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정상가족 - 자율적 개인과 열린 공동체를 그리며, 개정증보판
김희경 지음 / 동아시아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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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 울타리인가요?


가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따뜻함, 울타리, 공동체? 어른들과 미디어는 가족에 꽤 여러 이름을 붙였지만 어떤 이들에게 가족은 지옥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나는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한부모 가정에서 자랐다. 그리고 나의 어릴적, 인권감수성이란 개나 줘버리던 그 시절에는 대놓고 학교와 사회는 우리 집을 무엇이 하나 빠져있다는 뜻의 결손가정이라고 불렀고 이는 후에 한부모 가정으로 정정되었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우리집은 누군가에게 어디가 하나 부족한 집이었구나. 그렇다면 그 정상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 책 <이상한 정상가족>은 제목부터 그 '정상'이라는 단어를 묻는다.


책은 네 개의 장으로 나뉜다.


1부는 가정이 아이의 울타리가 아니라 부모가 아이를 소유물처럼 여기며 체벌과 방임, 일가족 동반 자살까지 다양한 폭력의 장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2부는 미혼모·한부모 가족이나 다문화 가정처럼 “비정상”으로 분류되는 가족들이 경험하는 차별과 제도적 배제를 짚는다.

3부는 누가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지 묻고 한국 사회가 아이들의 개별성을 인정하지 않는 가족주의의 폐해를 드러낸다.

4부는 공동체를 어떻게 바꿀지 대안을 찾는다 .


저자는 가족 안팎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모순을 아이의 시선으로 드러내며, 가족이라는 이름의 안락한 울타리 뒤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직시하게 만든다. 그리고 묻는다. 당신의 가족은 정상가족인가?



사랑의 매와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


공교롭게도 최근 <참교육>이라는 드라마가 대유행하며 사랑의 매에 대한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한다.

학교가 아니라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매’라는 이름의 폭력이 정당화되는 방식말이다.


국내 아동학대의 80% 이상이 가족 내에서 발생한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결코 가족이 아이의 안전지대라고만 말할 수 없다.

저자는 폭력과 사랑을 연결하는 표현 자체가 위험하며, 체벌은 아이들에게 “나는 언제든 당신을 통제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심어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 메세지는 지금은 맞는 입장의 아이들이지만 언제든 통제권을 행사할 때 때리는 아이로 바뀔수 있다는 점도 우리에게 경고한다.


“한 사회가 아이들을 다루는 방식보다 더 그 사회의 영혼을 정확하게 드러내는 것은 없다”고 한다.

한 사회의 성숙도를 측정하는 기준으로 이 기준을 꼽기도 한다.


맞다. 아이들은 작은 인간이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

체벌을 금지하고 아이의 의견을 존중하는 스웨덴 사례는 우리 사회에도 시사점이 크다 .



제도는 변했지만 여전히 부족한 것들


개정증보판인 이 책은 초판 출간 이후 실제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한다.

보편적 아동수당 도입, 징계권 조항 삭제, 입양 절차의 공공화, 한부모 가정에 대한 지원 확대, 부양의무제 폐지 등이 그 예다.


덕분에 미혼모·한부모 가족도 경제적 지원을 받을 수 있고, 친권은 권리가 아닌 의무라는 인식이 조금씩 자리를 잡았다.

저자는 삶은 개인주의적으로, 해법은 집단주의적으로라고 말하며 집단적 돌봄과 공공지원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아동을 돕는 NGO에서 일하는 나 역시 이런 변화들을 환영한다.


그러나 여전히 아이들이 학대당해 숨지는 사건이 반복되고, 해외 입양이 계속되며, 출생 등록제 같은 기본 제도가 미완성인 현실을 보면 갈 길이 멀다.

제도가 만들어지는 속도보다 인식의 변화가 더디다는 점이 현장에서 더 크게 느껴진다.



