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두 소설Q
이주혜 지음 / 창비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주혜 작가의 [자두]를 읽었다. 다른 과일과 다르게 정말 맛있는 자두를 먹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겉으로는 아주 탐스러워 보이는데 막상 한 입 베어물면 나도 모르게 눈가에 주름이 지는 강렬한 신맛에 아주 작은 크기인데도 이걸 어떻게 참고 먹나 라는 후회가 앞설 때가 많다. 하지만 섬망이 온 시아버지의 회상 속에 등장한 기순네 자두는 절대 그런 후회를 가져올 것 같지 않아 보인다. 


“침이 고인다. 새콤하고 달큼한 자두. 한알만 먹어도 배가 부른 큼직한 자두. 겉도 붉고 속도 붉은 피자두. 한입 베어 물면 입가로 주르륵 붉은 물이 흐리는 기순네 자두.(82)”


원고지 2,000매가 넘는 분량의 번역을 마치고 역자 후기 원고를 보내달라는 청을 받은 화자인 은아는 지난 4개월의 시간을 돌이켜보다가 미국의 시인 엘리자베스 비숍과 에이드리언 리치의 사연을 떠올린다. 그들이 우연히 함께한 짧은 시간은 비극적인 공통된 삶의 배경을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강렬한 만남이었다. 이후 은아는 역자 후기를 쓰기 어려운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서인 것처럼 독자인 나에게 개인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제 마음을 이해받고 싶었지만 끝내 실패했던 어느 여름의 이야기입니다.(20)”라는 말로 1994년의 여름을 소환하는 무더운 여름날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시골에서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기순네 딸 순이를 납치하다시피 고향에서 도망친 시아버지 안병일은 담도암의 염증 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된다. 은아가 세진과 결혼했을 당시에는 여느 홀로된 시아버지들과는 다르게 언제나 깔끔하고 단정한 생활을 유지하는 시부가 로맨스그레이의 현신이라고 할 정도로 충분한 만족감을 선사했다. 이런 시부의 입원생활이 시작되자 은아는 남편 세진과 2교대로 병간호를 맡기 시작했고, 병원에서도 짬을 내서 번역일을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시아버지의 염증이 나아지지 않고 섬망 증세까지 드러나게 되자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힘겨워지기 시작했다. 


“시아버지의 극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오늘이 어제보다 더 행복한 나날’이었습니다. 그때로부터 10년도 되지 않아 그중 한 사람이 암 환자가 되어 병상에 누울 것이며 나머지 두 사람은 속수무책으로 지쳐갈 것을 티끌만큼도 예상하지 못했던 오만한 나날이기도 했습니다.(31)”


도저히 은아와 세진 부부가 시부의 병간호를 감당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자, 세진은 동료를 통해 간병인 영옥을 소개받게 된다. 은아는 간병인에게 지불해야 할 금액이 상당함을 헤아리게 되지만, 이내 영옥의 숙련된 도움을 받아 쉴 수 있는 시간을 얻게 됨에 안도한다. 은아는 섬망 증세가 심해져 영옥에게 도둑년 이라는 욕까지 서슴치 않고 내뱉는 시부의 포악한 모습에 몹시 당황하지만, 영옥은 이미 그런 일에 익숙해진 것처럼 시부의 간병을 능숙하게 이어간다. 그러던 어느 날 옆 침대 보호자를 통해 영옥이 시부에게 ‘죽어라. 죽어라’라는 말을 소근 소근 내뱉는다는 말을 전해 듣고 설마 하는 마음이 앞섰지만, 산책을 나간 사이에 영옥이 시부에게 하는 말을 실제로 듣게 된다. 쉽사리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영옥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길래 시부에게 그런 저주의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것일까. 


은아의 독백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간병인 영옥이 던지는 저주의 말에 대한 의심에 이르러 섬망에 빠진 시아버지 병일의 시선에서 영옥과 은아를 바라보는 속마음을 그려낸다. 그리고 시부가 영옥에게 하는 줄 알았던 도둑년 이라는 욕은 시부에게 있어서 보물과도 같은 귀한 박사 아들을 뺏어간 며느리 은아에게 하는 말임이 드러나게 된다. 은아는 로맨스그레이의 현신인 줄 알았던 시부가 사실은 자신의 소중한 보물을 뺏아간 은아가 손주를 낳지 못하자 응근한 패배감과 죄책감을 부과해온 지난날을 도둑년 이라는 욕으로 대체한 것이다. 


이후 영옥이 간병인이라는 직업을 선택한 이유와 시부에게 아무렇지 않게 저주의 말을 퍼붓을 수 밖에 없었던 가슴 아픈 과거가 회상 장면처럼 그려진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아픈 엄마를 돌봐야만 했던 영옥은 한 달에 한 번씩 먹을 거리만 놓고 무책임하게 사라지는 아빠를 대신하게 된다. 등교 전에 엄마가 밥을 먹을 수 있도록 상을 차려놓고 가는 영옥이 설거지가 되지 않은 그릇을 볼 때마다 느꼈을 상실감과 무력함이 얼마나 컸을지, 평소와는 다른 악취를 풍기는 엄마를 하루종일 그대로 놔둔 채 영원한 이별을 가늠했을 그 어린 소녀의 슬픔을 어렴풋하게나마 그려보게 된다. 그때의 상처와 아픔이 너무나도 컸기에 영옥은 죽음을 앞둔 시부에게 모진 말을 내뱉은 것이리라. 


“어르신, 죽으려거든 날 좋을 때 죽어요. 이런 염천에는 죽지 말아요. 이런 날 죽으면 자식들 고생합니다. 부디 볕도 좋고 바람도 좋은 날 죽어요. 그래야 자식들이 덜 서럽습니다. 알았지요? 꼭 좋은 날에 죽어요. 우리 어머니처럼 염천에 죽어 자식 가슴에 한을 심지 말아요.(77)”


#이주혜 #자두 #소설Q #창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