장소에서 예기치 못한 경험을 기대케 하는 여행은 이런 자잘한 걱정들을 뒤로 밀어둔채 불도저처럼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평소보다 과감한 지출을 강행하며 배우의 유행어처럼 "진행시켜"를 연발한다. 


특히나 해외여행에 대한 경험담은 무슨 배틀이 벌어진 것처럼 자신이 다녀온 곳의 진귀함을 드러내고 싶은 뻐김으로 점철되어 과장되거나 무용한 정보를 산발시키기도 한다. 청자는 아니꼬우면서도 내심 부러움을 감출 수 없어서 내가 다녀온 여행지를 떠올려 보지만 딱히 주목받을 만한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면 갑자기 인생의 패배자가 된 것 같은 씁쓸함이 밀려와 '여행 그 따위거 개나 줘버려'라는 염세주의의 늪에 빠져들기도 한다. 뭐 아무려면 어떠하겠는가, 나도 언젠가는 근사한 곳에 가서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여행을 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여행계획이나 짜면 어떨까? 이런 긍정적 마인드를 야기시킨 저자의 글에서도 가끔씩 '이거 자랑질이 너무 심한거 아닙니까?'라는 반발심이 불끈 솟아오른다.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내가 인솔해서 가야하는 여행에서부터 마치 여행사처럼 시간표를 짜며 동선을 예상하여 방문지와 식당의 거리를 계산했던 것 같다. 국내여행이라면 뭐 그 정도야 그렇게 어렵지 않고 돌발상황에도 충분히 대처가 가능하겠지만, 해외여행에서는 그야말로 멘붕이라는 말이 가장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몇 년 전에 친구와 친구 친형내외를 모시고 나름 가이드와 같은 형태로 로마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철두철미한 계획표를 세우고 매 끼니 식사 장소와 기차표 예매, 투어 예약까지 빈틈없이 준비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너무 황당하게도 안전의 안전을 생각하고 숙소 예약을 맡긴 여행사에서 펑크를 낸 것이다. 밤 늦은 시각에 숙소에 도착해서 체크인을 하려고 하는데, 우리를 마주한 직원의 표정이 뭔가 심상치 않았다. 한 눈에도 이 시간에 올 손님이 없는데 라는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름을 말하고 숙소 예약을 했다는 말에 한참이나 검색을 하던 직원은 그런 기록이 없다며 확인을 해달라고 했다. 머리속이 하얗게 되어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어떻게 벌어질 수가 있는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혼자였다면 뭐 어디든 다른 숙소를 찾아 툴툴거리며 갔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행스럽게 출국 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여행사의 현지 직원의 연락처를 받아왔기에 급한 마음에 떨리는 손으로 버튼을 눌렀다. 연락을 받은 현지 직원은 그럴리가 없다며 잠시 기다리라고 했고 나의 친구와 형님 내와는 불안한 눈빛으로 하지만 괜찮을거라고 나를 위로했다. 얼마 후에 그 직원 분이 직접 호텔로 와 주었고 도대체 어디서 누가 실수를 한 것인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다행스럽게 다른 호텔로 숙소를 잡아주었다. 내가 원한 위치가 아니라 동선이 조금 꼬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첫날부터 노숙을 하지 않은게 얼마나 다행인지 저절로 하느님께 감사라는 말이 나왔다. 여행 내내 그리고 다녀와서도 왜 숙소에 돈을 아끼느라 그런 곳을 예약을 했을까란 후회와 더불어 누군가의 귀한 여행을 이끈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깨달은 귀중한 경험이었다. 