정치와 정부가 해결하지 못하는 것들


책이 제기하는 문제의식에 동의하면서도 아쉬움도 남는다.

아이를 중심에 두고 '국가 vs 가족' 구도로 논의가 흘러가게 두면 결국 해결되지 못하는 숙제만 쌓이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돌아간다.


모든 문제는 정치와 큰 정부의 개입으로 해결할 수 없다.

기존 제도나 공동체의 장점을 어떻게 계승하고 더 크게 만들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함께 고민되면 좋겠다.


사실 현장에서 있는 사람으로 법과 정책은 필요하지만 만능 해결책은 아니다.

부모 교육과 지역 공동체, 기업문화 개선(육아휴직 및 다양한 제도의 활용) 등 다양한 길이 함께 모색되어야 한다.


복잡한 현실을 다루는 책일수록 여러 목소리를 담아 균형을 잡는 것이 중요한데 이런 부분에서의 언급이 없다는 점이 좀 아쉬웠다.



함께 돌보는 공동체를 꿈꾸며


이 책은 한국 사회를 옥죄는 가족주의를 비판하며, 아이가 존중받는 공동체를 상상하도록 만든다.

미혼모가 편견 없이 아이를 키우고, 입양을 기다리는 아이들이 국내에서 가정을 찾으며, 학교·직장이 육아를 공공의 과제로 받아들이는 사회를 꿈꾸게 한다.


익숙한 프레임 속에서 가정이란 상자를 조금만 비틀어 보면 그 안에 갇혀 있던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책은 그 목소리를 들려주고, 우리는 그 울림에 어떻게 응답할지 고민하게 한다.


이런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면 <이상한 정상가족>은 꽤 괜찮은 길잡이가 될지도 모르겠다.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있는가?

책이 묻는 그것이 과연 진짜 정상인지에 대해 한번쯤 고민해보자.


그리고 조금 더 괜찮은 세상을 꿈꿔보자.

우리 모두가 더 넓은 ‘가족’을 꿈꾸기 시작할 때 그때 변화는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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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한 죽음이라는 환상 - 고통 없이, 내 뜻대로, 존엄하게 죽는 일은 가능한가
박혜윤.신성준.최은경 지음 / 아몬드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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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중과 상연


넷플릭스 드라마 <은중과 상연>의 마지막 장면.

암에 걸린 상연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마무리하기 위해 스위스로 떠난다.

엄마처럼 병원에서 고통받다가 죽고 싶지 않다. 자신의 죽음만은 스스로 선택하고 싶다.며 그는 별 고민 없이 죽음을 선택한다.

그리고 평생 친구이자 라이벌이자 미워하는 사람이었던 은중을 향한 애정과 질투 그리고 미안함,

그 모든 복합적인 감정을 가지도 두 친구는 삶의 마지막을 함께한다.

그 마지막이 하얀 병실이 아니라 스위스여서 어쩌면 다행이다 싶었다.


그리고 이런 콘텐츠의 범람은 아제 스위스행으로 통칭되는 조력 죽음이 생각보다 우리 곁에 가까이 왔으며,

그리고 그 선택의 기로에 우리도 설 수 있음을 알려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 책은 묻는다.

정말 ‘깨끗한 죽음’이 존재하는가?


<깨끗한 죽음이라는 환상>은 이 질문을 가지고

우리 사회가 안락사나 조력 임종을 논의할 때 어떤 현실과 감정에 빠져있는지,

그리고 반대로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를 논박한다.



세 사람이 그린 조력 임종의 지도


책은 정신과 전문의 박혜윤, 신장내과 전문의 신성준, 의료인문학 교수 최은경, 세 사람이 함께 썼다.

암 병동에서 환자와 가족의 고통을 돌보고, 말기 환자의 치료 거부와 연명의료 문제를 연구하며, 의료 역사와 윤리를 가르쳐 온 경험이 책 곳곳에 녹아 있다.


