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집 - 그러나 여전히 가끔은 울 것 같은 마음으로 아무튼 시리즈 62
김미리 지음 / 코난북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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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리 작가의 [아무튼, 집]을 읽었다. 부제는 "그러나 여전히 가끔은 울 것 같은 마음으로"이다. 아무튼 시리즈 62번째 책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가장 갖고 싶어하는 게 집이 아닐까 싶다. 내 집만 마련되면 다른 어떤 어려움은 뭐든지 다 이겨낼 수 있을 것만 같은 무형의 교육을 받은 것 같다. 하지만 도시에 살고자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집 마련이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부동산 투기를 근절해야 한다는 얘기를 경제가 뭔지도 모를 나이때부터 들은 것 같은데 여전히 영끌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유효하다. 연예 기사의 가십거리에 주기적으로 등장하는 모 연예인이 건물을 사고 팔아 수십억의 차익을 남겼다는 내용을 볼 때면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딴 세상 얘기처럼 느껴진다. 


생각해보면 내가 기억하는 첫 번째 집도 화장실이 없었다. 아주 어릴때니까 밤 중에는 부엌의 작은 플라스틱 대야에 큰 것도 보았는데, 평소에 주인집 퍼세식 화장실을 이용할 때에는 항상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나는 기억이 잘 안 나는데 내가 화장실에 힘을 주고 있다는 걸 그렇게 노래로 표시했었나보다. 아마도 퍼세식 화장실의 각종 괴담으로 인해 무서워서 그랬을 것이다. 아니면 그때부터 화장실의 천연에코를 즐겨했을지도. 나도 꽤 오랜 시간 내 방이 없었다. 사춘기의 시작을 알리는 첫 장면으로 기억되는 게 엄마, 아빠 옆에서 나름대로 나만의 시간을 갖는 것처럼 그때 처음 내것이 된 포터블카세트플레이어에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유행가를 듣는 것이었다. 헤드폰으로 음악을 들으면서서도 벌써부터 어른 흉내 낸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응근 신경을 썼던 기억이 난다. 


그 아파트에 살 때에는 성당에 걸어갈 수 없었다. 버스를 타고 15분 정도 가야 하는 거리였기에 걸어서 다니기에는 조금 멀었다. 내 유년 시절의 거의 모든 추억이 담긴 성당에 다니는 동년배의 친구들은 대부분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당시에는 꽤 괜찮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다른 애들은 다 걸어서 성당에 다니는데, 나와 몇몇 애들만 버스를 타고 다녀서 왠지 모르게 주눅이 들었고 버스를 타고 성당을 다니는 건 마치 가난의 상징처럼 느껴졌다. 지금 초딩들도 아파트 이름을 보고 집안 형편을 파악한다고 하는데, 그건 오래전에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신축 아파트로 이사오면서 난생 처음 내 방도 생기고 드디어 성당도 걸어다닐 수 있게 되었다. 내 방이 생기고 침대와 책상도 있다는 게 너무나도 좋았는데 더 이상 친한 친구들을 만날 수 없었다. 삶의 낙이었던 성당 주일학교를 다니기 싫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살짝 우울감이 엄습해왔던 것 같다. 뭔가 환경적으로는 훨씬 윤택해졌는데 정서적으로는 견디기 힘들만큼 노잼 그 자체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본격적인 입시경쟁에 돌입하면서 그따위 고민으로 시간을 허비 하도록 놔두지 않았다. 하지만 가끔씩 이사를 가지 않고 오래전 그 성당에서 가장 가까웠던 친구들과 함께 어른이 되었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공부는 분명 덜 했겠지만 더 많이 웃었을 것이고 더 많은 크리스마스의 추억이 생겼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니 저자가 살아왔던 과거의 집들에 대한 회상에서 자연스럽게 내가 살았던 집이 오버랩되며 정말로 인간에게 집 곧 거주지는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꼭대기집과 수풀집의 5도 2촌의 삶을 실행하는 저자의 결단력과 의지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며 몹시 부럽기도 하다. 번잡한 도시의 삶을 완전히 포기할 수 없는 태생적 도시인들에게는 어쩌면 더욱 더 간절히 고요한 집이 주는 안정감이 필요한 것 같다. 


할머니와 함께 안방을 쓰며 지냈던 저자의 유년시절에 대한 내용을 통해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뜨끈한 아랫목에 놓은 두툼한 담요와 같은 사랑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의 가장 감동적인 부분인 택배기사에 대한 내용의 고찰이 가능했던 것은 저자가 할머니에게 받은 사랑을 기억하고 타인에게 나눠줄 수 있는 추억의 집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이제 그들을 선명하게 떠올린다. 나의 다정하고 안온한 세계를 소리 없이 지탱하는 사람들을. 나의 집을 집답게 해주는 사람들을. 나와 세상을 이어주는 사람들을. 그들 하나하나의 얼굴을.(129)"


"살다 보면 내 자리가 아닌 것 같은 곳에 가게 될 때가 있다. 심지어 그곳에서 힘껏 버텨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실은 나를 원치 않았다고 대놓고 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못 들은 척 어떤 연극을 해내야 하는 시절이 온다. 괜찮아질 거라고 마냥 낙관할 수도, 될 대로 돼라 체념할 수도 없는 때, 그때마다 나는 집을 떠올렸다. 여전한 표정으로 나를 품어주는 익숙한 공간을. 그 속에서 울고 웃으며 살아낸 시간을. 집에서 환대받았던 힘으로 오늘을 버티고 내일을 소망할 수 있었다. 집에 단단히 뿌리내릴수록 나는 삶의 더 멀리까지 안전히 갈 수 있었다. 내가 모르는 세계로 건너가서 가끔 타인의 안부를 물을 수도 있게 되었다.(149)"