답답한 일상에 지쳐갈 때, 누군가 긴 여행을 다녀와서 무용담을 늘어놓을 때, 휴가철이라 다들 어디론가 떠날 때, 나도 가고 싶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을 때 여행기를 뒤적거린다. 이번 저자의 책처럼 여행을 즐기는 사람의 소회를 읽기만 해도 어느 정도 여행에 대한 욕구가 해소되는 것 같다. 어차피 시간과 돈이 허락된다고 해도 도저히 갈 수 없을 것만 같은 여행지도 어느 여행가의 책으로 대체해도 충분한 만족감을 얻기도 한다. 반갑게도 내가 다녀온 곳을 소개하는 여행가의 글을 볼 때면 그날의 기억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아 내가 사람들이 쉽게 갈 수 없는 곳을 다녀왔구나라는 뿌뜻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특히나 거의 여행전문가 같은 저자가 소개한 장소와 식당은 내가 가본 곳이 거의 없어서 우와 세상에 정말 가볼 곳이 무궁무진하구라는 감탄이 터져나왔다. 그런데 저자가 아직 못 가본 곳 중의 7곳 장소 중의 하나인 영국의 레이크 디스티릭트 공원이 내가 오래 전에 가본 곳이라서 깜짝 놀랐다. 그때는 그냥 막연히 아 정말 공원이 아름답고 좋구나라는 느낌이었는데, 그곳이 사람들이 가고 싶어하는 곳 중의 하나였다니. 조금 놀랍고 나는 그때 친구 덕분에 복받는 거였구라나는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던 지루한 팬더믹 사태가 마무리되고 이제는 거의 예전과 다른 없이 자유로운 여행을 즐길 수 있는 때가 돌아와 지난 주말 인천공항 하루 출입국자가 12만명에 달한다는 뉴스를 볼 때면 나도 언제일지 모를 여행 출발의 날을 위해 사부작사부작 여행준비를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진짜 가보지 않아도, 진짜 먹어보지 않아도 대리만족할 수 있는 기회는 넘쳐나기에 옹졸하게 다른 이의 여행 추억을 비꼬지 말고 도움이 될 정보로 귀담아 듣는 아량을 갖도록 해야겠다. 


#박재영 #여행준비의기술 #글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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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
이미리내 지음, 정해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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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리내 작가의 [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을 읽었다. 얼마 전 문보영 작가의 아이오와 작가 레지던시에서 지냈던 내용이 담긴 [삶의 반대편에 들판이 있다면]을 읽으며 엑소포닉(exophoix: 이중 언어자)이라는 말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여러 가지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긴 호흡이 필요한 소설과 같은 글을 써야 할 때면 당연히 자신에게 가장 편한 언어인 모국어를 선택할 것이다. 의외로 모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글을 쓰는 작가들이 있었고, 이름이 알려진 유명한 작가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대부분 알파벳을 쓰는 유럽어를 사용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기에 언어의 유사성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20대까지 자란 사람이 성인이 되어 영어로 소설을 쓰다니, 그 사실만으로도 놀라웠고 작품을 읽고 나니 감탄과 감동은 배가 되었다. 


  황혼요양원에서 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묵미란' 이라는 이름의 할머니는 일종의 자서전과 같은 부고를 작성해주겠다는 봉사자와의 만남을 통해서 묵은 이야기를 꺼내게 된다. 묵 할머니가 머무는 A구역은 치매 환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기에 할머니의 방 배정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란 화자의 의심은 묵 할머니와 같은 방을 쓰는 송 할머니의 사연을 회귀하며 충분한 납득을 시킨다. 어쩌면 묵 할머니의 회상이 아주 어린 시절부터 차례차례 진행되었다면 더욱 손쉽게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었을텐데, 여덟 가지 인생의 각 쳅터가 시간의 흐름과는 무관하게 진행되어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하기까지 시간이 더 필요했다. 하지만 이런 앞뒤가 뒤섞인 배치 때문인지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며 마치 흐릿하게만 보이던 묵 할머니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름 없는 여자로 살아간 여덟 가지 인생이지만, 묵미란 할머니에게는 미희의 어머니로서 비현실적인 남편을 북한에서 재회한 '용말'이라는 이름, 그리고 영어 이름 '데버라', 그리고 용말로서의 삶을 선택하기 이전에 힘없고 나약하게 당할 수 밖에 없이 강요된 이름 '간요'라는 이름이 있었다. 한 가지 이름으로만 한 평생을 살아온 사람들은 아주 간단하게 당신의 원래 이름이 뭐냐고 물을 수 있다. 하지만 주인공처럼 마치 시대를 분활하여 살아오고 그때마다 다른 이름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었다면 진짜 이름을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심지어 남파 공작원으로 파주의 수풀 속에서 기거하며 미친 여자 노릇을 할 때 그녀에게는 이름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으니 이름 없는 여자의 인생이라는 제목이 더욱 그럴듯하게 다가온다. 


