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가의 밤
조수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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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말라가에서 하루를 보낸 적이 있다. 사진을 돌이켜보니 2016년, 벌써 10년 전이다.

스페인 여행 때 론다라는 작은 마을에 들렀는데 오래된 투우 경기장이 있었다.

꽤 유명한 관광지라는 협곡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셨고 옆 테이블에 앉은 이가 여기가 '말라가'라고 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다. 이 말라가는 말라가 주의 이름이고 우리가 말라가라고 부르는 곳은 해변도시다)

말라가. 언젠가 해외축구에서 들어본 지명이다. 그곳은 따뜻했고 평온했다.


그 말라가라는 이름을 책에서 다시 만났을 때 묘한 설렘이 있었다.

<말라가의 밤>이라니. 얼마나 낭만적일까.

하지만 책을 펼치자 낭만은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어쩌면 사치, 반대로 살아남아야 느낄 수 있는 어떤 것이라는 뭔가 좀 복잡다단한 감정이 일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 형우는 생사의 경계에서 아홉 살, 열아홉, 스물아홉의 자신을 차례대로 만난다.

그 시절들은 모두 다정했고, 아팠고, 놓쳐버린 것이 많았다.

당시에는 사소했지만 지나고 난 이후에 생각하면 놓치지 말았어야 할 순간들.

그는 그 모든 장면을 다시 지나가며 문득 알게 된다.

사람을 잃는 일은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마음의 균열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동생의 질문을 허투루 넘겼던 날, 가족의 마음을 살피지 못한 날, 회사 일에 치여 누군가의 신호를 듣지 못한 날.

그 장면들은 형우의 삶에 뒤늦게 보내는 자막처럼 하나하나 떠오른다.

그리고 그 장면들 넘어 어쩌면 새로운 미래를 꿈꿀 수 있지 생각하게 된다.


구조되어 현실로 돌아온 형우는 자살 생존자들과 함께 프리다이빙을 한다.

물속이라는 공간은 이상할 만큼 위로가 된다.

숨을 참아야만 비로소 숨을 자각하게 되고, 깊이 내려가야만 결국 다시 올라올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운다.

프리다이빙은 죽음과 닮았지만, 동시에 완전히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

잠수는 사라지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살아남기 위해서 이기도 하다.


예전에 자살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자살로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들은 누구나 마음속에 결코 내려놓을 수 없는 돌덩이 하나를 품고 살아간다.

죄책감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내가 그때 어떻게 했으면 어땠을까'는 생각으로..

결코 사라지지 않는 어떤 것으로 남는다.

그리고 혼자서는 그 짐을 쉽게 내려놓을 수 없다.


프리다이빙에서 가장 중요한 건 호흡보다 함께 물속으로 내려갔다 떠오르는 버디라고 한다.

캄캄한 물 아래에서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는 사람.

그 안전한 거리 안에서만 사람은 비로소 숨을 다시 찾는다.


비단 자살생존자의 이야기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이와 비슷한, 결코 잊을 수 없는 상처를 가진 사람에게 회복은 화려한 기적이 아니다.


그저 아주 조용히, 아주 조금씩 다시 숨을 들이마시는 일이다.

프리다이빙에서는

숨이 쉬어지지 않는 날에는 억지로 숨을 몰아쉬기보다

누군가와 함께 잠시 숨을 참는 것이 더 나을 때가 있다고 말한다.


그렇게 버티고 나면, 언젠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올 수 있다는 믿음.

형우가 말라가의 바다에서 배운 건 바로 그 믿음이었다.


말라가의 밤에 낭만이 존재하는가?

글쎄. 살아 있는 이들이 숨을 이어가기 위해 필요한 단단하고 조용한 연대,

그리고 그 연대가 결국 한 사람이 다시 살아낼 용기를 만든다는 사실이 낭만이라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말라가의 밤.

