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균열내기 - 뒤라스, 카뮈, 에르노를 지나 다만 내가 되기 위해
신유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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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앞에서 만나는 균열


좋은 서평을 쓴다는 건 무엇일까.

늘 고민하는데 쉽지 않다.

책을 읽으면서 부러웠다.


어떻게 하면 이런 글을 쓸 수 있을까.

아니 나도 어쩌면 이런 글을 계속 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과 함께.


나의 서평은 블로그 브런치 인스타 등에 올라간다.

이미 알고리즘이 지배해 버린 채널에서 선택받기 위해, 언젠가부터 내 글은 어느 정도의 모양을 포기한지 오래다.

그저 SEO에 걸리기 위해 GEO에 선택받기 위해 AI 선생님 가르침을 받고 내 글을 고친다.


이따금 현타가 올 때도 있다.

이게 맞나.

그러나 읽히지 않는 글은 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런저런 고민을 하던 중에 만난 글, 아니 이 책은 또 내 머리를 퉁치고야 말았다.

맞다. 이게 글이다.


일단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면 신유진의 <나를 균열내기>를 주저 없이 추천한다.


저자는 뒤라스의 감각과 욕망, 카뮈의 부조리와 실존, 에르노의 자기 해부와 기억의 서사 등 프랑스 작가들의 문장을 빌려 우리가 흔들리고 부서지고 다시 시작하는 삶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문학을 통해 일어나는 균열을 통해 자기 자신을 다시 세우는 여정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균열의 발견 – 고독과 부조리, 이름 없는 여백


첫 번째 장 <균열의 발견>은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감정들에 관한 이야기다. 고독, 상실, 공허함 같은 것들 말이다.


우리는 이런 감정을 만나면 빨리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저자는 오히려 그 안을 들여다보자고 말한다. 카뮈와 뒤라스의 작품 속 인물들은 삶의 부조리와 사랑의 실패를 피하지 않는다. 그들은 상처를 극복하기보다 그 안에서 자신을 바라본다.


저자는 이런 순간을 '균열'이라 부른다. 벽에 금이 가면 무너질 것 같지만, 때로는 그 틈으로 빛이 들어오기도 한다. 삶이 흔들리는 순간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원하는가 같은 질문들은 대개 평온한 시기가 아니라 균열의 순간에 시작된다.


결국 이 장은 고독과 상실을 실패가 아니라 자신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출발점으로 바라본다.



해체와 붕괴 – 언어와 계급, 몸의 기억


2부는 우리가 생각하는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복잡한지를 이야기한다.


저자는 여러 작가들의 삶과 작품을 통해 인간이 얼마나 복잡한 존재인지 말한다.

어린 시절의 기억, 계급의 경험, 사용하는 언어, 몸에 남은 상처와 습관은 모두 지금의 나를 만드는데 이것은 일관적이지 않다.

우리는 젠틀하면서도 비겁하고,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이렇게 여러 시간과 경험이 겹쳐진 우리는 무엇이라 정의하기 어렵다.


그런데 이것을 어떤 존재로 규정하게 될 때,

어린 시절 속했던 세계와 지금 살아가는 세계가 충돌할 때, 익숙했던 언어와 가치관이 흔들릴 때 우리는 혼란을 겪는다.

하지만 저자는 이 모든 순간을 실패가 아닌 자신을 다시 읽는 과정으로 바라본다.



유예의 순간 – 창작과 욕망, 실패의 미학


3부 <유예의 순간>은 쉽게 결론 내릴 수 없는 시간에 관한 이야기다.


삶에는 성공인지 실패인지, 끝난 것인지 아닌지 판단하기 어려운 순간들이 있다.

저자는 그런 시간을 유예라고 부른다.


쿤데라는 인간의 삶을 거창한 철학이나 신화가 아니라 작고 우스운 것들에서 다시 바라본다.

이를테면 배꼽 같은 것.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그 사소한 곳에서 오히려 인간의 근원을 묻는다.

슬리마니는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욕망과 진실을 보여준다. 불편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것들.

라가르스는 성공의 언어가 아니라 실패의 언어를 선택한다.