  우리나라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일제강점기 치하의 강제노역과 수탈 그리고 위안부의 상처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그러한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배고픔에 지친 양민들은 좌우 이념의 빗발치는 총칼에 이리저리 끌려다니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묵미란 할머니는 한 사람이 겪기도 힘든 이러한 엄청나고 비극적인 사건들을 관통하며 다행스럽게도 그녀의 영혼만은 여전히 건재하여 용말의 남편을 만나게 해준다. 취업을 시켜준다거나, 일본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거나 하는 사탕발림으로 끌려간 10대 소녀들 뿐만 아니라 용말과 미자처럼 그냥 장보러 나왔다가 납치된, 그 수를 일일이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소녀들이 태평양 전쟁이 치뤄지는 동남아시아의 어딘가에 내동댕이쳐져 일본군의 소모품으로 허비된다. 그 끔찍한 순간을 대체 어떻게 버텨낼 수 있었을까? 인도네시아 스마랑에서 기적적으로 살아간 묵 할머니는 남한으로 돌아와 끼니를 때우기 위해 소년 행세를 하게 되고, 부산에서 미군을 상대로 소일거리라도 얻을 요량으로 구걸을 하다가 몽키하우스라는 곳에서 머물게 된다. 


  전쟁이 벌어지면 전세계 어디서나 유사한 전쟁범죄가 벌어지게 되는데, 당연히 가장 나약한 존재인 여성과 노인과 아이들이 위협의 첫 번째 대상이 되기 마련이다. 폭력과 탈취와 강간이 난무하며 마치 전쟁이라는 상황이 인간의 가장 기초적인 윤리마저 제거해버린 것처럼 군인들은 폭주한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두려움 때문인지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한 이들은 내일을 생각하지 않고 충동과 욕구에 사로잡혀 수많은 사람들은 영혼을 짓밟는다. 하지만 그동안 몽키하우스처럼 미군들을 위한 위안소가 있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심지어 자국민들마저 그곳에 끌려온 여자들이 조국을 위해서 봉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니, 지금의 사대주의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끔찍한 사건을 연속적으로 견뎌낸 주인공은 스마랑에서 자신과 자매처럼 닮았던 용말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북한으로 돌아가 용말의 남편을 찾아낸다. 불운과 불행이 겹쳐 지독히도 고통스러웠던 주인공의 삶에 비록 가짜 행세라 할지라도 주인공에게 드디어 행복의 여명이 서서히 비춰지는 것처럼 따스하게 느껴졌다. 북한과 관련된 내용이 담긴 책을 읽다보면 자주 언급되는 것이 90년대 초반에 있었던 고난의 행군 시기이다. 북한 주민의 4분의 1이 아사했던 지독한 굶주림의 시기에 부모에게 버려지거나 부모가 죽고 남게 된 어린 아이들을 꽃제비라고 불린다는 것을 오래전에 들었었다. 그 당시의 실상을 담은 영상이나 사진들을 쉽게 볼 수 없기에 우리는 그저 막연하게 셀 수 없이 많은 북한 주민들이 굶어 죽었었다는 것을 숫자상으로만 헤아릴 뿐이다. 용말이 지켜보았던 실상처럼 어차피 굶어 죽을 바에는 압록강을 건너다 총살을 당할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탈북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사실 지금 우리나라에서 탈북자들에 대한 일반적인 시선은 그렇게 좋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아니 어쩌면 좋고 나쁘고를 떠나 그냥 관심이 없는 것 같다. 탈북자들은 좀처럼 표나지 않을 수 없는 북한 사투리로 인해 정체성이 너무나도 쉽게 드러나게 되고, 각박한 도시 생활에 허덕이는 남한 사람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여력이 없는 편이다. 하지만 탈북자들이 어떤 심정으로 알몸으로 차가운 강물을 건넜는지, 중국에서 공안에게 발각되어 강제송환되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성매매를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급박한 처지를 알게 된다면, 지금 우리사회에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게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싶다. 


