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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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었다. 한 홉의 쉼도 없이 흠뻑 빠져들이 단숨에 읽히는 감동과 재미를 담고 있음에도, 마음 속 어딘가 묵직함이 자리하게 만드는 우리나라의 슬픈 역사가 담겨 있기에 책장을 덮고 나서도 쉬이 고상욱이라는 인물에서 해방되지 못할 것만 같다. 제주의 4.3 사건을 알게 된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학창시절에는 그 사건에 대해서 들어본 적 조차 없었다. 4.3에 대한 내용을 알게 되니 자연스럽게 여순사건의 내막도 꼬리를 무는 것처럼 달려왔다. 그리고 이번 작품을 통해 여순사건에서 마지막까지 투항한 이들이 빨치산이 되어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인채로 본인 뿐만 아니라 가족들까지도 연좌제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간혹 뉴스에서 비전향장기수에 대한 내용이 보도될때면 대체 무엇때문에 그렇게 긴 시간을 감옥에서 보내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이 꿈꾼 것은 이상적인 사회주의의 단면이고 지금 북한에서 자행되는 정치논리와는 전혀 맞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왜 전향서에 사인하지 않는 것일까? 사돈에 팔촌까지 빨갱이 낙인을 찍혀가면서까지도 지켜야 할 이념이란 무엇인지 납득하기 힘들었다. 


우리나라의 빨갱이 색깔론은 아직도 진행중이다.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아직도 빨갱이 운운하느냐고 하지만 전쟁을 겪은 세대가 아직 살아있고 그들이 겪은 공포가 얼마나 거대한 것인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이해가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극우세력의 집회때마다 성조기가 나붓기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태극기를 사리사욕을 위해서 남용하는 것도 기분 나쁜데, 거기에 성조기까지 대동시켜 아직도 미군의 하수인인 것처럼 부르짓는 이들을 보면 치가 떨릴 지경이다. 그들은 어쩌면 아직도 4.3사건을 북한의 지령을 받은 빨갱이를 소탕한 것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제주에서 무참히 양민들이 학살된 배경에 미군정의 야욕과 허용이 있었기에 벌어진 일이라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알고 있다면 감히 성조기를 그렇게 아무때나 함부로 들고 설치지 않을텐데 말이다. 


읽는 내내 이건 소설이 아니라 저자가 살아온 삶을 전해주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는데, 마지막 저자의 말에서 아버지를 보내드리는 딸의 사부곡임을 알게 되었다. 전라도의 구성진 사투리가 대화의 거의 모든 부분에 나오기에 몇 번을 반복해서 읽어야 때로는 소리를 내봐야 이해가 되는 내용들이 많았지만, 아무래도 이 책의 백미는 바로 그 사투리에서 느껴지는 묘한 뉘앙스의 정겨움이었다. 고아리와 아버지 고상욱의 대화에서 사투리가 아닌 표준말로 대화를 나누었다면 어쩌면 고상욱은 빨치산이 아니라 일제 앞잡이로 뒤바뀌었을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소설의 첫 머리부터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병원으로 실려가 죽음을 맞이하는 기구한 운명의 아버지는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이후 180킬로의 속도로 달려와 아버지의 장례를 준비하는 딸 고아리는 아버지가 한 평생 지켜온 유물론자의 삶으로 관계를 맺은 온갖 사람들의 문상을 받는라 정신이 없다. 그리고 그렇게 문상을 온 이들이 아버지와 어떤 관계였는지 하나씩 이야기가 펼쳐지며 빨갱이로 낙인찍힌 고상욱의 삶이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었음을 알려준다. 


어찌보면 소설의 가장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작은아버지가 형의 유골함을 안고 우는 장면이 아닐까 싶다. 작은 아버지가 한 평생 술에 쩔어 자신의 앞길을 막다 못해 망가뜨린 형에게 한탄과 원망을 하며 지내온 내용도 가슴 아프고 안타까웠지만, 소설의 후반부에 큰언니를 통해서 처음 듣게 되는 작은 아버지의 사연은 그야말로 기막힌 일이었다. 형 고상욱을 자랑스럽게 여기던 동생인 작은 아버지는 형이 여순사건 이후 14연대의 군인들과 함께 군인들을 피해 산으로 올라간 사이 고상욱을 잡이들이려고 학교에서 온 이들에게 자신이 고상욱의 동생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며 총부리를 들이댄 그들을 집으로 데려가 결국은 좌익이 아니라 당당하게 집에 머물던 할아버지의 죽음을 목도하게 된다. 촉새라고 입을 다물지 않던 작은 아버지가 그 이후로 입을 다문 채 술에 몸을 기댄 채 한 평생 살아가며 분노하고 원망한 것은 어쩌면 형이 아니라 자신이었을지 모른다. 


