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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말로 사랑할 시간 - 분열의 시대에 도착한 새 교황, 레오 14세
크리스토퍼 화이트 지음, 방종우 옮김 / 한겨레출판 / 2025년 12월
평점 :
사실 가톨릭에 대해 잘 모른다. 관심은 있는데 개신교여서인지 괜스레 가톨릭은 조금 멀다.
그런데 새 교황의 선출에 관련된 책을 집어 들었다. <지금이야말로 사랑할 시간>이라는 제목이 이상하게 오늘의 세상과 겹친다.
선종하신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 당시 유가족들에게 전해 받은 세월호 리본을 교황이 달자 기자들이 물었다.
"그 리본은 정치적 중립을 해칠 수 있습니다."
교황의 답은 이랬다.
"저는 인간의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교황은 어떤 사람일까? 그때부터 그들의 이야기가 사뭇 궁금해지기도 했다.
1. 프란치스코, 소외된 이들 앞에 멈추어 선 사람
책의 1부는 이 프란치스코라는 인물이 걸어온 길을 천천히 조명한다.
그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한 가지가 분명해진다. 그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같은 방향을 바라본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그 방향은 중심이 아니라 늘 주변의 소외된 이들이었다.
미혼모가 쓴 기사를 읽고 직접 전화를 걸어 위로하던 장면도,
성소수자에게 "제가 감히 어떻게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던 순간도,
모두 같은 길 위에 놓인 경험들이다.
진보와 보수로 갈라진 세상에 어떤 편에 속한 이들은 이 모든 행동을 정치적 제스처라 말하지만, 책은 그 이면에 있는 그의 삶의 결을 보여준다.
그가 선택한 교황명 '프란치스코'는 가난과 겸손의 이름이었고, 그 선택은 그저 그의 삶과 같았다.
책의 몇몇 에피소드로나마 그의 삶을 들여다볼 뿐이지만 그는 꽤 자주 멈추었던 사람 같다.
함부로 말하지 않았고, 깊게 고민하고 행동했다.
전 세계에 그를 필요로 하는 이들이 그렇게 많음에도 그는 사람 앞에 효율을 내세우지 않았다.
어쩌면 누군가의 고통 앞에 선다는 건 먼저 멈춰 서는 일에서 시작할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의 어두운 시간을 잠시 함께 견디는 일.
그리고 보니 늘 짜여진 시간표대로 살아가는 내 삶은 언제 저 시간을 내어놓았던가.
2. 시스티나 성당의 문이 닫히는 순간, 콘클라베
분명 12년 전에도 콘클라베는 TV에 나왔을 터인데 지난해 콘클라베는 유독 관심 있게 본 것 같다.
전 세계의 133명의 추기경들이 모여 교황의 취임을 논의한다.
교황이 선출되면 바티칸에 두 번의 검은 연기 이후 흰 연기가 피어오른다.
마치 오래된 성당의 문틈 사이로 역사가 흘러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저자는 실제 규정과 기자로서의 경험을 함께 엮어, 우리가 결코 볼 수 없는 그 내부를 묘사한다.
그곳에는 아마도 '누가 교황이 될 것인지'보다 세상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오래된 논의가 있었을 것이다.
프란치스코의 개혁을 더 이어가야 하는가,
아니면 전통적 질서를 다시 중심에 세워야 하는가,
교회의 미래는 다양성인가, 일치인가.
할 수만 있다면 그들이 논의하는 테이블 밑에 납작 엎드려서라도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선출된 교황이 왜 이렇게 많은 의미를 가지게 되는지 생각했다.
결국 리더십으로 향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리더는 그 결정을 위임받고 그들의 이야기가 오래도록 이어지는 방향을 만들어 간다.
3. 레오 14세, 다리를 놓는 사람
하베무스 파팜!(우리에게 교황이 있다)
교황이 선출되면 사람들이 외치는 라틴어다.
책의 마지막은 이 시대의 새로운 교황, 레오 14세를 탐색한다.
그는 첫 미국인 교황이지만 동시에 페루에서 긴 시간을 보낸 사람이다.
행정가이면서도 사목자이고, 중심에 있으면서도 주변을 알고, 특권의 세계와 가난의 세계를 모두 지나온 사람이라는 평가다.
저자는 그를 '다리를 놓는 사람'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 표현이야말로 이 시대의 교황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정체성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분열의 시대.
정치와 문화, 세대와 세계관이 끝없이 갈라지는 시대.
레오 14세의 첫 메시지다.
"형제자매 여러분, 지금이야말로 사랑할 시간입니다"
페루의 골목에서 배운 연대,
시카고 남부에서 겪은 다양성,
바티칸 행정 속에서 배운 절제와 균형.
아마도 그는 삶의 모든 조각들이 이어 붙여 다시 우리가 '사랑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노력할 것이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너무 쉽게 조롱당하는 시대다.
하지만 결국 우리가 잃어버린 것도,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도 사랑이다.
책은 프란치스코라는 한 사람이 살아낸 사랑의 방식,
세상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물었던 콘클라베의 밤,
그리고 레오 14세라는 새 이름이 보여주는 희망을 통해
우리에게 다시 묻는다.
"지금이야말로 사랑할 시간이라는 말에, 당신은 어떤 얼굴을 떠올립니까?"
공부, 성장, 효율, 돈, 자동화, AI 같은 단어들이 우리를 지배하는 시대에
당신은 오늘 하루 얼마나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살아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