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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
이미리내 지음, 정해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7월
평점 :
이미리내 작가의 [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을 읽었다. 얼마 전 문보영 작가의 아이오와 작가 레지던시에서 지냈던 내용이 담긴 [삶의 반대편에 들판이 있다면]을 읽으며 엑소포닉(exophoix: 이중 언어자)이라는 말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여러 가지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긴 호흡이 필요한 소설과 같은 글을 써야 할 때면 당연히 자신에게 가장 편한 언어인 모국어를 선택할 것이다. 의외로 모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글을 쓰는 작가들이 있었고, 이름이 알려진 유명한 작가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대부분 알파벳을 쓰는 유럽어를 사용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기에 언어의 유사성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20대까지 자란 사람이 성인이 되어 영어로 소설을 쓰다니, 그 사실만으로도 놀라웠고 작품을 읽고 나니 감탄과 감동은 배가 되었다.
황혼요양원에서 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묵미란' 이라는 이름의 할머니는 일종의 자서전과 같은 부고를 작성해주겠다는 봉사자와의 만남을 통해서 묵은 이야기를 꺼내게 된다. 묵 할머니가 머무는 A구역은 치매 환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기에 할머니의 방 배정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란 화자의 의심은 묵 할머니와 같은 방을 쓰는 송 할머니의 사연을 회귀하며 충분한 납득을 시킨다. 어쩌면 묵 할머니의 회상이 아주 어린 시절부터 차례차례 진행되었다면 더욱 손쉽게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었을텐데, 여덟 가지 인생의 각 쳅터가 시간의 흐름과는 무관하게 진행되어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하기까지 시간이 더 필요했다. 하지만 이런 앞뒤가 뒤섞인 배치 때문인지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며 마치 흐릿하게만 보이던 묵 할머니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름 없는 여자로 살아간 여덟 가지 인생이지만, 묵미란 할머니에게는 미희의 어머니로서 비현실적인 남편을 북한에서 재회한 '용말'이라는 이름, 그리고 영어 이름 '데버라', 그리고 용말로서의 삶을 선택하기 이전에 힘없고 나약하게 당할 수 밖에 없이 강요된 이름 '간요'라는 이름이 있었다. 한 가지 이름으로만 한 평생을 살아온 사람들은 아주 간단하게 당신의 원래 이름이 뭐냐고 물을 수 있다. 하지만 주인공처럼 마치 시대를 분활하여 살아오고 그때마다 다른 이름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었다면 진짜 이름을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심지어 남파 공작원으로 파주의 수풀 속에서 기거하며 미친 여자 노릇을 할 때 그녀에게는 이름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으니 이름 없는 여자의 인생이라는 제목이 더욱 그럴듯하게 다가온다.
우리나라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일제강점기 치하의 강제노역과 수탈 그리고 위안부의 상처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그러한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배고픔에 지친 양민들은 좌우 이념의 빗발치는 총칼에 이리저리 끌려다니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묵미란 할머니는 한 사람이 겪기도 힘든 이러한 엄청나고 비극적인 사건들을 관통하며 다행스럽게도 그녀의 영혼만은 여전히 건재하여 용말의 남편을 만나게 해준다. 취업을 시켜준다거나, 일본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거나 하는 사탕발림으로 끌려간 10대 소녀들 뿐만 아니라 용말과 미자처럼 그냥 장보러 나왔다가 납치된, 그 수를 일일이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소녀들이 태평양 전쟁이 치뤄지는 동남아시아의 어딘가에 내동댕이쳐져 일본군의 소모품으로 허비된다. 그 끔찍한 순간을 대체 어떻게 버텨낼 수 있었을까? 인도네시아 스마랑에서 기적적으로 살아간 묵 할머니는 남한으로 돌아와 끼니를 때우기 위해 소년 행세를 하게 되고, 부산에서 미군을 상대로 소일거리라도 얻을 요량으로 구걸을 하다가 몽키하우스라는 곳에서 머물게 된다.
