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도시 2026 - 소음 속에서 정보를 걸러 내는 해
김시덕 지음 / 열린책들 / 2025년 12월
평점 :
예약주문


도시에 관한 책이라고 해서 도시의 역사와 현재를 아우르는 인문학 책이라고 생각하고 사실 조금 기대한 면이 있었는데 막상 책은 도시의 과거보다 미래를 이야기하는 책이다. 더 정확히는 도시의 성장 전략, 정책 변화, 산업과 인구가 만들어내는 구조, 그리고 그 구조가 예측하게 만드는 도시의 흐름을 다룬 책이다. 사실 이런 쪽으로는 거의 문외한이다 싶은데 김시덕의 <한국도시 2026>은 지금 한국 도시를 흔들고 있는 여러 신호 속에서 무엇을 우선적으로 봐야 하는지를 조금은 확인할 수 있었다.



도시를 읽는 기본 틀 : 선거·국제정세·인구·교통


책의 1부는 도시를 읽는 데 필요한 네 가지 축을 빠르게 정리한다.

2025 대선과 2026 지방선거 사이에서 쏟아지는 개발 공약, 국제정세와 기후 변화가 만들어내는 외부 압력, 인구와 산업 재편이 가져오는 구조적 변화, 그리고 교통망 구축이라는 현실적 제약.

이 네 축은 도시의 미래를 알아맞히기 위한 예측 도구라기보다는, 뉴스와 공약에 휩쓸리지 않고 도시를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시선에 가깝다. 선거 공약은 빠르게 소음이 되고, 국제정세는 산업의 무게중심을 계속 바꾸어 가고, 인구와 산업은 도시의 체력을 결정하며, 교통은 도시의 속도를 조정하는 요소다. 책은 이 네 가지 기준을 통해 도시를 해석할 때 무엇부터 봐야 하는지를 가볍지만 정확하게 안내한다. 그리고 이 기준에 맞추어 우리나라의 권역들을 소개한다. 그는 특정 지역을 낙관하거나 경계하려기 보다 그 지역을 움직이는 '힘이 어디에서 오는가'를 찾고 보여준다.



대서울권: 강한 축과 약한 축이 드러나는 자리


확장 강남은 여전히 견고할 수밖에 없다. 반도체와 지식 산업 중심의 고밀도 일자리, 인구 유입이 지속되는 구조, 교통망 우선순위가 강남을 중심으로 다시 배치되는 현실 등이 대한민국의 발전은 모두 서울을 가리킨다. 여기에 선거때마다 이슈로 떠오르는 김포·고양의 서울 편입 논란이나 GTX-D 요구가 반복적으로 벽에 부딪히는 이유, 경기 북부와 서해안 개발 테마가 장기적으로 힘을 얻기 어려운 이유 역시 그는 나름의 근거로 설명한다.



동남권: 국제정세와 산업 재편이 만들어낸 새로운 중심


'노인과 바다'라는 별명을 가진 부산·울산·경남이 국제정세 변화와 산업 재편 속에서 어떻게 다시 중심축으로 떠오르는 과정을 책은 보여준다. 방위산업과 조선업의 회복, 글로벌 공급망 이동이 이 지역의 장기적 성장성을 뒷받침할 것이고 이 지역들이 쉽게 무너지지 않음을 책은 구조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가덕도 신공항 추진처럼 여전히 해결해야 할 기술적·행정적 난관도 존재하지만 도시의 가능성과 한계를 그는 꽤 균형 있게 읽어 내려간다.



중부권: 수도 기능의 이동이 만들어내는 변화


선거때마다 행정수도 관련 가장 뜨거운 지역이다. 세종과 충청권을 다루는 부분은 한국 도시의 힘이 재배치되는 모습을 가장 잘 보여준다. KTX 세종역 논의, 행정수도 논쟁, 2차 공공기관 이전처럼 익숙한 이슈들이 사실은 이 지역의 위상을 크게 바꾸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조목조목 짚어낸다. 수도권 집중이 완화되는 과정에서 중부권이 어떤 교차점 역할을 하고 있는지, 산업과 인구 흐름이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 책은 차분하게 설명한다.



이 밖의 전국 소권 분석


이 밖에 책은 '대구 구미 김천 소권', '동부 내력 소권', '동해안 소권', '전북 서부 소권', '전남 서부 소권', '제주 소권'을 차례로 설명한다.

