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기완을 만났다 (리마스터판)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
조해진 지음 / 창비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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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해진 작가의 [로기완을 만났다]를 읽었다.  한 때 e-book으로만 책을 구매했던 때가 있었다. 종이로 된 책보다 휴대가 용이하고 어두운 공간에서도 가독이 가능해 지금 스마트폰의 반 만한 화면으로도 책을 읽은 때가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더 이상 전자책을 구매하지 않게 되었고, 여전히 종이로 된 책의 물성의 매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어쩌다 가끔은 미리 읽을 책을 구비하지 못했을 때 급하게 전자책을 구매하기도 한다. 그렇게 짬을 내어 구입한 전자책들은 대부분 읽다가 그만둔 후 종이로 된 책처럼 눈에 띄지 않아서 그런지 읽던 페이지에 그대로 멈춰 있는 경우가 많았다. [로기완을 만났다]가 그랬다. 벌써 몇 년 전에 절반 정도를 읽다가 그만둔 채로 다시 처음부터 읽어야 할 텐데 생각만 할 뿐 구입해놓은 다른 책들을 읽다보니 또 다시 뒷전으로 밀리기 일쑤. 이번에 넷플릭스에서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대대적인 홍보에 이어 개정판이 나왔다는 소식에 차라리 종이책을 구입해서 읽자고 결심했고, 왜 알리딘 배너 창에 ‘숨이 멎을 것 같은 완벽한 작품’이라고 칭송했는지 알 것 같았다. 과대광고가 아니라 정말로 이야기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주체할 수 없는 감동과 슬픔이 태풍처럼 밀려왔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한 사람이 타인의 마음을 이 정도로 헤아릴 수 있을 것인가, 대체 얼마나 오랜시간을 고뇌하고 이해하려고 기다려왔기에 자기 자신조차 잘 알지 못하는 죄책감의 근원을 이토록 적절히 해체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할 수 있는 것인지 놀람을 금치 못하게 만든다. 


소설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김작가는 방송국에서 나중에 연인이 된 재이 피디와 함께 형편이 안 좋은 사람들의 사연을 25분짜리 미니 다큐로 만들어서 전화 ARS로 후원을 받는 프로그램의 메인 작가로 일한다. 김작가는 그 프로그램을 통해서 얼굴에 큰 혹이 생긴 윤주를 만나게 되었고 윤주가 더 많은 후원을 받을 수 있도록 수술을 미루다가 조직 검사를 통해 악성 종양임을 전해 듣게 된다. 윤주를 살리고자 애썼던 마음이 송두리째 무너지며 엄청난 죄책감에 휩싸인 김작가는 차마 윤주에게 그 비극적인 소식을 알릴 용기가 나지 않아서 재이에게 이별을 고하며 윤주를 외면하게 된다. 방송국을 그만두고 김작가는 우연히 시사주간지에서 탈북 청년 로기완에 대한 사연을 읽게 되고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기 위해 무작정 벨기에의 브뤼셀로 향한다. 


김작가가 로가 머물렀던 과거의 시간을 뛰따라가며 방송을 위해 글이 아니라 자기만의 제대로 된 글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를 표면적으로 드러냈지만, 사실은 로가 남긴 일기의 한 구절이 김자가를 떠날 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 김작가는 브뤼셀에 도착하여 로가 난민 지위를 얻을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준 박을 만나게 되고 로가 남긴 노트를 통해 탈북 이후의 발자취를 그대로 재현해보기로 한다. 2007년 크리스마스를 앞둔 12월 로는 159센티의 외소한 몸을 가진 20살의 청년으로 유로 버스를 타고 낯선 곳에 도착하게 된다. 거인국의 후손인 것처럼 보이는 그 나라의 사람들 속에서 소년으로 보이는 로는 남루한 옷차림 속에 어머니의 목숨값에 달하는 650유로를 방수포에 칭칭 감고 남한 대사관에 갈 날을 하루하루 미루게 된다. 김작가는 로가 걸어가며 마주했을 처음보는 낯선 세계에 대한 묘사와 숙박비를 지불하고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어떤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티었는지 로를 외면하고 무시했던 이들에게 뜬금없은 분노를 드러내며 윤주를 마주하지 못하고 떠나온 자신을 경멸한다. 