이내 아버지의 오죽하멘 이라는 말로 생면부지 타인에게까지 온정을 쏟아붇는 마음을 이해하기 힘들었던 주인공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루고 뻿가루를 아버지의 삶의 흔적이 담긴 곳에 뿌리며 깨닫게 된다. 아버지가 결코 잘못된 삶을 살아온 게 아니라고 말이다. "죽음으로 비로소 아버지는 빨치산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로, 친밀했던 어린 날의 아버지로 부활한 듯했다. 죽음은 그러니까, 끝이 아니구나, 나는 생각했다.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231)"


"고통이든 슬픔이든 분노든 잘 참는 사람은 싸우지 않고 그저 견딘다. 견디지 못하는 자들이 들고일어나 누군가는 쌈꾼이 되고 누군가는 혁명가가 된다.(68)"


"타인의 눈물이 가문 날의 태양 별처럼 내 마음에 가득 차오른 습기를 불태웠다.(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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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편지에 마음을 볶았다 - 귀농하고픈 아들과 말리는 농부 엄마의 사계절 서간 에세이
조금숙.선무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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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숙, 선무영 님의 [그 편지에 마음을 볶았다]를 읽었다. 부제는 "오해의 잡초를 헤치고 피어난 이해의 말들"이다. 책 표지 귀퉁이에 '귀농하고픈 아들과 말리는 농부 엄마의 사계절 서간 에세이'리는 설명도 있다. 우선 귀농이라는 단어가 눈에 띄었고, 이어서 엄마와 아들의 이어지는 편지라니 호기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릴 때에는 성인이 된 자녀들이 혼인을 하지 않아도 부모로부터 독립해서 살아야 한다는 말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설사 혼인을 한다 하더라도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은 이상에야 부모님과 함께 사는 것이 여러모로 좋지 않을까란 단순한 생각을 했었다. 왜냐하면 연로하신 부모님 두 분만 함께 사는 것을 걱정하는 자녀들의 불안함과 또 아직 혼인하지 않은 자녀가 홀로 어렵게 살아가는 모습을 염려하는 부모님의 모습을 많이 지켜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거의 대다수의 부모와 자녀들은 일정한 시기가 지나면 살림을 분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품안의 자식이라는 흔한 말처럼 이제 성장한 자녀는 더 이상 부모의 보살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헬리콥터 맘과 같은 보호 속에 있으면 퇴보할 뿐 자립할 수 있는 기회는 점점 박탈당하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엄마와 아들의 사계절 서간 에세이라니 떨어져 살아도 이렇게 서로의 마음을 전하고 이해할 수 있는 진심을 꾹꾹 눌러담은 편지를 나눌 수 있다면 오히려 같이 사는 것 이상의 정이 생기지 않을까 내심 부러운 마음이 든다. 귀농을 선택한 아들의 편지와 귀농을 말리는 엄마의 답장이 오고가는 중간에 아버지, 며느리의 편지도 중간에 삽입되어 온 가족이 편지로 소통하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이제 갓 결혼한 새신랑이 귀농이라니, 그것도 도시에서 충분히 좋은 직장을 얻고 살 수 있음에도 시골로의 귀환이라니 남이라면 그냥 작은 응원을 해주는 것에 그칠지 모르겠지만, 내 자식이라면 아마도 대부분의 부모님들이 쌍수를 들고 말리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아들인 저자가 귀농을 선택할 수 있는 큰 빽은 뭐니뭐니해도 10년 전에 귀농을 선택한 부모님이 계시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책을 읽으며 귀촌과 귀농을 별 생각없이 사용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둘 다 시골 한 적으로 곳으로 거주지를 옮기는 것은 같겠지만, 귀촌은 그저 도시가 아닌 자연을 만끽하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고 귀농은 그야말로 논과 밭을 일구는 농부의 삶을 선택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엄청난 차이였다. 사실 전망 좋은 곳에 시설만 잘 갖출 능력이 된다면 한 적한 곳에 집을 짓고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삶의 터전만 바뀌었을 뿐이지 하는 일이나 라이프 스타일에 변화를 주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귀농을 한다는 것은 하루 아침에 오랜시간 농부로 살아온 분들의 영역에 끼어든다는 것이다. 농부의 공동체에 들어간다는 것은 텃새로 무시를 당하고 농삿일을 모른다고 피잔을 듣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무엇보다도 그 어마어마한 육체 노동량을 감당할 자신이 있냐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편지의 엄마가 몇 번이나 강조하듯이 농사짓는 품목들은 높은 수익을 올리기 어려운 구조이고 날씨에 큰 영향을 받기도 한다. 특히 귀농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아킬레스건처럼 다가오는 조언은 시골에는 아이들이 공동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기관이 별로 없거나 또래의 아이들이 거의 없다는 사실과 제대로 된 의료 혜택을 받기가 힘들다는 사실이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보면 젊은 청년 농부들이 무척 행복하게 나온다. 도시의 변변치 않은 삶에서 벗어나 어릴적 엄마와 단둘이 살던 집으로 귀향한 주인공은 엄마 덕에 삼시세끼를 알차게 만들어 먹는다. 영화속에 나오는 단촐하지만 평화롭고 안정된 장면들은 시골 고향집이 없는 게 내심 아쉽게만 느껴질 정도로 매력적이다. 하지만 영화는 영화일 뿐,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내 맘대로 되지 않는 자연의 흐름과 나와는 무관하게 생존하는 수많은 짐승들과 미생물의 반격이 비지땀을 흘린 노력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들기도 하리라. 그 모든 좌절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농삿일을 마다하지 않고 천직으로 여기며 살아온 많은 분들이 새삼 존경스럽게 다가온다. 별 생각없이 고깃집에서 상추를 리필해주지 않을 때 요즘 채소값이 왜 이렇게 비싸지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뉴스에 나오는 불합리한 유통 구조에 대해서는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 나와는 상관없는 혹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지 않겠냐고 담념해왔는데, 따지고보면 내가 먹는 모든 것이 결국 농삿일과 연관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하지 못하는 과감한 용단을 내린 저자에게 큰 박수를 보내며 좋은 결실을 맺기를 응원한다. 그리고 엄마와 아들의 편지처럼 마음을 나누는 대화들이 많아지길 기원한다. 


