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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을 지나가다 ㅣ 소설, 향
조해진 지음 / 작가정신 / 2023년 12월
평점 :
조해진 작가의 [겨울을 지나가다]를 읽었다. 소설, 향 시리즈 8번째 작품이다. 한파가 몰아닥치는 시기라 그런지, 소설의 소제목인 동지가 가까워서 그런지, 엄마를 떠나보낸 소설 속 주인공 정연의 마음이 너무나도 깊이 와닿아서 그런지 나 또한 깊은 겨울을 지나가고 있는 느낌이다. 그냥 찬바람이 부는 쌀쌀한 온도가 아니라 잠시도 밖에 서 있기 힘든 매서운 추위가 맹위를 떨치는 시기가 오면 마음이 더 쓸쓸해지는 기분이다. 몸의 어딘가에도 서리가 맺히고 점점 굳어지는 것처럼 삐그덕거리는 것 같은 착각은 행여나 비슷하게 굳어진 무엇과 부딪혀 깨지기라도 할까봐 더욱 몸을 사리게 만드는 것만 같다. 이렇게 세상 모든 것을 얼게 만들 정도로 추워 모든 기능을 멈추게 할 것만 같지만, 실상 두터운 얼음 밑에서도 생명의 기운은 사라지지 않고 조금씩 아주 느리게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정연을 위로하는 "모든 건 잊힌다고, 세상에 잊히지 않는 것은 없다고."라는 엄마의 말처럼, 세상의 절대 강자인 시간은 무던히도 흘러가 모든 것을 얼어붙게 만든 쓸쓸함과 허전함을 밀어내고 만물의 생명을 다시 숨쉬게 만드는 촉촉한 비를 내리는 때를 가져온다. 그렇게 물기를 흠뻑 머금은 것들은 새싹을 튀우며 언젠가 발화할 아름다움을 한껏 웅그린 채 감춰두고 고이고이 키워낸다. 서울에서 분주하게 편집 일을 하던 큰 딸 정연은 엄마의 투병과 죽음으로 엄마가 칼국수 가게를 하던 집으로 내려와 엄마의 흔적을 붙잡고만 싶어 한다.
누군가 돌볼 사람이 있다는 것은 슬픔과 무력의 늪에서도 스스로 걸어나갈 수 있는 힘을 북돋워주기에 정연의 동생인 미연은 언니를 혼자 남겨두고 떠나는 것이 못내 걱정스럽지만, 정연은 엄마가 키우던 정미라는 개를 산책시키며 조금씩 살아갈 의지를 보듬게 된다. 그리고 엄마가 남겨둔 김치를 덜어내 칼국수를 먹으며 데워진 몸은 남겨진 이들의 시간이 다시금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음을 인정하게 만든다. 엄마가 남겨준 것은 머물 집과 옷가지와 털신만이 아니라 정미와의 산책 그리고 정미의 보금자리를 맡긴 목공소 주인 영준과의 만남 또한 해당되었다.
도시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영준이 갑자기 일을 그만두고 한적한 곳에 취미생활로 하던 목공소를 열게 된 데에는 분명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라 짐작하게 되는데,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영준의 사정이 드러나게 되고 영준의 가슴 아픈 고백과 다현이라는 소녀가 머물던 자리를 방문함으로써 정연 또한 엄마와의 이별을 제대로 마주하게 된다.
어른이 되고 하던 일에 익숙해지면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충분히 계획하고 예상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아무리 철두철미하게 준비한다 하더라도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이별의 시간은 도무지 감당할 수 없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삶의 무상함,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은 무력함의 긴 터널을 지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 또한 나의 의지와 노력과는 무관하게 선물처럼 다가온다. 마치 내가 흘려온 눈물에 대한 보상이라도 되는 듯이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따스한 손길과 손수건의 부드러운 만남은 잃어버린 끈을 다시 이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만들어 준다.
"칠십일 년 동안 엄마의 몸 안에 축적된 시간과 지상에는 더 이상 흔적을 남기지 못할 미래으 ㅣ시간까지 함께 묻혔다. 엄마의 삶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사건들과 인연을 맺었던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미완성된 역사가, 하지 못한 말과 가보지 못한 곳, 끝내 이루지 못한 일들까지...(41)"
"집으로 걸어가는데 바람 끝에 둥글고 나른한 온기가 배어 있는 게 느껴지긴 했다. 겨울에서 봄 사이의 국경을 지나가는 기차 안의 승객이 된 것만 같았다. 기차는 느리게, 그러나 쉬는 일 없이 규칙적으로 달릴 것이고 겨울 나무와 봄 나무가 섞여 있는 기차 창밖을 바라보다가 문득 주머니 안을 을 뒤적이면....
시곗바늘은 없지만 타이머는 내장된, 그러나 그 타이머가 언제 멈추는지는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은 시계가 내 손에 딸려 나올 터였다.(131)"
"언제나 그랬다. 조해진의 소설을 읽는 것은 언젠가 크게 발을 헛디뎌 무너져 내렸을 때 스스로 일으켜 세울 힘을 비축해두는 일이고, 적대적인 얼굴을 하고 불쑥 나타난 타인 앞에 잠시 멈춰 그가 나쁜 건지 아픈 건지를 헤아려볼 수 있는 숨을 준비해주는 일이고, 미래로 함께 나아가야 할 이 시대의 가장 약한 존재들의 이야기를 들어두는 일이다. [겨울을 지나가다]를 읽으면서는 이미 아프게 겪었던 죽음들을 다시 제대로 애도할 기회를 갖는 동시에, 언젠가 이런 커다란 상실을 마주했을 때, 시간을 들여 요리한 칼국수를 맛보고 씹고 삼키는 행위에만 온전히 몰두하며 추상적인 고통이 마음에 그어놓은 어지러운 선들을 지워내고 구체적인 감각으로 삶을 채워가기 시작했던 정연을 떠올리며 어떤 시도를 해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쌓아둔다. - 김혼비(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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