3년 전 로가 거리에서 쓰려져 있는 것을 경찰이 발견하고 길 잃은 청소년이라 여겨져 고아원에 보내진 것을 계기로 박을 만나게 되고 그렇게 뜻밖의 연속된 은인을 통해 정식 난민 지위를 얻게 된 과정 속에서 안도와 감사의 마음이 동시에 느껴졌다. 김작가가 로를 이해하기 위해 그의 뒤를 따라간 시기가 2010년 12월이라 그런지 비록 소설 속의 설정이지만 동시간대에 유럽에 머물렀던 시간이 떠오르며 축축하고 칙칙한 하늘이 반복되는 그때의 마음이 아주 조금이나마 로가 지녔던 애달픔에 닿았으리라 생각하니 더더욱 가슴이 아려왔다. 생면부지의 알수도 이 다음에도 만날 길이 없는 익명의 누군가임에도 불구하고 김작가가 윤주를 생각하며 자신의 가식적인 진심을 단죄하며 보낸 시간들은 박이라는 또 다른 우연한 만남을 통해서 갑작스럽게 치유받게 된다. 


이런 우연한 타인의 만남들이 마치 영화나 소설 속에서만 일어나는 꿈같은 일인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지만, 사실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놓치고 그리워하다가 다시금 일어설 수 있는 것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우연한 만남의 결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렇게 치유된 현재의 나는 무상으로 주어진 그 타인의 애정어린 선물에 보답하는 길로 또 다른 타인에게 무상의 관심과 사랑을 베풀어 이 세상의 또 다른 로가 구원될 수 있기를, 또 다른 김작가가 용기를 내어 윤주에게 전화를 걸 수 있기를, 또 다른 박이 아내가 스스로 안락사를 선택하도록 한 죄책감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기를 염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어디에 있든 사람들의 시선을 한꺼번에 유인하던, 그애의 오른쪽 뺨과 턱을 감싸는 얼굴만큼 커다란 혹이 그애에게서 아름답고 당당할 수 있는 권리를 빼앗고는 타인의 외로움을 위로할 줄 아는 목소리를 부여해준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면 그 비참한 선물이 가혹해서 출처와 분량을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기도 했다. 그 혹은 근육과 핏줄, 신경으로 이루어진 단백질 덩어리가 아니라 타인의 무분별한 시선 한줌과 그 시선에 놀란 여린 마음 한줌,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흘려야 했던 눈물 한줌으로 이루어진 이상하고도 잔인한 윤주의 또다른 얼굴이면서 사람들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는 그애의 진짜 인생이었다.(24-25)”


“연민이란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어떻게 만들어져서 어떻게 진보하다가 어떤 방식으로 소멸하는 것인가. 태생적으로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성되는 그 감정이 거짓 없이 진심이 되려면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포기되어야 하는 것일까.(58-59)”


“진심이란 것에 병적으로 엄격했던 우리가 언어가 책임질 수 있는 영역 역시 가변적이고 생각보다 훨씬 협소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감정적 차원의 진실이란 한순간에 급조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추억을 헌납하며 조금씩 만들어가는 공유된 약속일 것이다. 흘러가는 시간이 있어야 하고, 그 시간이 조심스럽게 준비해놓은 구체적인 사건들도 있어야 한다. 사랑이란 언어가 그 모든 것을 보듬어준다고는 믿지도 않았고, 이제부터 연인이 되자는 식의 선언은 유치하게 느껴졌다.(72)”


“나는 배고프의 끝을 모른다. 가난은 늘 상대적이었고 더 가진 사람들의 시선으로 상상하여 바라본 대상화된 박탈감이었을 뿐이다. 대학 시절 비싼 학비를 감당할 수 없어 언제나 과외 아르바이트를 두세개씩 해야 했기 때문에 엠티니 농활이니 하는 건 꿈도 꾸지 못했다고 말했을 때, 재이는 진정 불쌍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봐주었다. 그때는 내게도 아무런 거부감이나 감상 없이 상대의 연민을 이끌어낼 만한 단서 하나가 있다는 것이 다행스럽기까지했다. 그러니까 내게 배고픔은 가상의 영역일 뿐 현실의 차원은 아닌 것이다. 나는 배가 고파서 헛것을 보거나 구걸을 한 적이 없고 쓰레기통을 뒤지거나 비참하게 쓰러지는 경험도 해본 적이 없으며 내 주변에도 그런 사람들은 없다.(161)”


