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냉면 : 처음이라 그래 며칠 뒤엔 괜찮아져 띵 시리즈 10
배순탁 지음 / 세미콜론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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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순탁 작가의 [평양냉면: 처음이라 그래 며칠 뒤엔 괜찮아져]를 읽었다. 세미콜론 띵 시리즈 10번째 책이다. 우리나라 사람치고 여름을 나면서 냉명 한 번 안 먹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을까? 딱히 냉면을 먹으로 냉면 전문점을 찾지 않는다고 해도 고기 먹으러 갔다가 후식 냉면 정도는 한 번씩 맛보기 마련이다. 면 매니아가 아닌 나 조차도 해마다 여름이면 냉면을 몇 번씩 사먹곤 했으니 말이다. 띵 시리를 읽다보면 갑자기 나도 그 음식을 먹으러 나가야 할 것 같은 유혹에 휩싸인다. 비단 음식을 주제로 한 에세이지만 음식 얘기만이 아니라 음식을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가 틈틈이 섞여 있어 주제가 된 음식이 더욱 땡기는 것 같다. 


이미 TV 프로그램을 통해서 얼굴까지도 어느 정도 알려진 저자이기에 혹시나 유명세를 타고 이 시리즈를 이어가는 것은 아닐까란 우려는 단숨에 사라질 정도로 잘 읽혔다. 살얼음이 살짝 낀 냉면수를 들이키는 것처럼 시원한 맛이 느껴지고 자신의 생각과 개성을 주저없이 드러내는 소신넘치는 진술에는 나도 모르게 동조하며 박수를 보내게 된다. 그리고 음악 평론가이자 전문가답게 평양냉면에 대한 생각과 짝을 맞추는 듯한 음악 이야기는 여러모로 매력적이고, 음악이 절대로 고정관념처럼 음악을 좀 안다고 허세를 부리는 이들의 전유물이 아님을 어필해주니 더욱 고맙기 그지없다. 


나도 냉면을 먹으러 가면 들은 적이 있는 것 같다. 식초나 겨자 소스를 넣거나 가위로 면을 자르는 행동은 평양냉면에 대한 모독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지금도 트라우마처럼 남아 있는지 냉면을 가위로 자를 때면 뭐라 할 사람도 없는데 슬쩍 눈치를 보게 된다. 혹시 나 촌뜨기처럼 냉면 자르고 있는거 아닌가 하고 말이다. 이런 나의 의기소침함을 저자가 단숨에 위로해 준다. 식초나 겨자를 넣든 말든, 면을 자르던 말던 냉면을 먹는 사람은 그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다. 내가 편하고 내가 만족스러우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평양냉면을 먹을 때의 어떤 절대적인 법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평양냉면 매니아가 설파해주니 속이 다 시원해진다. 특히나 내용 중에 돼지갈비와 같이 먹는 평양냉면에 대한 감상 부분이 나오는 부분은 정말 침이 꼴깍 넘어간다. 아마도 이렇게 평양냉면 하나에도 전심전력인 작가와 한 팀이기에 <배철수의 음악캠프>는 앞으로도 꾸준히 인기가 높을 듯 싶다.


"다행이다. 치과 치료를 열심히 받은 결과, 내 이는 아직까지 얼음을 견딘 만하다. 여러분도 더는 미루지 말고 치과 치료를 빨리 받기 바란다. 맛있게 나온 냉면 기왕이면 제대로 즐겨야 하지 않겠나. 무섭다고 치과 치료 미룰수록 늘어나는 건 지옥으로의 초대장이나 다름없는 고통과 치료비뿐이다.(52)"