"아내는 자신을 감추는 법이 몸에 익었답니다. 보통 사람들은 무얼 입고, 보통 어디서 살고, 보통 무슨 일을 한다는 말에 그렇게 마음이 쓰인다 해요. 무엇이 '보통'이고 어떻게 보통의 기준을 만족시킬 수 있는지 모르겠으니, 본인이 무얼 좋아하는지보다 주변에서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마음이 쓰일 수 밖에 없다 합니다. 자꾸 그런 생각이 행동을 주저하게 만든다나요.(63)"


"'노나메기' 정신이라고 들어봤니. 온몸의 힘을 박박 긁어 낼 때 흘리는 박땀, 안간땀, 피땀. 그렇게 흘린 땀만큼 서로서로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노나메기란다.(154)"


"삶을 향기롭게 하려면 용기가 꼭 함께해야 하는 것 같아. 나이가 들어서도, 소소한 일상에서도, 도전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217)"


"척박함 속에서도 평화로움을 유지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찾을 수 있다면, 오늘을 사는 나에게도 그들이 누리는 것과 같은 평화가 찾아올 것으로 믿었다.-김영갑 갤러리 두모악 (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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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철동 사람들 - 공단 마을 이야기 보리 만화밥 12
이종철 지음 / 보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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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 작가의 [제철동 사람들]을 읽었다. 부제는 ‘공단 마을 이야기’이다. 3년 전 코로나가 시작되기 얼마 전에 [까대기]를 읽고 흡족한 마음에 저자 신간 알림을 해 놓았는데, 이번엔 저자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담긴 내용으로 포항제철 인근의 마을에서 30년간 식당을 해온 부모님과 동네 친구들, 학교 친구들, 그리고 저자의 마음 고백이 담겨 있다. 바로 전에 [쇳밥일지]를 읽어서 더 그런지 모르겠지만, 쇳가루 날리는 공장 지대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눈앞에 그려지는 착각마저 든다. 만화속에 그려진 제철동의 모습은 작업복을 입고 식사를 하러 온 사람들의 모습마저 깔끔하고 상쾌해 보인다. 마치 가을 하늘의 모습으로 둔갑한 채 30도가 넘는 한 여름의 바깥 풍경을 시원한 에어컨이 나오는 실내에서 바라보면 상쾌해보이는 것처럼, 노동자들의 옷에 알알이 박힌 철가루와 먼지와 냄새는 직접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어릴적 살았던 동네는 제철동 같은 거대한 공단이 있는 곳이 아니었음에도 수출입 부두항이 가까워서 그런지 어머어마하게 큰 대형 트레일러들이 쉴세없이 지나다녔다. 그리고 그 거대한 창고에 들러 물건을 싣거나 내리곤 했을 것이다. 워낙에 큰 화물들을 싣고 다니는 차들이 쉴세없이 지나다니다보니 먼지가 항상 가득했고 대형 트럭에서 울리는 클락션 소리에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어릴 때는 그렇게 큰 차들도 무섭지 않았는지 요리조리 피해다니며 겁도 없이 뛰어다니곤 했다. 지금 우연히 그 곳을 지나치게 되면, 운전하기가 겁날 정도로 여전히 대형 트럭들이 많이 어서 빨리 그 구간을 지나가려고 한다. 그럼에도 그곳에서 참 많은 친구들을 만났고 학교를 다녔다. 그때는 어떻게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대형 트레일러들이 다니는 길을 한참이나 걸어내려와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혼자 버스를 타고 학교를 다녔다. 나와 같은 동네에 사는 아이들은 다 그랬으니 당연하게 느껴졌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조금 아찔한 기분도 든다. 