언젠가 나도 그곳 해변을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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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 옷 추적기 - 당신이 버린 옷의 최후
박준용.손고운.조윤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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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에서 만난 뜻밖의 장면 중 저 옷이 왜 여기?? 했던 장면이 있다. 2002년 한국을 휩쓴 Be the Reds 티셔츠 그리고 이회창 대통령이라고 쓰인 옷(그는 대통령이 된 적이 없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사용되지 못하고 옷이 돌고 돌아 그곳에 도착한 것일게다. 그렇게라도 제 역할을 하고 있는 저 옷들을 바라보는 마음 한쪽이 묘하게 불편했다.



1. 의류 수거함 너머의 풍경


헌 옷을 어떻게 처리하는가? 너ㅏ는 깨끗한 옷은 아름다운 가게에 버려야 할 옷들은 의류 수거함에 넣는다. 응당 그냥 그래왔다. 마치 공공의 의류 쓰레기통 같았던 그곳이 민간에서 운영한다는 걸 알게 된 건 불과 몇 해 전의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류를 처리할 딴 방법을 모르는 나는 계속 그곳에서 헌 옷을 버렸다.


이 책의 이야기는 그렇게 버려진 헌 옷들이 진짜 어디로 향하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는 재활용이라는 말에 어떤 안도감을 배워왔다. 입지 않는 옷을 넣으면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막연한 믿음. 하지만 버려진 옷에 달아둔 GPS 추적기는 그 믿음 뒤의 세계가 얼마나 어둡고 혼란스러운지를 말해준다.


한국에서 해마다 버려지는 헌 옷은 공식 집계만 10만 톤이 넘지만 수출되는 양은 30만 톤에 달한다고 한다.


집계되지 않은 20만 톤이 어디선가 들어와 편법과 불법으로 빠져나가고 있다는 얘기다. 이들 옷들은 대부분 말레이시아, 인도, 필리핀, 태국, 볼리비아 등 중고 의류 수입을 금지한 나라로 들러들어간다. 그리고 이 옷들은 그곳의 쓰레기 산을 더욱 높게 쌓아 올린다.


인도와 태국, 필리핀 등도 마찬가지다.


의류 수거함을 통해 우리가 재활용된다고 믿었던 옷들은 개발도상국으로 향했다. 의류가 아닌 쓰레기가 돼서 말이다.




2. 기업의 말과 구조의 공백


H&M, 자라 같은 패스트패션 기업들이 최근 몇 년간 급성장하면서 친환경, 지속가능성이라는 이름으로 의류 수거함을 매장 내 비치하기 시작했다.


H&M은 수거된 옷의 92%를 재활용한다고 말했고, 자라는 '새로운 주인을 찾아드립니다'라는 슬로건을 걸었다.


하지만 헌 옷 추적 결과 H&M 매장 수거함에 넣은 7벌 중 4벌은 아프리카, 동남아로 흘러갔고 자라의 헌 옷은 튀니지에서 발견되었다.


우리가 동네 의류 수거함에 넣는 옷과 이들은 별밥 다르지 않은 운명을 걸었다.


이를 책은 '그린워싱'이라고 부른다.

이은 소비자를 두 번 속이는 행위다. 더 많이 사게 만들고 버린 뒤의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 친환경이라는 말로 포장한다.


정부는 제도의 빈틈을 방치한다. 유럽은 이미 생산자 책임재활용제를 통해 의류의 생애 주기를 관리하려 하지만, 한국은 여전히 검토 중이라는 말만 되풀이한다. 수십조 원 규모의 의류산업이 내는 이익은 있지만 그로 인한 책임은 누구에게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3. 그 옷을 입은 사람들의 이야기


추적기가 멈춘 인도 파니파트의 표백, 염색 공장에서는 아직도 폐수를 별도의 정화장치 없이 방류한다고 한다. 마을 사람 4,000명 중 400명이 중증 질환을 앓고 있고 노동자들은 맨손으로 화학 용수를 다룬다. 그리고 그곳의 아이들은 독성 물질이 묻은 옷더미 속을 놀이터처럼 뛰어다닌다.