“때로는 미안한 마음만으로도 한 생애는 잘 마무리됩니다.(222)”

언제나 거창한 족적을 남기는 것만이 성공한 삶으로 여겨지는 세상의 논리 한 가운데에서 얼마나 위로가 되는 한 마디인가. 미안한 마음, 진심을 다하는 것인지 고뇌하는 마음, 가슴 저미는 아픔에 머무는 시간들이 쌓이고 쌓여 삶이 완성되기를…


#조해진 #로기완을만났다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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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황석희 - 번역가의 영화적 일상 에세이
황석희 지음 / 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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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희 번역가의 [번역: 황석희]를 읽었다. 부제는 “번역가의 영화적 일상 에세이”이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본 이름. 더군다나 아무리 본인의 책이라 하더라도 제목에 자신의 이름을 걸 수 있다는 것은 웬만큼 업계에서 인정받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닐까 싶다. 아마도 저자도 언급했듯이 책 제목에 떡하니 이름이 드어가는 걸 몹시도 민망해 했을 것 같은데, 번역 콜론 황석희라는 제목을 주장했을 편집자 측은 이보다도 더 이 책이 가진 매력을 잘 드러낼 수 있는 게 없다는 지론에서 결국 쾅쾅 낙점되지 않았을까 싶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점점 나이가 들수록 자막을 읽기 귀찮아서 그런지 외화보다 우리나라 영화를 즐겨보게 되었다. 집에서 TV로 볼때는 외화도 상관없지만 극장에서 거대한 스크린으로 자막을 쫓다보면 화려한 장면이 주는 효과를 제대로 만끽하지 못할 때가 있다. 설상가상으로 자막을 읽기 불편한 자리에 앉게 되면 영화를 다 보고 나와서 멀미도 나고 무슨 내용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이런 입장이 되고 나니 이태리에 머물 때 거의 모든 외국 영화를 더빙하는 그 나라의 영화 문화를 도통 이해하지 못하고 투덜거렸던 모습이 떠오른다. 가뜩이나 외국어를 듣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아 차라리 자막을 보면 영화를 이해하기 쉬울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이태리의 거의 모든 극장에서 더빙을 한다는 것을 알고 실소를 금치 못했었다. 아니 대체 왜? 아마 지금처럼 우리나라 영화가 전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상을 받아도 이태리에서는 우리나라 배우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문맹률과도 연관이 있다고 한다. 그래도 그렇지 이태리 사람들은 자막 읽는 것조차 귀찮은 게으름뱅이가 틀림없다고 나만의 결론을 내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제와 다시 생각해보면 더빙으로 인해 조금 어색한 감이 있어도 자막을 읽지 않고 영화의 내용을 이해하고 따라갈 수 있다는 것은 더 많은 이들에게 편안함을 주었을 것이다. 아무튼 워낙에 오페라와 연극 등 영화 말고도 극적 문화가 발달한 나라라 그런지 전세계 배우들의 목소리가 몇 명으로 압축된다는 웃픈 결론에.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영상 번역가라는 특이한 직업의 특성을 자세히 엿볼 수 있었다. 번역이라는 작업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기에 섣불리 덤빌 일도 아니지만,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서 수많은 관객들의 피드백을 순식간에 받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은 조금은 무서운 일이 아닐까 싶다. 특히나 저자가 언급했듯이 아무리 숙련된 프로 번역가라 하더라도 영화마다 5개 이내의 오역이 생길 수 밖에 없다니, 오역을 낱낱이 지적하며 힐난하는 메시지를 받게 되었을 때에는 꽤나 큰 심리적 충격을 받지 않을까 싶다. 사실 그 몇 개 안되는 영화를 이해하는 데 별 무리가 없는 오역은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닐텐데도 익명의 그림자에 숨어 오역을 찾아냈다는 우월감을 비하의 언어를 사용하여 표현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저자처럼 유명해진 번역가도 이런 DM을 수없이 받는다고 하니 대중 매체에 얼굴과 이름이 알려지는 대중문화와 관련된 일을 한다는 것은 대단한 내공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진실을 호도하고 의도된 곡해와 자의적 해석이 난무하는 세상 속에서 정말로 우리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는 번역가가 있다면 우리는 지금처럼 혼란스럽지 않을텐데, 영화와 같은 우리 삶에서 극적 반전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그런 무용담이 곱게 보이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에게 엉뚱한 환상을 심어준다는 데 있다. 그 직업을 하기 위해선, 정확히 말하면 그 직업에서 성취를 이루기 위해선 영웅적이고 운명적인 서사가 필연적이라는 인상을 남기는 거다. 성공한 사람의 부풀려진 사연이 미디어에서 한번 더 가공되어 환상을 심고 그걸 본 사람들의 기를 죽인다. 너무 꼰대 같고 재미없는 소리지만 일정한 성취에 기본이 되는 건 따분하고 지루하고 고된 반복을 묵묵히 견디는 무던함, 그리고 제 살길을 어떻게든 찾아내 지속할 줄 아는 현실감이다. 대개는 그런 것들이 쌓여 성취가 된다.(88-89)”


