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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준비의 기술
박재영 지음 / 글항아리 / 2020년 11월
평점 :
박재영 작가의 [여행준비의 기술]을 읽었다. 세상에 읽어야 할 책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아직 알지 못하는 글을 잘쓰는 작가들이 얼마나 많은지 새삼 다시 한번 알게 되었다. 좀 더 일찍 이 책을 만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코로나로 인해 안식년의 해외체류 계획이 망가진 시점에 읽었더라면 아마도 코로나를 더욱 원망하며 한탄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나마 위안을 얻는다. 여행을 그렇게 즐기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이상하게도 여행계획을 짜기 시작하면 설렘이 밀려오며 촘촘한 시간표를 준비하기 시작한다.
여행도 어찌보면 개인적 성향과 관련이 있어 좋아하는 스타일도 여러가지고 교통과 숙박과 식당에 대한 개취도 각양각색이라 동행하는 이의 의견도 배려해야 하는 조금은 피곤한 시간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막 일상을 벗어나 새로운 장소에서 예기치 못한 경험을 기대케 하는 여행은 이런 자잘한 걱정들을 뒤로 밀어둔채 불도저처럼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평소보다 과감한 지출을 강행하며 배우의 유행어처럼 "진행시켜"를 연발한다.
특히나 해외여행에 대한 경험담은 무슨 배틀이 벌어진 것처럼 자신이 다녀온 곳의 진귀함을 드러내고 싶은 뻐김으로 점철되어 과장되거나 무용한 정보를 산발시키기도 한다. 청자는 아니꼬우면서도 내심 부러움을 감출 수 없어서 내가 다녀온 여행지를 떠올려 보지만 딱히 주목받을 만한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면 갑자기 인생의 패배자가 된 것 같은 씁쓸함이 밀려와 '여행 그 따위거 개나 줘버려'라는 염세주의의 늪에 빠져들기도 한다. 뭐 아무려면 어떠하겠는가, 나도 언젠가는 근사한 곳에 가서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여행을 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여행계획이나 짜면 어떨까? 이런 긍정적 마인드를 야기시킨 저자의 글에서도 가끔씩 '이거 자랑질이 너무 심한거 아닙니까?'라는 반발심이 불끈 솟아오른다.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내가 인솔해서 가야하는 여행에서부터 마치 여행사처럼 시간표를 짜며 동선을 예상하여 방문지와 식당의 거리를 계산했던 것 같다. 국내여행이라면 뭐 그 정도야 그렇게 어렵지 않고 돌발상황에도 충분히 대처가 가능하겠지만, 해외여행에서는 그야말로 멘붕이라는 말이 가장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몇 년 전에 친구와 친구 친형내외를 모시고 나름 가이드와 같은 형태로 로마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철두철미한 계획표를 세우고 매 끼니 식사 장소와 기차표 예매, 투어 예약까지 빈틈없이 준비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너무 황당하게도 안전의 안전을 생각하고 숙소 예약을 맡긴 여행사에서 펑크를 낸 것이다. 밤 늦은 시각에 숙소에 도착해서 체크인을 하려고 하는데, 우리를 마주한 직원의 표정이 뭔가 심상치 않았다. 한 눈에도 이 시간에 올 손님이 없는데 라는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름을 말하고 숙소 예약을 했다는 말에 한참이나 검색을 하던 직원은 그런 기록이 없다며 확인을 해달라고 했다. 머리속이 하얗게 되어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어떻게 벌어질 수가 있는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혼자였다면 뭐 어디든 다른 숙소를 찾아 툴툴거리며 갔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행스럽게 출국 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여행사의 현지 직원의 연락처를 받아왔기에 급한 마음에 떨리는 손으로 버튼을 눌렀다. 연락을 받은 현지 직원은 그럴리가 없다며 잠시 기다리라고 했고 나의 친구와 형님 내와는 불안한 눈빛으로 하지만 괜찮을거라고 나를 위로했다. 얼마 후에 그 직원 분이 직접 호텔로 와 주었고 도대체 어디서 누가 실수를 한 것인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다행스럽게 다른 호텔로 숙소를 잡아주었다. 내가 원한 위치가 아니라 동선이 조금 꼬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첫날부터 노숙을 하지 않은게 얼마나 다행인지 저절로 하느님께 감사라는 말이 나왔다. 여행 내내 그리고 다녀와서도 왜 숙소에 돈을 아끼느라 그런 곳을 예약을 했을까란 후회와 더불어 누군가의 귀한 여행을 이끈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깨달은 귀중한 경험이었다.
답답한 일상에 지쳐갈 때, 누군가 긴 여행을 다녀와서 무용담을 늘어놓을 때, 휴가철이라 다들 어디론가 떠날 때, 나도 가고 싶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을 때 여행기를 뒤적거린다. 이번 저자의 책처럼 여행을 즐기는 사람의 소회를 읽기만 해도 어느 정도 여행에 대한 욕구가 해소되는 것 같다. 어차피 시간과 돈이 허락된다고 해도 도저히 갈 수 없을 것만 같은 여행지도 어느 여행가의 책으로 대체해도 충분한 만족감을 얻기도 한다. 반갑게도 내가 다녀온 곳을 소개하는 여행가의 글을 볼 때면 그날의 기억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아 내가 사람들이 쉽게 갈 수 없는 곳을 다녀왔구나라는 뿌뜻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특히나 거의 여행전문가 같은 저자가 소개한 장소와 식당은 내가 가본 곳이 거의 없어서 우와 세상에 정말 가볼 곳이 무궁무진하구라는 감탄이 터져나왔다. 그런데 저자가 아직 못 가본 곳 중의 7곳 장소 중의 하나인 영국의 레이크 디스티릭트 공원이 내가 오래 전에 가본 곳이라서 깜짝 놀랐다. 그때는 그냥 막연히 아 정말 공원이 아름답고 좋구나라는 느낌이었는데, 그곳이 사람들이 가고 싶어하는 곳 중의 하나였다니. 조금 놀랍고 나는 그때 친구 덕분에 복받는 거였구라나는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던 지루한 팬더믹 사태가 마무리되고 이제는 거의 예전과 다른 없이 자유로운 여행을 즐길 수 있는 때가 돌아와 지난 주말 인천공항 하루 출입국자가 12만명에 달한다는 뉴스를 볼 때면 나도 언제일지 모를 여행 출발의 날을 위해 사부작사부작 여행준비를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진짜 가보지 않아도, 진짜 먹어보지 않아도 대리만족할 수 있는 기회는 넘쳐나기에 옹졸하게 다른 이의 여행 추억을 비꼬지 말고 도움이 될 정보로 귀담아 듣는 아량을 갖도록 해야겠다.
#박재영 #여행준비의기술 #글항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