제철동 사람들의 주인공 강이의 유년 시절을 재미있게 읽다보니 잊고 지냈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저자의 상상력이 가미되기도 했겠지만, 어떻게 함께 지낸 사람들의 사연들을 잘 기억하고 있는지 신기하기도 하고 어릴때부터 사람들과의 관계를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는 습관이 있는 것 같다. 이런 생각이 든 적이 있다. 험난한 유년시절을 보낸 적이 없기에 딱히 드라마틱한 일도 없어서 나중에 무용담처럼 해줄 얘기도 없다는 게 아쉽게 느껴진 적이 있다. 당연히 배부른 투정이요, 철없는 소리겠지만 유년시절 고난의 시기를 딛고 일어선 이들의 성장기는 많은 부분에서 감동적이고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의 확장은 아마도 그 힘든 시기를 통해서 형성된 것이 아닐까란 생각을 하게 된다. 특별히 고생을 한 적도 없고 엄청난 실패의 늪에 빠져본 적도 극도의 사춘기를 보내며 못된 짓만 골라삼던 적도 없이 무던하고 범생처럼 지내왔다. 그래서 그런지 학창시절을 그리워 하는 이들의 마음이 잘 헤아려지지 않는다. 그때가 뭐가 재미있다고 돌아가고 싶은 것일까란 생각이 든다. 학교 폭력을 당한 적도 그렇다고 친구가 없었던 것도 아닌데도 뭔가 항상 외로웠던 것 같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남들이 보는 나와 내가 느끼는 나는 많이 다른 것 같다. 저자의 그림을 보고 과거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렇게 나이가 들고 어른이 되어가는 것인가란 생각을 해 본다. 후회되는 일도 아쉬운 일도 많겠지만 그럼에도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그렇게 살다보면 또 언젠가는 지금과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까란 기대를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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쇳밥일지 - 청년공, 펜을 들다
천현우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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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현우 님의 [쇳밥일지]를 읽었다. 부제는 "청년공, 펜을 들다"이다. 신간을 둘러보다 제목부터 시선을 사로잡더니 주문하고 책을 받은 날, 문재인 전 대통령의 강력 추천 도서라는 기사도 눈에 띄었다. 읽는 내내 여러번의 감동과 놀라움과 슬픔이 밀려왔고 한 마디로 이분 진짜 고생 많이하셨구나라는 생각과 더불어 아니 청년공이 이렇게 글을 잘 써도 되는 건가 라는 부러움마저 느껴졌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치고 작가를 꿈꿔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작가가 너무 요원한 일처럼 느껴진다면 작은 책 하나라도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되는 것을 꿈 꿀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등단한 작가들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살펴보면 자신으로 이름 석자가 새겨진 책을 한 권 내기 위해서 아주 오랜시간 준비해 왔으며, 그에 걸맞은 교육을 받았으며, 때로는 생계의 위협을 겪으면서도 글쓰기를 포하기하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꽤 큰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저자의 글을 읽으며 어쩌면 글쓰기에도 천부적인 재능이 탑재된 것은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저자를 폄하하고 싶은 게 아니라, 지금의 기자에 이르기까지 저자가 보낸 유년시절은 정말 기구하다라는 말이 나올 수 밖에 없을 만큼 불행했다. 감히 그 고통의 시간을 헤아리는 것 조차 죄송할 만큼 저자가 보낸 시간을 나는 조금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그렇게 힘들고 외로운 시간을 보내며 엄청난 강도의 노동을 견뎌내는 시간 동안 아마 제대로 된 공부를 할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저자가 아무리 작가가 되고 싶었다 하더라도 이건 출발점부터가 너무 불공평하다. 그럼에도 저자의 글에 쓰인 몇 몇 단어들의 배치는 그야말로 '신의 한 수'라고까지 칭송하고 픈 너무나도 적당한 표현이었다. 언젠가 이 세상에서 어떠한 상황에 맞는 단어는 비슷한 뜻을 가진 수많은 단어들 중에 딱 하나 일 수 밖에 없다는 얘기를 들은적이 있는데, 저자가 바로 그렇게 딱 하나 밖에 없는 상황에 맞는 단어를 선택하는 귀중한 재능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에세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분명 책의 내용이 저자가 겪은 실화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한편의 성장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차라리 소설이었다면, 작가의 상상에 의해서 만들어진 이야기였다면 젊은이들이 이렇게 좌절할 수 밖에 없는 사회를 만들면 안된다는 경계심에 그쳤겠지만, 저자의 이야기는 엄연히 지금도 지속중인 우리 사회의 밑낯이었다. 제대 후 몇개월 동안 노동 현장에서 일해본 게 전부인 나로서는 최저 시급을 겨우 웃도는 월급에 청춘을 저당잡힌 채 미래를 그려볼 수 없는 현장에서 떠날 수 없는 이들의 현실을 그동안 모른척 살아왔다. 입으로는 '그래 많이 힘들겠다, 불공평한 처우는 빨리 개선되어야 할 텐데'라고 흰소리만 내뱉을 뿐 나는 그냥 나의 일상으로 돌아가 내 일신을 돌보는 것에만 집중했다. 사실 다 읽고 나서도 수박 겉핧기 식으로 조금이만 노동 현장을 엿보았다고 구체적으로 내가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아마도 조금더 마음을 기울여 노동자들의 소식을 살펴보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와 같은 편린된 일종의 무식자들이 이 책을 더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책의 말미에 포터 아저씨가 저자에게 해 준 말이 바로 우리시대에 필요한 해답이 아닐까 싶다. 


"내가 니 칼럼은 전부 챙겨 보거든. 근데 그 왜, 우리 판때기에서만 쓰느 말들이 있잖냐? 그 상스러운 걸 칼럼에다 그대로 다 실을 순 없잖어. 그렇다고 먹물들 말로 쓰면 맛이 안 살고. 그 중간 언어를 찾아야 하는데 니가 그걸 잘하더란 말이지. 노조 아재들이 이게 안 돼. 맨날 머리띠 매고 메가폰 잡고 소리만 치잖아. 간절한 건 이해하겠는데 촌스러워. 그림이 너무 구리잖아. 우리가 그리 욕해도 결국 가진 놈들은 먹물이잖냐? 그 먹물들이 원하는 양식미라는게 또 따로 있을 거 아니냐. 우리 얘기를 먹물들 언어로 번역해야 해. 좀 아니꼬워도 세상은 그렇게 바꾸는 거지. 넌 그게 되더라. 그래서 니가 중요한 거야. 쇳밥 얘기를 먹물들 알아먹게 쓸 수 있으니까.(283-284)"