  저자의 말에서 소설에서 언급된 사건들은 대부분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고 했는데, 읽는 내내 이건 실제로 벌어진 사건이 아닐 수 없다는 느낌을 자주 받았다. 저자가 사료를 바탕으로 했던, 실존 인물의 경험담을 토대로 했던 묵 할머니가 마주한 사건들은 도저히 인간이 상상해 낼 수 없는 범주에 머물러 있다. 인간이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는지, 어디까지 폐인이 될 수 있는지 격동기의 시대를 살아온 이들이 직접 온 몸으로 보고 느꼈기에 가능한 서사가 아닐까 싶다. 앞으로는 두 번 다시 이런 유사한 형태의 비참한 사건들이 일어나서는 안되기에 우리는 아픔을 견뎌내며 묵 할머니의 회고록을 천천히 꼽씹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첫눈에 시작된 사랑은 아니었다. 조금씩 쌓은 유대감이었다. 외국어를 배우는 것과 같았다. 배우면 배울수록 점점 더 몰입하는 기분을 느끼고 점점 더 즐기게 된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처럼, 많은 연습과 인내가 필요하다. 자장가를 흥얼거릴 때마다, 아이가 골을 부려서 달래줄 때마다, 이유식을 한 숟갈 떠 넣어줄 때마다 -아이가 삼키건 뱉건- 사랑이 안에서 조금씩 자라난다. 그 보상은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너의 입에서 처음 나온 엄마라는 말, 네가 나를 그려서 선물로 준 '내 최고의 동무'라는 제목의 막대 인간 그림, 갑작스러운 숨 막히는 포옹, 특별한 이유 없이 잠자리에서 졸린 목소리로 건네는 사랑해라는 말. 살아오면서 나는 그토록 취약하면서도 그토록 무방비한 상태로 조건 없이 사랑하고 신뢰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196)"


"제이슨은 말했어요. 따뜻한 눈물과 천사 같은 미소, 구조센터나 유니세프 광고에서 우리가 보는 그런 이미지들은 할리우드 배우들이나 고작 1년에 한 번 아프리가 고아원을 찾는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죽음과 학대와 질병을 봐야 하는 실제 일꾼과 구조원들은 눈물을 흘리는 데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할 여유가 없다. 날마다 먹이와 포옹과 생존을 원하는 수백 개의 작은 눈들이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다. 최대한 많은 생명을 구하고 돌보기 위해서는 로봇처럼 기계적이어야 한다. 감정을 보일 수가 없고, 모든 개들에게 사랑을 보일 수는 없다. 모두를 사랑하는 건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수를 사랑하는 것은 나머지를 모두 포기하는 것을 뜻한다고 했죠.(302-303)"