“원복을 훼손한 번역자를 비판하거나, 반대로 번역을 상찬하며 원작을 절하하는 과정에서, 때로 문학적인 담론의 지점을 넘어 이 책의 ‘영광’이 과연 누구의 것인가를 질문하며 어느 한쪽을 선택해 공격하거나 배제하는 양상이 나타나기도 했는데요. 실은 모두가 알다시피 문학은 성공과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문학은 사업이 아니고, 문학 작품은 사업적 결과물이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덧없는 것이고, 그 덧없음의 힘으로 진실과 직면하는 것이고, 세계와 싸우며 동시에 말을 거는 것입니다. -연합뉴스 <한강, 채식주의자 오역 60여 개 수정… 결정적 장애물 아냐> 2018.01.29 (148-149)”


#황석희 #번역황석희 #달 #번역가의영화적일상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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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캐나다의 한국인 응급구조사 - 나를 살리러 떠난 곳에서 환자를 살리며 깨달은 것들
김준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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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일 님의 [나는 캐나다의 한국인 응급구조사]를 읽었다. 응급이라는 말만 들어도 갑자기 가슴이 두방망이질 치며 손에 응근한 땀에 베어드는 느낌이 든다. 요란한 비상벨소리를 울리며 황급히 움직이는 구급차를 멀리서 지켜보기만 해도 어디선가 누군가가 위급한 상황을 맞이했구나 라는 찰나의 연민의 마음이 피어오른다. 그리고 동시에 이렇게 멀쩡히 하루를 보내고 있음을 감사하는 이기적인 안도의 한숨 또한 뱉어낸다. 예전에는 그렇게 엠블런스를 탈 정도로 위급한 일은 마치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딴 나라의 얘기처럼 생각하고 지냈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지금까지 그런 일을 겪지 않았다는 것은 어쩌면 굉장한 기적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나는 축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저자의 글을 읽으며 책을 덮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여러번 느꼈다. 저자가 응급구조사로서 맞이했던 상황의 묘사가 너무나도 상세해서 마치 눈앞에 그 끔찍한 장면들이 펼쳐지는 것만 같았다. 더이상 이어지는 장면을 따라갈 용기가 나지 않고, 그냥 예전의 어리숙한 생각처럼 그런 일은 나와는 무관하다고 외면하고만 싶어졌다. 하지만 이렇게 글로 읽는 것만으로도 힘든 상황을 자신의 온 몸으로 체험한 저자와 그의 동료들은 어떻게 하루 하루를 견디며 자신만의 삶을 일구어 갈 수 있는지 궁금했고, 그들의 삶에 존경을 표하기 위해서는 기꺼이 저자가 들려주는 내용에 귀를 기울여야만 하는 의무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곧 트라우마에 대한 보편적 인식이 높아졌다. 그러다보니 응급구조사들이 현장에서 겪게 되는 심리적 충격과 스트레스는 아마 일반인들이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일 것이다. 사고로 처참하게 일그러진 사람의 형체와 피로 범벅된 현장에서 느꼈던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은 아마도 시시때때로 불현듯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재생될 것이다. 아마도 보통 사람들이라면 이렇게 자주 심각한 충격에 자주 노출되는 상황을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응급구조사를 선택하고 자신의 온 삶을 타인의 위급한 상황을 위해서 헌신하는 이들에게는 아마도 아주 특별한 은총이 주어진 것이 아닐까 싶다. 저자가 글에서 여러 번 언급했듯이 믿음의 유무를 떠나서 신의 손길이 머물다 간 것이라 생각되는 장면이 묘사가 있다. 도저히 어떤 절대적 힘의 개입이 없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사람들은 억세가 운이 좋았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혹자는 강철멘탈을 소유한 이들에게만 가능한 일이라는 부연 설명이 붙을지 모르겠지만 한 인간의 마지막 순간에 절대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이들에게는 분명 특별한 힘을 하느님께서 주셨을 것이다.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캐나다라는 복지 국가에 대한 시선이 많이 바뀌었다. 