"나는 강사 개인이 아니라, 개인을 빌려 튀어나온 세상의 문제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교육과 대학 서열화는 결국 인간의 욕망과 그 욕망의 소산물인 돈이 만들어낸 결과물, 평등과 이해는 돈이 되지 않는다. 돈이 안 되니 가르치지 않는다. 학생들은 자연히 자신의 욕망 외 다른 가치를 모른 채 어른이 된다. 현대 대한민국 사회는 이런 악순환의 굴레 속에서 만들어졌다. 이 강사 같은 이들은 삶에 순위를 매겨 성공과 실패를 규정하고, 실패한 이들에게 냉소를 퍼부어왔다. 공부 안 한 너희들이 잘못했어. 그러니까 힘든 일을 하는 건 당연한 거야. 열심히 살아온 자신은 응당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배워왔을 터.(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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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재수사 1~2 - 전2권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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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 작가의 [재수사 1,2]를 읽었다. 한동안 장강명 작가의 신작이 나오지 않아서 궁금해하곤 했는데, TV프로그램의 패널로 나오는 것을 보고 이제는 소설을 안 쓰는건가라는 생각까지 했었다. 하지만 이번 작품을 읽고 나서야 이 대작을 준비하기 위한 침묵의 시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사물, 혹은 추리물의 전형적인 긴장감이 아닌 장강명표라 할만한 다른 서사가 있을거라고 기대했다. 역시나 살인사건을 다룬 형사들의 집요한 추적의 여느 소설과는 다른 명백한 특징이 있었다. 정철희 반장과 박태웅, 연지혜 형사의 수사 진행은 시간의 흐름대로 따라가기에 수월했다. 행여나 시간을 거스르거나 화자들이 순식간에 뒤바뀌어 마지막에 갑작스런 반전을 드러내는 전개였다면 꽤나 머리가 아팠을 것 같다. 왜냐하면 형사들의 전개 사이사이에 아직 누군지 모를 살인자의 독백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 독백이 살인에 대한 자세한 묘사와 정황 설명이 아니라 너무나도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살인자가 창조해낸 새로운 신계몽주의에 대한 논거이다. 그리고 고전으로 유명하지만 손쉽게 읽히지 않는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이 거론되고 설상가상으로 당시의 거대한 철학적 흐름이었던 니체의 허무주의까지 등장하니 살인자의 독백은 그냥 건너뛰어도 되지 않을까란 유혹까지 밀려왔다. 한마디로 연지혜 형사의 용의자들에 대한 심문과 그들의 사연이 소개되는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재미를 맛보다가 갑자기 너무나도 진지한 하지만 몇 번을 읽어야 이해가 되기도 하고 좀처럼 무슨 말인지 모를 것 같은 살인자의 독백부분에 읽다보면 소설의 반전처럼 골치아픈 철학 수업을 듣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살인자의 독백이 길어야 3-4페이지에 달했다는 것이다. 마치 숙제를 마치듯이 살인자의 논거를 읽고 나면 연지혜 형사가 등장해 “지겨우셨죠. 이제 저와 함께 달리죠”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22년 전에 발생된 신촌 여대생 살인사건의 범인은 여전히 잡히지 않았고, 영구미제 사건으로 남을 수도 있었지만 정철희 반장의 선택으로 당시의 상황을 재조명하게 된다. 밀레니엄이 시작되었다고 호들갑을 떨었던 2000년도에는 그 당시가 엄청나게 발전한 첨단 시대라고 생각했었는데, 소설을 읽다보니 겨우 20여년이 지났음에도 지금의 눈에 비춰봤을 때 뭔가 굉장히 구식이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완전한 디지털화가 되기 전인 과도기 단계였기에 더욱 그랬을 것이고 그 당시만 해도 PC작업을 낯설어하는 사람들도 꽤나 많았다. 