#이미리내 #이름없는여자의여덟가지인생 #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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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1~20 세트 - 전20권 (반 고흐 에디션) - 박경리 대하소설
박경리 지음 / 다산책방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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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부터 토지를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음만 앞설 뿐 과연 내가 그 장구한 이야기를 따갈 수 있을까란 생각에 미루었는데, 이제 박경리 작가님이 초대하신 우리나라 근대 역사의 장으로 기꺼이 들어가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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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은의 가게
이서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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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수 작가의 [마은의 가게]를 읽었다. '마은'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제목을 보았을 때 불혹의 나이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우후죽순으로 생겼다 사라지는 카페를 바라보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커피를 진짜 많이 마시는 것 같아도 커피를 팔아 가게를 운영하고 이익을 남기기란 쉽지 않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각종 프랜차이즈 카페와 식물원과 같은 대형 카페의 등장 그리고 아주 저렴한 가격의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치는 카페의 등장으로 웬만큼 특징을 갖지 않고서는 개인 카페를 유지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소설 속 주인공인 공마은이 카페를 차리고 운영하는 내용을 살펴보니 여성이 혼자서 자영업을 운영하는 데 그동안 알지 못했던 꽤나 심한 난처함과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학원 강사와 연극 배우의 일을 하다가 모은 얼마간의 돈으로 권리금이 없는 낡은 장소를 택한 마은은 빚을 지고 싶지 않은 마음에 덜컥 계약을 하게 된다. 최소의 비용으로 인테리어를 마치고자 이곳 저곳 업자를 만나 카페를 꾸미기 시작하지만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단계를 마주하게 되고 똥파리처럼 꼬여 어슬렁 거리며 이것 저것 참견하기 시작한 동네 남자들로 인해 위기감이 고조된다. 개업떡을 돌리라는 엄마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비상벨을 꼭 달아야 한다는 정미 언니와 작은 숲 카페 사장의 조언에도 마은은 비용 때문인지, 아니면 그런 두려움에 떨지 않겠다는 다짐 때문인지 아무런 안정 장치를 추가하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전세계 어느 나라보다 밤길을 걷기에 안전한 나라라고 하지만, 마은이 처한 상황에 몰입하다보니 결코 그렇지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는, 나의 친족인 젊은 여자가 혼자 카페를 운영하며 밤에는 그곳에서 텐트를 치고 생활하는데, 한 밤중에 누군가가 카페 안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면 얼마나 걱정되고 불안할까. 고시원 월세를 아까기 위해서 선택한 카페 안의 기숙은 너무나도 위태로워 보였다. 하지만 마은이 왜 불안과 공포에 떨어야 하는가? 카페 바닥은 보일러가 들어와서 한 겨울에도 따뜻하게 누울 공간이 있고 화장실도 있어서 샤워까지 가능하다면 구태여 좁디 좁고 그 또한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리빙텔과 같은 곳에 비용을 지불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될 것이다. 그러나 복병은 마은처럼 여자 혼자 머문다는 사실을 알게 된 빌런들의 출몰이다. 특히나 마은의 가게 근처에 자영업을 하는 중년 남성들은 마은에게 선 넘는 질문을 던지며 치근덕 거린다. 카페에 들어와 사적인 질문을 하거나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마은이 사근사근하지 않다고 대놓고 불평을 한다. 혹시나 그들이 사람들이 시선이 사라진 시간에 이상한 짓을 하면 어떻게 할까? 그들을 대적해서 나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을까? 


소설 속에서는 마은 말고도 작은 숲 카페를 운영하는 솔이와 옆에서 꽃집을 운영하는 채영 그리고 마은의 엄마 지화씨가 울산에서 반찬 가게를 운영하는 1인 여성 자영업자들이 등장한다. 마은은 이들과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마은이 알지 못했던 여성 자영업자의 위태로움을 전해듣고 공감하게 된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시답잖은 농담에 상처를 받고 가게의 존폐를 결정지을 손님과의 실랑이를 견디고 있는지. 소설의 말미에 마은은 이모와 함께 울산으로 내려가 엄마를 만나서 전 남자친구에게 협박까지 하며 딸을 지키려 했던 엄마의 강단있는 고백을 듣게 된다. 엄마는 마은이 생각했던 것처럼 착하고 순하지 않으며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딸을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강인한 여성이었다. 


소설의 주인공인 마은과 카페를 통해 연결점을 갖는 보영은 재경관리 부서의 사원이다. 90년대 생 답고 야근을 거부하고 철저한 워라벨을 꿈꾸지만 보영이 류팀장처럼 헌신하지 못하는 데에는 여성으로서 팀장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이다. 보영에게는 확실한 미래를 그리지 않고 일용직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주호라는 남자친구가 있었지만 그들의 관계를 안정적이지 못하고 주호가 마은의 가게에 설치한 CCTV 카메라를 확인하는 앱을 지우지 않은 것을 확인하면서 결별을 맞이한다. 보영은 류팀장의 지시로 여성을 제외한 신입사원 입사원서를 가려내고 자신보다 3년이나 후배가 절대로 자신의 자리를 넘볼 수 없을 것이라 확신하지만, 신입사원 조현수는 입에 발린 말을 아무렇지 않게 잘하고 야근도 거부하지 않는 영악한 인물로 비춰지며 보영의 자리를 위협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마은의 가게에 들어와서 치근덕 거리는 21세기의 건달이나 마은을 위협했던 술취한 어떤 남성의 모습을 생각했을 때, 한국 사회에서 결혼하지 않는 여성이 혼자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선택인가라는 비관적 생각에 몰입된다.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문제가 시작된 것일까? 이런 위협과 두려움의 해결책은 결국 여자에게는 남자가 있어야 한다는 구시대적 유물로만 가능할 것일까? 개인의 자유와 책임에 대한 민주주의적 사회를 지향하는 시대를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법과 규칙들은 한 개인의 안위를 보장하기에 충분치 않다. 우리는 뉴스를 통해 보복 범죄와 데이트 폭력으로 숨지거나 다친 이들의 소식을 주기적으로 전해듣는다. 그럼에도 그치지 않는다. 보호 요청을 해도 경고에만 그칠 뿐 위협을 느낀 당사자가 비참한 죽음을 당한 이후에야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다고만 말한다. 어쩌면 소설 속 마은 또한 그런 피해자가 될 수도 있었다. 마은이 그런 피해자가 되었다면 아마도 사람들이 하는 말 중의 하나는 '그러길래 왜 여자가 혼자 가게에서 숙식을 하고 그래' 혹은 '그러니까 비상벨과 같은 안전장치를 잘 해놨어야지.' 등이 아닐까. 