#김미리 #아무튼집 #그러나여전히가끔은울것같은마음으로 #코난북스 #아무튼시리즈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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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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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태 작가의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을 읽었다. '세상의 모든 바다', '롤링 선더 러브', '전조등',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보편 교양', '로나, 우리의 별', '태엽은 12와 1/2바퀴', '무겁고 높은', '팍스 아토미카' 이렇게 9편의 단편이 실린 소설집이다. 이미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과 이상문학상 작품집에서 '보편 교양', '세상의 모든 바다', '팍스 아토미카'를 읽었던 터라 다른 단편들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궁금했다. 소설집의 제목인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만 봐도 이 정도의 제목을 붙일 만한 깜냥이 되어야 소설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힙하다. 말미에 붙은 평론가의 설명에도 나오지만 여느 소설가와는 다르게 지금 현재 유행 중인 인터넷 짤이나 OTT 프로그램의 예시와 아이돌 문화를 가감없이 차용하고 있다. 더불어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꽤나 인기 있었던 대중 문화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노래 가사나 드라마 대사도 진부하지 않게 잘 녹여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소설이 가진 힘이 대중 문화처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소비되고 페기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성을 추구한다는 측면에서 저자의 통속적인 유행 재료들을 거침없이 소비하고 있는 것은 또 하나의 색다른 시도이자 유행은 결국 돌고 돈다는 일반적인 담론을 기반삼아 시간이 흘러도 언젠가는 다시금 회자될 수 밖에 없는 매력을 보여주고 있지 않나 싶다. 그리고 이번 소설집을 읽으면서 뭔가 다른 단편소설집과는 다른 느낌을 받았는데, 몇 편의 소설에서 이야기를 극대화시키고 갈등을 불러일으킬 만한 것들을 응근히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닐까란 의심이다. 특히 '전조등'에서는 어찌보면 성공한 인생처럼 보이는 주인공이 뒤늦게나마 청혼하고픈 마음이 드는 애인을 만나 괜찮은 팬션을 향해 가는 도중에 털신 한 켤레로 전조등 한 쪽이 망가지는 부분에서 어떤 불길한 조짐이 느껴졌지만, 계획된 프로포즈가 아닌 어이없이 정차된 순간에 반지를 넣어둔 자켓에 손을 넣은 애인으로 인해 발각되며 조금은 싱겁게 끝이난다. 대부분의 단편이 장편과는 다르게 열린 결말이나 확실한 결론을 내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김기태 작가의 단편들은 유독 뭔가 더 이야기가 이어지길 것 같은 순간에 끝났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래서 그런지 언젠가 나올 장편 소설이 더욱 기대가 된다. 


'롤링 선더 러브'에서 주인공 맹희는 처음엔 절친 리아와 여가를 즐기며 간간이 SNS로 일상을 공유하는 조금은 무료한 일상에 무기력해진 인물처럼 그려지는 것 같았지만, 갑자기 지금 각종 방송에서 가장 유행하는 예능 포맷인 짝짓기 프로그램에 지원하며 급변하게 된다. 워낙에 채널이 많아져서 서로가 즐겨보는 프로그램이 공통되기를 바라는 것이 어려운 시대가 되었지만, 유독 '나는 솔로'와 같은 유사한 짝짓기 예능이 대세인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과거에도 비슷한 포맷이 있었지만 요즘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는 일반인들이 나와서 마치 연예인이 되어가는 팬덤을 형성하는 것을 보면 신기하기만 하다. 포털사이트에도 거의 매번 다른 기수의 동일한 예명인 영숙이나 영호의 이름이 언급되는 걸 보면 사람들이 꽤나 많이 보면서 회자가 되는 것 같다. 아무튼 소설 속에서의 맹희는 그런 유사한 프로그램에 지원하여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캐릭터를 맡게 되지만, 이내 마지막에 냄새 나는 거름을 옮기는 과정에서 최종 스페셜 데이트권을 획득하는 반전을 선사하며 막을 내리게 된다. 마치 지금 방송되는 어느 기수의 인물들에 대한 댓글과 반응을 모아놓은 것처럼 생동감 넘치는 전개에 이어 솔로 농장 참가자들의 후기 모임에서 시비를 거는 불량배들에게 "사랑할 용기도 없는 놈들"이라고 멋지게 일침을 놓는 맹희의 모습에 박수를 보내게 만든다.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에서는 막상 학교를 다닐 때는 서로 얼굴만 알았던 동창인 진주와 니콜라이가 성인이 되어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는 내용이다. 진주와 니콜라이는 서로 친하지 않았지만 학교행정실에서 드러나지 않게 흰봉투를 받는 공통점이 있었고 자세한 설명이 첨부되지 않아도 둘 다 사회적 배려를 받는 대상임을 짐직할 수 있다. 진주에 대해서는 엄마의 새 애인을 소개받았다는 장면에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듯이, 니콜라이는 러시아인 부모에 대한 사정이 설명되지 않아도 이름만으로도 그가 겪고 있는 어려움이 짐작 가능하다. 진주는 대학을 가고 니콜라이는 실업계 고등학교를 거쳐 여러 자격증을 갖게 되지만 사회에서 다시 마주한 진주와 니콜라이는 둘 다 고만고만한 상태에서 경제적 어려움을 견디고 있었다. 우연한 재회를 계기로 그들은 연인이 아닌 그냥 친한 사이라는 미명하에 동거를 시작하게 된다. 경제적 공동체라고도 명명할 수 있는 그들의 불안정한 동거는 비단 진주와 니콜라이만 겪는 처참한 현실은 아닐 것이다. 