이들은 먼저 이 이슈의 이름부터 정의한다.

‘안락사’, ‘존엄사’, ‘조력자살’, ‘의사 조력 임종’ 등 용어에 따라 행위의 윤리적 무게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는 오랜 논쟁 끝에 의사 조력 임종이 합법화됐지만, 한국과 일본은 이 논란이 개인은 가족이 돌보아야 한다는 사회질서 안에서 아직도 윤리적 논쟁에 갇혀 있다.


이렇듯 윤리가 논쟁에 들어가면 자칫 찬성과 반대라는 흑백논리에 갇히기 쉽다.

그럼에도 이들은 최대한 감정을 배제한 채 조력 임종을 둘러싼 언어와 제도, 그리고 한국의 말기 돌봄 현실을 세밀하게 해부한다.

(이렇게 흑과 백이 뚜렷한 논쟁은 처음에는 건설적으로 시작했다 보통 감정싸움으로 끝난다 ㅠ)



돌봄의 공백 속에 피어나는 절망


책의 두 번째 파트는 왜 많은 이들이 스위스를 꿈꾸는지 해부한다.


한국인은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고 한다

일부 호스피스와 완화의료라는 제도가 있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 제도를 누리지 못한다.


암 말기 환자와 가족이 겪는 경제적 부담, 간병과 돌봄의 고립은 사회적으로도 심각한 문제이며

이 시간이 쌓이면 환자의 뜻과 무관한 연명치료를 환자와 가족 모두 중단하고 싶다고 속으로만 삭이게 된다.

(환자도 가족도 누구도 이 이 이야기를 함부로 입 밖으로 낼 순 없다)


서두에 언급한 상연의 고민도 이와 마찬가지다.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은 삶을 스스로 끝낼 권리.


이 조력 임종에 대한 논의는 서구에서 의사들이 주도해 진행한 것과 달리 아직 한국에서는 제대로 된 논의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뿌리 깊은 가부장제, 가족 돌봄이 우선시 되는 사회적 분위기 아래

가족에게는 가족(환자)을 포기한다는 윤리적으로 용납 받기 어려운 이유와 함께

환자는 자살을 선택한다는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이런 배경 아래 아주 가끔 경제적 이유로 인한 가족 간 살해 사건이 발생하는 등 여러 사건들이 일어나고 한동안 사회문제가 되기도 한다.


어쩌면 제대로 된 안락사 논쟁은 아직까지 시기상조인지도 모르겠다.


이와 별개로 조력 임종 제도가 도입될 경우 위에서 언급한 경제적으로 취약한 이들이

이제는 ‘살아야 할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 역설에 빠질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저자들은 돌봄과 의료 인프라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채 조력 임종을 허용하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사회적 폭력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자기결정권, 고통, 존엄


세 번째 파트는 조력 임종을 옹호하는 주된 논거인 자기결정권, 고통, 존엄을 차례로 살핀다.


자기결정권은 우리의 본능적 공감을 얻지만, 임종 과정에서 사실 ‘온전한 자기결정’이란 존재하기 어렵다고 저자는 말한다.

환자가 결정권을 행사하려면 의료인과 가족의 도움이 필요하고, 그 과정에서 권력관계와 부담이 작용한다.

고통 역시 신체적 통증뿐 아니라 우울과 상실감, 돌봄의 부재가 얽혀 있어 어떤 기준을 세우기도 어렵다.


‘존엄’이라는 말은 지지 진영과 반대 진영에서 서로 다른 의미로 쓰이기도 하고, 때로는 논의를 흐리는 수사학이 된다.

*이를테면 조력 임종을 찬성하는 측의 존엄은 '내 삶의 결정권은 내게 있다'는 걸 강조하지만

반대하는 측의 존엄은 '돌봄 받더라도 똑같은 인간이다' 즉 인간은 인간을 해칠 수 없다는 인간 존재의 가치를 말한다.