절대적 약자일 수 밖에 없는 이들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불필요한 비용을 지불하거나 억지스레 도움을 요청해야만 하는 현실이 서글프기만 하다.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다면 우리 사회는 뭔가 심각한 위협에 놓인 것이 아닐까. 약육강식의 원시시대도 아니고 이렇게 첨단 과학의 문명을 누리고 살면서도 원초적인 욕구하나 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나약한 이들이 난립하는 시대를 견뎌내기 위한 유일한 해결책으로 무상의 연대를 제시한다. 비록 마은이 폐업을 고민하며 견디고 견뎌 얻어낸 성과이기에 더욱 안쓰럽지만, 마은의 가게에 방문하는 엄마와 아기들의 존재가 불의한 마음을 품고 있는 이들을 항상 각성시킬 수 있는 유일한 경고라니 조금은 씁쓸하기만 하다. 


"무엇보다 내 감정의 색채에 대한 재후의 짐작이 두려웠다. 내가 모르는 나의 마음을 자신은 알고 있다고 말했을 때 나는 맨발로 압정을 밟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십대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내 감정을 내가 정의 내릴 수 없었던 순간들이 압정처럼 내 발에 박혀 있었다.(121)"


"서로에게 의존하는 관계가 아니라 적당히 선을 긋되 필요할 땐 확실히 돕는 관계. 그리고 다시 물러서서 자신의 삶 속으로 기꺼이 돌아가는 관계. 우리는 자기 원의 한쪽 끝이 상대의 원과 겹쳐지는 지점을 매일 바라보면서 오롯이 남아 있는 나머지 원 안에서만 살아간다.(229)"


#이서수 #마은의가게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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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라닌 - 제29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하승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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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승민 작가의 [멜라닌]을 읽었다. 제29회 한겨례문학상 수상작이다. '심사위원 전원 압도적 지지'라는 띠지의 문구 내용과 더불어 제목에서부터 풍겨오는 현실적 감각이 심상치 않게 다가왔다. 역시나 읽는 내내 엄청난 몰입감과 더불어 주인공 재일에게 공감이입이 되어 순식간에 한국와 베트남과 미국의 소도시를 오가는 기분이 들었다. 특히나 재일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어 소설이 출간되기 바로 전까지의 현 시대의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기에 소설이 아니라 차별과 배제가 만연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분투해온 한 청년의 성장기를 그대로 바라보는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어릴 때 귀가 닳도록 들었던 말 중의 하나가 우리나라는 '단일민족'이라는 근거없는 자신감이 담긴 단어였다. 그때에는 그 단일민족이라는 말이 왠지 모르게 자긍심을 갖게 해 주었고 소위 국뽕에 빠지게 만들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과학기술이 점차 발전하면서 단일민족이란 존재할 수 없고, DNA 검사를 통해 나온 유전자 검사를 해 보면 우리나라 사람의 피 속에도 저 먼 유럽대륙의 피가 섞여 있음이 드러나기도 했다. 우리가 결코 알아낼 수 없는 나의 조상의 조상의 조상은 어디에선가 이 땅이 아닌 곳에서 살아온 이와 피를 섞게 되었지만 겉으로 보아 동북아시아 황인종의 피부색을 갖고 있기에 '단일민족'이라는 허상을 품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근자감 때문인지, 아니면 인간은 원래 계급적 의식을 타고나 차별과 배제에 익숙한 것인지, 낯선 피부색을 가진 이들을 만나게 되면 거부감을 느끼며 그들을 폄하하는 별명을 만들어 왔다. 코쟁이, 튀기, 때놈, 쪽바리 등등, 역사와 얽힌 부정적 감정이 담긴 단어들이기도 하지만 그때의 언어적 습관은 꽤나 오랜 시간 우리 삶 안에서 지속되어 왔다. 