각 지역마다 당면한 과제와 이슈가 다르지만 결국 지방이라는 이름으로 관통하는 공통 패턴을 보여주고, 지역별로 산업 기반이 어떻게 이동하는지, 인구가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는지, 교통망 구축이 실제로 그 지역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속도를 가지는지 등을 알려준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성장하는 도시의 패턴과 반짝 테마로 그치는 도시의 패턴을 구별하게 된다.

사실 이런 식으로 지역 설명이 길어지는 책들은 전체가 산만해지곤 하는데 이 책은 같은 기준으로 전국을 읽으며 도시를 판단하는 기준이 명확하지는 느낌이다.



예측의 책이 아니라 해석의 기준을 주는 책


<한국도시 2026>은 어느 지역이 뜨는지, 어떤 지역이 떨어지는지를 가르쳐 주는 예측서는 아니다. 장기적 신호와 단기적 소음을 구별하고, 공약보다 구조를 먼저 읽는 법을 통해 도시를 바라보는 해석의 기준을 독자에게 심어주는 책이다.

사실 지역이라고 하면 역사와 감성을 먼저 떠올리던 내게는 도시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시야를 열어준 책이었다.

부동산에 관심이 있거나 한국 도시의 미래를 알고 싶은 독자뿐 아니라, 도시 뉴스를 해석하고 싶은 분들께도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금이야말로 사랑할 시간 - 분열의 시대에 도착한 새 교황, 레오 14세
크리스토퍼 화이트 지음, 방종우 옮김 / 한겨레출판 / 202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실 가톨릭에 대해 잘 모른다. 관심은 있는데 개신교여서인지 괜스레 가톨릭은 조금 멀다.

그런데 새 교황의 선출에 관련된 책을 집어 들었다. <지금이야말로 사랑할 시간>이라는 제목이 이상하게 오늘의 세상과 겹친다.

선종하신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 당시 유가족들에게 전해 받은 세월호 리본을 교황이 달자 기자들이 물었다.


"그 리본은 정치적 중립을 해칠 수 있습니다."

교황의 답은 이랬다.


"저는 인간의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교황은 어떤 사람일까? 그때부터 그들의 이야기가 사뭇 궁금해지기도 했다.


1. 프란치스코, 소외된 이들 앞에 멈추어 선 사람


책의 1부는 이 프란치스코라는 인물이 걸어온 길을 천천히 조명한다.

그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한 가지가 분명해진다. 그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같은 방향을 바라본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그 방향은 중심이 아니라 늘 주변의 소외된 이들이었다.


미혼모가 쓴 기사를 읽고 직접 전화를 걸어 위로하던 장면도,

성소수자에게 "제가 감히 어떻게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던 순간도,

모두 같은 길 위에 놓인 경험들이다.

진보와 보수로 갈라진 세상에 어떤 편에 속한 이들은 이 모든 행동을 정치적 제스처라 말하지만, 책은 그 이면에 있는 그의 삶의 결을 보여준다.

그가 선택한 교황명 '프란치스코'는 가난과 겸손의 이름이었고, 그 선택은 그저 그의 삶과 같았다.


책의 몇몇 에피소드로나마 그의 삶을 들여다볼 뿐이지만 그는 꽤 자주 멈추었던 사람 같다.

함부로 말하지 않았고, 깊게 고민하고 행동했다.

전 세계에 그를 필요로 하는 이들이 그렇게 많음에도 그는 사람 앞에 효율을 내세우지 않았다.

어쩌면 누군가의 고통 앞에 선다는 건 먼저 멈춰 서는 일에서 시작할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의 어두운 시간을 잠시 함께 견디는 일.

그리고 보니 늘 짜여진 시간표대로 살아가는 내 삶은 언제 저 시간을 내어놓았던가.



2. 시스티나 성당의 문이 닫히는 순간, 콘클라베


분명 12년 전에도 콘클라베는 TV에 나왔을 터인데 지난해 콘클라베는 유독 관심 있게 본 것 같다.

전 세계의 133명의 추기경들이 모여 교황의 취임을 논의한다.

교황이 선출되면 바티칸에 두 번의 검은 연기 이후 흰 연기가 피어오른다.

