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마음속에 나무를 심었다 - My Dog’s Diary
권남희 지음, 홍승연 그림 / 이봄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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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반려동물이 떠난 자리


지난해, 소중한 나의 반려묘 짱고를 떠나보내고 한동안 아무 말도 쓸 수 없었다.

12년을 함께한 고양이는 집안 곳곳에 스며 있었다.

짱고가 좋아하던 의자, 자주 앉던 이불, 함께 앉아 그릉대던 소파의 자리, 그 흔적들을 한참이나 만지작거리다 울어버리는 날이 많았다.

더 잘해주지 못한 마음 짱고가 원했을지도 모를 걸 놓쳐버린 것 같다는 후회,

그리고 빈자리에 자꾸만 부딪히는 내 하루.


한동안은 반려동물을 다룬 책도 읽지 못했다.

그리고 사실 동화책인 줄 알고 집에 든 이 책.

권남희의 <어느 날 마음속에 나무를 심었다>

집어 든 김에 읽기 시작했는데 김금희 소설가의 추천사에서 그만 마음이 무어지고 말았다.


“최선을 다해 다른 존재를 사랑한 사람들이 이 책을 통해 자책과 슬픔 대신

소중한 추억과 자신이 행한 돌봄에 대한 마땅한 긍지를 안고 살아가기를 바란다.

그것이 우리의 반려동물 친구들이 자기 삶 전체를 통해 주려고 한 선물이므로.”



2. 반려동물이 변화시킨 삶


<어느 날 마음속에 나무를 심었다>는 처음 강아지를 무서워했던 번역가가

나무라는 시추와 가족이 되며 하루하루 삶이 바뀌는 과정을 그린다.


작고 여린 생명을 안고 시작된 관계는 길고양이를 바라보는 시선,

임보를 자처하는 용기, 낯선 생명과도 눈을 마주칠 수 있게 만든다.


그 모든 변화의 중심엔 ‘나무’라는 강아지와 그와 함께한 14년의 세월이 밝은 그림처럼 책 속에 담겨 있다.

우연히 이 가정에 입양되어 천천히 노견이 되어가는 나무, 백내장과 간암을 겪는 모습까지.

작가는 그저 담담히 건조하지 않게 그려나간다.



3. 무지개다리, 그 뒤편의 풍경


반려동물을 잃어본 사람은 안다.

그 황망한 이별이 얼마나 사람을 무너지게 하는지 그리고 주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슬픔을 어떻게 풀어낼지 몰라 답답해하는 그 마음을.


물론 작가의 며칠도 그랬겠지만, 결국 작가는 나무가 떠나간 뒤 그의 이름을 행복하게 부른다.

나무와 함께 웃었던 기억을 먼저 꺼내든다.


“나무가 떠난 뒤, 이렇게 행복하게 나무 이름을 말하게 될 줄 몰랐다.

슬픔보다 아픔보다 상실감보다 행복했던 기억을 먼저 떠올릴 줄 몰랐다.

이 모든 게 착한 나무가 주고 간 선물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반려동물의 죽음을 말하면서도 결국 ‘살았던 시간’을 더 오래 이야기한다.

함께했던 나날들을 슬픔의 증거로만 남기지 않겠다는 다짐.

이 헤어짐이 아프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함께 했던 날들이 너무나 빛났기에 돌아가더라도 나무를 선택하겠다는 다짐.



4. 짱고와 나, 그리고 남은 마음


짱고가 떠나고 한동안 늘 같은 생각을 반복했다.

‘이렇게 보낼 줄 알았다면, 더 자주 안아줄걸.’

‘그날 왜 짜증을 냈을까.’

'차라리 발령 같은 거 집어치우고 대구에서 늘 함께 살껄'


풀리지 않는 감정들이 이 책을 읽으며 조금씩 해소되었다.

그리고 내가 이 고양이를 얼마나 좋아하고 사랑했는지 다시 알게 되었다.

또 하나 내가 한 사랑이 엉망이 아니라 충분히 ‘최선’이었다는걸,

짱고도 알고 있었을 거라고 막연히 믿게 되었다.


짱고와의 시간은 여전히 그립지만 이제는 조금은 덜 아프게 그리워할 수 있을 것 같다.



5. 짱고에게


내가 너무 사랑했던 내 고양이 짱고야,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들 속에 항상 다정한 고양이로 네가 있어줘서 고마워.

알고 있었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나는 너를 더 좋아하고 사랑했나봐.

그리고 너도 그렇게 나를 바라봐 주었다는 걸 이제는 조금은 알 것 같아.


지금도 현관문을 열 때면 네가 그 앞에 있을 것만 같아서 마음이 쿵쾅거려.