그의 인물들은 끝내 완벽하게 화해하지 못하고,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계속 어긋난다.

대신 실패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다시 말하고, 끝이 보이는데도 더 멀리 걸어간다.


저자는 그 모습에서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버팀을 발견한다.

그래서 이 장은 실패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 이후에도 멈추지 않는 삶의 태도를 이야기한다.



자아의 재구성 – 깨진 거울로 타자를 품다


마지막 4부는 흔들리고 부서진 이후 다시 자신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관한 이야기다.


저자는 인간이 처음부터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살아가며 끊임없이 변하고, 기억을 새롭게 해석하며, 타인을 만나면서 조금씩 다른 사람이 된다.


페렉은 우리가 매일 지나치는 사물들을 바라본다. 너무 평범해서 잘 보지 않았던 것들. 방, 거리, 물건, 목록 같은 것들 말이다.

그는 그런 사소한 것들을 통해 묻는다. 우리는 정말 우리가 가진 것들 속에서 더 선명해지고 있을까. 아니면 그 많은 것들에 파묻혀 오히려 흐려지고 있는 걸까.


엘렌 식수는 언어 속에 숨어 있는 남성 중심의 질서를 흔든다. 우리가 당연하게 써온 말들이 어쩌면 누군가를 배제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질문한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무언가를 더 많이 갖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불필요한 것들을 덜어내고, 나를 설명하던 낡은 말들을 내려놓는 것이다.



균열 속에서 다시 나를 쓰기


이렇듯 <나를 균열내기>는 문학을 통해 ‘나’라는 존재의 균열을 발견하고, 해체하고, 유예하고, 재구성하는 여정을 담은 에세이다.

작가는 한 사람이 끝내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무엇을 부수고 다시 세울 수 있는지 탐색하며, 세계의 틈을 보는 일이 곧 문학이라는 믿음을 펼친다.

살짝 아쉬운 점은 프랑스 사회를 배경으로 한 사례가 많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다소 거리감 있게 느껴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읽고 쓰는 일만이 나의 막을 부수고 나를 건져 올리는 일"이라는 이라며 이 일을 소개한다.

균열은 파괴가 아니라 가능성이며, 무너진 자아의 잔해 속에서 다른 삶은 시작된다.


어쩌면 좋은 서평을 쓰는 일 또한 그러할지도 모르겠다.

분절된 독서의 경험을 모아 글이라는 그릇에 담는 과정,

남들이 다 그렇다고 하는 것에 균열 내고 다시 만드는 일.


어렵지만 한 번 더 용기를 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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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 유어 마인드 - 반복되는 루틴에 가려진 내 안의 잠재력과 마주하는 법
마리오 알론소 푸이그 지음, 성소희 옮김 / 오픈도어북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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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해석을 바꾸라


이 책은 ‘세상은 내가 해석한 만큼 존재한다’는 전제로 시작한다.

우리는 눈으로 외부 사물을 인지하지만, 그 정보는 기억·감정·신념이라는 필터를 통과하면서 뇌가 재구성한 이미지로 변한다.

그래서 현실을 바꾸려면 외부를 통제하려는 것보다 내면의 해석 방식을 바꾸는 것이 실질적이다.


재미있는 점은 보통 내면을 바꾸는 일을 말하면서 마음가짐이나 자존감을 이야기하는데 저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뇌를 이야기한다.

몸이 감정에 앞선다. 철저하게 유물론적인 저자는 신경과학적 설명으로 이를 설득력 있게 뒷받침한다.


사실 이 부분이 문제다.

의학적 지식이 거의 없는 나와 아마 이 책을 읽는 모두는 이 부분이 조금 헷갈리고 어려울 것 같다.

마치 처음보는 의학서적을 보는 것 같은 초반부를 견뎌내는게 중요하다.



통합과 잠재력


책은 자기계발서라기 보다 아닌 과학적·실천적 안내서로 보는게 적합할 것 같다.

앞서 말한 조금 어려운 초반부를 지나면 책은 우리게 익숙한 언어(?)인 좌뇌와 우뇌를 안내한다.

