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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가의 밤
조수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2월
평점 :
나는 말라가에서 하루를 보낸 적이 있다. 사진을 돌이켜보니 2016년, 벌써 10년 전이다.
스페인 여행 때 론다라는 작은 마을에 들렀는데 오래된 투우 경기장이 있었다.
꽤 유명한 관광지라는 협곡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셨고 옆 테이블에 앉은 이가 여기가 '말라가'라고 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다. 이 말라가는 말라가 주의 이름이고 우리가 말라가라고 부르는 곳은 해변도시다)
말라가. 언젠가 해외축구에서 들어본 지명이다. 그곳은 따뜻했고 평온했다.
그 말라가라는 이름을 책에서 다시 만났을 때 묘한 설렘이 있었다.
<말라가의 밤>이라니. 얼마나 낭만적일까.
하지만 책을 펼치자 낭만은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어쩌면 사치, 반대로 살아남아야 느낄 수 있는 어떤 것이라는 뭔가 좀 복잡다단한 감정이 일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 형우는 생사의 경계에서 아홉 살, 열아홉, 스물아홉의 자신을 차례대로 만난다.
그 시절들은 모두 다정했고, 아팠고, 놓쳐버린 것이 많았다.
당시에는 사소했지만 지나고 난 이후에 생각하면 놓치지 말았어야 할 순간들.
그는 그 모든 장면을 다시 지나가며 문득 알게 된다.
사람을 잃는 일은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마음의 균열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동생의 질문을 허투루 넘겼던 날, 가족의 마음을 살피지 못한 날, 회사 일에 치여 누군가의 신호를 듣지 못한 날.
그 장면들은 형우의 삶에 뒤늦게 보내는 자막처럼 하나하나 떠오른다.
그리고 그 장면들 넘어 어쩌면 새로운 미래를 꿈꿀 수 있지 생각하게 된다.
구조되어 현실로 돌아온 형우는 자살 생존자들과 함께 프리다이빙을 한다.
물속이라는 공간은 이상할 만큼 위로가 된다.
숨을 참아야만 비로소 숨을 자각하게 되고, 깊이 내려가야만 결국 다시 올라올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운다.
프리다이빙은 죽음과 닮았지만, 동시에 완전히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
잠수는 사라지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살아남기 위해서 이기도 하다.
예전에 자살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자살로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들은 누구나 마음속에 결코 내려놓을 수 없는 돌덩이 하나를 품고 살아간다.
죄책감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내가 그때 어떻게 했으면 어땠을까'는 생각으로..
결코 사라지지 않는 어떤 것으로 남는다.
그리고 혼자서는 그 짐을 쉽게 내려놓을 수 없다.
프리다이빙에서 가장 중요한 건 호흡보다 함께 물속으로 내려갔다 떠오르는 버디라고 한다.
캄캄한 물 아래에서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는 사람.
그 안전한 거리 안에서만 사람은 비로소 숨을 다시 찾는다.
비단 자살생존자의 이야기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이와 비슷한, 결코 잊을 수 없는 상처를 가진 사람에게 회복은 화려한 기적이 아니다.
그저 아주 조용히, 아주 조금씩 다시 숨을 들이마시는 일이다.
프리다이빙에서는
숨이 쉬어지지 않는 날에는 억지로 숨을 몰아쉬기보다
누군가와 함께 잠시 숨을 참는 것이 더 나을 때가 있다고 말한다.
그렇게 버티고 나면, 언젠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올 수 있다는 믿음.
형우가 말라가의 바다에서 배운 건 바로 그 믿음이었다.
말라가의 밤에 낭만이 존재하는가?
글쎄. 살아 있는 이들이 숨을 이어가기 위해 필요한 단단하고 조용한 연대,
그리고 그 연대가 결국 한 사람이 다시 살아낼 용기를 만든다는 사실이 낭만이라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말라가의 밤.
언젠가 나도 그곳 해변을 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