남의 일 같지만 이 일들은 어쩌면 우리가 짧게는 수십 년 전에 이미 겪었던 일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공장폐수를 강에다 버렸고, 그 물질들은 각종 질병을 일으키며 마을 사람들을 병들게 했다. 아직도 이 일들이 법정에서 다뤄지고 있으며 이제 선진국이 되어버린 우리나라에 더 이상 이런 일을 벌이는 이는 없다.


그런데 그게 우리나라가 아니라면 괜찮다는 말인가?


내가 버린 옷이, 내가 신던 운동화가, 누군가의 몸을 병들게 하고 있음에도 개도국의 이들이 선택한 일이니 그것이 괜찮은 일이 되는가?


어쩌면 이 모든 것은 누군가의 선택이 아닌 구조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생산자는 대량 생산을 멈추지 않고 정부는 관리하지 않으며, 소비자인 우리는 재활용한다는 이야기에 거리낌 없이 소비한다.


티셔츠 한 장이 종이컵 수백 개의 탄소를 내뿜고, 폐의류의 20%가 불법 폐기될 때 매년 소나무 수천만 그루가 필요하다.



다른 선택은 가능하다


프랑스는 2028년까지 중고 섬유 재활용률을 90%까지 높이겠다고 선언했고, 네덜란드는 2050년 완전한 지속 가능 직물을 목표로 삼았다.

기술도 조금씩 진보하고 의류업계 종사자들 또한 변화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이런 변화의 출발은 정부나 기업을 움직일 수 있게 우리의 눈이 문제를 직시하기 시작할 때다. 의류 수거함이라는 블랙박스 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아는 것. 편리함 뒤에 누군가의 고통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않는 것.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다.



*개인적으로 행사를 위한 일회용 티셔츠는 이제 모든 기관에서 지양해 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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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의 격 - 옳은 방식으로 질문해야 답이 보인다
유선경 지음 / 앤의서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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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 보면 가끔 문장보다 내 생각이 먼저 움직이는 순간이 있다. 이 책 <질문의 격>을 읽을 때가 그랬다.

책장을 넘기며 계속 질문하지 못했던 어느 날이 떠올랐고, 동시에 하지 말아야 할 질문을 해버려 곤란했던 날들이 떠올랐다.


"답을 찾으려 하지 말고, 질문을 찾아라."


그랬다. 어쩌면 내가 하지 못했던, 하고 후회했던 질문은 어쩌면 답을 이미 알고 있거나 유도하는 질문이었다.

사실 그건 이미 답을 정해놓고 던지는, 어쩌면 질문이 아니라 포기와 항의에 가까웠다.

제대로 된 질문을 하고 싶었다. 나와 같은 이들이라면 서평을 접고 책을 먼저 펴드는 게 빠를지도 모르겠다.



1. 우리는 왜 질문하지 못하게 되었을까


책은 질문을 잃어버린 우리의 습관을 짚어낸다. 우리는 태어나서 줄곧 정답을 맞히는 방식만을 배워왔다. 질문은 수업 흐름을 방해했고, 교실은 언제나 조용해야 했다. 답을 잘하는 아이가 똑똑한 아이였고 질문은 버릇없거나 분위기를 깨는 행동으로 취급되었다.


돌아보면 나도 그랬다. 일을 하면서도 질문보다 좋은 답을 준비하는 데 더 익숙했다. 회의에서 손을 드는 대신 이미 주어진 결론에 맞는 분석을 찾아 맞추는 쪽이 더 자연스러웠다. 이는 나뿐 아니래 후배 직원들에게도 똑같이 요구되었다. 연차가 낮을수록 질문은 버릇없음의 동의어였다. 그러니 사고는 한 방향으로만 흐르게 되었고 다른 관점은 쉽게 닫혔다.


책은 이렇게 굳어진 사고방식을 부드럽게 흔든다.

질문을 못하는 게 아니라 질문을 배워본 적이 없기에 당연한 거라고.