두 가지 정신 시스템(논리적 좌뇌와 직관적 우뇌)사이에 갈등이 있으며 이를 조화롭게 균형 잡아야 잠재력을 온전히 활용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또 어린 시절 형성된 내적 서사와 언어가 사고를 제한하므로, 긍정적 언어로 이야기를 이를 다시 써야 한다고 말한다.

재미있는건 내가 읽은 꽤 많은 책에서 뇌과학이나 의학이 아닌 심리학을 연구한 이들 또한 같은 결론을 말한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뇌과학으로 시작한 저자 역시 성장 마인드셋을 강조하고, 명상·시각화·마음챙김과 같은 구체적 훈련이 두뇌 가소성을 활용해 습관을 재배선한다고 말한다.


저자가 진짜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아마도 ‘통합’과 ‘잠재력’이 아닐까 싶다.

책은 부모의 목소리와 내면 아이의 욕구가 반복적 고통을 생성한다고 지적하며, 이를 인식하고 통합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두뇌의 두 시스템, 즉 좌뇌와 우뇌가 서로 협력해야 하며 감정·언어·신체감각·관계 등 다양한 요소를 통합적으로 다뤄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좌뇌가 분석과 분리를 맡고 우뇌가 전체성과 깊이를 담당하며, 두 가지를 조율할 때 창조성과 치유가 일어난다고 설명한다.

이 균형과 통합이 마음의 운영체제를 리셋한다.



다른 시작 같은 결론


사실 잘 모르는 부분이라 함부로 언급하기 어렵지만 좌뇌·우뇌의 구분을 지나치게 단순화했다고 지적하는 부분도 있다.

뇌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두 뇌의 기능이 꼭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나뉘지 않는다는 연구도 있어 추후 이 부분은 추가 검증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또 현실의 문제는 사실 내면의 해석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과학으로 출발한 책의 결론이 결국 심리학이나 자기개발서적과 결론이 비슷한데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이 흥미로웠지만 누군가는 이게 어색하게 받아 들여질지도 모르겠다.



리셋 유어 마인드


《리셋 유어 마인드》는 뇌과학과 심리학, 경험적 통찰이 어우러진 책이다.

저자는 인간의 마음을 소프트웨어에 비유하며,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프로그램–부모 자아와 내면 아이–을 인식하고 새롭게 설치할 프로그램을 스스로 선택하라고 권한다.


그 과정에서 좌뇌와 우뇌, 본능과 감정, 이성과 직관이 서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협력하는 팀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거듭 강조한다.

T들이 읽으면 좋은 책이랄까.


결국 책은 내면의 운영체제를 재가동해 마음의 잡음을 줄이고 자기 삶의 화면을 다시 그리라고 설명하지만 F들 읽기에는 어려운 점이 분명있다.

하지만 뇌과학에 관심이 있거나, 우리의 몸이 익숙한 두려움에 안주하는 대신 어떻게 새로운 가능성에 뛰어들게 하는지 궁금하고 한번쯤 자신을 재정비하고 싶은 이들이라면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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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정상가족 - 자율적 개인과 열린 공동체를 그리며, 개정증보판
김희경 지음 / 동아시아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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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 울타리인가요?


가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따뜻함, 울타리, 공동체? 어른들과 미디어는 가족에 꽤 여러 이름을 붙였지만 어떤 이들에게 가족은 지옥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나는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한부모 가정에서 자랐다. 그리고 나의 어릴적, 인권감수성이란 개나 줘버리던 그 시절에는 대놓고 학교와 사회는 우리 집을 무엇이 하나 빠져있다는 뜻의 결손가정이라고 불렀고 이는 후에 한부모 가정으로 정정되었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우리집은 누군가에게 어디가 하나 부족한 집이었구나. 그렇다면 그 정상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 책 <이상한 정상가족>은 제목부터 그 '정상'이라는 단어를 묻는다.


책은 네 개의 장으로 나뉜다.


1부는 가정이 아이의 울타리가 아니라 부모가 아이를 소유물처럼 여기며 체벌과 방임, 일가족 동반 자살까지 다양한 폭력의 장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2부는 미혼모·한부모 가족이나 다문화 가정처럼 “비정상”으로 분류되는 가족들이 경험하는 차별과 제도적 배제를 짚는다.