"잠들지도 않고 이야기하지도 않고 그저 누운 채로 숨을 쉬다보면 방안으로 노을이 스며들었다. 아이들의 재잘거림도 사라진 뒤 조용히 일렁거리는 커튼을 보고 있으면 세상이 남 얘기 같았다. 예쁘고 멋있고 촉감 좋은 물건들이 꼭 필요한 건 아니라고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다. 자이실현 같은 건 모르겠지만 견딜 만한 일을 하고, 지글지글 보글보글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는 삶. 가끔은 나란히 누워서 햇볕을 쬘 사람이 있는 삶. 이 정도면 괜찮다고 여기면서도 어두운 골목을 걸어 다시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면 불안해졌다. 어느 날 흰 봉투가 날아와 계약 종료 통지서나 처음 들어보는 병명의 진단서를 덜컥 내놓는다면, 그때는 어떻게 되는 걸까?(133)"


사랑만 가득하다면, 진심으로 꿈과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 상대라면 조금 배고프고 불편한 것들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지 않느냐는 이상적인 담론이 대세를 이루던 때가 오래 지속되었다. 지금의 청년들 중에 그런 말을 받아들이는, 아니 한 번이라도 그런 생각을 깊이 있게 고민해본 이들은 얼마나 될까? 소설 속 진주의 고백처럼 그럭저럭 견딘말한 일을 하고 함께 따뜻한 음식을 먹으며 핫한 OTT 프로그램이 아니라 그냥 옅어져 가는 오후의 햇살을 함께 느끼는 것만으로도 행복함에 빠질 수는 있겠지만, 노후와 주거가 아무런 보장이 되어 있지 않는 상태에서도 그 행복감이 지속될 수 있을까란 불안함이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이희우 평론가의 말대로 우리는 이제 인터넷을 단순히 정보를 충분히 제공해 줄 좋은 도구를 찾아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제 인터넷을 모르던 시대로 돌아갈 수 없다. 아무리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만족하고 받아들이려고 해도 단 몇 초만의 스크롤로 굳건히 다잡았더 마음이 순식간에 무너지기 십상이다. 몇 번의 클릭과 염탐으로 도저히 가닿을 수 없을 것만 같은 환상적인 삶을 사는 것 같은 이들의 노출에 피로감을 느끼며 비현실적인 허상에 불과하다가 단정짓다가도 어느 순간 다시금 그들이 보여주는 과시에 몸과 마음을 뺏앗기기 일쑤다. 그럴때면 진주와 니콜라이가 인터넷 밈을 따라한 것처럼 당장 웹사이트와 SNS를 덮고 이렇게 외쳐야 하지 않을까.


"기립하시오! 기립하시오 당신도! 이것이 인터내셔널이오!(135)"


