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나잇 라이브러리
매트 헤이그 지음, 노진선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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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 헤이그의 [미드나잇 라이브러리]를 읽었다. ‘윌라’ 광고에 김혜수 님이 노라와 엘름 부인의 대화를 듣는 장면이 나온다. 자정이 되면 열리는 도서관이라니 판타지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막상 다 읽고 나니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반추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이야기의 시작은 ‘노라 시드’라는 40대 여성이 우울증 증세를 드러내며 자신의 인생을 한탄하고 슬퍼하다 심지어 키우던 고양이까지 죽게 되자 스스로 생을 포기할 것을 다짐하고 약을 먹으며 시작된다. 노라가 죽기 몇 시간 전의 상황들이 전개되고 죽음의 늪에 빠진 노라는 죽음과 삶의 경계에 놓인 ‘자정의 도서관’에서 엘름 부인을 만나게 된다.


엘름 부인은 노라에게 '자정의 도서관'에 대한 설명을 하며 노라가 살아온 삶의 발자취 중에 <후회의 책>을 건넨다. 노라는 자신이 후회했던 일들을 회상하며 괴로워한다. 그리고 지금처럼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게 된 것은 자신이 잘못된 선택을 했기 때문이 아닐까 자신을 자책하게 된다. 사실 노라와 같은 후회와 자책은 노라만의 상황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반복해서 겪게 되는 일이다. 그때 그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며, 그때 조금만 더 인내할 수 있었더라면, 그때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이라는 반복된 후회가 자신의 가슴을 구멍내고 고통과 좌절의 순간들이 다가왔을 때 바로 그 후회된 일로 인해서 이런 일이 발생된 것은 아닐까 자책하게 된다. 

우리는 앞으로의 자신이 삶이 결정되어 있다는 운명론을 받아들이기 싫어하면서도 이렇게 과거의 일과 미래의 일을 연관지어 생각하곤 한다. 과거의 잘못된 선택이 반드시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비관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들은 우연에 불과한 것이 많다. 우리 삶의 우연성에 의미를 부연하는 것은 우연적으로 일어난 일들이 가져온 결과가 아니라 그 우연적인 일에 반응한 자신의 모습이다. 소설에도 반복적으로 나오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견해라고 할 수 있는 "어떤 일이 생겼을 때 중요한 것은 무엇을 보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보았느냐'라는 말로 우리 삶의 우연성을 설명할 수 있다. 

노라는 스스로 삶을 마감하고자 하는 극단의 상황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겪은 후회와 한탄의 선택들을 되돌릴 수 있는 다른 삶을 살아보게 된다. 아버지의 강요가 부담스러워 그만두었던 수영을 지속해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삶을, 무대 공포증을 이기고 오빠와 밴드를 지속해서 세계적인 가수가 되어 해외공연을 하는 유명인의 삶을, 엘름 부인의 권유를 받아들여 빙하학자가 되어 북극에서 북극곰을 만나 죽을 위기를 넘기는 삶을 그리고 노라가 가장 머물고 싶었던 애쉬와 결혼하여 몰리를 낳고 철학자가 되어 자신이 책을 저술하는 삶을 살아보게 된다. 하지만 노라는 그 숱한 삶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균열을 감지하고 '자정의 도서관'으로 돌아오게 된다. 수없이 많은 삶을 살아본 노라는 결국 모든 것을 놓아버릴 지경에 놓인 것처럼 보였던 실재의 삶이 그렇게 한심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요양원에 혼자 버려질 이웃집 할아버지를 위로했고 재능이 뛰어나지만 가난한 소년의 피아노 선생님이 되어 그가 나쁜 길로 빠지지 않도록 했음을 알게 된다. 결국 우리 삶은 어떤 방법으로든 서로가 연결되어 있고 우리의 선택은 알지 못하는 순간에도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 영향의 의미를 깨닫기만 한다면 그 누구의 삶도 무용한 것은 없다는 것을 노라는 알게 된다. 