한국 전쟁 이후 미군정의 지배를 받은 이후 지금까지도 미군이 주둔하고 있기에 전후 초기에는 경제, 문화적으로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고 미국 주둔 지역에서 생계를 이어갔던 이들 중 상당수가 미군과 혼인하여 거주지를 옮기기도 했었다. 그때 태어난 아이들은 당연히 생김새와 피부색이 달랐기에 튀기라는 단어로 뭉뚱그려졌다. 이후 배우자인 미군을 따라 미국으로 이주한 이들에게는 양공주라는 또 다른 폄하하는 단어가 생겨났고, 이런 모진 말들은 당사자들에게 아물지 않는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당시에는 아주 소수에 불과했고 일반적인 사회 현상으로 드러나지 않았기에 외국인과 결혼한 이들과 그들의 자녀가 받는 집요한 시선은 감당할 수 밖에 없는 한계를 지녔었다. 당사자를 제외한 아무도 그들의 아픔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었다.


어느덧 우리나라도 경제적 성장을 이루어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수많은 저개발국가에서 노동자들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더불어 농촌의 나이든 총각들의 국제 결혼이 빈번해지면서 소위 이주민 사이에서 태어난 피부색이 다른 아이들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이제는 이주민 노동자들이 많은 어느 소도시에 가면 여기가 우리나라가 맞는지 의아할 정도로 낯선 언어로 쓰인 간판과 다수 인종이 모여 살고 있다는 것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아니 어쩌면 이제 시작에 불과한 차별과 혐오가 곳곳에 놓인 덫처럼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놓고 있다. 이주민 노동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이나 국제 결혼을 통해서 태어난 아이들은 대부분 경제적 형편이 넉넉치 않다. 마치 순혈주의에 심취하여 자기들이 거져 얻은 좋은 환경과 기회를 특권인 것처럼 착각하며 거대한 장벽을 쌓는 모습들은 트럼프가 멕시코 이민자를 막기 위해 사막에 벽을 쌓는 것과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들을 몰아넣으며 쌓은 장벽과 다를게 없지 않나. 


언젠가 우연히 본 다큐멘터리에서 미국 사회의 인종 차별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그려냈는데, 특별히 인종 차별 의식을 갖지 않고 있던 평범한 백인 남성이 운동을 하다가 아시아계 여성을 만나 스몰 토크를 나누는 장면이었다. 둘 다 유창한 영어를 구사했기에 의사소통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는데, 백인 남성은 아시아계 여성에서 어디에서 왔느냐는 질문을 던진다. 여성은 약간의 의아함을 가지며 자신은 미국인이라고 말한다. 남성은 아니 그거 말고 너의 원래 출신이 어디냐고 물었고 여성은 약간의 찜찜함을 느끼며 자신은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는 아시아의 어느 나라 사람이었다고 대답한다. 백인 남성은 그제서야 '아 너는 어느 나라 사람이구나'라는 반응을 보인다. 이제 여성은 반대로 남성에게 묻는다. 너는 어디에서 왔어? 남성은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질문이냐는  듯한 반응을 보이자, 너의 부모가 인디언이 아니고서야 조상들 또한 이주민이 아니냐고 묻는다. 백인 남성은 그때서야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대화를 마친다. 


지금 전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 갈등의 여러 양상들의 근본적인 원인 중의 하나는 특정한 인종과 민족적 정서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거에 무차별적인 폭력의 결과로 얻누리게 된 지배 계층이 자기들만 선택되었다고 믿는 선민의식을 바탕으로 피부색과 인종을 바탕으로 아파르트헤이트와 제노사이드를 서슴치 않고 자행했다.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빈번해진 현대에 이르러서도 자국민의 보호와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이주민의 정착과 난민의 유입에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이주민과 난민을 배타적으로 생각하는 극우세력이 득세하여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하는 상황이 가속되고 있다. 


