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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우다 1~3 세트 - 전3권
현기영 지음 / 창비 / 2023년 7월
평점 :
현기영 작가의 [제주도우다 1-3]를 읽었다. 띠지에 적힌 ‘필생을 건 대작’이라는 수식어를 누가 감히 쓸 수 있을까? 이제 1권을 읽었을 뿐인데도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를 읽는 것이 너무 힘든 것은 아닐까 선뜻 2권에 손이 가지 않는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의 서사를 전개하기 위해 저자는 얼마나 많은 사료를 연구하고 인터뷰를 했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의 커다란 줄기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본다면 한 사람, 한 사람 익명으로 존재했던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의 시름과 아픔과 고통이 생생하게 펼쳐져 있을 것이다. 어차피 육신의 한계를 지닌 존재이기에 언젠가는 사멸했을 것이라는 결말로 지나온 공동체의 삶을 치부해버린다면,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자신 또한 그 누구에게도 억울함과 같은 슬픔을 토로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까지 잘 알지 못했던 익명의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래야 나의 이야기도 미래의 누군가에게 전해질 것이기에.
코로나 사태가 발생되고 외국여행이 불가능해지자 수많은 사람들이 차선책으로 제주도를 찾게 되었다. 그래서 나온 말이 ‘우리나라에 제주도가 없었으면 어쩔뻔했냐?’ 는 조금은 뻔뻔한 말이다. 해외여행이 원활해지기 전까지는 신혼여행지로 그 이후에는 수학여행지로 그리고 이제는 그냥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잠깐 가서 쉬다 올 수 있는 곳으로 인식된 제주도는 어쩌면 내륙에 사는 사람들에게 이런 마음을 갖고 있지 않았을까? 평소에는 연락 한 번 없다고 필요할 때만 애교를 부리는 얄미운 상대처럼 ’외국 못가니까 제주도라도 가야지’ 라는 약간은 이기적인 마음을 가진 상대로 말이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제2공항 건설, 비자림 2차 공사와 같은 찬반 논쟁을 방관자의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하지만 이번 작품을 읽으면서 [제주도우다]는 단지 제주에 대한 이야기만을 하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간 이들의 처절한 아픔과 고통의 시간을 제대로 조우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유사한 갈등과 대립이 발생되었을 때에 해결책을 찾지 못할 것임을 알게 되었다.
소설의 제주의 4.3사건을 다큐멘터리로 만들고 싶은 영미와 창근 부부가 4.3사건의 트라우마로 인해 그때의 일을 얘기하려하지 않는 영미의 할아버지 창세를 설득하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창세는 손주 부부에게 왜 그 사건을 말하기를 거부하는지, 그 사건을 떠올리는 것이 지금도 얼마나 무서운지, 아직도 자신은 4.3사건에 묶여 있다고 토로한다. 그리고 드디어 창세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이르기 전의 제주도의 설화와 조선 후기에 200년 동안 지속된 출륙 금지의 상황과 그로 인해 생겨난 탐관오리들의 수탈과 민란들에 대해 간략하게 전해준다. 영미 할아버지의 진술은 1부 부터 관찰자의 시점으로 바뀌어 일제강점기를 보내는 제주도민들의 팍팍한 삶을 영화처럼 보여준다. 이창동 영화감독의 추천사에도 나와 있는 것처럼 “분명 소설을 읽고 있음에도 눈앞에 스크린이 펼쳐진 것처럼 생생한 영상이 떠오른다”. 아마도 2권에서는 해방 후 미군정으로 인한 제주도민들의 고통이 자세히 묘사될 것 같은데, 1권에서는 일제치하의 제주처럼 고립된 지역에서 일본 순사와 지도층에 빌붙은 친일파들로 인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불안과 공포 속에서 살아갔을지 엿볼 수 있는 장면들이 나온다. 아직도 우리나라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이 정쟁의 도구로 이용당하고 있는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친일파 청산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 중요한 시기를 미군정으로 인해 놓쳐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저자는 암울한 시대적 상황을 어린 창세와 세 살 많은 동네 형이자 소학교 동기인 행필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유쾌한 장면들로 배치해 마음이 너무 가라앉지 않고 이야기를 쫓아갈 수 있도록 돕는다. 특히나 행필이 짝사랑하는 두 살의 연상인 해녀 숙희를 향한 순애보는 창세가 불턱에 모여 몸을 녹이는 해녀들의 무리에서 행필의 사랑고백이 담긴 편지를 대독하는 장면에서 일본의 압제로 경직된 분위기를 한 순간에 녹여버렸다. 억지스러운 공출과 공납으로 제대로 배를 채울수도 없고, 어린 아이들마저 학교에서 공부를 하지 못하고 비행장을 만드는 곳에 뗏장을 나르는 일로 차출되고, 언제 어디서든 쥐새끼 같은 밀정이 들을까 험담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날들이 수없이 이어졌다. 그리고 창세와 행필보다 나이가 많은 성인이 된 청년들은 일본 본토의 여러 지역과 전쟁 중인 인도차이나 반도의 어느 곳으로 강제 징용과 징병되어 생사를 알 수 없는 가족들이 부지기수였고, 설상가상으로 제주와 일본을 왕래하던 커다란 여객선마저 미군의 공격으로 침몰하여 수많은 제주도민들이 죽게 된다.