3부는 누가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지 묻고 한국 사회가 아이들의 개별성을 인정하지 않는 가족주의의 폐해를 드러낸다.

4부는 공동체를 어떻게 바꿀지 대안을 찾는다 .


저자는 가족 안팎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모순을 아이의 시선으로 드러내며, 가족이라는 이름의 안락한 울타리 뒤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직시하게 만든다. 그리고 묻는다. 당신의 가족은 정상가족인가?



사랑의 매와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


공교롭게도 최근 <참교육>이라는 드라마가 대유행하며 사랑의 매에 대한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한다.

학교가 아니라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매’라는 이름의 폭력이 정당화되는 방식말이다.


국내 아동학대의 80% 이상이 가족 내에서 발생한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결코 가족이 아이의 안전지대라고만 말할 수 없다.

저자는 폭력과 사랑을 연결하는 표현 자체가 위험하며, 체벌은 아이들에게 “나는 언제든 당신을 통제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심어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 메세지는 지금은 맞는 입장의 아이들이지만 언제든 통제권을 행사할 때 때리는 아이로 바뀔수 있다는 점도 우리에게 경고한다.


“한 사회가 아이들을 다루는 방식보다 더 그 사회의 영혼을 정확하게 드러내는 것은 없다”고 한다.

한 사회의 성숙도를 측정하는 기준으로 이 기준을 꼽기도 한다.


맞다. 아이들은 작은 인간이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

체벌을 금지하고 아이의 의견을 존중하는 스웨덴 사례는 우리 사회에도 시사점이 크다 .



제도는 변했지만 여전히 부족한 것들


개정증보판인 이 책은 초판 출간 이후 실제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한다.

보편적 아동수당 도입, 징계권 조항 삭제, 입양 절차의 공공화, 한부모 가정에 대한 지원 확대, 부양의무제 폐지 등이 그 예다.


덕분에 미혼모·한부모 가족도 경제적 지원을 받을 수 있고, 친권은 권리가 아닌 의무라는 인식이 조금씩 자리를 잡았다.

저자는 삶은 개인주의적으로, 해법은 집단주의적으로라고 말하며 집단적 돌봄과 공공지원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아동을 돕는 NGO에서 일하는 나 역시 이런 변화들을 환영한다.


그러나 여전히 아이들이 학대당해 숨지는 사건이 반복되고, 해외 입양이 계속되며, 출생 등록제 같은 기본 제도가 미완성인 현실을 보면 갈 길이 멀다.

제도가 만들어지는 속도보다 인식의 변화가 더디다는 점이 현장에서 더 크게 느껴진다.



정치와 정부가 해결하지 못하는 것들


책이 제기하는 문제의식에 동의하면서도 아쉬움도 남는다.

아이를 중심에 두고 '국가 vs 가족' 구도로 논의가 흘러가게 두면 결국 해결되지 못하는 숙제만 쌓이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돌아간다.


모든 문제는 정치와 큰 정부의 개입으로 해결할 수 없다.

기존 제도나 공동체의 장점을 어떻게 계승하고 더 크게 만들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함께 고민되면 좋겠다.


사실 현장에서 있는 사람으로 법과 정책은 필요하지만 만능 해결책은 아니다.

부모 교육과 지역 공동체, 기업문화 개선(육아휴직 및 다양한 제도의 활용) 등 다양한 길이 함께 모색되어야 한다.


복잡한 현실을 다루는 책일수록 여러 목소리를 담아 균형을 잡는 것이 중요한데 이런 부분에서의 언급이 없다는 점이 좀 아쉬웠다.



함께 돌보는 공동체를 꿈꾸며


이 책은 한국 사회를 옥죄는 가족주의를 비판하며, 아이가 존중받는 공동체를 상상하도록 만든다.

미혼모가 편견 없이 아이를 키우고, 입양을 기다리는 아이들이 국내에서 가정을 찾으며, 학교·직장이 육아를 공공의 과제로 받아들이는 사회를 꿈꾸게 한다.


