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두기 - 2024년 제47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조경란 외 지음 / 문학사상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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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제47회 이상문학상 작품집]을 읽었다. 대상 수상작은 조경란 "일러두기"이고, 우수작은 김기태 "팍스 아토미카", 박민정 "전교생의 사랑", 박솔뫼 "투 오브 어스", 성혜령 "간병인", 최미래 "항아리를 머리에 쓴 여인" 등 이다. 


성격테스트가 스테디셀러처럼 꾸준히 유행중이다. 아주 간단하게는 혈액형 가지고, 12간지나 별자리를 따지기도 하지만 좀 더 전문적인 절차를 거치는 MBTI와 에니어그램을 통해서 나와 다른 상대방을 이해하고자 한다. 이런 테스트가 어떤 유형에 대한 선입견을 만들기도 하지만 그동안 전혀 이해살 수 없었던 상대방의 행동을 조금은 지켜봐 줄 수 있는 아량이 생겨났다면 꽤나 긍정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성격 유형은 타고난 유전적 영향을 많이 받지만 더불어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사건이나 주변환경의 영향도 많이 받는다. 행여나 일반적이지 않은 강렬한 트라우마를 남길 사건을 겪게 된다면 그 특정한 사건은 한 사람의 일생에 오랜 시간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문제는 내가 만나는 사람이 어떤 사건을 겪고 어떤 상처가 있는지 처음에는 전혀 알 수가 없는 상태에서 관계를 시작해야 한다는 점이다. 


조경란 작가의 "일러두기"에는 우리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데 있어 결정적 장애물이 될 수 있는 요소들을 서로에게 미리 일러 둘 수 있다면 어떨까라는 결론을 맺고 있다. 쉰을 앞 둔 반찬가게를 하는 미용과 아버지의 복삿집을 물려받은 돌싱남 재서는 재서의 아버지가 버리기를 만류한 오래된 장롱이 넘어져 재서의 팔꿈치가 다치는 것을 계기로 가까워지게 된다. 서로에 대한 관심이 생겨난 이유는 단지 미용이 오지랖이 넓어서만이 아니라 미용이 프린트물 출력을 위해 남기고 간 USB에 담긴 미용의 글을 재서가 읽게 되면서부터이다. 미용의 글에는 혼자 사는 여자가 반찬 가게를 운영하며 근방의 자영업자들과 스스럼 없이 지내는 외적인 모습에서는 전혀 추론할 수 없는 미용의 고백이 담겨 있었다. 미용은 자신을 이렇게 만든 고등학교의 교련 선생을 찾아내서 왜 그랬냐는 복수의 칼날을 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미용이 걱정되어 집을 찾아온 재서에게 USB에 담기지 않은 다른 글에는 어린시절부터 무용한 존재로 살아가는 법을 배운 미용이 교련 선생에게 당한 수치와 급우들의 왕따로 인한 상처가 아니라 그 순간 서서히 떨어지는 꽃잎을 바라보며 아름다움을 느꼈던 추억의 고백이었다. 미용이 되새기는 아픈 추억을 공유하게 된 재서는 우리 삶에도 이렇게 서로를 배려할 수 있는 일러두기가 있다면 좋겠다는 말로 미용을 보듬게 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그런 게 있으면 좋겠네요.

왜요?

그러면 미리 이해를 구할 수도 있고 안내 같은 것도 할 수 있게 될 테니까요.(47)"