분명 지옥같은 시간을 버텨낸 이들은 어느덧 해방을 맞이하게 되고, 지금처럼 연락이 자유롭지 못하던 때이기에 몇날 며칠이 지나서야 일본이 패망하였을 알고 조선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게 된다. 생각같아서는 천황의 항복 선언 이후에 쿠데타과 같은 폭동이 일어나 일본군과 친일을 일삼던 이들을 단숨에 처단하지 않았을까 예상했는데, 몇십년 동안 지속된 일제의 폭압의 공포에 짓눌린 많은 이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선뜻 그들에게 대적하지 못한다. 그리고 아직 공식적인 정부가 세워지지 않았기에 당시에 지식인층이었던 이들이 일본군과 친일파를 처벌할 근거를 마련하지 못하고 당시 지역의 관습법으로 추방하는 것에 그치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이 당한 수모와 치욕에 비하면 너무나도 하찮은 징벌이지만 아마도 상당수의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제주도에 머물던 일본군이 칠만이나 되었다고 나오는데 패망 이후에도 미국이 올 때까지 그들이 계속해서 제주에 머물고 있었고, 결국은 미군에 의해 무기를 비롯한 모든 것을 폐기한 후 본국으로 돌아가는 장면은 해방의 기쁨과는 별개로 뭔가 개운치 않은 제대로 된 판정이 아닌 답답함이 밀려왔다. 그리고 일본군이 패망으로 돌아가기 전에 미군의 명령이라는 핑계로 도민들에게 빼앗은 군량미를 놔두지 않고 다 태워버렸다는 내용에서는 불에 타는 곡식을 바라보는 이들의 분노와 허탈함이 얼마나 극심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해방 이후 동네 주민들이 모두 모여 잔치를 벌이는 장면은 우리가 한 개인으로서의 성공에서만 기쁨과 행복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로서의 성취가 더 큰 만족감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운동장에 모인 조천리 주민들은 항일 운동을 했던 청장년들의 감격스러운 인사말과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은 이들에 대한 추모와 생사를 알 수 없는 이들을 기억하자는 말로 ‘조선 해방 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치게 된다. 몇 백 명이나 모인 사람들이 발을 구르며 한 목소리로 ‘조선 해방 만세’를 외치며 감격스러워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는 모습은 얼마나 감격적이었을까? 1권의 말미에 창세와 행필이 아무 이유 없이 어깨를 들썩거리며 신나서 ‘조선 해방 만세’라는 말을 반복하고 들뜬 기분으로 노래를 부르며 마을을 다니는 행복한 장면은 그냥 이야기가 여기서 끝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란 생각이 들게 만든다. 창세 할아버지는 이후에 어떤 일을 겪게 되는 것일까?