마치 오래된 성당의 문틈 사이로 역사가 흘러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저자는 실제 규정과 기자로서의 경험을 함께 엮어, 우리가 결코 볼 수 없는 그 내부를 묘사한다.

그곳에는 아마도 '누가 교황이 될 것인지'보다 세상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오래된 논의가 있었을 것이다.


프란치스코의 개혁을 더 이어가야 하는가,

아니면 전통적 질서를 다시 중심에 세워야 하는가,

교회의 미래는 다양성인가, 일치인가.


할 수만 있다면 그들이 논의하는 테이블 밑에 납작 엎드려서라도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선출된 교황이 왜 이렇게 많은 의미를 가지게 되는지 생각했다.


결국 리더십으로 향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리더는 그 결정을 위임받고 그들의 이야기가 오래도록 이어지는 방향을 만들어 간다.



3. 레오 14세, 다리를 놓는 사람


하베무스 파팜!(우리에게 교황이 있다)

교황이 선출되면 사람들이 외치는 라틴어다.


책의 마지막은 이 시대의 새로운 교황, 레오 14세를 탐색한다.

그는 첫 미국인 교황이지만 동시에 페루에서 긴 시간을 보낸 사람이다.

행정가이면서도 사목자이고, 중심에 있으면서도 주변을 알고, 특권의 세계와 가난의 세계를 모두 지나온 사람이라는 평가다.


저자는 그를 '다리를 놓는 사람'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 표현이야말로 이 시대의 교황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정체성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분열의 시대.

정치와 문화, 세대와 세계관이 끝없이 갈라지는 시대.

레오 14세의 첫 메시지다.


"형제자매 여러분, 지금이야말로 사랑할 시간입니다"


페루의 골목에서 배운 연대,

시카고 남부에서 겪은 다양성,

바티칸 행정 속에서 배운 절제와 균형.

아마도 그는 삶의 모든 조각들이 이어 붙여 다시 우리가 '사랑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노력할 것이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너무 쉽게 조롱당하는 시대다.

하지만 결국 우리가 잃어버린 것도,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도 사랑이다.



책은 프란치스코라는 한 사람이 살아낸 사랑의 방식,

세상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물었던 콘클라베의 밤,

그리고 레오 14세라는 새 이름이 보여주는 희망을 통해

우리에게 다시 묻는다.


"지금이야말로 사랑할 시간이라는 말에, 당신은 어떤 얼굴을 떠올립니까?"


공부, 성장, 효율, 돈, 자동화, AI 같은 단어들이 우리를 지배하는 시대에

당신은 오늘 하루 얼마나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살아가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말라가의 밤
조수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말라가에서 하루를 보낸 적이 있다. 사진을 돌이켜보니 2016년, 벌써 10년 전이다.

스페인 여행 때 론다라는 작은 마을에 들렀는데 오래된 투우 경기장이 있었다.

꽤 유명한 관광지라는 협곡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셨고 옆 테이블에 앉은 이가 여기가 '말라가'라고 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다. 이 말라가는 말라가 주의 이름이고 우리가 말라가라고 부르는 곳은 해변도시다)

말라가. 언젠가 해외축구에서 들어본 지명이다. 그곳은 따뜻했고 평온했다.


그 말라가라는 이름을 책에서 다시 만났을 때 묘한 설렘이 있었다.

<말라가의 밤>이라니. 얼마나 낭만적일까.

하지만 책을 펼치자 낭만은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어쩌면 사치, 반대로 살아남아야 느낄 수 있는 어떤 것이라는 뭔가 좀 복잡다단한 감정이 일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 형우는 생사의 경계에서 아홉 살, 열아홉, 스물아홉의 자신을 차례대로 만난다.

그 시절들은 모두 다정했고, 아팠고, 놓쳐버린 것이 많았다.

당시에는 사소했지만 지나고 난 이후에 생각하면 놓치지 말았어야 할 순간들.

그는 그 모든 장면을 다시 지나가며 문득 알게 된다.

사람을 잃는 일은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마음의 균열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동생의 질문을 허투루 넘겼던 날, 가족의 마음을 살피지 못한 날, 회사 일에 치여 누군가의 신호를 듣지 못한 날.

그 장면들은 형우의 삶에 뒤늦게 보내는 자막처럼 하나하나 떠오른다.