그런데 이런 마음도 결국 우리가 함께였던 날들이 너무 좋고 행복해서 였다는 걸 이제는 알 것 같아.


난 아마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 같아,

내 무릎에서 갸릉대던 그때의 온기와 너의 눈빛을.


이제는 사진속에만 있지만

나도 너를 마음에 나무로 심고 가끔 들어다 볼게.

너무 슬퍼만하지 않고 좋았던 기억들 떠올리면서 행복해 할게.

정말로 고마웠어.

사랑해. 내 고양이 짱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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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버지의 집
파코 로카 지음, 강미란 옮김 / 우리나비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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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버지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생각난 사람


아들이 생기고 나서부터 이상하게 아버지가 자꾸 떠오른다.

은우를 안고 있으면 문득 언젠가 나를 안고 있었을 그 사람의 팔을 생각하게 된다.

그땐 몰랐다. 그가 왜 그렇게 말이 없었는지, 왜 그렇게 고집스러워야만 했는지.

그런 아버지를 이해한다고 착각했지만 사실은 이해하려 한 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어릴 적 아버지는 거대한 존재였다. 무엇이든 고칠 수 있었고, 무엇이든 참을 수 있었던 사람.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알게 된다. 그 강해 보이던 사람도 결국은 한 인간이었다는걸.

어느 날 문득 보이는 좁은 어깨, 축 처진 등. 그 장면이 늦게 도착한 이해처럼 마음에 걸린다.



2. 아버지의 집, 그곳에서의 기억


파코 로카의 그래픽 노블 『내 아버지의 집』은 아버지가 남긴 집을 정리하는 세 남매의 이야기다.

만화책, 그러니까 그래픽 노블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글보다 그림이 많다는 것이 더 좋을 때가 있는데 아마 이런 경우를 보고 말하는 것일 거다.

창문을 통과하는 햇빛, 비어 있는 의자, 한때는 소란스러웠을 식탁.

그 장면들이 긴 설명 그대로 보이는데 나는 이 장면들이 참 좋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형제자매는 집을 팔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집을 정리하는 일은 단순한 부동산 문제가 아니다.

서랍을 열면 어린 시절이 나오고, 고장 난 수도꼭지를 보면 아버지의 손이 떠오른다.

집을 처분하는 것이 곧 추억을 버리는 일처럼 느껴지는 순간 그들은 그들의 손을 멈추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세 자녀와 아버지의 친구,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에 각자의 추억을 가진 인물들이 하는 추억들은 꽤나 섬세하다.

그리고 이들은 죽음이라는 사건을 다룸에도 슬픔이라는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각자의 이야기를 전한다.

천천히 천천히. 그렇게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전해진다.



3. 이해는 언제나 늦게 온다


서두에도 이야기했듯 책을 읽는 내내 자꾸만 내 아버지가 겹쳐졌다.

그가 왜 그렇게 집의 이곳저곳을 고치고, 필요 이상으로 꼼꼼하게 굴었는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그에게 집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가족을 지키는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 말로 사랑을 표현하지 못한 사람이 선택한 방법.


아버지를 닮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아들을 안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 어느새 그와 닮은 나를 보게 된다.

말수는 적고, 표현은 서툴고, 대신 다른 방식으로 책임을 지려한다.

그걸 깨닫는 순간, 괜히 가슴이 먹먹해진다.



4. 내 아버지의 집


<내 아버지의 집>을 덮고 내가 자란 집을 떠올려 보았다.

벽의 얼룩, 오래된 가구, 낡은 문고리. 모든 것이 누군가의 시간을 품고 있다.

그저 숙식을 해결하는 장소인 것 같았던 집은 기억이 눌어붙은 자리였고 차마 표현하지 못한 사랑이 말없이 남아 있는 공간이었다.


어쩌면 자식에게 아버지는 집 같은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늘 거기 있는 줄 알았고, 쉽게 사라지지 않을 거라 믿었던 사람.


아들이 생기고 나서야 비로소 이해하게 되는 감정들이 있다.

늦게 도착한 이해, 뒤늦은 연민, 그리고 조금은 아픈 감사.


다음 주에 집에 가게 되면 괜히 집 안을 한 번 더 둘러볼 것 같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의 어깨를 한 번쯤 주물러 드려야겠다.


* 이 작품은 바르셀로나 그래픽 노블상, 이탈리아 루카 그래픽 노블상, 일본 우수작품상 등을 수상하며 해외에서도 큰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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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끝의 기록
존 버거.장 모르 지음, 민지현 옮김 / 더퀘스트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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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익숙한 세계를 낯설게 바라보는 눈


<급류>의 작가 정대건은 창작자들이 가장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은 매일 보던 것을 처음 보는 것처럼 바라보는 눈,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세계 앞에서 다시 멈춰 설 수 있는 능력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능력을 위해 이 책 <세상 끝의 기록>을 권한다.