"삶에는 어떤 패턴이... 리듬이 있어요. 한 삶에만 갇혀 있는 동안에는 슬픔이나 비극 혹은 실패나 두려움이 그 삶을 산 결과라고 생각하기 쉽죠. 그런 것들은 단순히 삶의 부산물일 뿐인데 우리는 그게 특정한 방식으로 살았기 때문에 생겨났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슬픔이 없는 삶은 없다는 걸 이해하면 사는 게 훨씬 쉬워질 것예요. 슬픔은 본질적으로 행복의 일부라는 사실도요. 슬픔 없이 행복을 얻을 수는 없어요. 물론 사람마다 그 정도와 양이 다르긴 하겠죠. 하지만 영원히 순수한 행복에만 머물 수 있는 삶은 없어요. 그런 삶이 있다고 생각하면, 현재의 삶이 더 불행하게 느껴질 뿐이죠.(258)"

C.S.루이스의 삶을 그린 <섀도우랜드>라는 영화에서 사랑하는 조이가 암에 걸려 죽음을 앞두고 떠난 여행에서 조이는 루이스에게 이런 말을 건넨다. "내가 죽고 난 이후에 받을 고통은 지금 우리가 누리는 행복의 일부예요." 우리 삶에서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슬픔과 고통은 우리 삶의 자리를 떠날 수 없는 내가 어떻게 삶을 바라보도록 도와주는 일생일대의 중요한 사건들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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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학의 자리
정해연 지음 / 엘릭시르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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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연 작가의 [홍학의 자리]를 읽었다. 오랜만에 장르소설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야말로 마지막 부분을 읽었을 때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과연 인간의 상상력이란 어디까지 가능한 것인지 왜 그렇게 충격적 반전이라는 설명이 붙었는지 단박에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절대 스포 금지라는 말 또한 격하게 공감된다. 예전에 보았던 ‘식스센스’라는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긴장감이 영화를 보고 나온 누군가가 ‘그 아이 유령이야’라는 한 마디에 맥이 완전히 풀려버리는 것과 같은 결과가 펼쳐지지 않을까 싶다. 충격적인 반전이 있다는 문구가 책을 선택하는데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기에 읽는 내내 과연 무엇이 절대 스포 금지라는 말까지 붙인 것일까 의문이 더해갔다. 그런데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받는 충격이 크지,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있다면 반전이 주는 묘미는 생각보다 크지 않다. 하지만 이 소설은 전혀 그런 법칙이 통하지 않았다. 다현을 살해한 범인이 누굴까 의심해가며 강치수 경위의 수사를 따라가며 한 명씩 의심해가는 동안 생각지도 못했던 반전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반복되었던 문장들이 떠올랐다. 오로지 나만 당신을 이해할 수 있다는 식의 내용들이 마중나오듯 그려졌다. 

그리고 그러한 놀라운 반전의 내용은 이미 소설의 제목에 암시되어 있는 부분에 이르러서야 저자의 의도를 명확히 알 수 있었다. 홍학이라니,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새이기도 하지만 살인 사건과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란 생각이 들었고, 그저 다현과 준후의 관계에서 의미 있는 새의 사진이라 제목으로 선택한 것일까란 단순한 생각만 했었다. 소서의 내용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하고 싶지만, 감상을 펼칠수록 반전의 키워드가 손끝을 간지럽혀 이만 줄여야 할 것만 같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나를 잃어가는 과정으로 변질되었을 때 어떤 불행한 사태가 일어나는지 우리는 많은 일을 통해 배웠다. 부모에게 인정받으려 애쓰던 자녀가 부모를 살해하고, 자신을 무시한다며 이웃 주민에게 폭행을 서슴지 않는다. 
당신은 누구에게 인정받고자 하는가.
그 인정에 중독되어가고 있는지 않은가. -작가의 말 중에서(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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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틈의 온기 - 출근길이 유일한 산책로인 당신에게 작가의 숨
윤고은 지음 / 흐름출판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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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고은 작가의 [빈틈의 온기]를 읽었다. 부제는 “출근길이 유일한 산책로인 당신에게”이다. 흐름출판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작가의 숨> 시리즈 첫 번째 책이다. 이미 여러 편의 소설을 출간한 작가의 에세이를 읽을 때면 소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받곤 한다. 소설과 에세이가 둘 다 자신의 이야기를 삽입할 수 있지만 소설에서는 이야기의 흐름에 맞도록 수정되거나 개개인의 사생활이 드러나지 않도록 윤색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반면에 에세이에서는 솔직함에 방해가 되는 거짓을 첨부할 바에는 차라리 어설픈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오히려 매력적이기에 분명 같은 사람이 쓴 글임에도 소설과 에세이의 온도차는 크게 느껴지곤 한다. 