익숙한 프레임 속에서 가정이란 상자를 조금만 비틀어 보면 그 안에 갇혀 있던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책은 그 목소리를 들려주고, 우리는 그 울림에 어떻게 응답할지 고민하게 한다.


이런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면 <이상한 정상가족>은 꽤 괜찮은 길잡이가 될지도 모르겠다.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있는가?

책이 묻는 그것이 과연 진짜 정상인지에 대해 한번쯤 고민해보자.


그리고 조금 더 괜찮은 세상을 꿈꿔보자.

우리 모두가 더 넓은 ‘가족’을 꿈꾸기 시작할 때 그때 변화는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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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한 죽음이라는 환상 - 고통 없이, 내 뜻대로, 존엄하게 죽는 일은 가능한가
박혜윤.신성준.최은경 지음 / 아몬드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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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중과 상연


넷플릭스 드라마 <은중과 상연>의 마지막 장면.

암에 걸린 상연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마무리하기 위해 스위스로 떠난다.

엄마처럼 병원에서 고통받다가 죽고 싶지 않다. 자신의 죽음만은 스스로 선택하고 싶다.며 그는 별 고민 없이 죽음을 선택한다.

그리고 평생 친구이자 라이벌이자 미워하는 사람이었던 은중을 향한 애정과 질투 그리고 미안함,

그 모든 복합적인 감정을 가지도 두 친구는 삶의 마지막을 함께한다.

그 마지막이 하얀 병실이 아니라 스위스여서 어쩌면 다행이다 싶었다.


그리고 이런 콘텐츠의 범람은 아제 스위스행으로 통칭되는 조력 죽음이 생각보다 우리 곁에 가까이 왔으며,

그리고 그 선택의 기로에 우리도 설 수 있음을 알려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 책은 묻는다.

정말 ‘깨끗한 죽음’이 존재하는가?


<깨끗한 죽음이라는 환상>은 이 질문을 가지고

우리 사회가 안락사나 조력 임종을 논의할 때 어떤 현실과 감정에 빠져있는지,

그리고 반대로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를 논박한다.



세 사람이 그린 조력 임종의 지도


책은 정신과 전문의 박혜윤, 신장내과 전문의 신성준, 의료인문학 교수 최은경, 세 사람이 함께 썼다.

암 병동에서 환자와 가족의 고통을 돌보고, 말기 환자의 치료 거부와 연명의료 문제를 연구하며, 의료 역사와 윤리를 가르쳐 온 경험이 책 곳곳에 녹아 있다.


이들은 먼저 이 이슈의 이름부터 정의한다.

‘안락사’, ‘존엄사’, ‘조력자살’, ‘의사 조력 임종’ 등 용어에 따라 행위의 윤리적 무게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는 오랜 논쟁 끝에 의사 조력 임종이 합법화됐지만, 한국과 일본은 이 논란이 개인은 가족이 돌보아야 한다는 사회질서 안에서 아직도 윤리적 논쟁에 갇혀 있다.


이렇듯 윤리가 논쟁에 들어가면 자칫 찬성과 반대라는 흑백논리에 갇히기 쉽다.

그럼에도 이들은 최대한 감정을 배제한 채 조력 임종을 둘러싼 언어와 제도, 그리고 한국의 말기 돌봄 현실을 세밀하게 해부한다.

(이렇게 흑과 백이 뚜렷한 논쟁은 처음에는 건설적으로 시작했다 보통 감정싸움으로 끝난다 ㅠ)



돌봄의 공백 속에 피어나는 절망


책의 두 번째 파트는 왜 많은 이들이 스위스를 꿈꾸는지 해부한다.


한국인은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고 한다

일부 호스피스와 완화의료라는 제도가 있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 제도를 누리지 못한다.


암 말기 환자와 가족이 겪는 경제적 부담, 간병과 돌봄의 고립은 사회적으로도 심각한 문제이며

이 시간이 쌓이면 환자의 뜻과 무관한 연명치료를 환자와 가족 모두 중단하고 싶다고 속으로만 삭이게 된다.