분명 우리보다 경제적 형편이 넉넉하고 살기 좋은 곳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는데 그곳 또한 삶의 터전을 일구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던 과거의 인물들이 있었고 여전히 생계를 꾸리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하는 이들이 있음을. 특히나 저자가 가족들과 이민을 떠나 제대로 된 직장을 갖지 못해 가슴 졸인 시간들에 대한 회상은 그가 얼마나 큰 두려움을 갖은 채 차 안에서 혼자 눈물을 삼켰을지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리고 결국은 수많은 응급 호출에 익숙해지며 능숙한 파라메딕이 되어 독자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말은 우리가 삶의 마지막을 잘 준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저자가 마주했던 수많은 노년의 병을 앓고 있던 이들의 집에는 그들의 과거를 떠올 수 있는 지난날의 모습들이 파노라마처럼 액자에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아름다운 시절을 누렸던 그 누구도 언젠가는 내 몸 하나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순간을 맞이하게 되며, 인간의 몸에서 나오는 모든 배설물을 뒤짚어 쓴 채 전혀 모르는 응급구조사의 손길에 자신의 몸을 맡길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마주하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 삶의 마지막이 너무나도 비참하고 쓸쓸하게 느껴지지만 결국 먼지에 불과한 존재로 다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유한함을 하루 빨리 인정하고 받아들여 나에게 주어진 하루하루를 의미있게 살아간다면 죽음 또한 잘 준비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돈이 없을 때는 돈이 많아지면 더 잘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픈 환자를 자주 접하다 보니 건강하게 살면 잘 사는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돈이 많아도, 몸이 건강해도 결국 삶의 종착점이 그런 모습이어야 한다면 잘 사는 것이 대체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에서 쉽게 헤어나지 못했다. 나는 하루하루 먹고사는 일이 제일 중요한 생활인인지라 그런 일로 마냥 우울해할 여유는 없었다. 하지만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그 생각이 문득문득 치밀어 올라올 때면 답도 안 나오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묻고, 다시 잠깐 잊었다가 묻기를 되풀이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질문 하나. '내 삶의 끝을 알게 되면 지금이, 그리고 앞으로의 삶이 더 행복해질까?'(229)"


"우리는 저마다 중요하다고 믿는 것들을 갖기 위해, 혹은 더 갖거나 뺏기지 않기 위해 애쓰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분명 그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고 인정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그저 열심히 살고만 있는 것은 아닌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진짜 중요한 것들을 챙기며 사는 법은 잊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사람마다 다 다를 수 있지만 결국 우리는 다 똑같이 죽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살아 숨 쉬고 있는 까닭에 쉽게 느끼지 못할 뿐 죽음은 삶과 외따로 떨어져 있지 않고, 오히려 우리 인생길 바로 옆에서 함께 조용히 걷고 있을 뿐이지요. 따라서 죽음은 삶의 일부분이며, 잘 죽는 것은 우리 삶의 마침표를 잘 찍는 것과 같습니다. 환자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돌아보면서, 자신에게 진짜 중요한 것들을 잘 가꾸어 살다 보면 언젠가 다가올 죽음 또한 잘 맞이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오늘도 애쓰며 사는 우리들의 수고를 더 가치 있게, 그리고 지금 살아 있는 이 순간을 더 풍성하게 해줄 것이며, 그런 것들이 모여 결국 죽음까지 포함한 우리의 삶을 더 의미 있게 해줄 것이라고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251-252)"