세 저자는 이렇게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들을 던지며, 죽음을 향한 욕망 안에 삶에 대한 갈망과 절망이 함께 있음을 보여준다.



깨끗한 죽음은 존재하는가


저자는 논문의 형식을 빌어 네덜란드, 캐나다, 일본, 미국, 스위스 등 여러 나라의 법적 사례를 탐구하며, 제도의 도입 과정과 부작용 또한 기록한다.


합법화 이후 대상이 정신질환자까지 확대된 캐나다의 논란,

나고야 판결 이후에도 모호한 경계를 넘지 못한 일본의 상황,

음 관광으로 변질된 스위스의 현실 등을 들여다보며,

어쩌면 제도만으로는 죽음의 문제를 풀 수 없음을 강조한다.


만약 은중과 상연을 만난다면 나는 상연에게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가?


아직은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우리는 언젠가 죽음을 맞이해야 하며 '어떻게 죽을지' 결정해야만 한다.

그리고 같은 단어로 자의든 타의든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묻는다.


깨끗한 죽음이 과연 존재하는가?

그에 대한 대답은 각자가 내릴 일이긴 하다.


질문은 꽤 묵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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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의 무용수 - 인생은 언제나 다시 선택할 수 있다
에디트 에바 에거 지음, 안진희 옮김 / 북모먼트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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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네의 집


암스테르담에는 <안네의 일기>의 무대가 된 안네가 살던 집이 있다.

원래 계획에는 없었지만 갑자기 알게 곳에 꼭 가보고 싶었던 그곳은 관광지임에도 불구하고 음산했다.

좁은 계단과 숨 막히는 다락방, 마치 빛을 들이지 않으려는 것 같은 작은 창.

뭐랄까. 감옥이 있다면 이렇겠구나 싶기도 했다.


나는 늘 이런 곳에서 끝내 돌아오지 못한 아이의 이야기보다, 이곳을 벗어나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전쟁 생존자들은 전후 누군가에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영웅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것보다 그들이 홀로코스트의 그 끔찍한 기억을 이겨내기까지의 길은 얼마나 길고 외로웠을까.

나는 늘 이런데 감정이입이 되곤 한다.


이 책 <아우슈비츠의 무용수>은 그 이야기다.

살아남은 사람의 이야기.

어떻게 고통받았고 어떻게 살아남았으며 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이야기를 저자는 우리에게 들려준다.


그녀는 16세 발레리나로 아우슈비츠에 끌려가 부모와 헤어지고 악명 높은 멩겔레 앞에서 춤을 추어야 했다고 기록한다.

그리고 그 지옥에서 도망 나올 때는 시체 더미 속에서 기적처럼 살아 나왔노라 회상한다.

그리고 나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으로 평생을 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저자는 그것이 힘들었다, 혹은 그곳을 고발한다며 이 책을 쓰지 않았다.

상처 그 너머의 이야기.

그녀가 전하는 위대한 회복의 이야기다.



상처 입은 치유자


책은 저자의 어린 시절부터 수용소 생활, 전후 미국 이민까지를 섬세하게 들려준다.

하루아침에 자유를 빼앗긴 수용소에서 그녀는 "마음속에 넣은 것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다"는 어머니의 말로 하루를 버틴다.


굶주림과 폭력 속에서 그녀는 동료를 위로하고, 동생을 돌봤으며, 심지어 죽음의 의사가 요구하는 춤까지 추어야 했다.

이러한 삶은 트라우마로 남아 전후에도 그녀의 몸과 마음을 여전히 감옥에 가둬 놓았다.


그녀는 이 해결되지 않은 상처들을 안고 살아간다.

그리고 심리학자가 된다.

이후 그녀는 내담자들을 치료하며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해결되지 않은 상처와 아직 꺼내오지 못한 감옥 속의 영혼들을 치유하며 그녀는 삶을 이어간다.