#김기태 #두사람의인터내셔널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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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강물처럼
셸리 리드 지음, 김보람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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셸리 리드의 [흐르는 강물처럼]을 읽었다. 원제는 "Go as a river"이다. 올봄 우연히 SNS를 통해 이동진 작가님이 추천한 책을 보고 장바구니에 넣어놨었는데, 차일피일 주문을 미루다 권남희 작가님이 블로그에 올린 리뷰를 보고 당장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래에 읽은 소설 중에 단연코 최고라고 할 정도의 놀라운 가독성과 짙은 감동을 선사했다. 광활한 미국 서부 콜로라도 지역의 산과 강을 둘러싼 마을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인간의 삶과 그 터전이 될 수 밖에 없는 자연의 무한한 포용력을 깊이 통찰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전세계 어느 나라든 발전 단계와 상관없이 빌딩이 가득한 도시와 드넓은 들판과 산과 강 또는 호수가 있는 시골이 공존한다. 도시에 살면서 가끔씩 수련한 자연 경관을 그대로 보존한 곳을 방문하게 되면 숨통이 뜨이면서 여지껏 제대로 숨 쉬는 법을 알지 못했던 사람처러 크게 심호흡을 하게 된다. 눈과 귀를 어지럽히는 혼잡함이 사라진 곳에서 세상의 미물들이 살아가며 내는 소리와 하늘의 흐름을 지켜보며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하찮은지, 얼마나 작은지 무상함에 빠져들곤 한다. 하지만 막상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곳에서의 여정이 지속되면 여러가지 불편함이 지속적으로 터져나오기 마련이고, 이제 다시 내가 지내던 익숙한 곳으로 돌아가야겠다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그런데 빅토리아의 굴곡진 삶을 따라가면서 인간은 원래 현대 사회가 마련해놓은 편리함과는 무관하게 생존해오지 않았나 하는 당연한 사실을 떠올리게 되었다. 특히나 빅토리아가 산장에서 홀로 아기를 출산하고 극심한 고통과 혼란 속에서도 아기의 탯줄을 잘라내고 젖을 주는 장면에서는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이 다 비슷한 과정을 겪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어 인간의 생명력은 참으로 위대하구나라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도시와 시골에 대한 감상과 더불어 도대체 한 시도 인터넷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시대를 사는 하루를 조명하게 된다. 자극적이고 재미있는 놀이와 볼거리가 넘쳐나서 그런지 뭔가 하나에 집중하기가 더 힘들어졌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닌 자연이 전해주는 소리에 눈을 감고 단 10분도 집중하기 힘들다. 무한히 이어지는 릴스와 쇼츠의 홍수에 빠져 이어지는 뒷 이야기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는다. '나만 아니면 되'라는 이기적인 생각이 관념이 되어버려 어떤 사건에 대한 전후사정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하지만 빅토리아가 전해주는 고백은 삶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일이 벌어진다 해도 삶의 터전인 이 땅과 하늘과 그 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마음을 쏟는 순간 온세상이 나를 위로하며 앞으로 나아가라고 격려하고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소설의 배경은 제2차 세계대전을 비롯한 베트남 전쟁에 이르기까지 억지로 전쟁에 끌려간 젊은이들의 비참한 말로와 그로 인해 남겨진 가족들이 겪게 되는 고통 또한 그리고 있지만, 빅토리아의 동생 세스를 대표격으로 내세운 인디언 원주민에 대한 너무나도 강렬히 만연된 인종차별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고 있다. 열 일곱살이 된 빅토리아는 마을 중심부에서 우연히 마주친 윌슨 문과 순식간에 사랑에 빠지게 된다. 윌과의 만남이 그려지는 첫 장면에서는 빅토리아가 왜 그렇게 소극적으로 대처할 수 밖에 없었는지, 왜 그렇게 자신의 감정을 감추는 데 급급했는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빅토리아의 엄마와 사촌 오빠와 이모를 한 순간에 데려간 비극적인 사건과 더불어 세스라는 고집불통에 온갖 심술과 불만을 폭력적으로 드러낼 거리를 찾는 동생이 있다는 내용을 알게 되면서 더군다나 윌이 아메리카 인디언을 폄하하는 인전이라는 것이 드러나면서 빅토리아의 선택이 불러러올 파장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빅토리아는 윌이 단지 인전이라는 이유만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배척받으며 억울한 누명을 쓰고 현상금까지 걸리자 그에게 다른 곳으로 떠나라고 말한다. 윌은 빅토리아의 맘에 없는 말에 이렇게 답한다. 

"세스 같은 사람들은 밤하늘의 별보다 더 많아.

흐르는 강물처럼 살 거야. 우리 할아버지가 늘 그러셨거든. 방법은 그뿐이라고.(143)"

생각해보니 윌의 말이 맞는 것 같다. 빅토리아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것처럼 "윌이 이곳을 떠나 어디로 간다 한들 세스 같은 사람이 없겠는가? 어디로 간들 세스처럼 분노로 가득한 사람, 피부색이 어둡다는 이유만으로 괴롭히려는 사람이 없겠는가?" 말이다. 


빅토리아의 가족에게도 자동차 사고로 한 번에 가족 셋을 잃는 아픔을 겪게 되지만, 마을 사람들이 미친 할머니라고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는 루비앨리스 에이커스 또한 독감으로 가족 모두를 떠나보낸 상처가 있는 사람이었다. 세스가 끊임없이 분노를 표출하며 타인에게 불편함과 불안함을 제공했다면 빅토리아는 루비앨리스 에이커스를 피하면서도 마음속으로 '주님루비앨리스에이커스를도와주세요아멘'이라고 짧게마나 화살기도를 바치며 악과 선의 평행선을 이루게 만들지 않았나 싶다. 결국 빅토리아의 짧은 기도는 훗날에 처참한 몰골에서 멀정한 옷차림으로 집에 돌아갈 수 있는 는 보금자리를 만들어주고 한평생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으로 배회하던 루비앨리스가 편안히 임종할 수 있는 손을 잡아 어루만져 줄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한다. 


어쩌면 이 소설의 가장 극적이고 위태로운 순간이라고 할 수 있는 빅토리아가 임심한 몸으로 산장에서 머무는 시간은 실제로 이러한 경험을 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극적으로 다가오도록 묘사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놀라웠다. 복숭아 밭을 일구며 자연의 흐름에 익숙했던 빅토리아마저도 산 높은 곳에 있는 산장에서의 생활은 결코 녹록치 않았고, 8월 말에 갑자기 내려간 기온과 눈으로 간신히 일궈놓은 텃밭마저 엉망진창이 되자, 빅토리아는 이성의 끊을 놓고 만다. 급기야 극심한 배고픔으로 아직 턱없이 못자란 비트마저 뽑아 먹으며 흙 한 줌을 입에 넣는 장면은 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슬픔과 고통의 끝이 어디까지인지 감히 헤아릴 수 없게 만든다. 그리고 그 슬픔과 고통의 막바지에 갓난아기인 아들에게 줄 젖이 나오지 않자 홀린듯이 산에서 내려가다 마주친 젖을 물린 어느 여인이 타고 왔을 차에 아들을 놓고 떠나며 절정에 달한다. 