성혜령 작가의 "간병인"은 유방암으로 아내를 떠나보낸 아버지가 딸 나진에게 유전자 검사를 받아 암이 발병된 가능성을 미리 제거하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건낸다. 예방접종도 아니고 지금은 멀쩡한 가슴을 혹시나 암에 걸릴 것을 예방하기 위해 미리 잘라내라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 해결책일까? 사별한 아내의 병력이 행여나 딸에게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걱정되는 것이 당연한 아버지의 심정이겠지만 조금은 부당하고 어이없어 보이는 제안을 나진은 물리치지 않는다. 유전자 검사 결과에도 돌연변이 인자가 발견되었고 반드시 유방암게 걸리게 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불확실성에 오는 불안보다는 아버지의 제안을 받아들여 수술을 받는다. 나진은 수술을 받고 생각보다 큰 고통을 느끼며 간병인의 도움을 받게 된다. 아버지와 잘 아는 사이라는 미형은 나름 간병 전문가라며 나진을 안심시킨다. 얼핏 미형의 캐리어에서 본 청록색 자켓은 돌아가신 엄마의 것과 비슷해보여 나진은 미형과 아버지는 무슨 사이일까 의구심을 갖는다. 미형은 나진을 돌보다 아버지의 공장이 도산된 측은한 처지라는 어이없는 소리를 듣고 아버지가 미형을 재혼 대상으로 테스트 하고 있는 중이라 짐작한다. 나진은 엄마의 항암치료를 비롯한 모든 것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던 아버지에 대한 냉소적인 마음이 있는 듯 했지만, 미형의 간병을 받으며 특히 나진의 캐리어를 열지 못해 미형의 속옷을 빌려 입으며 깨닫게 된다. 자신 또한 아버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엄마가 정말 어떤 사람이었는지 나진 또한 궁금해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진이 입원하기 전 어머니의 일주기가 되어 봉안당에 다녀오던 길에 아버지는 네 엄마는,이라고 시작하는 말을 늘어놓았다. 네 엄마는 진밥보다 꼬들밥을 좋아했는데, 다른 김치는 하나도 못 담그면서 나박김치만은 맛있게 했는데, 네 엄마가 너를 낳을 때 죽을 뻔했더 걸 알고 있냐. 네 엄마가 나한테 말 한마디 없이 쌍꺼풀 수술을 하고 온 날 기억하냐..... 그런 건 같이 사는 사람이면 알고 싶지 않아도 알 수밖에 없는 사실들이었다. 그 말들을 아무리 쌓아도 어머니가 정말 어떤 사람이었는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에 분노했으며 어떤 순간에 평온했고 또 어떤 순간에 불안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런 말을 자랑스레 늘어놓는 아버지를 보면서 나진은 알고 싶지 않아도 알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와 자신이 근본적으로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자기 또한 단 한 번도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하지 않았다는 것을.(246)"


최미래 작가의 "항아리를 머리에 쓴 여인"은 배우 지망생인 '나'가 꼬마 아이 '서라'를 돌보는 시터 일을 하면서 벌어진 일을 이야기한다. 화자는 처음 냉장고에 붙여 있는 서라와 같이 있는 여자의 사진을 보며 서라의 엄마가 어떤 이유에서든 아빠가 갈라서고 지금은 고령의 할머니가 서라를 혼자 돌보기에 벅찬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서라의 아빠는 외국에 긴 출장중이고 서라의 할머니는 화자를 통해 서라의 하원을 책임지게 된다. 오후 5시에 서라의 하원을 책임지고 함께 놀아주고 씻고 먹이는 일을 통해 받는 보수는 적지 않아 화자는 꽤나 흡족해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서라의 아빠가 집으로 돌아오게 되고 서라의 할머니와는 다르게 서라의 아빠는 화자에게 서라의 엄마로서의 역할을 강요받는 상황을 만든다. 화자가 서라를 처음 만났을 때에는 아이답지 않게 필요한 말만 하고 TV를 보다가 지쳐 잠드는 일상이었지만, 서라를 놀이터에 데리고 다니고 서라가 필요로 하는 순간에 엄마와 같은 자리를 지키자 서라는 점점 여느 아이들처럼 엄마 껌딱지가 되어간다. 점점 부담을 느끼는 화자는 이런 애매모호한 시터 자리를 포기하지도 못한 채 자기 자신이 소모되어 가고 있다는 자괴감에 빠진다. 배우가 되기 위해 항아리를 막는 두꺼비 역할도 기꺼이 감내했던 과거의 모습을 떠올리며 결국 자신은 온 몸으로 그 구멍을 매우려 한다 하더라도 어디선가 줄줄 물이 새어가는 꼴을 면치 못하리라는 좌절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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