이 책은 그 치료의 기록이기도 하다.



마음속 감옥


그녀는 누구의 상처도 사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우리가 겪는 고통을 서로 비교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사실 가장 상처받은 사람, 전쟁이라는 국가가 벌이는 범죄에 가장 큰 피해를 받은 아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억울하고 자신의 상처를 내보일법한데 그녀는 그러지 않는다.

모두의 상처를 그녀는 가만히 끌어안는다.


돌이켜보라.

우리 또한 각자의 상처가 있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혹은 가족이나 친구와의 관계에서.

그리고 우리는 그 상처를 내보이며 자꾸만 남의 상처와 비교하며 '내가 더 아프다'고 말한다.


그런 우리에게 그녀는 말한다.


'우리가 처한 조건이 인생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조건에 대한 선택이 인생을 좌우한다'


이는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결론과도 결을 같이 한다.


상황을 선택할 수 없을 때도 태도는 선택할 수 있다.

과거를 부정하거나 억누르는 대신 고통을 직면하고 스스로를 용서하며 한 걸음씩 나아가라.


우리는 가해자에게 용서받으면 무언가 해결될 거라고 믿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는 말한다.

당신의 마음의 감옥을 연다는 것은.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이라기보다 더 이상 이런 과거의 상처에 끌려다니지 않겠다는 선언이라고.

그 감옥을 여는 열쇠는 타인이 아니라 자신의 그 그 선언에서 시작한다고.



당신은 또 다른 감옥을 택할 것인가


꽤 긴 책을 읽으며, 안네의 집에서 바라본 그 컴컴한 작은 창문이 다시 떠올랐다.


불행하게도 다시는 전쟁이 없을 것 같은 21세기에도 우리는 전쟁의 소문을 듣는다.

그리고 그 전쟁의 포화속에 또 다른 아우슈비츠에 사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해방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는 마음속에 아우슈비츠를 만들고 자신을 가두는 일들을 반복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말한다.


"우리 모두는 이 일에 가해자가 될 수도, 다정한 해방자가 될 수도 있다."


선택은 온전히 당신의 몫이다.

나는 우리도 해방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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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의 빈자리에 - 괴물, 여성, 망자, 호명되지 못한 존재들에 대해
권혁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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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우리를 얼마나 설명할 수 있을까


가끔 내 이름을 네이버에 검색해 보기도 한다.

"장민혁"

아직까지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장민혁"은 성우 장민혁 님이다.

그리고 권투선수, 작가 등 몇 명 나오는데 감사하게도 그 끄트머리에 나도 살짝 나온다.


콘텐츠 크리에이터.


뭔가 민망한 소개이긴 한데 문득 궁금해졌다. 이렇게 내 이름을 처음 알게 된 사람은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상상할까.


살면서 이름을 그렇게 자주 쓰면서도 정작 이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많지 않다.

그냥 당연히 불리는 것, 나를 지칭하는 단어,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봐야 한자어로 풀면 어떤 의미를 가지는 단어.


그런데 이 책 <이름의 빈자리에>는 바로 그 당연한 것에 질문을 던진다.

어쩌면 이름은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을 이 세상에 붙들어 두는 가장 오래된 끈이지 않을까?



이름이 없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


책은 이름 없이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영화 <송곳니> 속 아이들은 이름도, 세상을 이해할 언어도 없이 자란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단순히 불편한 일이 아니다.

자신을 설명할 방법이 없고, 다른 사람과 자신을 구분할 경계도 사라진다.


우리가 잘 아는 <프랑켄슈타인>의 괴물도 마찬가지다.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해줘야 하는 첫 번째의 일, 가장 기본이 되는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았다. 크리처가 괴물이 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잖은가."


이 문장을 읽는데 마음이 묘했다.

그랬다. 천지를 창조한 창조주는 아담과 하외를 만들고 그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다.

