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기태 작가의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을 읽었다. '세상의 모든 바다', '롤링 선더 러브', '전조등',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보편 교양', '로나, 우리의 별', '태엽은 12와 1/2바퀴', '무겁고 높은', '팍스 아토미카' 이렇게 9편의 단편이 실린 소설집이다. 이미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과 이상문학상 작품집에서 '보편 교양', '세상의 모든 바다', '팍스 아토미카'를 읽었던 터라 다른 단편들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궁금했다. 소설집의 제목인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만 봐도 이 정도의 제목을 붙일 만한 깜냥이 되어야 소설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힙하다. 말미에 붙은 평론가의 설명에도 나오지만 여느 소설가와는 다르게 지금 현재 유행 중인 인터넷 짤이나 OTT 프로그램의 예시와 아이돌 문화를 가감없이 차용하고 있다. 더불어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꽤나 인기 있었던 대중 문화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노래 가사나 드라마 대사도 진부하지 않게 잘 녹여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소설이 가진 힘이 대중 문화처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소비되고 페기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성을 추구한다는 측면에서 저자의 통속적인 유행 재료들을 거침없이 소비하고 있는 것은 또 하나의 색다른 시도이자 유행은 결국 돌고 돈다는 일반적인 담론을 기반삼아 시간이 흘러도 언젠가는 다시금 회자될 수 밖에 없는 매력을 보여주고 있지 않나 싶다. 그리고 이번 소설집을 읽으면서 뭔가 다른 단편소설집과는 다른 느낌을 받았는데, 몇 편의 소설에서 이야기를 극대화시키고 갈등을 불러일으킬 만한 것들을 응근히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닐까란 의심이다. 특히 '전조등'에서는 어찌보면 성공한 인생처럼 보이는 주인공이 뒤늦게나마 청혼하고픈 마음이 드는 애인을 만나 괜찮은 팬션을 향해 가는 도중에 털신 한 켤레로 전조등 한 쪽이 망가지는 부분에서 어떤 불길한 조짐이 느껴졌지만, 계획된 프로포즈가 아닌 어이없이 정차된 순간에 반지를 넣어둔 자켓에 손을 넣은 애인으로 인해 발각되며 조금은 싱겁게 끝이난다. 대부분의 단편이 장편과는 다르게 열린 결말이나 확실한 결론을 내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김기태 작가의 단편들은 유독 뭔가 더 이야기가 이어지길 것 같은 순간에 끝났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래서 그런지 언젠가 나올 장편 소설이 더욱 기대가 된다. 


'롤링 선더 러브'에서 주인공 맹희는 처음엔 절친 리아와 여가를 즐기며 간간이 SNS로 일상을 공유하는 조금은 무료한 일상에 무기력해진 인물처럼 그려지는 것 같았지만, 갑자기 지금 각종 방송에서 가장 유행하는 예능 포맷인 짝짓기 프로그램에 지원하며 급변하게 된다. 워낙에 채널이 많아져서 서로가 즐겨보는 프로그램이 공통되기를 바라는 것이 어려운 시대가 되었지만, 유독 '나는 솔로'와 같은 유사한 짝짓기 예능이 대세인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과거에도 비슷한 포맷이 있었지만 요즘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는 일반인들이 나와서 마치 연예인이 되어가는 팬덤을 형성하는 것을 보면 신기하기만 하다. 포털사이트에도 거의 매번 다른 기수의 동일한 예명인 영숙이나 영호의 이름이 언급되는 걸 보면 사람들이 꽤나 많이 보면서 회자가 되는 것 같다. 아무튼 소설 속에서의 맹희는 그런 유사한 프로그램에 지원하여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캐릭터를 맡게 되지만, 이내 마지막에 냄새 나는 거름을 옮기는 과정에서 최종 스페셜 데이트권을 획득하는 반전을 선사하며 막을 내리게 된다. 마치 지금 방송되는 어느 기수의 인물들에 대한 댓글과 반응을 모아놓은 것처럼 생동감 넘치는 전개에 이어 솔로 농장 참가자들의 후기 모임에서 시비를 거는 불량배들에게 "사랑할 용기도 없는 놈들"이라고 멋지게 일침을 놓는 맹희의 모습에 박수를 보내게 만든다.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에서는 막상 학교를 다닐 때는 서로 얼굴만 알았던 동창인 진주와 니콜라이가 성인이 되어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는 내용이다. 진주와 니콜라이는 서로 친하지 않았지만 학교행정실에서 드러나지 않게 흰봉투를 받는 공통점이 있었고 자세한 설명이 첨부되지 않아도 둘 다 사회적 배려를 받는 대상임을 짐직할 수 있다. 진주에 대해서는 엄마의 새 애인을 소개받았다는 장면에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듯이, 니콜라이는 러시아인 부모에 대한 사정이 설명되지 않아도 이름만으로도 그가 겪고 있는 어려움이 짐작 가능하다. 진주는 대학을 가고 니콜라이는 실업계 고등학교를 거쳐 여러 자격증을 갖게 되지만 사회에서 다시 마주한 진주와 니콜라이는 둘 다 고만고만한 상태에서 경제적 어려움을 견디고 있었다. 우연한 재회를 계기로 그들은 연인이 아닌 그냥 친한 사이라는 미명하에 동거를 시작하게 된다. 경제적 공동체라고도 명명할 수 있는 그들의 불안정한 동거는 비단 진주와 니콜라이만 겪는 처참한 현실은 아닐 것이다. 