#김준일 #나는캐나다의한국인응급구조사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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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퀴즈에서 만난 사람들 - 모든 사람은 한 편의 드라마다
이언주 지음 / 비채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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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주 작가의 [유퀴즈에서 만난 사람들]을 읽었다. 부제는 “모든 사람은 한 편의 드라마다”이다. 하루종일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다보니, 편하게 얘기할 대상이 생기면 방언이 터진 것처럼 폭풍 수다를 떨게 되는 때가 늘어가는 것만 같다. 샤워기에 떨어지는 물에 머리를 적실 때면 내가 왜 그렇게 주저리 주저리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았을까 이불킥 같은 후회가 밀려오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은 다시 주워담을 수 없다. 인생의 경험의 장고를 떠나서 떠나서 사람은 자기 얘기를 누군가 들어주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가끔은 마음 속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풀어놓은 것만으로도 어떤 특별한 치료제를 찾은 것처럼 마음이 가벼워지기도 하고, 상대방이 아무런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았음에도 자신의 문제를 제대로 직시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겨나기도 한다. 


유퀴즈라는 TV프로그램을 처음 보았을 때 가장 놀라웠던 사실은 갑작스러운 인터뷰에 응한 일반시민들이 처음에는 장난치듯이 말하며 어색해하다가도 어느 순간 내면의 가장 깊은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술술 털어놓는다는 사실이다. 이게 촬영이 되고 편집이 되어 어느 날에 방송이 된다면 그 이야기를 온 국민이 다 알게 될 수도 있을텐데, 그리고 그 방송을 본 지인이 바로 연락을 할 수 있을텐데도 사람들은 용기내어 이야기를 한다. 아니 어쩌면 용기는 전혀 필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단지 지금까지 물어보는 사람이 없었을 뿐이지. 생각해보면 정말 진중하게 나의 삶에 대한 질문을 받아보는 경우는 흔치 않은 것 같다. 그래서 그런걸까. 별로 특별하지 않은 질문에 응답한 솔직한 답변은 엄청난 감동을 선사한다. 존재의 우연성을 여실히 드러내듯이 지금까지 내가 듣고 싶어하던 말을 생면부지의 누군가가 길을 걷다 만난 MC에게 낱낱이 털어놓는다. 


지금은 물론 코로나 사태 이후로 실내에서 진행되기에 프로그램의 초기처럼 우연히 마주치는 만남이 가져오는 감동을 엿볼수는 없다는 점이 조금 아쉽기는 하다. 하지만 이후 섭외된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고 그들이 전해주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 우연한 만남과는 다른 무게의 감동과 놀라움이 전해지는 듯 하다. 유퀴즈의 전편을 다 보지는 못했지만, 가끔씩 본방을, 어쩌다 재방을 보다보면 하던 일을 멈추고 출연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리고 매번 공통적으로 느끼는 부분은 세상이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타인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놀라움이다. 종교의 세속화와 신자유주의가 뿌리내린 개인화로 탈바꿈된 사회에서 더 이상 따듯한 온정과 다정함을 찾기 어렵지 않을까란 단정을 보기 좋게 무너뜨리는 출연자들의 인내와 꾸준함의 발자취는 매 순간 감격스럽고 부끄러움을 느끼게 만든다.  


그래서 그런지 유독 다른 토크 프로그램보다 눈물 흘리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출연자도 아마 예상치 못한 감정의 변화가 발생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MC들 또한 경청하는 가운데 감동받지 않을 재간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 눈물의 발로에는 바로 이런 의아함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대체 그 긴 시간을 어떻게 견뎌왔을까” 세상에서 사람들을 가장 많이 놀래키고 마음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천재적인 재능이나 현란한 말쏨씨나 눈이 부실 정도의 멋진 외모는 아닐 것이다. 그렇게 거저받은 것이 아니라, 아무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장구한 시간을 묵묵히 견뎌온 발자국을 우연히 누군가가 발견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이 견뎌온 시간을 추앙하게 된다. 그 발자국을 뒤따라 가면 나에게도 그런 힘이 생겨나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말이다. 