그리고 그 장면들 넘어 어쩌면 새로운 미래를 꿈꿀 수 있지 생각하게 된다.


구조되어 현실로 돌아온 형우는 자살 생존자들과 함께 프리다이빙을 한다.

물속이라는 공간은 이상할 만큼 위로가 된다.

숨을 참아야만 비로소 숨을 자각하게 되고, 깊이 내려가야만 결국 다시 올라올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운다.

프리다이빙은 죽음과 닮았지만, 동시에 완전히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

잠수는 사라지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살아남기 위해서 이기도 하다.


예전에 자살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자살로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들은 누구나 마음속에 결코 내려놓을 수 없는 돌덩이 하나를 품고 살아간다.

죄책감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내가 그때 어떻게 했으면 어땠을까'는 생각으로..

결코 사라지지 않는 어떤 것으로 남는다.

그리고 혼자서는 그 짐을 쉽게 내려놓을 수 없다.


프리다이빙에서 가장 중요한 건 호흡보다 함께 물속으로 내려갔다 떠오르는 버디라고 한다.

캄캄한 물 아래에서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는 사람.

그 안전한 거리 안에서만 사람은 비로소 숨을 다시 찾는다.


비단 자살생존자의 이야기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이와 비슷한, 결코 잊을 수 없는 상처를 가진 사람에게 회복은 화려한 기적이 아니다.


그저 아주 조용히, 아주 조금씩 다시 숨을 들이마시는 일이다.

프리다이빙에서는

숨이 쉬어지지 않는 날에는 억지로 숨을 몰아쉬기보다

누군가와 함께 잠시 숨을 참는 것이 더 나을 때가 있다고 말한다.


그렇게 버티고 나면, 언젠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올 수 있다는 믿음.

형우가 말라가의 바다에서 배운 건 바로 그 믿음이었다.


말라가의 밤에 낭만이 존재하는가?

글쎄. 살아 있는 이들이 숨을 이어가기 위해 필요한 단단하고 조용한 연대,

그리고 그 연대가 결국 한 사람이 다시 살아낼 용기를 만든다는 사실이 낭만이라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말라가의 밤.

언젠가 나도 그곳 해변을 보고 싶어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헌 옷 추적기 - 당신이 버린 옷의 최후
박준용.손고운.조윤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프리카에서 만난 뜻밖의 장면 중 저 옷이 왜 여기?? 했던 장면이 있다. 2002년 한국을 휩쓴 Be the Reds 티셔츠 그리고 이회창 대통령이라고 쓰인 옷(그는 대통령이 된 적이 없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사용되지 못하고 옷이 돌고 돌아 그곳에 도착한 것일게다. 그렇게라도 제 역할을 하고 있는 저 옷들을 바라보는 마음 한쪽이 묘하게 불편했다.



1. 의류 수거함 너머의 풍경


헌 옷을 어떻게 처리하는가? 너ㅏ는 깨끗한 옷은 아름다운 가게에 버려야 할 옷들은 의류 수거함에 넣는다. 응당 그냥 그래왔다. 마치 공공의 의류 쓰레기통 같았던 그곳이 민간에서 운영한다는 걸 알게 된 건 불과 몇 해 전의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류를 처리할 딴 방법을 모르는 나는 계속 그곳에서 헌 옷을 버렸다.


이 책의 이야기는 그렇게 버려진 헌 옷들이 진짜 어디로 향하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는 재활용이라는 말에 어떤 안도감을 배워왔다. 입지 않는 옷을 넣으면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막연한 믿음. 하지만 버려진 옷에 달아둔 GPS 추적기는 그 믿음 뒤의 세계가 얼마나 어둡고 혼란스러운지를 말해준다.


한국에서 해마다 버려지는 헌 옷은 공식 집계만 10만 톤이 넘지만 수출되는 양은 30만 톤에 달한다고 한다.


집계되지 않은 20만 톤이 어디선가 들어와 편법과 불법으로 빠져나가고 있다는 얘기다. 이들 옷들은 대부분 말레이시아, 인도, 필리핀, 태국, 볼리비아 등 중고 의류 수입을 금지한 나라로 들러들어간다. 그리고 이 옷들은 그곳의 쓰레기 산을 더욱 높게 쌓아 올린다.


인도와 태국, 필리핀 등도 마찬가지다.


