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
이주혜 지음 / 창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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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혜 작가의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을 읽었다. 스마트폰을 열어볼 새도 없이 페이지 수가 줄어드는게 안타깝게만 느껴지는 소설을 만났다. 읽기 시작하면서도 제목이 자꾸 헷갈려 몇 번이나 표지를 보고 되새겨야했던 구절이 다 읽고 나니 영원히 각인될 것처럼 강렬한 여운을 남긴다. 어떻게 살아야할까? 어떻게 견뎌야할까? 고민했던 과거의 시간들은 미래를 위한 준비의 과정이 아니라 오늘 하루를 살아간 시간들의 발자취에 불과하지만, 그 덕분에 나는 또 다른 고민을 하며 오늘 하루를 불태울 원료로 삼게 된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간다는 말을 어릴 때부터 들었던 것 같다. 자기 나이의 두 배를 곱하는 속도로 시간이 간다는 말을 흔히 하는데, 똑같은 시간이 어떻게 그리 다른 체감을 가져오는 것일까 그냥 나이 많은 것을 내세우며 위로받기를 바라는 어른들의 젊음에 대한 시샘이라고 생각했다. 


나이가 들고 늙는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기력이 딸리고 점점 혼자 무엇인가를 감당하기가 어려워지고 누군가에게 다시 의지해야만 하는 일이 많아지는 무력함이 밀려오기 때문이다. 누구나 이런 인생의 시험대를 거쳐 삶을 마감하게 되지만 그 순간이 오기까지 자명한 사실을 믿지 못한다. 그래서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이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다행이 아닐까 싶다.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고 무력해지는 시간을 촘촘히 느끼게 된다면 인간은 아마도 견디기 힘들테니까 말이다. 계절의 무심한 변화가 자연의 이치임을 알면서도 왠지 모르게 나이가 들수록 계절의 변화에 자신의 삶을 이입시키게 된다. 그럼에도 봄이 온다는 말간 봉오리를 맺은 후 아름드리 꽃을 피우게 될 바람이 불어올 것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는 몇 번의 봄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처마 밑의 둥지를 떠났던 제비가 같은 다시 나를 만나러 와 줄 것인가? 제비는 이미 올 준비를 마쳤는데, 내가 그 만남을 기다리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염려와 걱정까지. 


우울증과 불안증세 때문에 상담과 더불어 약을 처방받은 주인공은 우연히 일기쓰기를 배우는 모임에 가입하게 된다. 글쓰기 모임은 들어봤지만, 일기쓰는 것을 배우다니 조금은 낯선 모임이 주인공의 시선을 잡아끈다. 주인공은 그곳에서 마웨, 고슴, 도치와 함께 림자의 강의를 수강한다. 각자가 써온 일기를 함께 나누는 자리가 이어지고 짧은 감상평과 더불어 림자는 일기에 대한 간단한 설명과 다른 작가들이 일기를 바라본 시선을 전해준다. 주인공은 시옷이라는 이름을 붙인 자신의 유년 시절의 아이가 성장해가는 과정을 전해준다. 시옷이라는 아기가 온양집에서 엄마와 아빠와 할머니와 유복하게 살던 시절을 지나 성장소설의 단골소재라 할 수 있는 아빠의 빚으로 인해 집안이 풍비박산이 난 이후 응달집으로 이사하여 대폿집을 하는 여자의 아들인 윤수를 만나기까지의 여정이 너무나도 흥미롭게 진행된다. 


일기 속에서의 시옷은 방송국 합창단에서 쏠로를 부르는 맑은 음색을 가진 소년으로 여겨질 만큼 노래를 잘 부르는 아이었지만, 중년 여성이 된 일기의 주인공은 이름도 드러내지 않은 채 이혼 도장만 찍지 않았지 헤어진 남편과 소원해진 딸로 인해 상처 가득한 하루하루를 간신히 견뎌내는 인물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따져본다고 해서 우리가 바라는 모습대로 삶이 회복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주인공은 어쩌면 다시는 돌아보고 싶지 않았던 시옷의 과거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딸과의 재회를 고대하게 된다. 사춘기를 지나 성인이 되면 다들 철이 들고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고 다시금 품안의 자식처럼 애틋한 가족의 정을 나눌 것이라 기대하지만, 혈육의 정은 모든 과거의 시간을 단숨에 몽글몽글하게 만들어주지는 못한다. 


