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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귀고리 소녀
트레이시 슈발리에 지음, 양선아 옮김 / 강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진주 귀고리 소녀>에서 우리는 주인공의 신분을 알 수 없다.
그녀가 귀족인지 하녀인지,
부유한 상인의 딸인지 근처 빵집 딸인지,
그녀의 지위를 알려주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방을 나가려다 누가 불러서 돌아보는 것인지,
무슨 말인가를 건네기 위해 그저 돌아보는 것인지,
화가에게 보내는 시선이 안타까운 것인지,
아니면 슬픔에 찬 것인지 무궁무진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진주 귀고리 소녀- 트레이시 슈발리에
네덜란드의 델프트에 다녀 온 기분이었다.
중간 중간에 삽입된 베르메르의 작품은
17세기 네덜란드 델프트의 생활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또한 작가의 치밀한 복원력과 정확한 미술사적 지식의 바탕은
나를 더욱 그 세계로 이끌어 주었다.
나는 그리트와 똑같이 외로움을 견뎌내야 했고
나는 그리트와 똑같이 피터와 함께 희열을 느꼈으며
나는 그리트와 똑같이 '그'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그'의 스치는 듯한 시선에 나 또한 가슴이 두근거렸고
'그'가 말이라도 한 번 걸때면 그리트처럼 귀가 빨개져옴을 느꼈다.
그리트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그'와 함께
화실에서 일을 도울 때가 가장 행복했다.
말 수가 적고 무뚝뚝했으나 꼬박꼬박 내 이름을 불러주는 게 좋았고
가까이에서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것도 좋았다.
그의 친구가 환심어린 어투로 내게 접근할 때마다
질투가 나지만 애써 감추려는 그의 표정은 너무나도 귀여웠다.
그가 나를 그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는 오랫동안 눈동자를 마주하고 서로를 바라볼 수 있었다.
나는 실제로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가르쳐준 사람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너무나도 보고싶고 너무나도 그리운 사람의 얼굴을
막상 마주하게되면...
부끄러움 때문인지 없어져버릴 것 같은 걱정때문인지
한 번도 똑바로 눈동자를 마주칠 수 없었다.
그러나 책속에선 몇시간이고 눈을 마주치고 '그'를 바라볼 수 있어서
너무나도 행복했다.
'작업'이라는 핑계거리를 통해
나는 드디어 눈동자를 맞출 수 있었던 것이다.
머리속으로 사랑하게 될 사람의 눈을 상상한다는 것은
나에게 너무나도 즐거운 일이었다.
'당신은 나를 파멸시키고 있어요'
그러나 나는 베르메르가 그리트를 자신의 작품을 위한
하나의 도구로밖에 여기고 있다는 생각이 점차 들기 시작했다.
그의 작품을 위해 그리트가 달았던 진주귀고리에 대해
그의 아내 카타리나에게 아무런 변명도 해주지 않았다.
또한 그리트가 저택을 나와 10년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에도
그는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도 않았다.
사랑을 장남감으로 취급하는 주인과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아파하는 하녀의 사랑이야기겠거니.......
"화가 베르메르 씨가 죽었대요."
이 말에 그리트는 그만 손바닥을 베었지만
난 그저 약간 놀랐을 뿐이었다.
"넌 어떻게 그 그림을 볼 수 있었지?"
"아빠가 잠시 빌려도 되겠느냐고 부탁했어요.
아빠가 돌아가신 다음 날 엄마는 그림을 반 라위번 어른의
따님에게 돌려보냈구요."
" 아 빠 가 그 림 을 다 시 보 고 싶 어 하 셨 니 ? "
"그렇다네, 이 사람아. 사위가 그런 상태에 있을때라
식구들은 감히 안된다고 말할 수 없었다네."
이 말에 그리트는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이 말에 나는 정말 말 그대로 펑펑 울었다.
그도 나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를 외면한 게 아니라
나를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 고마웠다.
주인님이라는 신분을 버리고 나를 찾아준 사실이 너무 고마웠다.
나는 이제서야 진주 귀고리를 찬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
그것을 그린 '그'의 마음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