"내가 바라는 타인과의 이상적인 관계에 대해 적어본다. 상대방에게 사심은 없지만 그렇다고 무관심하지는 않은 관계. 마치 노련한 조종사처럼 서로 간의 영역과 궤도를 잘 지키고 침범하지 않으면서 그저 자기 할 일 열심히 할 줄 아는 관계. 그러면서도 필요할 때는 기꺼이 손을 내밀 수 있는 그런 관계.(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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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마와라시
온다 리쿠 지음, 강영혜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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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다 리쿠의 [스키마와라시]를 읽었다. 일본어를 할 줄 알았다면 제목에 붙은 말이 좀 더 실감나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싶다. 책을 읽고 나니 ‘스키마와라시’라는 말은 실제 사용되는 단어는 아니고 작가의 만든 가상의 공간에서 적용되는 말이라 소리내어 반복할수록 어떤 주문을 외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장르 문학으로만 여겨졌던 SF와 판타지 소설들이 점차 주목받는 시기라 그런지 이번 소설도 판타지 요소가 큰 맥락을 차지하고 있다. 책 표지부터 뭔가 일본의 정통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같이 표현되어 있는데, 실제 읽고나서 다시 살펴보니 소설의 가장 중요한 화두를 아주 잘 표현한 것 같다. 책날개에 표시된 것으로 보아 원서와 같은 표지 디자인이 아닌가 싶다.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한 1인칭 시점으로 쓰여 있다. 중간에 대화가 상당히 많이 나와서 희곡집을 읽는 듯한 기분도 들지만 그래도 주인공 ‘산타’가 ‘스키마와라시’가 무엇인지 독자에게 아주 친절히 설명해주듯 이야기는 진행된다. 산타와 그의 형 다로는 골동품 전문점을 운영하며 더불어 몇 가지 음식을 팔고 있다. 그런데 산타에게는 신비로운 능력이 있었는데 어떤 물건을 만지고 나면 그 물건에 담긴 장면을 떠올리는 것이다. 그래서 아주 어릴때 지로라는 개가 물어온 샌들을 만져 죽은 아이가 버려진 곳을 묘사하거나 커다란 호텔의 기념 파티 현장에서 바닥에 떨어진 오비도메라는 물림 장치만 보고도 주인이 누군지 찾아내는 신묘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이 부분에서는 스티븐 킹의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 <그린 마일>이 생각났다. 교도소에 갇힌 신비로운 능력을 가진 인물은 범죄자와 악수를 하면 상대방이 살인이나 상해를 가할 때의 장면이 떠오르게 되고 그로 인해 죽음에 처한 이들이 살아나는 이야기로 기억된다. 온다 리쿠도 스티븐 킹의 소설을 오마주 한 것인가란 생각이 들었지만 이어지는 내용은 조금 다른 양상으로 흘러갔다.

산타가 갖게 된 이상한 능력은 그의 형 다로가 운영하는 골동품 전문점을 유지하기 위한 일과 연계되어 사건이 발생된다. 우연히 만지게 된 어떤 타일을 통해서 ‘그것’이라 지칭되는 비현실적인 공간으로의 유입과 오감을 통해 커다란 퍼즐의 한 조각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산타가 형과 함께 그 타일을 찾아나서며 어릴 때 사고로 돌아가신 부모님을 만나게 되는 장면에서는 혹시나 부모님의 사고와 관련된 미스터리가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결론 부분에 이르러 산타는 그가 가진 특별한 능력과 이미 무지개 다리를 건넌 지로와 너무나도 닮은 너트라는 개를 통해서 부모님을 만나는 통로에 이르게 되고 그곳에서 산타가 가진 의문을 해소된다. 

산타와 다로가 다이코 하나코를 우연히 만나 페스티벌에 그동안 모아온 골동품인 창문과 문을 사용하며 ‘스키마와라시’라 불리는 소녀를 만나게 된다. 한 여름 밤에 읽는다면 순간 순간 소름이 돋는 장면들이 연이어 나오기에 적당한 피서가 될 것 같지만 판타지한 요소가 자주 반복되다 보니 나중에는 그다지 놀랍지도 않고 식상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그리고 소설 속에서 느껴지는 일본인들의 정서에는 기묘한 일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지 않나 싶다. 일본 소설을 읽을 때면 우리나라의 지극히 현실적인 소설들의 주제와는 상반되게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들을 접할 때가 많다. 그들이 상상력이 더 뛰어난 것인지 아니면 너무나도 단조롭고 일률화된 일상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것인지 지금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저너머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은 것 같다. 