“그후부터 만옥은 그 웅변 내용 중에서 ‘압박과 착취와 기만과 강요 속에’ 대목만 빼내어 또래와 애기할 때 버릇처럼 /끼워넣곤 했다. ‘야, 염숙아, 압박과 착취와 기만과 강요 속에 물때가 되었져! 어서 바당에 가자.’ ‘야, 따알리아야, 오늘 밤 우리 집에 안 올래? 압박과 착취와 기만과 강요 속에 나와 같이 뜨개질하기 어떠냐?’ 하는 식이었다.(62)”
근래에 들어 페이지를 넘기는 게 이렇게 힘든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활자를 읽는 것이 아니라, 4.3으로 희생된 분들의 발자취를 하얗게 내린 눈을 시린 손을 호호 불며 거둬내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흔히 말하지만,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얼마나 이기적인 존재인지 한없는 무력함에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제주도의 4.3사건을 알게 된 후 정치와 역사적 배경에 대한 설명과 당시의 상황이 담긴 몇 권의 소설을 읽었었다. 잔혹한 처형이 벌어진 역사적 장소를 방문하고 그들의 얼마나 비참하게 삶을 마감했는지 어렴풋이나마 헤아려보려 했었다. 그리고 이번 작품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서청이라는 불한당 같은 단체와 미군정의 용인을 받기 위한 이기적인 정치인들의 욕심으로 벌어진 참혹한 일의 결과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 작품에 서술된 조천리 주민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양민 학살의 전모를 따라가다보니 악마와도 같았던 친일파의 무리들과 서북청년단의 모습은 인간 본성에 담긴 추악한 면모를 단 하나의 얇은 장막도 없이 완전히 드러낸 것이기에, 언제든 나 또한 그런 부류의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몸서리쳐졌다.
사람이 사람에게 얼마나 더 잔인해질 수 있을 것인가?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염치와 양심을 내버린 채 얼마나 더 이기적일 수 있을 것인가? 이번 작품은 비단 우리나라 역사의 가장 뼈아픈 사건에 대한 재조명과 더불어 우리 삶에서 언제든 다시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기에 인간 삶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독자에게 물음을 던지고 있다. 전쟁과도 같은 상황이 발생되면 단순히 군인들이 총과 칼로 서로를 죽이는 결과만을 초래하지 않는다. 군인들의 죽음은 물론이요, 민간인들의 희생도 만만치 않은데 그것보다 더 참혹한 것은 전쟁을 치루는 군인들의 광기가 극에 달한다는 점이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팔렴치한 짓을 서슴치 않고 저지르는데, 바로 점령한 곳의 주민들을 잔혹하게 처형해 본을 보이거나 여성과 아이들을 전리품처럼 다룬다는 것이다. 점령을 당한 이들은 아내와 자식들이 유린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영원히 잊지 못할 복수심에 불타오르게 되고 시간이 아무리 흐린다 해도 그때의 모욕과 치욕스러운 과거는 지워지지 않고 또 다른 재앙의 사태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제주도의 4.3 사건을 들여다보면 무엇보다도 먼저 미군정에 대한 분노가 치솟는다. 아니 지들이 뭔데 남에 나라에 와서 3.8선을 마음대로 그어놓고 이래라 저래라 하며 심지어 일제치하에 부역했던 기회주의자들을 대거 등용하여 혼란을 가중시키며 무고한 이들이 희생되도록 방치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이 소설을 읽기 전에는 잘 알지 못했던 일제치하와 동일한 강제공출과 양과자 강매와도 같은 사건들은 자유 민주주의를 토대로 공산주의를 토벌하기 위한 대의 명분을 삼았던 미국에게 우리나라는 그저 힘없고 수탈하기 좋은 대상에 불과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 문제는 아직도 앞으로도 지속될 심각한 사안이라고 생각되는데, 친일파에 대한 제대로 된 처벌이 내려지지 않은 일이다. 지금도 웹사이트에서 검색을 해보면 4.3 사건과 관련된 당시의 주요 인사들에 대한 설명 첫 줄에 독립운동가라는 설명이 부제처럼 붙어있다. 제주도의 양민을 폭도로, 빨갱이로 치부하고 무조건 척결할 것을 명령한 이들이 어떻게 독립운동가이고 후손들의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이란 말인가?