이번 책에서는 이미 문학가의 자리매김이 분명한 라디오 디제이를 하는 평범한 출근러의 일상을 그리고 있기에 항상 특별한 존재처럼 멀게만 느꼈던 작가의 일상이 조금은 친숙하게 느껴졌다. EBS 라디오 <윤고은의 EBS 북카페>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고 하는데,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서 검색해보니 어찌보면 낮 시간대의 가장 하이라이트 라고 할 수 있는 12시에서 2시 사이를 담당하고 있었다. 아마도 나처럼 책을 통해 라디오 청취자를 늘릴 수 있는 일석이조의 홍보효과임은 틀림없어 보인다. 그리고 그렇게 매일 라디오 방송을 위해 출퇴근을 하다보니 이번 에세이와 같은 책 또한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멀미가 심한 편이라 버스나 자가용 안에서는 스마트폰으로 메시지를 보내기도 힘들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지하철 안에서는 책을 즐겨 읽는다. 지하철이 버스나 자동차보다 훨씬 안정적이고 움직임의 크기가 덜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저자도 지하철이 책을 읽기에 적당한 환경을 조성한다고 말한다. 적당하고 일정한 소음, 그리고 반복적인 진동이 오히려 책에 몰입할 수 있는 백색소음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가 싶다. 특히나 요즘같은 코로나 시기에는 공공 장소에서 통화나 대화도 자제해 달라는 방송이 연이어 나오고 있으니 지하철 안은 더욱 책을 읽기에 좋은 장소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저자는 라디오 방송을 위해서 출근하는 지하철 안에서 그날 방송의 프롤로그를 작성했다고 한다. 그날 함께 지하철에 탔던 사람들이 주인공이 되거나 출근하며 지나쳐온 평범한 일상이 저자의 감성을 입고 나와 매일 매일 전파를 타고 어디선가 그 방송을 듣고 있을 이들에게 희망과 용기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셈이다. 

라디오 DJ라는 일도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느껴지는데 그 라디오 방송의 시작 원고조차도 스스로 작성할 수 있다니, 아마도 저자는 매일 매일 행복한 창작의 고통을 피력하지 않았을까 싶다. 저자가 라디오 디제이를 하고 있어서 그런지 지하철 디제이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출퇴근 시간에 지하철을 탄 적이 많지 않아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지하철에서는 안내를 위한 방송외에는 음악도 나오지 않기에 어떤 기관사님이 갑자기 목소리를 들려준다면 몹시 놀랄 것 같다. 

“그리고 어느 퇴근길에 선물 같은 순간을 한 번 더 만날 수 있었다. 그것도 가장 사랑하는 구간인 옥수역과 압구정역 사이에서. 지하철 디제이가 말했다. 한강을 지나고 있으니 고개를 들어 밖을 보시라고, 잠깐이라도 마음에 여유를 가지시라고, 마침 해가 지고 있었고 세상에 다시 없을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고 나는 자리에 앉아 있었고 그 모든 게 엄청나게 황홀한 우연, 그러니까 행운이라고 생각했다.(139)”

이야기의 말미에서 새로운 가족이 생기는 놀라움을 만끽하며 그들과의 봄 나들이가 얼마나 큰 행복을 가져다 주는지 언젠가 먼 훗날 그렇게 큰 행복을 가져다 준 이와의 이별을 두려워하게 만든다는 고백을 던진다. 세상에  無였던 존재에서 우연한 만남으로 이제는 없어서는 안 될 必의 존재가 되어버린 이들과의 운명을 이렇게 고백한다. 

“인생에는 아무리 앞서 생각하려는 사람도 절대 감지할 수 없는 강렬한 바람이 분다. 나의 슬픈 예감이 어느 공간에나 머무는 가벼운 먼지라는 걸 알게 만드는 바람. 어느 봄날 내가 품었던 늙은 감상과 쓸쓸함은 예상 못한 방식으로 깨졌다.(310)”

지금의 행복도, 지금의 불행도 언제일지 모르겠지만 나의 어떤 지력으로도 막을 수 없는 인생의 바람으로 날아갈 버릴 먼지라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가벼운 먼지를 쌓는 일을 무던히 해낼 수 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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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 한 마리
사쿠라 모모코 지음, 권남희 옮김 / 21세기북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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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라 모모코의 [도미 한 마리]를 읽었다. 저자의 에세이 3부작 중에 세 번째 책이다. 마치 이야기의 정점을 찍는 것처럼 책을 읽다가 개그 프로그램을 보는 것처럼 소리내서 웃은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그야 당연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방귀 얘기가 들어가서이기도 했지만, 사쿠라 모모코처럼 실감나고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작가는 그리 많지 않을 거 같다. 암튼 더러운 얘기는 더럽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무척이나 재미있다. 아마도 어른이 되어서도 아이 때와 마찬가지로 배설에 대해서는 똑같은 욕구를 갖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란 엉뚱한 가설을 세워본다. 