스마트폰이 나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고 인터넷이 서서히 보급되던 시기였기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미궁에 빠지는 사건이 발생되기는 하지만 민소림과 같은 상황이 지금 재현된다면 아마 한달 이내로 범인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특히나 소설 중간에 아마도 저자의 생각이 크게 반영된 것이겠지만 최종적으로 범인을 알아내는데 결정적인 제보라고 할 수 있는 도스토옙스키 독서 토론 모임에 대한 내용은 뭔가 인터넷이 상용되기 전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요즘은 길을 가다가, 이야기를 나누다가 전혀 모르는 생소한 단어를 보게 되면 바로 검색해서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민소림이 대학을 다녔던 시기에는 백과서전을 찾아보거나 그 단어를 알만한 누군가에게 물어보지 않는 이상 뜻을 알기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랬는지 당시에는 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고 무조건 자기 말이 맞다고 우겨도 당해낼 재간이 없기도 했다. 서로 자기 말이 맞다고 우기다가 내기를 걸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자의 말처럼 책을 읽지 않고서는 독서 토론 모임에 참여할 수 없었다. 지금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 대해서 토론을 벌이자고 하면 토론자 중의 반 이상이 읽지 않고도 참석해서 자신의 의견을 자신있게 표출할 수 있을 것이다. 1시간만 집중해서 웹서핑을 하면 줄거리는 물론이요, 학생에서부터 교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서평을 손쉽게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교에서 요구하는 간단한 페이퍼는 이제 실제로 학생 본인이 쓴건지 어디서 부분 부분을 갈무리한 것인지 판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어찌보면 자신의 진심을 보여주기가 어려운 시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과학기술이 발전한 것이 과연 인류에게 행복을 가져다 준 것인가? 요즘 지하철을 타고 다니다 보면 우리모두가 스마트폰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 같다. 몇 년 전에 요즘 학생들이 유튜브로 검색을 한다는 말을 듣고 설마했는데,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도 유튜브로 좋아하는 노래와 영상을 보며 즐기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이러다가 우리가 아무런 의미없는 맹목적인 영상과 기사에 중독되어 언젠가는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지 못하는 시대가 오는 것은 아닐까 두렵기까지 하다. 지금의 눈으로 2000년을 바라봤을 때 꽤나 촌스럽고 구식으로 느껴지는 것처럼 앞으로의 20년 후엔 지금을 또 그렇게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살인자의 독백에서 구구절절 반복되는 사실-상상 복합체라는 단어가 꽤나 거슬렀다. 대체 사실-상상 복합체라는 말이 뭘 뜻하는 것인지 명확히 손에 잡히지 않는 것만 같은데, 저자가 이렇게나 자주 이 단어를 반복하는데에는 분명 중요한 의도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더욱 거슬렸다. 사실 이해가 잘 되지 않아 답답해서 더 그런 것 같다. 결국은 살인자가 자신의 살인을 변명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쓰여진 새로운 사조에 의해 만들어진 세상의 시스템 안에서 자신의 죄를 판결해달라는 내용이 단지 살인자 혼자만의 호소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민주주의라는 탈을 쓰고 거의 모든 것을 개개인의 선택과 책임으로 귀결시키는 사회가 과연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곳인지 묻고 있는 것만 같다. 