질문의 첫 재교육이 필요한 건 어쩌면 애어른 할 것 없이 우리 모두 다.



2. 질문은 어떻게 사고를 전환시키는가


질문에도 격이 있다.

질문은 단순히 무엇이 답인가를 묻는 행위가 아니라, 어떻게 답에 도달할 것인가를 포함하는 사고의 구조다.

질문 하나에는 우리의 관점, 언어력, 삶의 태도까지 고스란히 드러난다.


실제로 기획안을 쓰거나 캠페인을 설계할 때 좋은 실행 안보다 먼저 필요한 건 늘 좋은 질문이었다.

"이 문제의 본질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오해하고 있는가?", "다른 방식으로 바라본다면 무엇이 달라질까?"


좋은 기획은 이러한 질문들이 기획의 흐름을 결정했다. 그러나 나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질문을 습관화하지 못했다.

책을 읽으며 깨달은 건 질문은 훈련의 영역이라는 것.

생각을 요약하고, 언어를 정밀하게 고르고, 관점을 바꾸어보는 과정 자체가 질문이라는 도구를 단련시키는 일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대안으로 "어떻게 하면"으로 질문하라고 권한다.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그까지 갈 수 있나요?"


질문을 바꾸면 세계가 달라 보이고, 관점이 달라지면 문제의 모양도 달라진다.



3. AI 시대, 질문이 곧 역량이 되는 순간


책 후반부는 지금의 시대와 놀랍도록 맞닿아 있다. 저자는 단언한다.

모두가 알다시피 AI 시대에 살아남는 사람은 답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질문을 잘 하는 사람이다.


프롬프트 하나에 따라 결과물이 달라지는 시대.

적확한 어휘를 고르고, 구체적인 맥락을 설정하고, 목적을 명료하게 제시해야 원하는 답에 도달할 수 있다.

질문력은 단순한 지적 능력이 아니라 사고력, 언어력, 문해력, 판단력의 총합이다.


GPT를 매일 쓰면서도 가끔 "왜 이렇게 답이 모호하지?"라고 생각할 때마다 사실 질문이 모호했던 때가 더 많았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 문제는 종종 답이 아니라 질문이었다.


책은 이 질문의 시대를 정확히 짚어낸다.

AI가 주는 답을 평가하고 보완하는 능력 역시 결국 질문의 품질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말한다.

질문은 이제 생각의 호흡이자 살아가는 언어가 되었다.



우리는 질문하는 대로 답을 찾는다.

능력보다는 질문하는 힘이 중요하다.

뇌 역시 그렇게 반응한다.

_토니 로빈스(작가, 심리학자)


책의 마지막 구절이다.

꽤 오래 두고 다시 펼칠 만한 그런 질문의 교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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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사랑 - 우리가 무뎌진 것에 대하여
고영호.신혜령 지음 / 북스고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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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가 기록한 평범한 순간들의 사랑을 따라가며, 사랑이 어떻게 흔들리고 단단해지는지를 담은 에세이 『그럼에도, 사랑』. 기억과 감정의 결을 따라 읽는 감성 서평.


고백하자면 나도 사진작가라는 직업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적이 있다.

대학 때부터 사진 괜찮게 찍는다는 말을 제법 듣기도 했고, 지금도 함께 여행이라도 가면 괜히 내 앞에서 얼쩡대는 사람도 많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누군가 "제대로 된 사진"을 부탁하는 순간(이를테면 행사나 웨딩 같은) 내 사진은 100이면 90은 망한다. 이상하게도 그랬다.


이 책 <그럼에도, 사랑>은 그런 나의 워너비, 사진작가라는 직업을 가진 이가 기록한 수많은 커플의 순간을 글과 사진으로 묶어낸 에세이다.

어디서 어떻게 만나 사랑하게 되었고, 그 사랑이 어떻게 흔들리고, 어떻게 다시 이어졌는지.