의류 수거함을 통해 우리가 재활용된다고 믿었던 옷들은 개발도상국으로 향했다. 의류가 아닌 쓰레기가 돼서 말이다.




2. 기업의 말과 구조의 공백


H&M, 자라 같은 패스트패션 기업들이 최근 몇 년간 급성장하면서 친환경, 지속가능성이라는 이름으로 의류 수거함을 매장 내 비치하기 시작했다.


H&M은 수거된 옷의 92%를 재활용한다고 말했고, 자라는 '새로운 주인을 찾아드립니다'라는 슬로건을 걸었다.


하지만 헌 옷 추적 결과 H&M 매장 수거함에 넣은 7벌 중 4벌은 아프리카, 동남아로 흘러갔고 자라의 헌 옷은 튀니지에서 발견되었다.


우리가 동네 의류 수거함에 넣는 옷과 이들은 별밥 다르지 않은 운명을 걸었다.


이를 책은 '그린워싱'이라고 부른다.

이은 소비자를 두 번 속이는 행위다. 더 많이 사게 만들고 버린 뒤의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 친환경이라는 말로 포장한다.


정부는 제도의 빈틈을 방치한다. 유럽은 이미 생산자 책임재활용제를 통해 의류의 생애 주기를 관리하려 하지만, 한국은 여전히 검토 중이라는 말만 되풀이한다. 수십조 원 규모의 의류산업이 내는 이익은 있지만 그로 인한 책임은 누구에게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3. 그 옷을 입은 사람들의 이야기


추적기가 멈춘 인도 파니파트의 표백, 염색 공장에서는 아직도 폐수를 별도의 정화장치 없이 방류한다고 한다. 마을 사람 4,000명 중 400명이 중증 질환을 앓고 있고 노동자들은 맨손으로 화학 용수를 다룬다. 그리고 그곳의 아이들은 독성 물질이 묻은 옷더미 속을 놀이터처럼 뛰어다닌다.


남의 일 같지만 이 일들은 어쩌면 우리가 짧게는 수십 년 전에 이미 겪었던 일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공장폐수를 강에다 버렸고, 그 물질들은 각종 질병을 일으키며 마을 사람들을 병들게 했다. 아직도 이 일들이 법정에서 다뤄지고 있으며 이제 선진국이 되어버린 우리나라에 더 이상 이런 일을 벌이는 이는 없다.


그런데 그게 우리나라가 아니라면 괜찮다는 말인가?


내가 버린 옷이, 내가 신던 운동화가, 누군가의 몸을 병들게 하고 있음에도 개도국의 이들이 선택한 일이니 그것이 괜찮은 일이 되는가?


어쩌면 이 모든 것은 누군가의 선택이 아닌 구조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생산자는 대량 생산을 멈추지 않고 정부는 관리하지 않으며, 소비자인 우리는 재활용한다는 이야기에 거리낌 없이 소비한다.


티셔츠 한 장이 종이컵 수백 개의 탄소를 내뿜고, 폐의류의 20%가 불법 폐기될 때 매년 소나무 수천만 그루가 필요하다.



다른 선택은 가능하다


프랑스는 2028년까지 중고 섬유 재활용률을 90%까지 높이겠다고 선언했고, 네덜란드는 2050년 완전한 지속 가능 직물을 목표로 삼았다.

기술도 조금씩 진보하고 의류업계 종사자들 또한 변화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이런 변화의 출발은 정부나 기업을 움직일 수 있게 우리의 눈이 문제를 직시하기 시작할 때다. 의류 수거함이라는 블랙박스 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아는 것. 편리함 뒤에 누군가의 고통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않는 것.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다.



*개인적으로 행사를 위한 일회용 티셔츠는 이제 모든 기관에서 지양해 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질문의 격 - 옳은 방식으로 질문해야 답이 보인다
유선경 지음 / 앤의서재 / 202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읽다 보면 가끔 문장보다 내 생각이 먼저 움직이는 순간이 있다. 이 책 <질문의 격>을 읽을 때가 그랬다.

책장을 넘기며 계속 질문하지 못했던 어느 날이 떠올랐고, 동시에 하지 말아야 할 질문을 해버려 곤란했던 날들이 떠올랐다.


"답을 찾으려 하지 말고, 질문을 찾아라."


