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김병운 지음 / 민음사 / 2022년 9월
평점 :
김병운 작가의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을 읽었다. 작가의 첫 번째 소설집으로 "한밤에 두고 온 것",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윤광호", "11시부터 1시까지의 대구", "9월은 멀어진 사람을 위한 기도", "알 것 같은 밤과 대부분의 끝", "어떤 소설은 이렇게 끝나기도 한다" 이렇게 7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미 첫 번째 장편 [아는 사람만 아는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를 통해서 퀴어 문학의 포문을 제대로 열어졌혔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번 소설집을 통해서 명실상부 선두 주자로 자리매김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무튼, 방콕]에서도 느꼈지만 퀴어라는 성소수자에 관한 이야기가 지닌 특징을 배제하더라도 저자의 글은 어느 때는 너무 간절하고 슬프도록 아름다워 한 동안 그 문장에서 계속 머물게 만드는 저력을 갖고 있다. 한 마디로 '어떻게 이렇게 글을 잘 쓰지' 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로 빼어난 문장력을 갖고 있다. 그리고 매우 진중하고 새드한 분위기가 이어지다가 별안간 터지는 터무니없는 개그력에 또한 한 표를 던지고 싶다.
지난 장편소설을 읽을 때에는 소설의 주인공이 유명한 연예인이 누릴 수 있는 많은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자신의 성정체성을 감추기를 그만두기까지의 용기를 보여주는, 어느 정도의 제3자의 시선에서 퀴어에 대한 소재가 펼쳐졌다면, 이번 소설집은 화자가 '나'라서 그런지 저자 자신의 이야기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7편의 단편이 조금씩 다른 환경과 주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마치 한 사람의 내면을 더욱 깊이 들여다보면 이렇게 다채로운 만남 속에서 서서히 자신을 알아가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 정도로 강렬한 몰입감을 선사했다.
제작년 이태원발 코로나 사태가 정점에 달했을 때 성소수자에 대한 비난과 모욕은 끝을 모를 듯 정점을 치닫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렇게까지 한 개인의 이동 경로를 동의도 없이 까발릴 수 있었을까 반발감이 들지만, 당시에 목숨을 저당잡힌 것 같은 극도의 긴장 상황에서 개인정보 정도야 당연히 국가에 헌납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마땅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이미 인격적인 존재에 대한 정의는 소멸해버렸다.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도 확진자 추적이 불가능한 유럽의 문화를 지탄하며 확진자가 폭주하듯 늘어나 장례조차 제대로 치룰 수 없는 상황을 비웃곤 했다. 하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면 인본주의적 사고방식이 뿌리깊은 서구에서는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한 개인의 인권이 마구잡이 취급받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우리는 똑같은 상황을 미지에 마주하게 된다면 예전처럼 또 다시 개인의 존재를 망각하게 될까? 아무튼 이태원발 코로나는 그곳을 다녀간 이가 거짓말을 하고 그로 인해 학원을 다니던 학생들이 감염되고 학부모들의 엄청난 항의로 일파만파 성소수자들에 대한 인신공격에 정당성을 부여하기까지 이르렀다.
시간이 흘러 그 학원강사가 이동 경로를 거짓으로 말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아웃팅이 두려웠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과연 우리가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지, 별 생각없이 내뱉었던 무심한 말들이 그의 영혼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아닌지 착찹함이 밀려왔다. 소설 속에서도 이러한 상황을 두려워한 등장인물들의 내면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방역을 빌미로 연일 게이 혐오 기사가 쏟아지고 폭력적인 아우팅이 자행되던 그 전례 없는 혼란 속에서, 혹시나 서로가 서로의 알리바이가 될까 봐 공포에 떨며 숨죽였던 상황 속에서, 단지 내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던 거라고 생각하면.... 나는 죽고 싶어진다.(192)"
소설 속 화자인 '나'가 소설가로서 자신의 성정체성을 밝히기를 거부하며 자신의 실제 삶과는 다른 이야기만 쓸 수 있다고 자부하지만, 이내 아무리 꾸며내는 가공의 이야기라 할지라도 자신이 누구인지 도려낸다면 그건 결고 진실한 이야기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부분에서는 큰 감동을 받았다. "혐오와 비난, 배제와 박탈, 우울과 고립, 질병과 고통, 그리고 성소수자와 자살(204)"이라는 상황이 반복된다 하더라도 '나'는 누구의 허락을 필요로 하지 않는 온전한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만이 자신의 소설을 진실하게 마주하는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윤광호가 이러한 소설을 쓸 수 있는 것은 용기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의 문제라고 말했지만, 이러한 시대가 도래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의 인정도 응원도 필요없는 세상을 이끌어낸 '나'와 같은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기만 하면, 선의와 정치적 신념을 담보하기만 하면 당신이 발언은 정당해지는가? 당신이 성소수자를 도구화해서 재생산한 편견에 대해서는 누가 책임지는가.(20)"
"나는 그건 용기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의 문제라던 광호 씨의 말을 자주 곱씹는다. 어쩌면 그 말은 나를 향한 충고나 조언이 아니라 다가올 세상을 향한 기대와 희망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바람을 안고서. 우리의 정체성이 어떻든 거기엔 아무런 차별이 없어서 특별한 용기도 자긍심도 필요 없는 세상. 우리가 누구에게 어떤 종류의 끌림을 느끼든 그건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어서 누군가의 인정도 응원도 필요 없는 세상. 그날의 광호 씨는 시간이 흐르면 그런 세상이 반드시 도래할 거라는 자신의 믿음에 내기를 걸고 싶었던 게 아닐까. 우리가 우리를 외면하지 않는다면 그런 세상은 틀림없이 앞당겨질 거라는 신념을 내게 보여 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117-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