"세상에는 슬픔을 넘어서는 슬픔, 펄펄 끓는 시럽처럼 아주 미세한 틈으로도 스며들어 버리는 그런 슬픔이 있다. 그런 슬픔은 심장에서 시작되어 모든 세포로, 모든 혈관으로 스며들기 때문에 그런 슬픔이 한번 덮치고 가면 모든 게 달라진다. 땅도, 하늘도, 심지어 자기 손바닥마자도 이전과 같은 눈으로 바라볼 수 없게 된다. 그야말로 세상을 바꿔버리는 슬픔이다.(209)"


사랑했던 엄마와 캘 오빠와 비브 이모를 떠나보내며 깊은 슬픔을 경험해 봤다고, 이미 빅토리아의 유년 시절의 촘촘한 태피스트리에는 큼직한 구멍이 나 있다고, 그 무지막지한 슬픔은 빅토리아를 앗아가려고 했지만, 아기를 차 뒷좌석에 놓고 도망치듯 달리는 그녀는 유년 시절의 슬픔을 뛰어넘는 슬픔을 넘어서는 슬픔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루비앨리스의 보살핌을 받고 집으로 돌아온 빅토리아는 윌이 가르쳐 준 말을 떠올리며 용기를 내어 아빠를 마주하게 된다. 

"끔찍하든 아름답든 절망적이든 어떤 결과가 닥치든 간에 그저 최선을 다해 마주하면 된다고.(224)"


아빠가 돌아가신 후 복숭아 농장을 돌보게 된 빅토리아는 아빠가 가르쳐 준대로 성실하게 나무들을 돌본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 속이 평화로운 것은 결코 아니었다. 

"겉으로는 모든 게 질서 정연해 보였겠지만, 나는 매일 아침 심장을 후벼 파는 진실과 함께 눈을 떴다. 이곳을 향한 내 사랑도 우리 가족이라는 끝장난 나무에 간당간당 매달린 시든 잎사귀 하나에 불과하다는 속삭임이 매일 아침 나를 깨우는 알람이었다.(237)"


극심한 내적 고통에 시달릴 때면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지옥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잠을 자고 있을 때가, 나에게 닥친 일을 의식하지 못할 때가 가장 편안하게 느껴지는 하지만 이내 잠에서 깨어나면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고통과 슬픔은 아주 조금씩 나를 갉아먹으며 공존하는 것만 같았다. 


빅토리아의 집이 있는 마을이 댐 건설로 수몰될 것이라는 정부 관계자의 설명을 듣고 미련없이 지을 처분하기로 결정한다. 빅토리아의 선택을 배신이라 생각한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본체만체하며 적대시하지만, 빅토리아는 서둘러 조부모 때부터 지켜낸 복숭아 나무를 옮겨심을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다행스럽게도 빅토리아를 도와주는 그리니 교수와 학생들 덕분에 완벽한 내시 복숭아를 열매 맺게 할 나무들은 새로운 터전에 자리를 잡게 된다. 복숭아 나무의 이동과 더불어 빅토리아는 새로운 삶의 조력자를 만나게 된는데, 부동산 중개인의 부인이자 빅토리아의 가장 친한 이웃이 된 젤다는 빅토리아가 상처를 안고 힘겹게 삶을 버티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그녀에게 진심어린 충고와 격려의 말을 이렇게 건넨다. 


"빅토리아가 강한 사람이라는 건 나도 잘 알아요. 나무도 구하고 농장도 운영하고 열심히 일하고 걷고... 뭐든 혼자서 척척 잘 해낸다는 거. 그래도 슬픔을 혼자 짊어지고 사는 건 강인한 게 아니에요, 빅토리아. 그건 누가 봐도 벌이야. 과거에 무슨 일을 겪었든 자신을 비난하는 것만큼은 멈췄으면 해요.(340)" 


삶을 송두리째 무너뜨릴 만한 불행을 마주한 사람은 몹시 괴로워하다가 그 불행의 원인을 자신에게 돌리는 경우가 많다. 옷을 뒤집어 먼지를 탈탈 털어내듯이, 서랍을 통째로 빼내어 보이지 않는 구석에 걸려 있는 것은 없는지 확인하듯이 너무 가물가물해서 정말로 있었던 일인지조차 확인되지 않는 기억을 재생시키며 '그 때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라는 가정으로 자신을 비난한다. 그 비난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원통함과 죄책감은 커져만 가고 부작용으로 불같은 화를 내뿜기도 하다 결국은 자신을 완전히 망가뜨리는 길만이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 아닐까란 극단의 상태에 이른다. 흐르는 강물처럼 최선을 다해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겠다고 다짐하며 복숭아 농장을 돌보던 빅토리아마저 자신의 아들과 같은 나이 또래의 이웃집 카를로스를 보며 슬픈 눈을 감추지 못한 모습을 눈여겨 살펴본 젤다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역할을 톡톡히 감당하고 있다. 자신의 불행에만 매몰되지 않고 때로는 억척스럽게 가끔은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방식으로 마음을 열지 않던 빅토리아에게 젤다의 인내로운 기다림과 배려는 종국에 가서 빅토리아가 아들을 만날 수 있는 용기를 품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빅토리아, 잉가, 루카스가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는 마중물 역할까지 해낸 것이 아닌가 싶다. 


"숲은 내게 말했다. 모든 존재를 그 자체로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건, 바로 겹겹이 쌓인 시간의 층이라고. 

