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고은 작가의 [빈틈의 온기]를 읽었다. 부제는 “출근길이 유일한 산책로인 당신에게”이다. 흐름출판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작가의 숨> 시리즈 첫 번째 책이다. 이미 여러 편의 소설을 출간한 작가의 에세이를 읽을 때면 소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받곤 한다. 소설과 에세이가 둘 다 자신의 이야기를 삽입할 수 있지만 소설에서는 이야기의 흐름에 맞도록 수정되거나 개개인의 사생활이 드러나지 않도록 윤색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반면에 에세이에서는 솔직함에 방해가 되는 거짓을 첨부할 바에는 차라리 어설픈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오히려 매력적이기에 분명 같은 사람이 쓴 글임에도 소설과 에세이의 온도차는 크게 느껴지곤 한다. 이번 책에서는 이미 문학가의 자리매김이 분명한 라디오 디제이를 하는 평범한 출근러의 일상을 그리고 있기에 항상 특별한 존재처럼 멀게만 느꼈던 작가의 일상이 조금은 친숙하게 느껴졌다. EBS 라디오 <윤고은의 EBS 북카페>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고 하는데,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서 검색해보니 어찌보면 낮 시간대의 가장 하이라이트 라고 할 수 있는 12시에서 2시 사이를 담당하고 있었다. 아마도 나처럼 책을 통해 라디오 청취자를 늘릴 수 있는 일석이조의 홍보효과임은 틀림없어 보인다. 그리고 그렇게 매일 라디오 방송을 위해 출퇴근을 하다보니 이번 에세이와 같은 책 또한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멀미가 심한 편이라 버스나 자가용 안에서는 스마트폰으로 메시지를 보내기도 힘들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지하철 안에서는 책을 즐겨 읽는다. 지하철이 버스나 자동차보다 훨씬 안정적이고 움직임의 크기가 덜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저자도 지하철이 책을 읽기에 적당한 환경을 조성한다고 말한다. 적당하고 일정한 소음, 그리고 반복적인 진동이 오히려 책에 몰입할 수 있는 백색소음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가 싶다. 특히나 요즘같은 코로나 시기에는 공공 장소에서 통화나 대화도 자제해 달라는 방송이 연이어 나오고 있으니 지하철 안은 더욱 책을 읽기에 좋은 장소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저자는 라디오 방송을 위해서 출근하는 지하철 안에서 그날 방송의 프롤로그를 작성했다고 한다. 그날 함께 지하철에 탔던 사람들이 주인공이 되거나 출근하며 지나쳐온 평범한 일상이 저자의 감성을 입고 나와 매일 매일 전파를 타고 어디선가 그 방송을 듣고 있을 이들에게 희망과 용기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셈이다. 라디오 DJ라는 일도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느껴지는데 그 라디오 방송의 시작 원고조차도 스스로 작성할 수 있다니, 아마도 저자는 매일 매일 행복한 창작의 고통을 피력하지 않았을까 싶다. 저자가 라디오 디제이를 하고 있어서 그런지 지하철 디제이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출퇴근 시간에 지하철을 탄 적이 많지 않아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지하철에서는 안내를 위한 방송외에는 음악도 나오지 않기에 어떤 기관사님이 갑자기 목소리를 들려준다면 몹시 놀랄 것 같다. “그리고 어느 퇴근길에 선물 같은 순간을 한 번 더 만날 수 있었다. 그것도 가장 사랑하는 구간인 옥수역과 압구정역 사이에서. 지하철 디제이가 말했다. 한강을 지나고 있으니 고개를 들어 밖을 보시라고, 잠깐이라도 마음에 여유를 가지시라고, 마침 해가 지고 있었고 세상에 다시 없을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고 나는 자리에 앉아 있었고 그 모든 게 엄청나게 황홀한 우연, 그러니까 행운이라고 생각했다.(139)” 이야기의 말미에서 새로운 가족이 생기는 놀라움을 만끽하며 그들과의 봄 나들이가 얼마나 큰 행복을 가져다 주는지 언젠가 먼 훗날 그렇게 큰 행복을 가져다 준 이와의 이별을 두려워하게 만든다는 고백을 던진다. 세상에 無였던 존재에서 우연한 만남으로 이제는 없어서는 안 될 必의 존재가 되어버린 이들과의 운명을 이렇게 고백한다. “인생에는 아무리 앞서 생각하려는 사람도 절대 감지할 수 없는 강렬한 바람이 분다. 나의 슬픈 예감이 어느 공간에나 머무는 가벼운 먼지라는 걸 알게 만드는 바람. 어느 봄날 내가 품었던 늙은 감상과 쓸쓸함은 예상 못한 방식으로 깨졌다.(310)” 지금의 행복도, 지금의 불행도 언제일지 모르겠지만 나의 어떤 지력으로도 막을 수 없는 인생의 바람으로 날아갈 버릴 먼지라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가벼운 먼지를 쌓는 일을 무던히 해낼 수 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