아담과 하와가 자연을 다스리라고 하며 받은 첫 임무도 그것들 하나하나의 이름을 짓는 일이었다.


우리는 너무 쉽게 누군가를 함부로 괴물이라 부른다.

그런데 어쩌면 그 사람은 한 번도 제대로 자신의 이름을 불려본 적이 없는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너나 할 거 없이 태어나자마자 이름을 얻는다.

그리고 그 이름을 통해 세상에 등록된다.

이름이 있다는 것은 이 세상 어딘가에 내가 자리하고 있다는 선언과도 같다.



사랑 :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일


책은 이름을 부르는 행위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서 들려준다.


아마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가만히 불러본 기억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이름을 글자로 쓸 때와 입 밖으로 낼 때의 감정이 다르다는 걸 느꼈을 것이다.


그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수많은 사람 가운데 오직 한 사람만 보인다.

저자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윤희에게>, <늦가을 무민 골짜기> 같은 작품을 통해 이 이름을 부르는 행위가 얼마나 특별한 의미를 갖는지 보여준다.


"한 존재를 내 속으로 받아들이는 엄청난 일, 나를 한 존재의 속으로 온전히 들이미는 일."


생각해 보면 사랑은 거창한 말보다 이름을 자주 부르는 데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너"를 찾아내는 일.

그리고 그 사람을 내 세계 안으로 초대하는 일.


그것이 아마 이름을 부르는 행위의 본질인지도 모르겠다.



이름으로 남는 존재


누군가 세상을 떠나면 가장 먼저 남는 것이 이름이다.

사진도 흐려지고 기억도 희미해지지만 이름은 이상하게 끝까지 남는다.


김소월의 <초혼>을 떠올리며 저자는 말한다.


"부르다가 죽을 이름을, 어쩌면 부르다가, 부르다가 내가 살 이름을."


동물을 좋아하는 아이가 옛날 사진을 보다 '고양이'하고 손가락을 가리키고 있었다.

갓난아기의 아이와 그 옆에 얌전히 앉아 아이를 지켜보던 우리 짱고.


'은우야, 저 고양이는 짱고라고 해. 은우 어릴 때 짱고랑 많이 같이 놀았어.'

'짱고 짱고'


그리고 아이는 그 고양이의 사진을 볼 때마다 '짱고!'라고 부른다.


언젠가 우리는 모두 헤어진다. 사람도 그렇고 고양이도 그렇다.

그리고 떠난 존재는 이름으로 다시 찾아온다.


아이가 '짱고'라고 부를 때마다

짱고가 잠시 우리 곁으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 이름은 기억의 다른 말인지도 모르겠다.



나의 이름에 가까워지고 있나요?


우리는 태어날 때 누군가로부터 이름을 얻지만, 정작 그 이름의 주인이 되는 데는 평생이 걸린다.

누군가는 부모가 지어준 이름을 떠나기도 하고, 누군가는 새 이름을 선택하기도 한다.

또 누군가는 평생 자신의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은 채 살아가기도 한다.


무엇이 됐든 결국 우리는 어떠한 이름으로 살아간다.

그 이름으로 사랑받고, 상처받고, 일하고, 누군가를 만나고, 또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는다.


<이름의 빈자리에>는 그 이름에 관한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그리고 누군가가 나를 기억한다면 어떤 이름으로 기억할 것인가.


책을 덮고 또 한 번 내 이름을 검색창에 검색해 보았다.


평생 써온 이름인데도 조금 낯설었다.

어쩌면 우리는 평생에 걸쳐 자신의 이름에 가까워지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그 질문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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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펑 - 나를 울리고 너를 배반하며 이룩되는 케이팝 이야기
복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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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케이팝을 좋아하나요?


솔직히 말하면 나는 케이팝을 잘 모른다.

누군가는 상식처럼 이야기하는 몇 세대 아이돌이니 하는 말도 낯설고 팬덤의 문법도 그렇다.