그랬다. 젤다의 말이 옳았다. 내 과수원이 그랬듯 나 역시 새로운 토양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회복력을 가지고 있었고, 내 의지와 관계없이 뿌리째 뽑히고도 어떻게든 살아왔다. 그러나 셀 수 없을 만큼 흔들리고, 넘어지고, 무너지고 두려움에 웅크린 것도 사실이다. 그러면서 나는 강인함은 이 어수선한 숲 바닥과 같다는 걸 배웠다. 강인함은 작은 승리와 무한한 실수로 만들어진 숲과 같고, 모든 걸 쓰러뜨린 폭풍이 지나가고 햇빛이 내리쬐는 숲과 같다. 우리는 넘어지고, 밀려나고, 다시 일어난다. 그리고 최선을 희망하며 예측할 수 없는 조각들을 모아가며 성장한다. 이토록 아름다운 방식으로 성장한다는 것 하나만으로 우리 모두는 함께였다.(415-416)"


#셸리리드 #흐르는강물처럼 #GoasaRiver #김보람역 #다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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왓 어 원더풀 월드
정진영 지음 / 북레시피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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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영 작가의 [왓 어 원더풀 월드]를 읽었다. What a Wonderful World. 전작인 [젠가]와 [침묵주의보]에서 그랬듯 이번 작품도 술술 잘 읽혔다. 로또 복권 1등 당첨자를 둘러싼 직장인들의 애환을 그린듯 하지만 결국 우리 모두가 살아가면서 정말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매 순간 이미 늦었다고 체념하며 지내온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만드는 소설이었다. 허쉬처럼 드라마로 만들어진다면 우리나라의 국토종주가 가능한 자전거길이 소개되는 명장면들이 펼쳐지지 않을까 기대가 되기도 한다. 


주인공 상익은 여상정공이라는 자동차부품 납품 중소기업의 품질관리팀의 말단 사원이다. 소설의 첫머리에 그려진 사장 오제일의 모습은 그야말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전형적인 속물로 그려져 있다. 온갖 얍삽하고 졸열한 방법을 동원해서 직원들의 연봉을 줄이고 야근 수당을 비롯한 추가 비용이 나가지 않도록 법을 적용할 줄 아는 치밀함도 갖고 있다.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약을 통한 관계가 우선된다 하더라도 오제일과 같은 사장 밑에서 일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오제일은 가장 믿음직한 부하 직원 중의 하나인 문희주 과장이 그만둔다는 말을 듣고 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송별회식까지 열지만 그의 결정은 요지부동이다. 홧김에 로또 복권을 사서 회식한 참석한 이들에게 나눠주며 복권에 당첨되면 돌아오라는 말도 안되는 부탁까지 청하게 된다. 이런 일이 있은 이후에 오제일이 사서 나눠준 복권 중의 하나가 1등에 당첨되어 누가 당첨된 것인지 직원들의 지갑을 들춰보는 치졸한 모습에서 시작된다. 


오제일의 팔렴치하고 야비한 모습에 분노한 직원 중의 하나인 우희철이 사장과 대거리질까지 하며 자신을 데리고 오기 위해 거짓으로 연봉을 뻥튀기한 사실을 밝히며 사표를 내민다. 궁지에 몰린 오제일은 직원들을 회유하기 위해 1등 복권이 당첨되었을 것이라 짐작되는 문희주 과장을 찾아오는 사람에게 연봉 1천만원을 올려줄 것이라는 각서를 작성하게 된다. 이후 박상익과 우희철, 이재유, 임정연은 문 과장을 찾기 위해 수소문하게 되고 그가 자전거로 국토대장정길에 올랐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은 자전거 길에서 문과장을 만나기 위해 차로도 걸어서도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급하게 자전거를 구입하여 문과장을 뒤쫓게 된다. 


한강자전거길에서부터 시작된 대장정은 우희철과 이재유의 갈등과 다툼이 지속되는 계기가 된 야유회 때의 노래 사건을 전해주고 사장과 그렇고 그런 사이가 아니냐는 의혹을 받는 임정연의 놀라운 반전 또한 드러나게 된다. 화자이자 주인공인 상익은 처음에는 이런 어이없는 상황을 관망하는 제3자처럼 나오지만 자전거 종주가 지속되면서 점차 주인공으로서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한다. 추노꾼처럼 문과장을 추척하는 중간에 간발의 차이로 놓치게 되는 장면이 반복되며 개연성이 조금 떨어지기도 하지만 문과장이 올리는 인스타그램의 인증샷에 담긴 비밀이 무엇일까 궁금증은 지속되었다. 그리고 로또 복권 1등 당첨자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하는 심준호의 카톡 메시지를 통한 지속적인 안부 인사는 그가 소설의 정점을 향한 결정적인 키를 갖고 있음을 충분히 예상케 했다. 


이재유가 과거 밴드의 기타리스트로 꽤나 유명한 노래를 만들고도 빼앗긴 사실이 드러나며 서로의 잃어버린 꿈을 되찾게 만들어주는 부분은 감동적이면서도 조금은 진부하게 느껴졌다. 이재유의 결심을 계기로 임정연 또한 사장과의 관계를 고백하고 회사의 대주주임이 밝혀진다. 임정연의 사이다가 같은 발언들은 그저 항상 을에 불과했던 수많은 약자들을 심정을 대변하는 모습이었기에 소설 속에서나마 오제일과 같은 이들이 몰락하고 회사가 제대로 자리잡는 이상적인 결말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주인공인 상익 또한 의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지만 그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아픈 사람을 낫게 해주는 것인지, 그저 번듯한 직업을 갖고 싶었던 것이었는지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고 상익의 고민을 해소시킨 자전거종주길을 끝까지 달려가고자 하는 마음은 독자로 하여금 그동안 여러가지 이유와 핑계로 단념했던 꿈을 향해 질주해 볼만한 가치가 있음을 전해주었다. 