“외환위기로 모든 힘들던 1998년, 아빠가 20년을 다닌 증권회사에서 명예퇴직을 했다. 살림밖에 안 해본 아내와 대학생 딸 둘을 감당해야 했던 아빠는 회사를 그만두었다는 사실을 꼬박 한 달이나 숨겼다. 엄마에게 들키기 전까지 매일 아침 출근하듯 집을 나서서 어딘가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퇴근 시간에 돌아왔다. 당시 아빠 나이는 지금 나보다 적었다. 아빠는 어디에 머물렀을까. 끼니는 잘 챙겨 먹었을까. 해가 뜨고 질 때까지의 기나긴 시간을 무슨 생각을 하며 보냈을까. 시공간을 초월해 어딘가로 갈 수 있다면, 나보다 어린 아빠가 시간을 보내던 집도 회사도 아닌 어딘가로 가고 싶다. 그곳에 가서 아빠를 찾으면 손을 잡고 말할 거다. 나중에 작은딸이 다 호강시켜드릴테니, 걱정 말고 함께 집에 돌아가자고.(178)”


“마음이 아프다는 말을 꺼내놓는 그의 눈에 순수한 슬픔이 드러났다.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의 슬픔을 고스란히 느끼는 순수한 동정심. ‘동정’, 그러니까 그는 부모들과 ‘같은 마음’이었다. 자신이 살아있는 한 아이를 찾겠다는 부모의 마음을 고스란히 함께 느끼기에 포기할 수 없던 것이다. 슬프게도 생은 빠르고 현실은 메말라 있기에, 망각은 편리하고 외면은 간편하기에, 기억하려는 사람은 외롭다. 사람들은 대부분 과거를, 상처를, 슬픔을 잊고 일상을 살아간다. 실종자 가족과 이건수처럼 기억하는 쪽은 더욱 외로워진다. 그들의 시간은, 아무것도 지우지 못한 채 그대로 멈춰 있기 때문이다.(290)”


#이언주 #유퀴즈에서만난사람들 #모든사람은한편의드라마다 #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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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두 소설Q
이주혜 지음 / 창비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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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혜 작가의 [자두]를 읽었다. 다른 과일과 다르게 정말 맛있는 자두를 먹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겉으로는 아주 탐스러워 보이는데 막상 한 입 베어물면 나도 모르게 눈가에 주름이 지는 강렬한 신맛에 아주 작은 크기인데도 이걸 어떻게 참고 먹나 라는 후회가 앞설 때가 많다. 하지만 섬망이 온 시아버지의 회상 속에 등장한 기순네 자두는 절대 그런 후회를 가져올 것 같지 않아 보인다. 


“침이 고인다. 새콤하고 달큼한 자두. 한알만 먹어도 배가 부른 큼직한 자두. 겉도 붉고 속도 붉은 피자두. 한입 베어 물면 입가로 주르륵 붉은 물이 흐리는 기순네 자두.(82)”


원고지 2,000매가 넘는 분량의 번역을 마치고 역자 후기 원고를 보내달라는 청을 받은 화자인 은아는 지난 4개월의 시간을 돌이켜보다가 미국의 시인 엘리자베스 비숍과 에이드리언 리치의 사연을 떠올린다. 그들이 우연히 함께한 짧은 시간은 비극적인 공통된 삶의 배경을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강렬한 만남이었다. 이후 은아는 역자 후기를 쓰기 어려운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서인 것처럼 독자인 나에게 개인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제 마음을 이해받고 싶었지만 끝내 실패했던 어느 여름의 이야기입니다.(20)”라는 말로 1994년의 여름을 소환하는 무더운 여름날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시골에서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기순네 딸 순이를 납치하다시피 고향에서 도망친 시아버지 안병일은 담도암의 염증 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된다. 은아가 세진과 결혼했을 당시에는 여느 홀로된 시아버지들과는 다르게 언제나 깔끔하고 단정한 생활을 유지하는 시부가 로맨스그레이의 현신이라고 할 정도로 충분한 만족감을 선사했다. 이런 시부의 입원생활이 시작되자 은아는 남편 세진과 2교대로 병간호를 맡기 시작했고, 병원에서도 짬을 내서 번역일을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시아버지의 염증이 나아지지 않고 섬망 증세까지 드러나게 되자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힘겨워지기 시작했다. 