(환자도 가족도 누구도 이 이 이야기를 함부로 입 밖으로 낼 순 없다)


서두에 언급한 상연의 고민도 이와 마찬가지다.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은 삶을 스스로 끝낼 권리.


이 조력 임종에 대한 논의는 서구에서 의사들이 주도해 진행한 것과 달리 아직 한국에서는 제대로 된 논의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뿌리 깊은 가부장제, 가족 돌봄이 우선시 되는 사회적 분위기 아래

가족에게는 가족(환자)을 포기한다는 윤리적으로 용납 받기 어려운 이유와 함께

환자는 자살을 선택한다는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이런 배경 아래 아주 가끔 경제적 이유로 인한 가족 간 살해 사건이 발생하는 등 여러 사건들이 일어나고 한동안 사회문제가 되기도 한다.


어쩌면 제대로 된 안락사 논쟁은 아직까지 시기상조인지도 모르겠다.


이와 별개로 조력 임종 제도가 도입될 경우 위에서 언급한 경제적으로 취약한 이들이

이제는 ‘살아야 할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 역설에 빠질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저자들은 돌봄과 의료 인프라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채 조력 임종을 허용하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사회적 폭력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자기결정권, 고통, 존엄


세 번째 파트는 조력 임종을 옹호하는 주된 논거인 자기결정권, 고통, 존엄을 차례로 살핀다.


자기결정권은 우리의 본능적 공감을 얻지만, 임종 과정에서 사실 ‘온전한 자기결정’이란 존재하기 어렵다고 저자는 말한다.

환자가 결정권을 행사하려면 의료인과 가족의 도움이 필요하고, 그 과정에서 권력관계와 부담이 작용한다.

고통 역시 신체적 통증뿐 아니라 우울과 상실감, 돌봄의 부재가 얽혀 있어 어떤 기준을 세우기도 어렵다.


‘존엄’이라는 말은 지지 진영과 반대 진영에서 서로 다른 의미로 쓰이기도 하고, 때로는 논의를 흐리는 수사학이 된다.

*이를테면 조력 임종을 찬성하는 측의 존엄은 '내 삶의 결정권은 내게 있다'는 걸 강조하지만

반대하는 측의 존엄은 '돌봄 받더라도 똑같은 인간이다' 즉 인간은 인간을 해칠 수 없다는 인간 존재의 가치를 말한다.


세 저자는 이렇게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들을 던지며, 죽음을 향한 욕망 안에 삶에 대한 갈망과 절망이 함께 있음을 보여준다.



깨끗한 죽음은 존재하는가


저자는 논문의 형식을 빌어 네덜란드, 캐나다, 일본, 미국, 스위스 등 여러 나라의 법적 사례를 탐구하며, 제도의 도입 과정과 부작용 또한 기록한다.


합법화 이후 대상이 정신질환자까지 확대된 캐나다의 논란,

나고야 판결 이후에도 모호한 경계를 넘지 못한 일본의 상황,

음 관광으로 변질된 스위스의 현실 등을 들여다보며,

어쩌면 제도만으로는 죽음의 문제를 풀 수 없음을 강조한다.


만약 은중과 상연을 만난다면 나는 상연에게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가?


아직은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우리는 언젠가 죽음을 맞이해야 하며 '어떻게 죽을지' 결정해야만 한다.

그리고 같은 단어로 자의든 타의든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묻는다.


깨끗한 죽음이 과연 존재하는가?

그에 대한 대답은 각자가 내릴 일이긴 하다.


질문은 꽤 묵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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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의 무용수 - 인생은 언제나 다시 선택할 수 있다
에디트 에바 에거 지음, 안진희 옮김 / 북모먼트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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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네의 집


암스테르담에는 <안네의 일기>의 무대가 된 안네가 살던 집이 있다.

원래 계획에는 없었지만 갑자기 알게 곳에 꼭 가보고 싶었던 그곳은 관광지임에도 불구하고 음산했다.

좁은 계단과 숨 막히는 다락방, 마치 빛을 들이지 않으려는 것 같은 작은 창.

뭐랄까. 감옥이 있다면 이렇겠구나 싶기도 했다.