“나는 SNS도 하지 않고, 자신이 무엇을 먹고 있는지, 어디에 있는지를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뭐, ‘그것’ 탓도 있겠지만. 프라이버시 보호가 심해지고 개인 정보를 신경 쓰는 사람이 늘어난 것에 역행하듯이 어째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먹었는지를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은 사람이 많을까, 그것이 늘 의문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도 자신에게 보여주고 싶다, 자신에게 그 ‘증거’를 보여주고 안심하고 싶은 것이라면 어쩐지 이해가 된다.(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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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에릭 와이너 지음, 김하현 옮김 / 어크로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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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와이너의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SOCRATES EXRESS]를 읽었다. 부제는 '철학이 우리 인생에 스며드는 순간'이다. 총 14명의 동서양을 망라하는 철학자들의 삶과 사상을 살피며 기차는 떠난다. 에릭 와이너가 타고 떠나는 철학의 기차는 인간 삶의 기나긴 여정과 함께 하며 삶과 죽음을 성찰하게 도와준다. 새로운 철학의 사조가 생겨나고 그에 따른 변주곡과 같은 기이한 형태의 유행이 뒤따른다 하더라도 결국은 인류의 발생 이래로 지속되어 온 핵심 화두는 마찬가지이다. 과연 인간의 삶의 의미는 무엇이며,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살아 하는 것인가? 


철학은 어렵다. 반면에 철학은 그럴듯하다. 폼내기가 좋다. 어려운 말이나 문장 몇 개를 기억하고 있다가 아무렇지 않은 듯 그럴듯한 상황에 툭 내뱉으면 꽤나 관념적인 인간처럼 보인다. 실제로 철학하는 삶을 사는 것은 어렵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 철학의 삶을 살고 있다. 에릭 와이너의 책은 실제 철학가들의 원서를 보는 것보다 훨씬 수월하다. 지루해질만 하면 기차를 타고 어딘가로 떠나며 적당한 지점에서 딸과 같은 다른 등장 인물들을 등장시켜 책을 덮을 위험에서 우리를 지켜준다. 보통 일반적인 철학 전문서적을 읽기 위해서는 꽤나 깊은 집중력이 필요하다. 단지 몇 문장을 연이어 읽었을 뿐인데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몇 페이지를 읽고 나면 그 책을 당장 집어 던지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다. 이따위 어려운 책을 읽지 않아도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고 큰 소리 치고 싶어진다. 그에 반해,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는 마치 고속열차를 탄 것처럼 순식간에 저명한 철학자의 정수로 우리를 데려간다. 에릭 와이너가 너무나 쉽고 간결하게 그 포문을 열어주다보니 철학도 별거 아니구나라는 손쉬운 단정을 내리게 된다. 그런데 책을 덮고 나서, 다른 챕터로 넘어가서 저자가 방금 전 철학자의 이야기를 다시 언급해도 무슨 내용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철학은 페이지를 넘기기 어렵다. 한 문장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소화가 되기를 기다려야 할 때가 많다. 어떤 철학자가 언급한 내용을 살피기 위해 그가 비판하거나 예로 든 다른 사상가의 책을 뒤적거려야 할 때가 있다. 그래서 좀처럼 한권을 독파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한 명의 철학가가 수십권에서 수백권의 저서를 발표했다면, 그리고 그러한 철학자가 지금까지 수 백, 수 천, 수 만에 이른다면 나는 사실 한 명의 철학자도 다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어느 시대의 철학사조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철학을 공부하고 살아가는 것은 시대의 엄청난 거리와 사조의 다양한 간극에도 불구하고 인간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커대란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않기에 어느 순간 비슷한 맥락을 찾아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힘겹게 거두어들인 깨달음은 한 개인의 지평을 넓혀주고 살아갈 힘이 되어준다. 


14명의 철학자의 이야기를 다 읽었는데도 명확히 기억하는 내용이 없는 것 같다. 그래도 에릭 와이너가 친절히 안내한 기차를 타고 2천년을 넘나드는 사상가들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은 하루를 시작하는 어떤 의미있는 약속과도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보낸 일주일이 조금 더 철학과 가까워질 수 있겠다는 용기를 건네 주는 것 같다. 


"걷는 동안 대답이 떠오른다. 짧은 두 단어다. 낯설지만 익숙하고, 터무니없지만 타당하고,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말. 다카포.