“시아버지의 극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오늘이 어제보다 더 행복한 나날’이었습니다. 그때로부터 10년도 되지 않아 그중 한 사람이 암 환자가 되어 병상에 누울 것이며 나머지 두 사람은 속수무책으로 지쳐갈 것을 티끌만큼도 예상하지 못했던 오만한 나날이기도 했습니다.(31)”


도저히 은아와 세진 부부가 시부의 병간호를 감당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자, 세진은 동료를 통해 간병인 영옥을 소개받게 된다. 은아는 간병인에게 지불해야 할 금액이 상당함을 헤아리게 되지만, 이내 영옥의 숙련된 도움을 받아 쉴 수 있는 시간을 얻게 됨에 안도한다. 은아는 섬망 증세가 심해져 영옥에게 도둑년 이라는 욕까지 서슴치 않고 내뱉는 시부의 포악한 모습에 몹시 당황하지만, 영옥은 이미 그런 일에 익숙해진 것처럼 시부의 간병을 능숙하게 이어간다. 그러던 어느 날 옆 침대 보호자를 통해 영옥이 시부에게 ‘죽어라. 죽어라’라는 말을 소근 소근 내뱉는다는 말을 전해 듣고 설마 하는 마음이 앞섰지만, 산책을 나간 사이에 영옥이 시부에게 하는 말을 실제로 듣게 된다. 쉽사리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영옥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길래 시부에게 그런 저주의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것일까. 


은아의 독백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간병인 영옥이 던지는 저주의 말에 대한 의심에 이르러 섬망에 빠진 시아버지 병일의 시선에서 영옥과 은아를 바라보는 속마음을 그려낸다. 그리고 시부가 영옥에게 하는 줄 알았던 도둑년 이라는 욕은 시부에게 있어서 보물과도 같은 귀한 박사 아들을 뺏어간 며느리 은아에게 하는 말임이 드러나게 된다. 은아는 로맨스그레이의 현신인 줄 알았던 시부가 사실은 자신의 소중한 보물을 뺏아간 은아가 손주를 낳지 못하자 응근한 패배감과 죄책감을 부과해온 지난날을 도둑년 이라는 욕으로 대체한 것이다. 


이후 영옥이 간병인이라는 직업을 선택한 이유와 시부에게 아무렇지 않게 저주의 말을 퍼붓을 수 밖에 없었던 가슴 아픈 과거가 회상 장면처럼 그려진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아픈 엄마를 돌봐야만 했던 영옥은 한 달에 한 번씩 먹을 거리만 놓고 무책임하게 사라지는 아빠를 대신하게 된다. 등교 전에 엄마가 밥을 먹을 수 있도록 상을 차려놓고 가는 영옥이 설거지가 되지 않은 그릇을 볼 때마다 느꼈을 상실감과 무력함이 얼마나 컸을지, 평소와는 다른 악취를 풍기는 엄마를 하루종일 그대로 놔둔 채 영원한 이별을 가늠했을 그 어린 소녀의 슬픔을 어렴풋하게나마 그려보게 된다. 그때의 상처와 아픔이 너무나도 컸기에 영옥은 죽음을 앞둔 시부에게 모진 말을 내뱉은 것이리라. 


“어르신, 죽으려거든 날 좋을 때 죽어요. 이런 염천에는 죽지 말아요. 이런 날 죽으면 자식들 고생합니다. 부디 볕도 좋고 바람도 좋은 날 죽어요. 그래야 자식들이 덜 서럽습니다. 알았지요? 꼭 좋은 날에 죽어요. 우리 어머니처럼 염천에 죽어 자식 가슴에 한을 심지 말아요.(77)”


#이주혜 #자두 #소설Q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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