전쟁이 벌어지면 전세계 어디서나 유사한 전쟁범죄가 벌어지게 되는데, 당연히 가장 나약한 존재인 여성과 노인과 아이들이 위협의 첫 번째 대상이 되기 마련이다. 폭력과 탈취와 강간이 난무하며 마치 전쟁이라는 상황이 인간의 가장 기초적인 윤리마저 제거해버린 것처럼 군인들은 폭주한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두려움 때문인지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한 이들은 내일을 생각하지 않고 충동과 욕구에 사로잡혀 수많은 사람들은 영혼을 짓밟는다. 하지만 그동안 몽키하우스처럼 미군들을 위한 위안소가 있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심지어 자국민들마저 그곳에 끌려온 여자들이 조국을 위해서 봉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니, 지금의 사대주의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끔찍한 사건을 연속적으로 견뎌낸 주인공은 스마랑에서 자신과 자매처럼 닮았던 용말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북한으로 돌아가 용말의 남편을 찾아낸다. 불운과 불행이 겹쳐 지독히도 고통스러웠던 주인공의 삶에 비록 가짜 행세라 할지라도 주인공에게 드디어 행복의 여명이 서서히 비춰지는 것처럼 따스하게 느껴졌다. 북한과 관련된 내용이 담긴 책을 읽다보면 자주 언급되는 것이 90년대 초반에 있었던 고난의 행군 시기이다. 북한 주민의 4분의 1이 아사했던 지독한 굶주림의 시기에 부모에게 버려지거나 부모가 죽고 남게 된 어린 아이들을 꽃제비라고 불린다는 것을 오래전에 들었었다. 그 당시의 실상을 담은 영상이나 사진들을 쉽게 볼 수 없기에 우리는 그저 막연하게 셀 수 없이 많은 북한 주민들이 굶어 죽었었다는 것을 숫자상으로만 헤아릴 뿐이다. 용말이 지켜보았던 실상처럼 어차피 굶어 죽을 바에는 압록강을 건너다 총살을 당할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탈북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사실 지금 우리나라에서 탈북자들에 대한 일반적인 시선은 그렇게 좋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아니 어쩌면 좋고 나쁘고를 떠나 그냥 관심이 없는 것 같다. 탈북자들은 좀처럼 표나지 않을 수 없는 북한 사투리로 인해 정체성이 너무나도 쉽게 드러나게 되고, 각박한 도시 생활에 허덕이는 남한 사람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여력이 없는 편이다. 하지만 탈북자들이 어떤 심정으로 알몸으로 차가운 강물을 건넜는지, 중국에서 공안에게 발각되어 강제송환되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성매매를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급박한 처지를 알게 된다면, 지금 우리사회에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게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싶다.
저자의 말에서 소설에서 언급된 사건들은 대부분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고 했는데, 읽는 내내 이건 실제로 벌어진 사건이 아닐 수 없다는 느낌을 자주 받았다. 저자가 사료를 바탕으로 했던, 실존 인물의 경험담을 토대로 했던 묵 할머니가 마주한 사건들은 도저히 인간이 상상해 낼 수 없는 범주에 머물러 있다. 인간이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는지, 어디까지 폐인이 될 수 있는지 격동기의 시대를 살아온 이들이 직접 온 몸으로 보고 느꼈기에 가능한 서사가 아닐까 싶다. 앞으로는 두 번 다시 이런 유사한 형태의 비참한 사건들이 일어나서는 안되기에 우리는 아픔을 견뎌내며 묵 할머니의 회고록을 천천히 꼽씹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첫눈에 시작된 사랑은 아니었다. 조금씩 쌓은 유대감이었다. 외국어를 배우는 것과 같았다. 배우면 배울수록 점점 더 몰입하는 기분을 느끼고 점점 더 즐기게 된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처럼, 많은 연습과 인내가 필요하다. 자장가를 흥얼거릴 때마다, 아이가 골을 부려서 달래줄 때마다, 이유식을 한 숟갈 떠 넣어줄 때마다 -아이가 삼키건 뱉건- 사랑이 안에서 조금씩 자라난다. 그 보상은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너의 입에서 처음 나온 엄마라는 말, 네가 나를 그려서 선물로 준 '내 최고의 동무'라는 제목의 막대 인간 그림, 갑작스러운 숨 막히는 포옹, 특별한 이유 없이 잠자리에서 졸린 목소리로 건네는 사랑해라는 말. 살아오면서 나는 그토록 취약하면서도 그토록 무방비한 상태로 조건 없이 사랑하고 신뢰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196)"
"제이슨은 말했어요. 따뜻한 눈물과 천사 같은 미소, 구조센터나 유니세프 광고에서 우리가 보는 그런 이미지들은 할리우드 배우들이나 고작 1년에 한 번 아프리가 고아원을 찾는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죽음과 학대와 질병을 봐야 하는 실제 일꾼과 구조원들은 눈물을 흘리는 데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할 여유가 없다. 날마다 먹이와 포옹과 생존을 원하는 수백 개의 작은 눈들이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다. 최대한 많은 생명을 구하고 돌보기 위해서는 로봇처럼 기계적이어야 한다. 감정을 보일 수가 없고, 모든 개들에게 사랑을 보일 수는 없다. 모두를 사랑하는 건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수를 사랑하는 것은 나머지를 모두 포기하는 것을 뜻한다고 했죠.(30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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