처음부터 다시 한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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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편의점 불편한 편의점 1
김호연 지음 / 나무옆의자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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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연 작가의 [불편한 편의점]을 읽었다. 2년 전 [파우스터]로 만났던 작가의 신작을 조금 늦게 접하게 되었다. [파우스터]와는 전혀 다른 소재로 밋밋해 보일 수 있는 보통 사람들의 애환을 드라마틱하게 그려냈다는 점이 새롭게 다가왔다. 표지 그림에 듬직한 주인공의 뒷모습이 보이고 ‘Always’라는 이름의 편의점이 도시의 어둠을 밝히는 등불 같은 모습으려 그려져 있다. ‘Always’라는 이름의 편의점은 항상, 언제든 무심하게 반복되는 잔혹한 일상에도 그 불편한 편의점을 이용하고 나면 세상 모든 시름이 이해되고 받아들여질 것 같은 마법의 장소로 그려진다. 저자가 정말로 의도하는 바는 우리가 이 매정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딘가에 ‘불편한 편의점’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독자들에게 호소하고 있는 듯하다. 

한 평생 역사 교사로 재직해온 염 여사는 남편이 남긴 재산으로 청파동의 한 주택가에 편의점을 열게 된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장사가 잘 되었지만 주변에 공격적으로 마케팅을 하는 편의점이 두 곳이나 생겨나면서 매출에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염 여사는 연금으로 일상 생활이 충분히 가능했지만 편의점에 생계가 걸린 직원들을 위해서 아들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편의점을 팔지 않는다. 이야기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염 여사의 편의점 운영은 실로 현실적이지 않다. 요즘에 누가 다른 사람들의 생계를 유지시키기 위해 수익이 시원찮은 사업을 지속할 수 있단 말인가? 어쩌면 당연히 우리사회에 존재해야 할 인간상의 모습이 실제로는 극히 보기 드물기에 저자는 염 여사와 같은 인물들의 등장으로 우리 마음 안에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는다. 

염 여사는 친지의 빈소에 참석하기 위해 부산행 기차를 탔다가 그녀의 지갑과 통장 등 귀중한 물건이 들어있는 파우치를 잃어버렸음을 알게 되고, 잠시 후에 독고라는 노숙자의 전화를 받게 된다. 이야기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미스터리스러운 인물인 독고는 염 여사의 파우치를 찾기 위해 폭행을 당하는 위험을 무릅쓰는 정의로운 행동을 보이지만 자신의 이름도 나이도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도 기억하지 못한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염 여사는 독고를 자신의 편의점으로 데리고 가서 편의점 도시락을 먹이게 되고 그것을 계기로 독고를 노숙자의 삶에서 일상적인 삶으로 전환시키는데 성공한다.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독고는 오랜 노숙 생활로 어눌해진 발음도 서서히 정상적으로 돌아오게 되고, 술을 끊고 옥수수 수염차를 먹으며 아주 조금씩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소설의 말미에 독고의 숨겨진 과거가 드러나기 전까지는 그의 점진적인 변화는 전혀 드러나지 않기에 독고에 대한 궁금증은 더욱 커지게 된다. 

불편한 편의점의 야간 알바생 독고는 ‘Always’에서 일하던 오 여사와 시현에게 신선한 충격과 영향을 미치게 된다. 시현은 독고의 충고로 유튜브에 편의점 포스기 사용법을 올려 다른 매장의 점장으로 스카웃되게 되고, 오 여사는 방황하는 아들과 화해할 수 있는 물꼬를 트게 된다. 그리고 독고가 일하는 시간에 편의점을 방문한 중년의 가장과 희곡을 쓰는 작가와의 만남에 대한 에피소드 또한 잔잔한 감동을 준다. 이야기는 클라이막스에 이르러 염 여사의 아들이 에일 맥주 양조장에 투자하려고 편의점을 팔기 위해 흥신소 곽에게 독고의 뒷조사를 부탁하면서 절정에 이르게 된다. 강남의 어느 부유한 성형 외과에서 오히려 협박을 당한 곽은 독고에게 모든 진실을 털어놓게 되고 곽은 뜻밖의 제안을 받게 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독고의 지난 과거는 우리 사회의 슬픈 자화상을 고백한다. 성형 외과 의사였던 독고는 취업을 위해 성형을 하려던 22살의 젊은 여성이 유령 수술로 숨지게 되는 끔찍한 사건을 마주하게 된다. 그럼에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던 독고는 아내와 딸에게도 버림받은 채 술로 매일을 지세우다 서울역의 노숙자가 된 것이다. 이야기는 코로나 시대와 맞물려 독고가 자신의 잘못을 사죄하는 의미로 대구에 봉사를 하러 가는 장면으로 마무리 된다. 너무나도 큰 트라우마와 자신을 학대하는 삶으로 기억을 잃어버렸던 독고라는 이름의 주인공은 마음이 따뜻한 전혀 알지 못했던 타인과의 만남으로 자신을 용서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고 그가 변화되는 시간 동안 또 다른 이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며 이야기는 해피엔딩이 된다. 소설에 나온 말처럼 인간에게 관계는 무엇보다 중요하며 관계는 곧 소통이라는 사실을 머리속으로는 알면서도 그 작은 용기를 내기가 왜 그렇게 힘든 것인지 독고의 삶을 통해 다시 한 번 자성하게 된다. 