읽는 내내 가장 크게 의문이 들었던 것은 서북청년단과 내륙에서 파견된 경찰들이 제주도민들을 학살하고 난 이후에 어떻게 살았을까란 점이다. 어쩌면 처음에는 북에서 공산주의의 핍박을 받다 고향 땅을 떠나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게 된 이들이 자신을 그렇게 만든 사상에 물든 이들이 제주도에 가득하다는 말에 넘어가 그들을 숙청해야겠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혔을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 바보가 아니고서는 막상 마주한 제주도의 그 수많은 양민들을 빨갱이라고 판단할 수 있었을까? 이미 광기에 물든 이들은 어떻게든 이유를 만들어서 약탈과 살인을 일삼게 되고 자기들이 무슨 절대권력을 가진 판관이라도 된 것처럼 도취되어 인간으로서의 지위를 스스로 내버린 것이다. 소설의 말미에도 묘사되지만 양민학살에 가담했던 토벌대 중의 한 명은 학살의 참혹함에 몸서리치다 결국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선택을 하게 된다. 4.3 사건을 계기로 학살된 수많은 제주도의 젊은 청년들과 그의 가족들과 관련된 많은 이들은 지금까지도 당시의 끔찍한 상황으로 인해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가고 있다. 혹시 가해자에 해당되는 토벌대의 이들 중에도 자신의 과오를 자책하며 불우한 삶을 살아가지는 않았을까? 얼마나 많은 이들이 좌우로 나뉘어 나중에는 생과 사를 결정짓는 복수심에 사로잡혀 서로를 잔혹하게 죽이는 야만성을 드러냈던 순간 때문에 괴로워하다 삶을 마감했을까?
전세계의 제노사이드가 벌어졌던 장소에는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역사관을 조성하고 후손들을 교육시키고 있다. 시간이 많이 흐르게 되면 당시의 일을 겪고도 살아남은 이들조차 생을 마감하고 그저 과거 역사의 일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망각의 동물인 인간은 철저한 교육과 반성을 통하지 않고서는 다시금 그런 과오를 반복하기 쉬운 나약한 존재이다. 요즘 들어 다크 투어리즘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쓰인다. 사실 전세계의 유명한 고적지의 역사를 살펴보면 마냥 태평성대를 이룬 곳은 단 한 곳도 없을 것이다. 어딜 가던지 인간이 머물던 장소에는 지금까지 우리에게 이어져 내려오는 나약하고 이기적인 본성의 사건들이 담겨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과거의 사건들을 다시금 조명하고 가슴 아프게 재생시키며 떠올려 보는 것이다. 얼마전 제주를 방문했을 때 함덕 해수욕장의 한가로운 풍경이 떠오르며 소설의 주인공 창세가 레포로서 산군의 지도부에 비밀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달래게 뛰었을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그렇게 견뎌낸 이들 덕분에 우리는 오늘도 이렇게 제주의 비경을 즐길 수 있음을 기억해야겠다.
“어떤 진실도 영원히 묻을 수는 없다. 드러나지 않은 진실은 누군가의 한숨이 되고 슬픔이 되고 한이 되어 대대손손 이어진다. 그리고 어느 순간, 활화산처럼 분출한다. 제주 사람 현기영은 제주의 입이다. 제주의 말이다. 1978년, 그의 소설을 통해 누구도 차마 말하지 못했던 4.3의 한순간이 세상에 드러났다. 서슬 퍼렇던 군사독재 시절, 정보기관에 끌려가 고초를 당할 줄, 그는 짐작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목구멍까지 차오른 제주의 한을 더는 참을 수 없었으리라. 제주 인구 십 분의 일 이상이 죽음을 당한 4.3 사건의 토벌대 최고 지휘관 로스웰 브라운은 말했다. ‘사태의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오직 진압뿐이다.’ 고통스럽다는 이유로, 혹은 지나간 일이라는 이유로, 귀 막고 입 닫은 우리가 그와 무엇이 다른가? 죽은 자의 아우성이 바람이 되어 휩쓸고 다니는 제주에서 살아남았어도 이미 죽은 제주 사람들의 무거운 침묵을 여행자의 들뜬 웃음으로 짓밟았던 우리가 그와 무엇이 다른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내일은 없다. (3권 표지 뒷면-정지아 소설가)”
#현기영 #제주도우다1-3 #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