그랬다. 어쩌면 내가 하지 못했던, 하고 후회했던 질문은 어쩌면 답을 이미 알고 있거나 유도하는 질문이었다.

사실 그건 이미 답을 정해놓고 던지는, 어쩌면 질문이 아니라 포기와 항의에 가까웠다.

제대로 된 질문을 하고 싶었다. 나와 같은 이들이라면 서평을 접고 책을 먼저 펴드는 게 빠를지도 모르겠다.



1. 우리는 왜 질문하지 못하게 되었을까


책은 질문을 잃어버린 우리의 습관을 짚어낸다. 우리는 태어나서 줄곧 정답을 맞히는 방식만을 배워왔다. 질문은 수업 흐름을 방해했고, 교실은 언제나 조용해야 했다. 답을 잘하는 아이가 똑똑한 아이였고 질문은 버릇없거나 분위기를 깨는 행동으로 취급되었다.


돌아보면 나도 그랬다. 일을 하면서도 질문보다 좋은 답을 준비하는 데 더 익숙했다. 회의에서 손을 드는 대신 이미 주어진 결론에 맞는 분석을 찾아 맞추는 쪽이 더 자연스러웠다. 이는 나뿐 아니래 후배 직원들에게도 똑같이 요구되었다. 연차가 낮을수록 질문은 버릇없음의 동의어였다. 그러니 사고는 한 방향으로만 흐르게 되었고 다른 관점은 쉽게 닫혔다.


책은 이렇게 굳어진 사고방식을 부드럽게 흔든다.

질문을 못하는 게 아니라 질문을 배워본 적이 없기에 당연한 거라고.

질문의 첫 재교육이 필요한 건 어쩌면 애어른 할 것 없이 우리 모두 다.



2. 질문은 어떻게 사고를 전환시키는가


질문에도 격이 있다.

질문은 단순히 무엇이 답인가를 묻는 행위가 아니라, 어떻게 답에 도달할 것인가를 포함하는 사고의 구조다.

질문 하나에는 우리의 관점, 언어력, 삶의 태도까지 고스란히 드러난다.


실제로 기획안을 쓰거나 캠페인을 설계할 때 좋은 실행 안보다 먼저 필요한 건 늘 좋은 질문이었다.

"이 문제의 본질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오해하고 있는가?", "다른 방식으로 바라본다면 무엇이 달라질까?"


좋은 기획은 이러한 질문들이 기획의 흐름을 결정했다. 그러나 나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질문을 습관화하지 못했다.

책을 읽으며 깨달은 건 질문은 훈련의 영역이라는 것.

생각을 요약하고, 언어를 정밀하게 고르고, 관점을 바꾸어보는 과정 자체가 질문이라는 도구를 단련시키는 일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대안으로 "어떻게 하면"으로 질문하라고 권한다.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그까지 갈 수 있나요?"


질문을 바꾸면 세계가 달라 보이고, 관점이 달라지면 문제의 모양도 달라진다.



3. AI 시대, 질문이 곧 역량이 되는 순간


책 후반부는 지금의 시대와 놀랍도록 맞닿아 있다. 저자는 단언한다.

모두가 알다시피 AI 시대에 살아남는 사람은 답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질문을 잘 하는 사람이다.


프롬프트 하나에 따라 결과물이 달라지는 시대.

적확한 어휘를 고르고, 구체적인 맥락을 설정하고, 목적을 명료하게 제시해야 원하는 답에 도달할 수 있다.

질문력은 단순한 지적 능력이 아니라 사고력, 언어력, 문해력, 판단력의 총합이다.


GPT를 매일 쓰면서도 가끔 "왜 이렇게 답이 모호하지?"라고 생각할 때마다 사실 질문이 모호했던 때가 더 많았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 문제는 종종 답이 아니라 질문이었다.


책은 이 질문의 시대를 정확히 짚어낸다.

AI가 주는 답을 평가하고 보완하는 능력 역시 결국 질문의 품질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말한다.

질문은 이제 생각의 호흡이자 살아가는 언어가 되었다.



우리는 질문하는 대로 답을 찾는다.

능력보다는 질문하는 힘이 중요하다.

뇌 역시 그렇게 반응한다.

_토니 로빈스(작가, 심리학자)


책의 마지막 구절이다.

꽤 오래 두고 다시 펼칠 만한 그런 질문의 교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