“어쩌면 노숙자 같은 사람들을 도울 방법은 그렇게 좀 더 느리게, 천천히 다가가는 것이 아닐까?(80)”

“밥 딜런의 외할머니가 어린 밥 딜런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행복은 뭔가 얻으려고 가는 길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길 자체가 행복이라고. 그리고 네가 만나는 사람이 모두 힘든 싸움을 하고 있기 때문에 친절해야 한다고.(140) -밥 딜런 자서전 [바람만이 아는 대답] 중에서”

“고통의 추가 내장을 관통해 바닥으로까지 그의 몸을 끌고 가는 게 느껴졌다. 사내가 판결문 읽듯이 숨을 골라가며 진술한 말들이 무거운 추가 되어 민식을 심해의 어두운 곳으로 끌고 들어가는 듯했다.(181)”

“노인과 함께 술을 많이 마셨다. 나보다 더한 중독자인 그는 생의 유일한 방비가 취권이어서 술을 안 마시곤 도저히 자신을 보호할 수 없다는 듯 늘 알코올에 젖어 있었다.(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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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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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 작가의 [밝은 밤]을 읽었다. 어떤 영화나 드라마의 주인공을 연기했던 배우가 촬영이 끝난 후에도 주인공의 모습에 몰입되어 현재의 사진으로 돌아오기가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듣곤 한다. 특히 연기를 잘하는 배우일수록 실재의 자신과 전혀 다른 모습의 삶을 살다보니 나중에는 어떤 것이 정말로 자신의 모습인지 헷갈려 정신적인 혼란을 겪기까지도 한다는 말도 들은 적이 있다. [밝은 밤]을 읽으면서, 그리고 작가의 말에서 ‘지난 이 년이 성인이 된 이후 보낸 가장 어려운 시간’이었다는 고백에서 아마도 어쩌면 소설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삶은 단순히 상상속에 그려진 인물 만이 아니라 저자의 마음이 그 인물들 속에서 함께 숨을 쉬며 그려진 것이기에 소설이 완성되기까지 아니 소설의 마침표가 찍힌 이후에도 한 동안 지속되지 않았을까 싶다. 나 또한 삼천과 새비의 기막힌 삶의 여정을 따라가며 가슴이 먹먹해지고 실제로 그러한 삶을 살아온 이들이 분명히 있을텐데 그들은 어떻게 이 모진 시간들을 견뎌온 것일까란 생각에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다. 

이야기의 화자인 지연은 천문학을 전공한 전문직 여성이지만 바람핀 남편과의 이혼을 가족들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채 희령으로 도피성 이주를 하게 된다.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여성이고 그에 반해 간혹 등장하는 그 여성들의 남편들은 대부분 무심하고 이기적이다. 지연은 희령에서 새로운 연구소로 출퇴근을 하며 이혼으로 받은 상처와 자신의 선택을 용인하지 못하는 엄마에게 깊은 실망감을 느끼며 아무렇지 않은 듯 살아가려 한다. 그곳에서 자신에게 아는 척을 하는 할머니를 만나게 되고, 그 할머니는 어릴 때 열흘 정도 머물며 그리웠던 외할머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할머니와 엄마가 무엇 때문에 오랜 시간 연락없이 지내온 것일까? 어떤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 짐작하며 지연은 할머니가 지내온 삶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할머니의 엄마, 곧 증조모와 증조모의 친구 새비 아주머니 그리고 새비 아주머니의 딸 희자 등 지연과 지연의 어머니 미선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도중 지연은 할머니 영옥의 이야기를 통해서 증조모 삼천과 새비 아주머니의 오래된 사연을 듣게 된다. 