소설 속에서 재일이 만난 많은 이들이 그렇다. 베트남 어머니와 한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동생 재우와는 다르게 재일은 파란 피부를 갖게 되었다. 어찌 보면 소수 중의 아주 희박한 소수 인종으로 살아가야하는, 언제 어디서든 지나가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수 밖에 없는, 때로는 가짜 뉴스와 이상한 사건의 주인공과 단지 같은 피부색을 지녔다는 이유로 경계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는 약자로서의 삶이 예약되어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재일의 아버지 또한 공장의 이주 노동자들에게 군림하며 재일의 피부색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부족하고 베트남 아내를 존중하지 못하는 전형적인 가부장이었다. 재일에 대한 배려라기 보다는 뜬금없는 아메리칸 드림을 갖고 미국 이민을 준비한 한 재일의 아버지는 결국 아내와의 불화로 아들 재일만 데리고 떠나게 된다.  


이후 재일은 학교를 다니며 지난한 적응과정을 거치게 된다. 당연히 유색인종이라는 시선과 더불어 파란 피부를 가졌다는 가시성은 파란 피부를 가진 누군가가 과거에 저질렀던 총기 난사와 같은 끔찍한 사건들을 연상시키며 재일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부각시킨다. 소설의 말미에서 호수에 빠진 루크의 엄마를 구해주었을 때 루크의 부모가 재일을 찾아와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라는 부분에서 동정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재일의 대답은 루크의 부모와 같은 관념을 가진 이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재일은 이렇게 반문하고 싶었을 것이다. 어째서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도움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인가? 어째서 당신들은 백인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다른 유색 인종들보다 높은 계급에 위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인종과 피부색을 구분하여 종적으로 나열하는 사고방식에서 헤어나지 않는다면 차별과 혐오는 우리 삶에서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인종주의는 사람들을 저항하지 못하게 만들어. 한 인종이 다른 인종을 멸시하고 억악하면서 지배 계층이라는 우월감을 느끼는 거야. 정작 본인이 계급의 아래에 놓여 있다는 걸 자각하지 못하면서 말이야. 가난한 백인 노동자가 흑인을 멸시하는 모습을 상상해봐. 그런데 한때는 이 나라에서 백인도 차별받았다는 거 아니? 하얀 흑인으로 불리던 아일랜드계 이민자가 있었지. 비숙련 노동자였고 가톨릭 신자였던 사람들. 그보다 더 오래전에는 슬라브계 사람들이 노예였고, 노예(slave)라는 단어의 어원이 슬라브(slav)지. 그러니까 이건 흑인과 백인 사이의 문제만이 아니야. 모든 인종이 이 구조의 영향을 받고 있으니까. 명예 백인으로 불리는 아시아인을 봐. 성공한 소수 민족 신화 덕에 이 계급사회에 저항하지 않고 섞여들었잖아. 백인이 던져준 먹잇감이지. 백인이 아시아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있을 때 옆에서는 굶주린 흑인이 으르렁거리는 거야. 자기들이 체스판 위에 있다는 걸 아무도 몰라. 이 시스템은 열등한 타자를 등장시켜 차별을 합리화하고 있는데, 서로를 공격하느라 진짜 적이 누군지 생각하지 않아. 분리 정복 전략의 효과를 다시 한번 입증한 셈이지. 효과가 있다니까. 언제나.(111)"


"차별은 그 시스템의 피해자만 인지할 수 있는 독가스 같은 거니까. 수십 번의 경험이 필요한 게 아니야. 몇 번, 어쩌면 딱 한 번의 끔찍한 경험이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폐에 남기는 거야. 그리고 숨을 쉴 때마다 그 기억이 되살아나는 거지. 사람들은 그걸 몰라. 차별이 강물처럼 흘러야지만 차별인 줄 안단 말이야. 사실 차별은 곳곳에 놓인 지뢰밭 같은 거야. 딱 한 번의 폭발에도 우린 불구가 된다고.(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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