[죄와 벌]의 라스콜니코프가 노파를 살해하기 전에 실제로 그 행위를 한다 하더라도 ‘살인자’라는 과거와는 완전히 달라진 실존에서 자유로울 것이라 착각했던 것처럼, 근대화 이전의 미개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인류가 만든 인본주의 중심의 수많은 정치 문화 철학 종교 사상들이 인간이 인간을 존중하고 아끼고 사랑하게 만들 줄 알았다. 하지만 살인자인 김상은이 민소림이 내뱉은 ‘점박이’라는 말에 담긴 함의를 이해하지 못하고 충동적인 살인을 저지른 것처럼 분노에 대한 완전한 통제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 분노가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불공평함에서 기인한다면 살인자의 기나긴 독백과도 같은 변명들이 난무하게 될 것이다. 소설을 다 읽고나니 유독 인상적으로 느껴졌던 미인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오타모반이라는 누군가에게는 결정적인 콤플렉스가 될 수 있는 부분과 대조적으로 맞아떨어졌다. 미인과 오타모반은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냥 그렇게 태어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도 지울 수 없으며, 미인과 오타모반이 있는 사람을 차별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머리속으로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오타모반이 있는 한은수와 김상은을 연지혜 형사가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머뭇거리게 되는 것처럼 우리는 낯설다 또는 뭔가 다르다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얼굴을 보게 되면 누구나 다 첫인상을 통한 감정을 숨기기 어렵다. 민소림처럼 오타모반을 한 사람의 개성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다수였다면 김상은이 점박이라는 말을 듣고도 칼로 심장을 찌르지 않았겠지만, 그동안 김상은이 마주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시선에 대한 분노가 단번에 점박이라는 말로 표출된 것이다. 