방송국 합창단 지휘자가 제멋대로 소년으로 착각해 쏠로로 발탁하더니, 시옷이 애니의 단복을 입고 촬영 당일날 나타나자 경멸과 혐오의 시선으로 시옷을 외면한다. 상처받은 시옷은 노래를 내려놓게 되고 열살 아래 동생 수호의 백일날 노래를 불러보라는 할머니의 부추김을 윤수와 함께 게다리춤을 추며 애써 외면하게 된다. 시옷이 노래를 더 이상 부르지 않기로 결심한 부분을 일기로 나눈 날 일기쓰기 모임의 고슴은 보육원에서 자랐다는 고백을 하며 배우지도 않는 노래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그것은 분명 기억하지 못하는 엄마에게서 온 것임을 확신하는 말을 듣게 된다. 그리고 주인공은 떠나간 남편에게 연락해 자신이 딸에게 노래를 불러준 적이 있는지 확인하게 되고, 남편 석구는 간난아기였던 해준에게 고슴이 기억하는 구슬픈 노래를 불러준 적이 있다고 말해준다. 


일기는 자신의 기억을 바탕으로 진술되기에 자신이 느꼈던 감정의 영역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아무리 객관화하려고 해도 일기를 쓰는 과거의 사건을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이 제멋대로 내용을 편집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사건의 단면이 존재한다. 시옷은 노래를 꽤나 잘 불렀지만 애니처럼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고자 마음껏 때를 쓸 수 없었던 시간을, 빚더미에 앉은 아빠 때문에 설상가상으로 터를 판 시옷 덕분에 수호를 가진 엄마의 폭폭한 마음 때문에 상처받고 외로워하는 시간을 마주하게 된다. 성추행범으로 몰린 남편 석구가 뻔뻔하게도 사과하지도 않고 더이상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떠나가버린 것이나 바깥 일로 딸을 제대로 돌보지 못해 소원하진 해준과의 관계가 지금의 주인공이 우울과 불안 증세를 지속시키는 근본적인 이유에 해당되겠지만, 화자는 더 이상 남편과 딸을 책망하지 않는다. 


응달집에서 때가 꼬질꼬질했던 같은 반 친구 윤수와 윤심 언니의 이야기가 지나가고 어느덧 시옷은 성인이 되어 연로한 엄마와 열살 동생으로 카페를 시작한 수호를 마주하게 된다. 딸 해준과 서먹한 사이가 된 것과 마찬가지로 남동생 수호만 바라보고 사는 것 같은 엄마의 별일 없냐는 전화로 전해주는 부고 소식은 주인공의 마음을 더욱 헤집어 놓는다. 응달집의 친구 윤수의 비극적인 죽음을 전해는 엄마의 전화를 외면하지만 중년이 된 시옷은 온양집의 맞은 편에 카페를 연 수호를 만나러 간다. 그리고 수호를 통해 잘 알지 못했던 윤수의 삶을 전해듣게 되고, 오랜시간 잊고 지냈던 윤수의 어금니를 뽑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상처로만 가득하고 추한 기억으로만 여겨져 외면하고 싶었던 시간들이 일기쓰는 모임을 통해서 되살아나고 결국은 그때의 시옷을 용기있게 마주한 주인공은 그때서야 수윤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얻게 된다. 그리고 노래를 놓아버리며 미워했던 그때의 시간들을 어쩜면 조금은 사랑할 수 있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집안 대대로 살아왔던 집을 팔아야 할 정도로 빚을 진 아빠의 실패를 한번도 나무라지 않았다. 그저 관세음보살을 찾으며 자신 앞에 떨어진 불행을 묵묵히 해쳐나갔다. 그때는 할머니가 큰 사람이라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어른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할머니는 처음부터 큰 어른이었던 것처럼. 하지만 내가 그때의 엄마보다 더 나이가 들어보니 알겠다. 처음부터 완성된 사람은 없다고. 할머니도 엄마도 아빠도 갈팡질팡 우왕좌왕하다가 그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선택을 했을 뿐이라고. 겉보기와 달리 속은 무척 시끄러웠을 거라고. 여러번 무너지고 또 무너졌을 거라고. 그래도 매순간 끊임없이 선택하면서 그렇게 한발 한발 앞으로 걸어갔을 거라고. 사는 게 원래 그렇다고. 이제야 겨우 알겠다. 해준이 보내주었던 제비둥지 사진이 떠올랐다. 처음의 자리로 돌아가지 못해도 괜찮은 거 아니냐고 자꾸만 묻던 해준의 문자메시지도 생각났다.(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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