작가는 화려한 드레스나 배경 뒤에 가려져 있던 작고 평범한 순간들에 귀를 기울인다.

말보다 먼저 전해지는 떨림, 서로를 바라보는 짧은 눈길, 다짐인지 망설임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침묵.

찰나의 그 순간들을 그는 사진뿐 아니라 글로도 정확하게 짚어내는 것만 같았다.


사진을 조금이라도 찍어본 이들은 카메라 앞에선 이의 마음을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다.

누군가의 시작, 오래된 연인의 습관 그리고 다시 사랑을 배우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좋아하는 그가 보인다.

뷰파인더 밖 잘 차려입은 남녀는 설레다가 주저하고, 다투다가 화해하고, 눈을 맞추다가도 시선을 피한다.

이 미묘한 감정의 흔들림 속에 시간이 쌓이면 묘한 단단함이 생긴다. 그것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른다.


한창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읽다가 예상치 못한 고양이 ‘고영희 씨’의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역시 고양이를 좋아하는구나. 고양이 좋아하는 사람들끼리도 통하는 게 있다.

그렇게 나도 모르게 우리 짱고를 떠올렸다.

사랑이란 참 이상해서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도 늘 나의 삶 어딘가가 자꾸 보인다.

누군가의 고양이가 나의 기억을 꺼내오고 잠시 묵혀둔 감정이 흔들렸다.

하긴 사랑은 연인 간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묘생 전체를 나와 함께 했던 내가 사랑했던 고양이 우리 짱고.

결국 사랑의 형태는 모두 다르지만 어쩌면 그 결은 어딘가 닿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랑은 완벽한 이야기가 아니라 매일 다시 써 내려가는 평범한 순간의 기록이라고 한다.

옳다. 누군가와의 관계가 특별해지는 이유는 거창함 때문이 아니라 하루하루의 평범한 순간들을 서로 지켜왔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작가가 렌즈 너머에서 발견한 건 이런 순간들. 기술적으로 잘 찍힌 사진이 아니라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의 깊이인지도 모르겠다.


책을 덮고 난 뒤, 나의 사랑에 대해 생각했다.

영화나 드라마 같은 사건은 없었다. 그저 문득 스쳐간 눈빛, 손끝의 온기, 같은 방향을 바라보던 조용한 순간들.

돌이켜 보면 별것 아니어서 특별하지 않다고 여겼던 것들이 사실은 내게 사랑의 순간이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 책은 마지막에서 아주 멋진 반전을 준비해둔다.

마지막 장 아내는 남편을 바라보며 에필로그를 남긴다.

그리고 그 글은 이 책이 왜 사랑을 이렇게까지 섬세하게 말할 수 있었는지를 단숨에 설명해 준다.

남편이 시간을 통과하며 건져 올린 순간들을 곁에서 지켜본 사람의 고백은 책 한 권을 통틀어 이야기하는 작가의 말에 신뢰도를 더한다.


아 이 사랑꾼 같으니.

누군가를 오래 바라보는 사람이 쓴 문장은 이렇게 따뜻해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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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쓸모 - 자유롭고 떳떳한 삶을 위한 23가지 통찰 역사의 쓸모
최태성 지음 / 프런트페이지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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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딩 시절 '역사가 무슨 소용이냐!!'는 건 늘 우리의 외침이었다. 그치만 그 친구들에게 미안하게도 나는 시간이 유독 재미있었다. 딱히 이유는 없고 그냥 재미있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 보니 내가 좋아했던 감정의 바닥에는 어떤 이유가 있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어쩌고' 하는 거대한 담론이 아니라도 아주 작은 삶의 조각과 감정의 결 같은 게 역사에는 스며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은 카테고리 상 역사책일지 몰라도 어느 순간 사적인독서가 된다. 남의 이야기 같다가도 돌연 내 이야기로 번져오는 그 지점. 아마 그 때문에 우리는 역사를 공부하고 또 언젠가는 거기에 기대어 길을 찾으려 하는지도 모르겠다.