"어머니 장례를 치르면서 깨달은 건데, 판단하기 어려울 때 죽음을 기준으로 판단하면 많은 고민이 줄어든다는 거였어. 내일이 내 삶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해봐. 오늘의 나는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지도 않을 테고, 온종일 침대에 퍼져 잠만 자지도 않을 거야. 그때 어머니는 진심으로 무지개를 보고 싶으셨던 거야. 그러니까 아들에게 무리한 부탁을 했겠지. 자기에게 남은시간이 너무나도 소중하니까. 우리가 죽을 때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기억 말고는 아무것도 없잖아. 사장한테 섭섭하다는 이유만으로 회사를 그만두는 게 아냐. 하고 싶었던 일에 한번쯤은 최선을 다해보고 싶어졌어.(227)"


"예전에 어떤 다큐멘터리에서 본 건데, 지구상에서 가장 비행을 잘하는 생물이 잠자리래.

잠자리는 앞날개 두 장과 뒷날개 두 장을 가지고 있는데, 이 네 장의 날개를 각각 따로 움직일 수 있다고 이재유가 설명했다. 그 덕분에 방향 전환은 물론 정지비행, 급선회, 급하강, 급상승, 상하좌우 이동, 심지어 후진 비행까지 가능하다는 추가 설명도 더해졌다.

더 신기한 게 뭔 줄 알아? 날개를 접을 수 없는 곤충이 접을 수 있는 곤충보다 더 오래된 곤충이라는 거야. 날개를 접지 못하는 잠자리는 한 마디로 구닥다리라는 거지. 그런데 어떻게 접을 수 없는 날개로 접을 수 있는 날개보다 더 멋진 비행을 하는 걸까. 그게 진화의 결과래. 기존의 불완전함 위에 새로운 불완전함을 반복해 얹으며 세상에 적응하는 것, 그게 진화라는 거야.

이재유의 말은 세상 모든 게 불완전한 것들로 이뤄져 있다는 의미로 들렸다. 우리의 삶은 영화나 드라마처럼 리셋하거나 회귀할 수 없다. 좋든 싫든 주어진 환경에서 지금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삶이란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과정이고, 아름다움은 그 삶을 사랑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느낄 수 있는 선물이 아닐까. 문득 차장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세상이 눈부시게 아름다워 보였다.(238-239)"


#정진영 #왓어원더풀월드 #WhataWondefulWorld #북레시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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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두기 - 2024년 제47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조경란 외 지음 / 문학사상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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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제47회 이상문학상 작품집]을 읽었다. 대상 수상작은 조경란 "일러두기"이고, 우수작은 김기태 "팍스 아토미카", 박민정 "전교생의 사랑", 박솔뫼 "투 오브 어스", 성혜령 "간병인", 최미래 "항아리를 머리에 쓴 여인" 등 이다. 


성격테스트가 스테디셀러처럼 꾸준히 유행중이다. 아주 간단하게는 혈액형 가지고, 12간지나 별자리를 따지기도 하지만 좀 더 전문적인 절차를 거치는 MBTI와 에니어그램을 통해서 나와 다른 상대방을 이해하고자 한다. 이런 테스트가 어떤 유형에 대한 선입견을 만들기도 하지만 그동안 전혀 이해살 수 없었던 상대방의 행동을 조금은 지켜봐 줄 수 있는 아량이 생겨났다면 꽤나 긍정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성격 유형은 타고난 유전적 영향을 많이 받지만 더불어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사건이나 주변환경의 영향도 많이 받는다. 행여나 일반적이지 않은 강렬한 트라우마를 남길 사건을 겪게 된다면 그 특정한 사건은 한 사람의 일생에 오랜 시간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문제는 내가 만나는 사람이 어떤 사건을 겪고 어떤 상처가 있는지 처음에는 전혀 알 수가 없는 상태에서 관계를 시작해야 한다는 점이다. 


조경란 작가의 "일러두기"에는 우리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데 있어 결정적 장애물이 될 수 있는 요소들을 서로에게 미리 일러 둘 수 있다면 어떨까라는 결론을 맺고 있다. 쉰을 앞 둔 반찬가게를 하는 미용과 아버지의 복삿집을 물려받은 돌싱남 재서는 재서의 아버지가 버리기를 만류한 오래된 장롱이 넘어져 재서의 팔꿈치가 다치는 것을 계기로 가까워지게 된다. 서로에 대한 관심이 생겨난 이유는 단지 미용이 오지랖이 넓어서만이 아니라 미용이 프린트물 출력을 위해 남기고 간 USB에 담긴 미용의 글을 재서가 읽게 되면서부터이다. 미용의 글에는 혼자 사는 여자가 반찬 가게를 운영하며 근방의 자영업자들과 스스럼 없이 지내는 외적인 모습에서는 전혀 추론할 수 없는 미용의 고백이 담겨 있었다. 미용은 자신을 이렇게 만든 고등학교의 교련 선생을 찾아내서 왜 그랬냐는 복수의 칼날을 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미용이 걱정되어 집을 찾아온 재서에게 USB에 담기지 않은 다른 글에는 어린시절부터 무용한 존재로 살아가는 법을 배운 미용이 교련 선생에게 당한 수치와 급우들의 왕따로 인한 상처가 아니라 그 순간 서서히 떨어지는 꽃잎을 바라보며 아름다움을 느꼈던 추억의 고백이었다. 미용이 되새기는 아픈 추억을 공유하게 된 재서는 우리 삶에도 이렇게 서로를 배려할 수 있는 일러두기가 있다면 좋겠다는 말로 미용을 보듬게 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그런 게 있으면 좋겠네요.