아마도 일본에서는 만화가로도 유명하고 TV 프로그램의 각본까지 썼다고 하니 꽤나 유명한 사람이라, 저자의 에피소드가 담긴 에세이 시리즈가 무척이나 인기 있었을 것 같다. 우리나라와 이렇게 가까운 나라임에도 그 나라에서 유명한 사람을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요즘이야 인터넷으로 너무나 쉽게 이웃나라의 유명한 사람들의 정보를 알아볼 수 있지만, 당시에는 아마도 일본에 유학을 하던지, 살던지 했던 사람들만 아는 정도였을 것이다. 그런데 벌써 30여년 전에 인기 있었던 작가의 책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저자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알고 나서 읽으니 나와 동시대의 삶을 살아왔음에도 아주 오래 전의 일처럼 여겨진다. 저자 본인은 몰랐겠지만, ‘즐거운 후기 대담’에 나오는 내용으로 보건데 너무나도 일을 많이 해서 몸을 혹사시켜 큰 병이 일찍 찾아온 것은 아닌지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리고 에세이 시리즈에 단골 등장인물로 등장하는 사쿠라 모모코의 가족들은 저마다의 개성이 뚜렷하게 그려져 책을 읽는 내내 저자의 가족들의 근황이 궁금해지기도 한다. 특히 저자가 17살 때까지 지독히 게으름을 피우며 엄마와의 갈등을 고백하는 내용은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엄마의 분노를 폭발시키는 철없는 아이같던 저자는 18살 때부터 갑자기 성실한 학생으로 변모했다고 고백한다. “내가 17년 동안 게으름을 부린 것은 그 후에 일하기 위한 힘을 축적한 것이다. 그러니 네타로의 다섯 배 이상 일을 해야 한다. 그의 다섯 배라면 엄청난 거다. 그냥 세 배 정도만 게으름을 부렸더라면 좋았을 걸.(118)”

걱정만 끼치는 언니에 대한 소회는 이렇게까지 적나라하게 언니에 대한 뒤담화를 해도 되는 것인지 우려가 될 정도로 솔직하다. 그런데 내용은 물론 저자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겠지만, 내용대로라면 언니는 민폐 캐릭터가 맞는 것 같다. ㅋㅋ 저자의 가족 중에 최고는 역시 아빠 히로시가 아닐까 싶다. 한마디로 어설픈 캐릭터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고 뭔가무능력하고 무색무취의 존재감은 바닥인 것처럼 보이지만 저자가 아빠를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는지 이야기의 곳곳에서 드러난다. “히로시에게 가장 큰 고민은 근처 맛있는 생선 가게가 휴일일 때 어디서 생선을 사는가, 하는 정도라고 한다.(208)” 우리가 이렇게 단순한 곳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다. 

“친구가 저희 집 복도에서 방귀를 뀌었는데, 제가 그것도 모르고 복도로 나간 거예요. 순간 친구가 ‘앗, 지금 복도에!’ 하고 소리를 질렀지만 때는 이미 늦었고, 너무나도 고약한 냄새에 저는 쓰러지고 말았죠. 쓰러지면서 저도 모르게 방귀를…. 제 방귀도 만만치 않아서 이건 방귀 지옥이 따로 없더군요. 복도가 조금 칙칙해진 느낌이었어요. 쓰러지면서 눈에 들어온 복도에 어린 빛까지 얼핏 보이더라고요.(248-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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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도배사 이야기 - 까마득한 벽 앞에서 버티며 성장한 시간들 에디션L 3
배윤슬 지음 / 궁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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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윤슬 님의 [청년 도배사 이야기]를 읽었다. ‘궁리’라는 이름의 출판사에서 연재하는 ‘Love My life’, 에디션L 시리즈 3번째 이야기이다. 책날개에 출판 이름에 대한 소개가 이렇게 나와 있다. “배우고 익히는 데 궁리보다 앞서는 것이 없고, 궁리의 요체는 모름지기 독서에 있다.” 요즘 출판계의 유행이 이렇게 연재 형식의 책을 내는게 아닌가 싶다. ‘아무튼’ 시리즈도 있고, ‘띵’ 시리즈도 있고, ‘like-it’ 시리즈도 있고, ‘일하는 사람’ 시리즈도 있다. 글을 전문적으로 써온 작가들이 아닌 경우도 많지만 각자 살아온 직업과 정해진 주제에 대한 개성 있는 글들이 매혹적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많다. 