(책은 기획하고 쓰인 책이라기 보다 최태성 선생님의 강연을 조합해 만들어진 책 같다.)



1.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 – 비전의 힘


‘혼자만의 비전은 몽상이나 망상으로 그칠 수 있지만,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


선덕여왕의 이야기다. 그녀는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우며 "우리가 삼국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그 꿈은 실은 허황된 예언에 가까웠다. 가장 약했던 나라가 삼국을 통일한다니.

하지만 사람들은 매일 그 꿈을 눈으로 보았고 동의하지 않던 이들도 그 꿈에 젖어갔다.

그리고 그 꿈은 결국 현실이 되었다.


우리는 지금도 비슷한 삶을 산다. 회사에서, 가정에서, 또 내가 원하는 삶을 향해 다가간다.

그때 우리이게 황룡사 석탑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어쩌면 클지도 모르겠다.

비전이란 그것은 누군가와 함께 바라볼 때 비로소 생명을 갖는 것이니까.



2. 협상의 기술


역사에서 협상의 기술을 볼 수 있을 거란 기대는 없었는데 원종의 외교술이 있었다.

원나라의 말발굽에 고려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있을 때 원종은 모든 걸 포기하는 대신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를 계산했다.

사실 그 상황에서는 포기가 제일 빠르고 쉬운 길이다. 이미 나라가 망했는데 어찌할 것인가.

하지만 그는 고려가 가진 패를 끝까지 놓지 않고 협상 테이블에 올랐다.

그 덕분에 고려는 이미 사라져 버린 나라들과 달리 자치권을 지켜냈고 이것이 조선으로 그리고 오늘날까지 한반도의 역사로 이어진다.


포기하지 말라. 섬세하게 관찰하라. 그리고 너의 패를 놓지 말아라.

이 태도는 오늘의 삶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삶이란 크든 작든 늘 협상의 연속이다.



3. 역사는 결국 사람을 이해하는 도구다


역사는 무용한 지식이 아니라 백미러 같은 존재로 불확실한 세상에서 우리가 어디쯤 와 있는지, 누가 지금 내 옆에 서 있는지 확인하게 해준다.

최태성 선생님은 이를 빗대 역사는 사람을 만나는 인문학이라 부른다.


이 또한 거대담론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역사는 좋은 소통의 도구가 된다는 건데 내용인즉슨 스몰토크가 가능하다는 거다.

농으로 들었는데 애매한 사이에서 이야기를 이어가다 출신 학교, 직장, 사는 지역 같은 단서들 중 공통의 기억을 꺼내는 순간 대화는 훨씬 넓고 깊어질 수 있다.

이는 단순히 혈연, 지연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나아가 우리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 나는 이런 기억이 있다' 며 마음을 열게 되는데 이는 나를 이해하고, 타인을 연결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그렇게 이해하게 된 사람을 우리는 마음으로 마주할 수 있다.



역사는 오늘의 나를 위한 가장 오래된 안내서다


역사는 묵은 지식이 아니라 '내 삶을 더 낫게 살기 위한 실용서'다.

수백 년 전 사람들이 남긴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고민하던 지점에 작은 불빛이 켜진다.


살다 보면 누구나 흔들릴 때가 있다.

그럴 때 역사는 말한다.

"너도 길을 잃을 수 있다. 그러나 길을 잃은 사람은 너 하나가 아니었다."


그때 우리는 역사 속 사람들을 마음속 멘토로 소환한다.

그들의 실패, 선택, 후회, 용기, 비전.

그 모두가 오늘의 나에게 말을 건다.


이것이 역사는 쓸모다.(제목은 생각할수록 잘 지은 것 같다)

삶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오래된 도구이며,

우리가 오늘을 살아내기 위해 필요한 가장 인간적인 안내서다.



가볍게 읽기에도, 역사를 알려주고 싶은 이들에게도 꽤 괜찮은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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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2025-11-28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책 중에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대사를 재인용한 문구가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몇페이지인지 아실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