지연의 할머니 세대는 지금 70대 후반에서 80대 초반에 이르는 어르신들이기에, 지연의 입을 통해서 전해지는 그분들의 지난 여정은 감히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일제치하 말기와 한국 전쟁이라는 한 인간이 평생에 걸쳐 한 번 겪기도 힘든 엄청난 사건들의 연속은 삶의 유일한 동아줄이었던 가족과의 이별을 앞당기고 오롯이 마음을 붙일 친구와의 생이별을 당연토록 했다. 지금 보면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사회적 통념들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시대가 불과 100도 채 안된 과거였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우리 시대는 급속도로 변화되었다. 백정의 딸이라는 사실 하나 때문에 하루 아침에 차갑게 외면하고 말도 붙이지 않는 사회가, 의도적으로 중혼을 하고도 뻔뻔하게 자신은 잘못하나 없다고 사과 한마디 하지 않는 남자의 호적에 딸을 올려야만 인간다운 대접을 받을 수 밖에 없는 남성주의의 사회가 몹시도 불의하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우리의 부모님 세대가 그러한 시기를 견뎌냈기에 가능해진 현재의 자유와 권리에도 쉽게 감사하지 못하는 속좁음은 과연 그 시대의 불의함을 욕할 자격이 있는지 반문하게 만든다. 

소설에는 한국전쟁 외에도 일본의 원폭투하로 인해 피폭당한 조선인들의 억울함 죽음에 대한 내용도 언급된다. 영옥의 아비가 천주교의 순교자 집안 출신으로 백정의 딸인 삼천내가 일제 군인들에게 끌려갈 것을 걱정한 나머지 순교자 흉내를 내며 집을 떠나 삼천과 살림을 차리지만, 그가 보여준 아량은 그것으로 끝이었고 오히려 삼천에게 한 평생 자신의 관대함에 감사하며 살것을 종용하는 나약한 아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에 반해 새비 아주머니의 남편은 그 시대에는 거의 보기 드물었던 여성을 존중하는 남성으로 처자식을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일본에 건너가 일을 하다가 그만 피폭되어 돌아와 고통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삼천, 영옥의 남편은 아내를 외롭게 만들고 결국은 자기애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물들이고 지연의 아버지 또한 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이 소설의 말미에서 지연의 어머니 미선과 영옥의 대화에서 드러나게 된다. 결국 소설에 등장한 주인공 여성들이 그렇게 억척스럽게 살아내며 자녀를 키우고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남편과의 사랑이 아니라 여성들의 연대 덕분이었던 것이다. 과거의 피치못할 환란 때문이라는 핑계를 대기에는 지연의 아버지 또한 마찬가지이기에 우리 시대를 관통해온 인간됨의 성찰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또 다시 밀려온다. 

“마음이라는 것이 꺼내볼 수 있는 몸속 장기라면, 가끔 가슴에 손을 넣어 꺼내서 따뜻한 물로 씻어주고 싶었다. 깨끗하게 씻어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해가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널어놓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마음이 없는 사람으로 살고, 마음이 햇볕에 잘 마르면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나는 마음을 다시 가슴에 넣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지. 가끔은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14)”

“경계하지 않을 때, 긴장하지 않을 때, 아무 일도 없으리라고 생각할 때, 비관적인 생각에서 자유로울 때, 어떤 순간을 즐길 때 다시 어려운 일이 닥치리라는 불안이었다.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터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전전긍긍할 때는 별다른 일이 없다가도 조금이라도 안심하면 뒤통수를 치는 것이 삶이라고 할머니는 생각했다. 불행은 그런 환경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겨우 한숨 돌렸을 때, 이제는 좀 살아볼 만한가보다 생각할 때.(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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