나는 늘 이런 곳에서 끝내 돌아오지 못한 아이의 이야기보다, 이곳을 벗어나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전쟁 생존자들은 전후 누군가에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영웅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것보다 그들이 홀로코스트의 그 끔찍한 기억을 이겨내기까지의 길은 얼마나 길고 외로웠을까.

나는 늘 이런데 감정이입이 되곤 한다.


이 책 <아우슈비츠의 무용수>은 그 이야기다.

살아남은 사람의 이야기.

어떻게 고통받았고 어떻게 살아남았으며 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이야기를 저자는 우리에게 들려준다.


그녀는 16세 발레리나로 아우슈비츠에 끌려가 부모와 헤어지고 악명 높은 멩겔레 앞에서 춤을 추어야 했다고 기록한다.

그리고 그 지옥에서 도망 나올 때는 시체 더미 속에서 기적처럼 살아 나왔노라 회상한다.

그리고 나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으로 평생을 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저자는 그것이 힘들었다, 혹은 그곳을 고발한다며 이 책을 쓰지 않았다.

상처 그 너머의 이야기.

그녀가 전하는 위대한 회복의 이야기다.



상처 입은 치유자


책은 저자의 어린 시절부터 수용소 생활, 전후 미국 이민까지를 섬세하게 들려준다.

하루아침에 자유를 빼앗긴 수용소에서 그녀는 "마음속에 넣은 것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다"는 어머니의 말로 하루를 버틴다.


굶주림과 폭력 속에서 그녀는 동료를 위로하고, 동생을 돌봤으며, 심지어 죽음의 의사가 요구하는 춤까지 추어야 했다.

이러한 삶은 트라우마로 남아 전후에도 그녀의 몸과 마음을 여전히 감옥에 가둬 놓았다.


그녀는 이 해결되지 않은 상처들을 안고 살아간다.

그리고 심리학자가 된다.

이후 그녀는 내담자들을 치료하며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해결되지 않은 상처와 아직 꺼내오지 못한 감옥 속의 영혼들을 치유하며 그녀는 삶을 이어간다.


이 책은 그 치료의 기록이기도 하다.



마음속 감옥


그녀는 누구의 상처도 사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우리가 겪는 고통을 서로 비교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사실 가장 상처받은 사람, 전쟁이라는 국가가 벌이는 범죄에 가장 큰 피해를 받은 아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억울하고 자신의 상처를 내보일법한데 그녀는 그러지 않는다.

모두의 상처를 그녀는 가만히 끌어안는다.


돌이켜보라.

우리 또한 각자의 상처가 있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혹은 가족이나 친구와의 관계에서.

그리고 우리는 그 상처를 내보이며 자꾸만 남의 상처와 비교하며 '내가 더 아프다'고 말한다.


그런 우리에게 그녀는 말한다.


'우리가 처한 조건이 인생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조건에 대한 선택이 인생을 좌우한다'


이는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결론과도 결을 같이 한다.


상황을 선택할 수 없을 때도 태도는 선택할 수 있다.

과거를 부정하거나 억누르는 대신 고통을 직면하고 스스로를 용서하며 한 걸음씩 나아가라.


우리는 가해자에게 용서받으면 무언가 해결될 거라고 믿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는 말한다.

당신의 마음의 감옥을 연다는 것은.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이라기보다 더 이상 이런 과거의 상처에 끌려다니지 않겠다는 선언이라고.

그 감옥을 여는 열쇠는 타인이 아니라 자신의 그 그 선언에서 시작한다고.



당신은 또 다른 감옥을 택할 것인가


꽤 긴 책을 읽으며, 안네의 집에서 바라본 그 컴컴한 작은 창문이 다시 떠올랐다.


불행하게도 다시는 전쟁이 없을 것 같은 21세기에도 우리는 전쟁의 소문을 듣는다.

그리고 그 전쟁의 포화속에 또 다른 아우슈비츠에 사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해방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는 마음속에 아우슈비츠를 만들고 자신을 가두는 일들을 반복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말한다.


"우리 모두는 이 일에 가해자가 될 수도, 다정한 해방자가 될 수도 있다."


선택은 온전히 당신의 몫이다.

나는 우리도 해방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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