명화를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우리가 시각을 통해 그림에 담긴 구도와 조화를 이해할 수 있는 미적감각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그런 감각이 없다거나 현저하게 떨어진다면 사람의 얼굴을 보고 예쁘다거나 잘생겼다는 느낌을 갖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그 사람이 친절하거나 다정하거나 거칠거나 무뚜뚝하다는 감정이 먼저 들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시각을 통해 첫인상의 수많은 정보를 얻게 되고 자신도 모르게 발동되는 미적감각으로 인해서 아름다움의 구조를 가진 얼굴을 자꾸만 보고 싶어한다. 그게 미적감각을 만족시키고자 하는 욕구에서 발동한 것인지 사랑인지 많은 사람들이 헷갈려 한다. 이러한 미적감각으로 충족시키고자 하는 욕구 그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이후에 보이는 사람들의 반응이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남기는 차별을 유발한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차별을 일삼는 반응을 제어할 수 있을까? 그런 면에서 미인이었던 민소림이 오타모반을 개성으로 여긴 것은 어쩌면 기적같은 일이 아니었을까? 원래 모든 걸 다 가진 사람들은 그렇게 관대한 것일까? 


“세계에는 하루 2달러 이하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7억 명이 넘는다. 보통 사람이라도 구호단체를 통해 그들에게 돈을 보내는 방법은 아주 쉽다. 그러므로 내가 당장 필요하지 않은 최신형 스마트폰을 살 때, 나는 명백히 선택을 하는 것이다. 사하라사막 남쪽에 사는 사람들 수백 명의 끼니보다 과시성 소비로 인한 나의 만족감이 더 중요하다는.

향이 좋은 프리미엄 커피를 마실 때, 플라스틱 가구 대신 원목 가구를 살 때,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고 택시를 타거나 자동차를 운전할 때, 집에 있지 않고 여행을 할 때, 우리는 계속해서 절대빈곤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고통스러운 삶을 살다 죽게 내버려두자고 선택한다. 우리는 모두 학살자이다.(1권-182)”


“우리가 타인, 혹은 다른 생명에게 공감할수록 그들의 고통을 막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런 감정이입 능력은 교육과 훈련으로 키울 수 있다. 폭력에 대한 감수성은 개인에게는 판단의 지침이 되고, 그런 개인들이 모이면 ‘보다 다정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우리는 종이게 그려진 캐릭터가 좌절하는 만화 속 한 장면을 보고 슬퍼서 눈물 흘린다. 새끼 고양이가 괴롭힘당하는 영상을 보고 진심으로 분노한다. 그러나 ‘북한 정치범수용소에 12만 명이 수용되어 있으며 여기서 끔찍한 고문과 학대 행위가 자행된다’는 뉴스는 별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 귀여운 것에 쉽게 공감하지만 추상적인 통계에는 마음을 열지 않는다.(1권-214)”


“자연이 가혹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보기 좋은 외모라는 건 굉장히 강력한 힘이죠. 미인 유전자를 물려받아 태어나는 아이들은 십대 후반부터 이십대 초반까지 그 힘을 가장 크게 누리게 돼요. 그런데 그 나이에 그 힘을 제대로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대부분은 자기가 지닌 힘이 어느 정도 큰 건지, 그 힘이 다른 사람을 얼마나 애타게, 아니면 괴롭게 할 수 있는지 이해하지도 못해요.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쉽게 상처를 입히고 자기도 피해를 입어요.(1권-373)”


“미모라는 건 복잡한 힘이에요.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쳐요. 그 사람들에는 미모를 지닌 본인도 포함됩니다. 때로는 치명적인 무기가 되기도 하고 가끔은 큰돈이 되기도 해요. 하지만 부서지기도 쉽죠. 가만히 있어도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사라져버리고요. 그 힘을 갖고 있다고 해서 다른 힘, 예를 들어 물리력이라든가 지혜라든가 평판 같은 것들이 저절로 따라오는 건 아니에요. 사용법이 극히 까다로운 힘이에요. 경험이 없을 때에는 제대로 사용할 수 없어요. 그런 경험은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쌓이는 게 아니죠. 특히 고전문학은 그런 데에는 쓸모가 없어요.(2권-70)”


“지금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 중에 제일 근접한 말은 ‘성실함’이에요. 지루하고 비루한 과정을 참고 견디는 자세죠. 거대하지만 실체가 있는, 실제적인 목표를 향한, 그 목표에 가는 길이 느리게 꾸역꾸역 조금씩 다가가는 방법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그 길을 걷는.(2권-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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