이번 책은 우연히 뉴스를 통해 잠시 소개된 내용을 얼핏 살펴보고 나중에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처럼 학벌지상주의의 나라에서 명문대학을 나와 멀쩡히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젊은 청년이 도배사를 한다고 하니,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체 이유가 뭘까 정도의 궁금증이 생기지 않을까 싶다. 언제부터인지 청년들 사이에서 스펙이라는 말이 당연시되기 시작했다. 우리말로 하면 경력이나 자격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까 싶은데, 스펙은 단순히 경험을 쌓아 삶의 지평을 넓히려는 의도보다는 취업을 위한 하나의 배경정도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신입사원을 뽑는데 이런 저런 경험이나 자격이 전무한 사람보다는 그래도 뭔가 있어보이는 사람이 더 경쟁력이 있게 비춰지다보니, 너도나도 스펙쌓기에 열을 올리게 되었고 취업의 문은 점점 좁아지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우리나라가 학벌지상주의에 몰입해 있는것과 비례적으로 화이트칼라에 대한 맹목적인 동경이 있다는 사실때문에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 같다. 저자가 말한 것처럼 사람의 일에는 머리를 쓰는 일과 몸을 쓰는 일이 나누어져 있고, 자신의 성향과 재능에 따라서 만족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할 텐데 우리사회는 몸을 쓰는 일을 미천하게 생각해왔기에 전국민이 대학을 나와 화이트칼라가 되어야만 할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들었다. 책의 에피소드에 나왔듯이 저자가 속한 도배팀이 소갈집에 회식을 하러 갔을 때도 작업복을 입은 그들을 티나게 푸대접하며 불친절했던 것과는 반대로 중형차를 몰고온 어떤 사람이 냉면 한 그릇 먹고 갔음에도 정중히 대했다는 내용은 우리가 얼마나 눈에 보이는 것에 길들여져 있는지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행태는 비단 우리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아주 오래전부터 답습해온 인간의 나약한 습성의 단면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는 Praxis와 Poiesis로 우리가 무엇인가를 행하는 일에 대한 구분을 짓는다. 실제로 자신의 성격과 능력에 걸맞지 않지만 그저 남들이 보기에 그럴듯한 일을 억지로 행하는 것은 그가 선택한 직업을 가식과 위선의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그에 반해, 허름한 옷을 입고 좋은 대학을 나와서 대체 뭐하러 그런 일을 하냐는 말을 들으면서도 자신이 선택한 일에 대한 자부심과 만족감을 갖고 일을 한다면 그가 선택한 직업은 진실한 것이며 그 직업을 선택한 이로 인하여 주변 사람들은 그 일을 더 이상 하찮게 보지 않을 것이다. 

사실 우리가 선택하고 행하는 직업은 날때부터 귀한 일과 천한 일이 구분된 것은 아니다. 그러한 구분은 모두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고 그러한 차별에 익숙해진 순간부터 차별을 당하는 일이 아닌 차별을 할 수 있는 일을 맡기 위해 맹목적인 교육을 받아 왔다. 배윤슬 님의 글은 어쩌면 이렇게 오랜시간 답습해온 우리 인간사회의 나약한 단면을 보기 좋게 들여다 볼 수 있도록 예리한 칼로 도려내고 있는 시도가 아닌가 싶다. 세상의 모든 일이 그러하듯 일이 손에 익어 자연스럽게 그 일을 능숙하게 해내기까지 홀로 감내해야만 했을 인고의 시간이 있을텐데, 기꺼이 그러한 시간을 솔직담백하게 나눌 수 있는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몸이 힘들고 피곤한 것보다 더 힘든 것은 마음을 다잡는 일이었다. 실제로도 몸이 아프고 힘들어 그만두는 사람보다 마음이 힘들어 그만두는 사람이 더 많다고 하니 말이다. 몸의 피로는 어느 시점이 지나면 익숙해지지만 거친 일터에서 지저분한 작업복을 입고 적은 월급을 받아가며 일하는 자신의 모습을 처음부터 인정하는 것은 쉽지 않을 뿐더러 주변에 보여주기 부끄러울 수 있다.(88)”

“같은 일을 하더라도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외롭게 시작하는 것과 지지를 받으며 일하는 건 아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삶이고 내 선택이지만 주변의 응원과 지지가 큰 힘이 되었다. 나는 어떤 일을 하더라도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견고한 믿음을 가지고 도배를 시작했고, 그 지지에 대한 믿음은 내가 도배를 하는 것에 있어 아주 큰 자원이 되었다.(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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