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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황금종이 1~2 세트 - 전2권
조정래 지음 / 해냄 / 2023년 11월
평점 :
조정래 작가의 [황금종이1-2]을 읽었다. 어릴 때에 출근하시던 아빠가 이백원을 손에 쥐어주시면 씻지도 않은 얼굴과 내복바람으로 구멍가게에 달려가 10원짜리 카라멜을 스무 개 사고 충만함에 젖어 하루를 행복하게 보낸 적이 있었다. 카라멜 20개만 있으면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좋아라 하던 나와 같은 시절을 누구나 하나쯤은 갖고 있지 않을까 싶다.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건졌잖소.”라는 가사로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어낸 가수도 있었다. 아무것도 내 것이 없었던 시절, 우리는 모두 그런 때가 있었다. 가끔씩 뉴스 기사로 유치원생 아이에게 수십억원에 해당되는 주식이 배당되었다는 황당한 기사를 접하기도 하지만, 결국 우리는 빈소으로 세상에 와서 언젠가는 빈손과 알몸으로 떠나기 마련이다. 이런 자명한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면서도 돈에 욕심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다.
무언가에 중독되지 않고서는 점점 견디기 힘들어지는 세상이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라고 하지만 그 먹고 살기 위한 일이 좀처럼 우리에게 만족과 보람을 느끼기 힘들게 만든다. 남과 비교하는 것은 하등 쓸데없는 짓이라고 쉽게 말하지만 상대적 박탈감에서 자유롭기란 여간해서 쉽지 않다. 특히나 요즘처럼 SNS에 자기 과시가 넘쳐나는 세상 속에서 어릴 때부터 소비 문화에 익숙해진 세대에게 자기 소신을 갖고 남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야 한다는 말은 저 먼 과거의 메아리처럼 들릴 것이다. 애어른 할 것 없이 하고 싶은 걸 마음 껏 누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돈이 많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순한 계산으로도 아주 소수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며 하루 하루를 견디고 있다. 그러니 이 악몽같은 시간을 무감각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중독이 필요하다.
이번 작품은 몇 가지 돈에 얽힌 추한 이야기들이 이태하 변호사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소설에 나온 내용과 완전히 똑같지는 않아도 언젠가 뉴스로 한 번 쯤은 접해봤을 법한 돈으로 발생된 슬프고 잔인한 사건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부모와 자식간에, 형제간에 소송을 벌이고, 심하게는 신체적 상해와 살인까지 서슴치 않는 만행을 저지른 사건들. 신파극 같지만 순정을 버리고 가난한 연인을 배신한 이를 처참하게 복수하는 사건들. 돈이라면 다 되는 줄 알고 안하무인격 행동을 저지르고도 모든 것을 돈으로 무마하려고 했던 비겁한 부자들의 사건들. 어쩌면 지금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거의 모든 흉악한 사건들의 전초는 돈일지도 모르겠다.
주인공인 이태하 변호사는 과연 실존할 수 있는 인물일까 싶을 정도로 이상적인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분명 어딘가에 소설 속에 나온 소신 넘치는 삶을 살고 있는 분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소설 속 이태하 변호사는 여느 사람들이 지닌 돈과 양심의 저울에서 어느 쪽으로 기울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솔직하게 건네고 있다. 돈의 노예가 되지 말고 욕심을 버리고 살아야 한다는 말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다. 소설의 시작에서 이태하 변호사와 동창으로 나오는 대기업 간부인 박현규 가족의 이야기는 바로 이렇게 언제든 너무나도 쉽게 돈의 노예가 되기를 선택하는 나약한 우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과연 나라면 딸이 오랜시간 사귀어온 애인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수천억 자산가의 아들과 새로운 연애를 시작한다는 사실을 알고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딸의 속물과도 같은 행동을 질타할 것인가, 아니면 딸이 어마어마한 부잣집 아들과 결혼까지 해서 한 평생 편안하게 살기를 바랄 것인가.
남의 이야기라면 쉽고 빠르게 속단하고 뒷담화를 하거나 자식 교육을 그렇게 시키면 안된다고 혀를 찰지도 모른다. 아니 반대로 딸의 선택에 박수를 치며 응원을 해주는 것이 마땅하다며 망한 집 아들과 결혼하기 전에 헤어져서 다행이라고 참견을 할지도 모른다. 소설 속에서 그렇게 강직한 모습으로 나오는 이태하 변호사도 박현규의 빈소에서 또 다른 동창인 윤민서와의 대화를 통해 과연 자신이 박현규와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아마도 그와 비슷한 선택을 하지 않았겠느냐며 서로의 마음을 나눈다. 딸의 행복을 위해 속물 같은 선택을 눈 딱 감고 행했는데, 그런 선택이 모든 가족을 풍비박산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느냐고 말이다. 소설이기에 극단적인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지만, 현실에도 우리는 비슷한 선택을 하게 되고 그 이후에 어떤 결말을 맺게 되는지 우리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해마다 최저시급이 오르고 있다고 하지만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지금 우리나라의 물가와 부동산 시세에서 연애를 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웬만큼 높은 연봉을 받는 직장에 다니지 않고서는 수억에 달하는 집장만을 하기 위해서는 거의 한 푼도 쓰지 않고 수십년을 저축해야만 가능하다. 거주가 안정치 않은 불안한 상황에서 2세를 낳고 미래를 꿈꾸며 여가를 즐긴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가정이다. 저출생으로 인해 인구저하와 경제적 악화를 우려하면서도 실질적인 대책은 전무한 상황이 아닌가 싶다. 부모님께 물려받을 재산이 별로 없는 경우에 비슷한 경제적 지위에 있는 상대를 만나 내 집 장만을 계획하고 자녀를 낳아 키우는 상상을 하게 되면 당연히 한숨부터 나오게 된다. 그래서 소설 속에 나온 어떤 젊은 여성이 애인에게 이별을 고하는 것은 너무나도 현실적이다. 결국 그 여성은 비혼의 삶을 선택하게 된다. 남자는 어떻게든 헤쳐나가자고 설득하려 하지만 하나씩 따지고 드는 여자는 서로를 위해서 혼자 사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경제적인 선택임을 설명한다. 좀처럼 반박하기 힘든 논리였다. 내가 만일 그들의 입장이라면 대입해보면 답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읽는 내내 마음이 좋지 않았다. 첫머리에 나온 작가의 말을 되뇌이며 황금종이에서 자유로워지는 날을 꿈꿔본다.
“우리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날마다 써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을 갖게 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의식, 무의식 중에 날마다 생각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의식, 무의식 중에 날마다 걱정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지니면 힘이 나고, 없으면 힘이 빠지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남에게 줄 때는 쉬워도 남에게 얻기는 어려운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너나없이 가장 갖기를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의 행복과 불행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의 삶에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어느 만큼 지니지 못하면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박탁해 버리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전혀 갖지 못하면 곧바로 죽음과 맞닥뜨리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하여 5,000여 년에 걸쳐서 줄기차게 우리를 지배해 온 것은 무엇일까.
그러므로 우리는 그 마력에 휘말려 얼마나 많은 비극적 연극의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것일까.(작가의 말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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