왜요?

그러면 미리 이해를 구할 수도 있고 안내 같은 것도 할 수 있게 될 테니까요.(47)"


성혜령 작가의 "간병인"은 유방암으로 아내를 떠나보낸 아버지가 딸 나진에게 유전자 검사를 받아 암이 발병된 가능성을 미리 제거하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건낸다. 예방접종도 아니고 지금은 멀쩡한 가슴을 혹시나 암에 걸릴 것을 예방하기 위해 미리 잘라내라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 해결책일까? 사별한 아내의 병력이 행여나 딸에게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걱정되는 것이 당연한 아버지의 심정이겠지만 조금은 부당하고 어이없어 보이는 제안을 나진은 물리치지 않는다. 유전자 검사 결과에도 돌연변이 인자가 발견되었고 반드시 유방암게 걸리게 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불확실성에 오는 불안보다는 아버지의 제안을 받아들여 수술을 받는다. 나진은 수술을 받고 생각보다 큰 고통을 느끼며 간병인의 도움을 받게 된다. 아버지와 잘 아는 사이라는 미형은 나름 간병 전문가라며 나진을 안심시킨다. 얼핏 미형의 캐리어에서 본 청록색 자켓은 돌아가신 엄마의 것과 비슷해보여 나진은 미형과 아버지는 무슨 사이일까 의구심을 갖는다. 미형은 나진을 돌보다 아버지의 공장이 도산된 측은한 처지라는 어이없는 소리를 듣고 아버지가 미형을 재혼 대상으로 테스트 하고 있는 중이라 짐작한다. 나진은 엄마의 항암치료를 비롯한 모든 것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던 아버지에 대한 냉소적인 마음이 있는 듯 했지만, 미형의 간병을 받으며 특히 나진의 캐리어를 열지 못해 미형의 속옷을 빌려 입으며 깨닫게 된다. 자신 또한 아버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엄마가 정말 어떤 사람이었는지 나진 또한 궁금해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진이 입원하기 전 어머니의 일주기가 되어 봉안당에 다녀오던 길에 아버지는 네 엄마는,이라고 시작하는 말을 늘어놓았다. 네 엄마는 진밥보다 꼬들밥을 좋아했는데, 다른 김치는 하나도 못 담그면서 나박김치만은 맛있게 했는데, 네 엄마가 너를 낳을 때 죽을 뻔했더 걸 알고 있냐. 네 엄마가 나한테 말 한마디 없이 쌍꺼풀 수술을 하고 온 날 기억하냐..... 그런 건 같이 사는 사람이면 알고 싶지 않아도 알 수밖에 없는 사실들이었다. 그 말들을 아무리 쌓아도 어머니가 정말 어떤 사람이었는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에 분노했으며 어떤 순간에 평온했고 또 어떤 순간에 불안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런 말을 자랑스레 늘어놓는 아버지를 보면서 나진은 알고 싶지 않아도 알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와 자신이 근본적으로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자기 또한 단 한 번도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하지 않았다는 것을.(246)"


최미래 작가의 "항아리를 머리에 쓴 여인"은 배우 지망생인 '나'가 꼬마 아이 '서라'를 돌보는 시터 일을 하면서 벌어진 일을 이야기한다. 화자는 처음 냉장고에 붙여 있는 서라와 같이 있는 여자의 사진을 보며 서라의 엄마가 어떤 이유에서든 아빠가 갈라서고 지금은 고령의 할머니가 서라를 혼자 돌보기에 벅찬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서라의 아빠는 외국에 긴 출장중이고 서라의 할머니는 화자를 통해 서라의 하원을 책임지게 된다. 오후 5시에 서라의 하원을 책임지고 함께 놀아주고 씻고 먹이는 일을 통해 받는 보수는 적지 않아 화자는 꽤나 흡족해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서라의 아빠가 집으로 돌아오게 되고 서라의 할머니와는 다르게 서라의 아빠는 화자에게 서라의 엄마로서의 역할을 강요받는 상황을 만든다. 화자가 서라를 처음 만났을 때에는 아이답지 않게 필요한 말만 하고 TV를 보다가 지쳐 잠드는 일상이었지만, 서라를 놀이터에 데리고 다니고 서라가 필요로 하는 순간에 엄마와 같은 자리를 지키자 서라는 점점 여느 아이들처럼 엄마 껌딱지가 되어간다. 점점 부담을 느끼는 화자는 이런 애매모호한 시터 자리를 포기하지도 못한 채 자기 자신이 소모되어 가고 있다는 자괴감에 빠진다. 배우가 되기 위해 항아리를 막는 두꺼비 역할도 기꺼이 감내했던 과거의 모습을 떠올리며 결국 자신은 온 몸으로 그 구멍을 매우려 한다 하더라도 어디선가 줄줄 물이 새어가는 꼴을 면치 못하리라는 좌절감과 함께. 


#조경란 #일러두기 #문학사상 #2024제47회이상문학상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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