"잠들지도 않고 이야기하지도 않고 그저 누운 채로 숨을 쉬다보면 방안으로 노을이 스며들었다. 아이들의 재잘거림도 사라진 뒤 조용히 일렁거리는 커튼을 보고 있으면 세상이 남 얘기 같았다. 예쁘고 멋있고 촉감 좋은 물건들이 꼭 필요한 건 아니라고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다. 자이실현 같은 건 모르겠지만 견딜 만한 일을 하고, 지글지글 보글보글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는 삶. 가끔은 나란히 누워서 햇볕을 쬘 사람이 있는 삶. 이 정도면 괜찮다고 여기면서도 어두운 골목을 걸어 다시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면 불안해졌다. 어느 날 흰 봉투가 날아와 계약 종료 통지서나 처음 들어보는 병명의 진단서를 덜컥 내놓는다면, 그때는 어떻게 되는 걸까?(133)"


사랑만 가득하다면, 진심으로 꿈과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 상대라면 조금 배고프고 불편한 것들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지 않느냐는 이상적인 담론이 대세를 이루던 때가 오래 지속되었다. 지금의 청년들 중에 그런 말을 받아들이는, 아니 한 번이라도 그런 생각을 깊이 있게 고민해본 이들은 얼마나 될까? 소설 속 진주의 고백처럼 그럭저럭 견딘말한 일을 하고 함께 따뜻한 음식을 먹으며 핫한 OTT 프로그램이 아니라 그냥 옅어져 가는 오후의 햇살을 함께 느끼는 것만으로도 행복함에 빠질 수는 있겠지만, 노후와 주거가 아무런 보장이 되어 있지 않는 상태에서도 그 행복감이 지속될 수 있을까란 불안함이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이희우 평론가의 말대로 우리는 이제 인터넷을 단순히 정보를 충분히 제공해 줄 좋은 도구를 찾아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제 인터넷을 모르던 시대로 돌아갈 수 없다. 아무리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만족하고 받아들이려고 해도 단 몇 초만의 스크롤로 굳건히 다잡았더 마음이 순식간에 무너지기 십상이다. 몇 번의 클릭과 염탐으로 도저히 가닿을 수 없을 것만 같은 환상적인 삶을 사는 것 같은 이들의 노출에 피로감을 느끼며 비현실적인 허상에 불과하다가 단정짓다가도 어느 순간 다시금 그들이 보여주는 과시에 몸과 마음을 뺏앗기기 일쑤다. 그럴때면 진주와 니콜라이가 인터넷 밈을 따라한 것처럼 당장 웹사이트와 SNS를 덮고 이렇게 외쳐야 하지 않을까.


"기립하시오! 기립하시오 당신도! 이것이 인터내셔널이오!(135)"


#김기태 #두사람의인터내셔널 #문학동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