그래서 처음 <펑펑>의 표지를 봤을 때 이걸 내가 과연 읽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렇게 별 걱정을 하며 책장을 펼치긴 했는데 생각보다 책은 어렵지 않았다.

아마 내 또래이거나 나보다 조금 어릴 것 같아 보이는 저자는 케이팝을 이야기하며 예능에서나 보던 이름들과 더불어 우리 세대의 아이돌까지 소환해 내는데 외국어로 뒤범벅이 된 글자들 사이에 아는 영단에 몇 개를 찾아낸 것처럼 반가웠고, 또 아는 이름들이 나오자 책은 꽤 즐겁게 읽히기도 했다.


사실 우리 나이쯤 되면 케이팝을 입에 올리고 팬을 자청하는 것이 조금 민망스럽다.

이미 거대한 산업이 되어버린 케이팝의 이면을 봐야 할 것 같은 표정으로 무대 앞에서 열광하는 건 왠지 어른의 태도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이 또한 거대한 편견이다. 인정)


재밌는 건 저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케이팝의 산업구조의 문제는 문제고, 자신이 누군가를 좋아하며 울었던 시간은 또 다른 이야기라고.


맞다. 사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건데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해 사달이 나는 경우가 우리 삶에는 꽤 많다.



2. 케이팝을 통해 바라본 세상


초반부가 케이팝에 관한 저자의 이야기라면

후반부는 조금 더 깊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여성 아이돌이 어떤 시선 속에서 소비되는지,

왜 누군가는 노래보다 몸매를 먼저 평가하는지,

팬덤이 어떻게 사회와 연결되는지에 대해서도 그는 이야기한다.


이전에 일하고 있는 단체에서 2NE1의 팬클럽이 기후 위기를 위한 모금활동과 기부를 진행한 적이 있다.

그 일련의 활동을 지근거리에서 보며 팬덤이라는 게 단순히 앨범을 사고 공연을 보러 가는 사람들의 집단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저자도 같은 이야기를 한다.


이제 팬덤은 좋아하는 것을 통해 세상을 읽고, 사회를 읽고, 자기 자신을 읽으려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나의 스타가 연예산업의 소모품으로 사라지는 걸 거부한다.

팬의 이름으로 이 구조를 바꾸고, 세상을 더 좋아지게 하는 일에 일조하고 싶어 한다.


그렇게 보니 이들이 조금 달라 보이기도 했다.

뭔가 존경스럽기도 했고.



3. 낭만에 대하여


나는 어린 시절 리어카 카세트에서 흘러나오던 노래를 들으며 자랐다.

저작권이라는 개념이 아예 없던 시절,

거리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대중가요를 배웠고 좋아하는 가수의 앨범을 사면 꼭 첫 곡부터 마지막 곡까지 순서대로 들었다.

(사실 테이프는 여기에 대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저 플레이 버튼을 누르고 끝까지 들을 뿐)

재킷을 펼쳐보고 가사를 읽고, 왜 이 노래가 1번 트랙인지, 왜 저 노래가 마지막 곡인지 혼자 상상하곤 했고 어쩌다 이에 관한 기사라든지 인터뷰를 볼 때면 혼자 흐뭇해하곤 했다.


그렇게 앨범을 꽉 채운 아티스트의 취향과 선택을 들으며 그를 이해하기도 했고 그 음악에 심취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아직도 유튜브 스트리밍이 어색하다.

좋아하는 가수가 컴백한다치면 CD나 LP를 더 찾고,

디지털 싱글이니 뭐니 하면 괜히 섭섭해진다.


이 책은 케이팝 이야기를 하지만 책을 읽으며 나는 음악을 사랑하던 그 시절의 나의 모습을 자꾸만 보고 있었다.


그렇게 음악을 좋아하던 아이는 지금 어떻게 되었나.

괜히 다시 처박아 놓은 LP를 꺼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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