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라닌 - 제29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하승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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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승민 작가의 [멜라닌]을 읽었다. 제29회 한겨례문학상 수상작이다. '심사위원 전원 압도적 지지'라는 띠지의 문구 내용과 더불어 제목에서부터 풍겨오는 현실적 감각이 심상치 않게 다가왔다. 역시나 읽는 내내 엄청난 몰입감과 더불어 주인공 재일에게 공감이입이 되어 순식간에 한국와 베트남과 미국의 소도시를 오가는 기분이 들었다. 특히나 재일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어 소설이 출간되기 바로 전까지의 현 시대의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기에 소설이 아니라 차별과 배제가 만연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분투해온 한 청년의 성장기를 그대로 바라보는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어릴 때 귀가 닳도록 들었던 말 중의 하나가 우리나라는 '단일민족'이라는 근거없는 자신감이 담긴 단어였다. 그때에는 그 단일민족이라는 말이 왠지 모르게 자긍심을 갖게 해 주었고 소위 국뽕에 빠지게 만들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과학기술이 점차 발전하면서 단일민족이란 존재할 수 없고, DNA 검사를 통해 나온 유전자 검사를 해 보면 우리나라 사람의 피 속에도 저 먼 유럽대륙의 피가 섞여 있음이 드러나기도 했다. 우리가 결코 알아낼 수 없는 나의 조상의 조상의 조상은 어디에선가 이 땅이 아닌 곳에서 살아온 이와 피를 섞게 되었지만 겉으로 보아 동북아시아 황인종의 피부색을 갖고 있기에 '단일민족'이라는 허상을 품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근자감 때문인지, 아니면 인간은 원래 계급적 의식을 타고나 차별과 배제에 익숙한 것인지, 낯선 피부색을 가진 이들을 만나게 되면 거부감을 느끼며 그들을 폄하하는 별명을 만들어 왔다. 코쟁이, 튀기, 때놈, 쪽바리 등등, 역사와 얽힌 부정적 감정이 담긴 단어들이기도 하지만 그때의 언어적 습관은 꽤나 오랜 시간 우리 삶 안에서 지속되어 왔다. 


한국 전쟁 이후 미군정의 지배를 받은 이후 지금까지도 미군이 주둔하고 있기에 전후 초기에는 경제, 문화적으로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고 미국 주둔 지역에서 생계를 이어갔던 이들 중 상당수가 미군과 혼인하여 거주지를 옮기기도 했었다. 그때 태어난 아이들은 당연히 생김새와 피부색이 달랐기에 튀기라는 단어로 뭉뚱그려졌다. 이후 배우자인 미군을 따라 미국으로 이주한 이들에게는 양공주라는 또 다른 폄하하는 단어가 생겨났고, 이런 모진 말들은 당사자들에게 아물지 않는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당시에는 아주 소수에 불과했고 일반적인 사회 현상으로 드러나지 않았기에 외국인과 결혼한 이들과 그들의 자녀가 받는 집요한 시선은 감당할 수 밖에 없는 한계를 지녔었다. 당사자를 제외한 아무도 그들의 아픔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었다.


어느덧 우리나라도 경제적 성장을 이루어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수많은 저개발국가에서 노동자들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더불어 농촌의 나이든 총각들의 국제 결혼이 빈번해지면서 소위 이주민 사이에서 태어난 피부색이 다른 아이들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이제는 이주민 노동자들이 많은 어느 소도시에 가면 여기가 우리나라가 맞는지 의아할 정도로 낯선 언어로 쓰인 간판과 다수 인종이 모여 살고 있다는 것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아니 어쩌면 이제 시작에 불과한 차별과 혐오가 곳곳에 놓인 덫처럼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놓고 있다. 이주민 노동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이나 국제 결혼을 통해서 태어난 아이들은 대부분 경제적 형편이 넉넉치 않다. 마치 순혈주의에 심취하여 자기들이 거져 얻은 좋은 환경과 기회를 특권인 것처럼 착각하며 거대한 장벽을 쌓는 모습들은 트럼프가 멕시코 이민자를 막기 위해 사막에 벽을 쌓는 것과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들을 몰아넣으며 쌓은 장벽과 다를게 없지 않나. 


언젠가 우연히 본 다큐멘터리에서 미국 사회의 인종 차별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그려냈는데, 특별히 인종 차별 의식을 갖지 않고 있던 평범한 백인 남성이 운동을 하다가 아시아계 여성을 만나 스몰 토크를 나누는 장면이었다. 둘 다 유창한 영어를 구사했기에 의사소통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는데, 백인 남성은 아시아계 여성에서 어디에서 왔느냐는 질문을 던진다. 여성은 약간의 의아함을 가지며 자신은 미국인이라고 말한다. 남성은 아니 그거 말고 너의 원래 출신이 어디냐고 물었고 여성은 약간의 찜찜함을 느끼며 자신은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는 아시아의 어느 나라 사람이었다고 대답한다. 백인 남성은 그제서야 '아 너는 어느 나라 사람이구나'라는 반응을 보인다. 이제 여성은 반대로 남성에게 묻는다. 너는 어디에서 왔어? 남성은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질문이냐는  듯한 반응을 보이자, 너의 부모가 인디언이 아니고서야 조상들 또한 이주민이 아니냐고 묻는다. 백인 남성은 그때서야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대화를 마친다. 


지금 전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 갈등의 여러 양상들의 근본적인 원인 중의 하나는 특정한 인종과 민족적 정서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거에 무차별적인 폭력의 결과로 얻누리게 된 지배 계층이 자기들만 선택되었다고 믿는 선민의식을 바탕으로 피부색과 인종을 바탕으로 아파르트헤이트와 제노사이드를 서슴치 않고 자행했다.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빈번해진 현대에 이르러서도 자국민의 보호와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이주민의 정착과 난민의 유입에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이주민과 난민을 배타적으로 생각하는 극우세력이 득세하여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하는 상황이 가속되고 있다. 


소설 속에서 재일이 만난 많은 이들이 그렇다. 베트남 어머니와 한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동생 재우와는 다르게 재일은 파란 피부를 갖게 되었다. 어찌 보면 소수 중의 아주 희박한 소수 인종으로 살아가야하는, 언제 어디서든 지나가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수 밖에 없는, 때로는 가짜 뉴스와 이상한 사건의 주인공과 단지 같은 피부색을 지녔다는 이유로 경계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는 약자로서의 삶이 예약되어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재일의 아버지 또한 공장의 이주 노동자들에게 군림하며 재일의 피부색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부족하고 베트남 아내를 존중하지 못하는 전형적인 가부장이었다. 재일에 대한 배려라기 보다는 뜬금없는 아메리칸 드림을 갖고 미국 이민을 준비한 한 재일의 아버지는 결국 아내와의 불화로 아들 재일만 데리고 떠나게 된다.  


이후 재일은 학교를 다니며 지난한 적응과정을 거치게 된다. 당연히 유색인종이라는 시선과 더불어 파란 피부를 가졌다는 가시성은 파란 피부를 가진 누군가가 과거에 저질렀던 총기 난사와 같은 끔찍한 사건들을 연상시키며 재일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부각시킨다. 소설의 말미에서 호수에 빠진 루크의 엄마를 구해주었을 때 루크의 부모가 재일을 찾아와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라는 부분에서 동정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재일의 대답은 루크의 부모와 같은 관념을 가진 이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재일은 이렇게 반문하고 싶었을 것이다. 어째서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도움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인가? 어째서 당신들은 백인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다른 유색 인종들보다 높은 계급에 위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인종과 피부색을 구분하여 종적으로 나열하는 사고방식에서 헤어나지 않는다면 차별과 혐오는 우리 삶에서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인종주의는 사람들을 저항하지 못하게 만들어. 한 인종이 다른 인종을 멸시하고 억악하면서 지배 계층이라는 우월감을 느끼는 거야. 정작 본인이 계급의 아래에 놓여 있다는 걸 자각하지 못하면서 말이야. 가난한 백인 노동자가 흑인을 멸시하는 모습을 상상해봐. 그런데 한때는 이 나라에서 백인도 차별받았다는 거 아니? 하얀 흑인으로 불리던 아일랜드계 이민자가 있었지. 비숙련 노동자였고 가톨릭 신자였던 사람들. 그보다 더 오래전에는 슬라브계 사람들이 노예였고, 노예(slave)라는 단어의 어원이 슬라브(slav)지. 그러니까 이건 흑인과 백인 사이의 문제만이 아니야. 모든 인종이 이 구조의 영향을 받고 있으니까. 명예 백인으로 불리는 아시아인을 봐. 성공한 소수 민족 신화 덕에 이 계급사회에 저항하지 않고 섞여들었잖아. 백인이 던져준 먹잇감이지. 백인이 아시아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있을 때 옆에서는 굶주린 흑인이 으르렁거리는 거야. 자기들이 체스판 위에 있다는 걸 아무도 몰라. 이 시스템은 열등한 타자를 등장시켜 차별을 합리화하고 있는데, 서로를 공격하느라 진짜 적이 누군지 생각하지 않아. 분리 정복 전략의 효과를 다시 한번 입증한 셈이지. 효과가 있다니까. 언제나.(111)"


"차별은 그 시스템의 피해자만 인지할 수 있는 독가스 같은 거니까. 수십 번의 경험이 필요한 게 아니야. 몇 번, 어쩌면 딱 한 번의 끔찍한 경험이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폐에 남기는 거야. 그리고 숨을 쉴 때마다 그 기억이 되살아나는 거지. 사람들은 그걸 몰라. 차별이 강물처럼 흘러야지만 차별인 줄 안단 말이야. 사실 차별은 곳곳에 놓인 지뢰밭 같은 거야. 딱 한 번의 폭발에도 우린 불구가 된다고.(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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