어떤 콘텐츠를 분석하거나 해석하기 이전의 시선, 무언갈 알아서 설명보다 그것을 인지하는 순간 경탄이 먼저 터져나오는 상태 말이다.

이 책은 여행을 통해 독자에게 무언가를 가르치기 보다, 잊고 있던 어떤 것을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그러고 보면 여행이라는 건 새로운 장소로의 이동이 아니라 익숙한 세계를 다시 바라보는 나의 시선의 변화를 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여행으로 저자들은 우리를 안내한다.



2. 이방인의 시선, 그러나 그리움이 스며드는 풍경


책은 다큐작가 장 모르가 세상의 변방을 여행하며 찍은 사진과 존 버거의 글을 함께 엮은 책이다. 책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장 모르의 사진은 그 대상으로부터 늘 한 걸음 물러나 있다. 그는 지나치게 다가가지도 그렇다고 멀찍이 도망치지도 않는다. 이 미묘한 거리는 사진 속 인물과 풍경을 그냥 스쳐가는 소비의 대상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나와 다른 지구 어느 곳에서 살아가는 하나의 삶으로 남겨둔다. 그래서 그의 사진에는 늘 이방인의 시선이 담겨 있으면서도 따뜻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설명하기 힘든 그리움 같은 감정마저 은근히 배어 나온다.


그의 사진을 설명하는 존 버거의 글은 그 감정을 확대하지 않는다. 그저 독자가 그 사진 속에 가만히 서 있을 공간을 만들어준다.

흥미로웠던 건 그의 여행지 중에는 평양도 있다. 잘지내고 떠나기 전 사진을 많이 빼앗겼다고도 기록되어있는데 그래서 몇 장 남아있지 않지만 그가 북한에서 찍은 사진들에는 괜히 마음이 찡해지기도 했다. 가까이 두고도 가지 못하는 나라. 이 사진에 담겨 있는 이들은 지금쯤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3. 여행은 장소가 아닌 기억으로 완성된다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각자의 기억으로 미끄러진다. 낯선 도시의 골목을 통해 문득 오래전 내가 살던 골목의 공기와 냄새, 함께 뛰놀던 이들의 얼굴이 겹쳐진다.

그 얼굴들을 떠올리다 보면 이제 이 사진들이 정작 어디서 찍혔는지는 크게 중요치 않게 된다.

작가의 카메라가 머물던 그 시간과 장소가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우리는 계속 되짚어 보게 된다.

그래서 <세상 끝의 기록>은 여행기나 사진집으로 퉁치기는 꽤 많은 것을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존버거도 장모르도. 대가의 이야기는 확실히 다르다.

좋은 책이 늘 그렇지만 이 책도 한번의 호흡에 다 읽기에는 생각할게 꽤 많다.

그리고 우리가 다녀올 기억 속의 그 장소도 꽤 많다.



4. 책을 덮은 뒤에 시작되는 또 하나의 여정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아주 먼 곳까지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매일 보던 풍경인데도 무언가 낯설게 느껴졌는데 그 낯섦이 이상하게 반가웠다.

세상 끝의 풍경. 이 책의 제목이다. 낯설지만 반가운 공간.


당신에게 세상 끝의 풍경은 무엇인가.

그것은 지구 반대편의 황량한 풍경일 수도, 이미 지나온 삶의 어느 평범한 하루일지도 모르겠다.

지금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면. 그래서 오늘 당신의 삶을 좀 더 새롭게 보고 싶다면,

그리고 천천히 읽을 책을 원한다면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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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 난 세계 - 우리 세계에 뚫린 구멍에 관한 이야기
김지웅 지음 / 책과나무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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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누구에게나 하나쯤은 남아 있는 구멍에 대하여


<구멍 난 세계>

제목이 너무 직접적이어서 제법 두께 있는 책을 한참이나 째려보았다.

제목이 말하는 구멍이 무얼 뜻하는지 그때는 알 수 없었지만 문득 그때 내 마음에 덩그러니 난 구멍을 들켜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랬다. 우리는 대개 괜찮은 척 살아가지만 사실 누구나 하나쯤은 설명하지 못할 결핍을 안고 있다.

애써 이름 붙이지 않거나 지금도 최선을 다해 외면하고 있을 뿐 마음 어딘가에는 크든 작든 구멍 하나쯤은 존재한다.


책은 그 구멍에 관한 이야기다.

저자는 처음부터 자신의 삶을 가장 크게 생채기 낸 그 구멍을 보여주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상실, 패배, 단절, 이별. 피하고 싶지만 결국 누구도 비켜갈 수 없는 것들.

이 구멍은 특별한 이들에게 찾아오는 삶의 예외가 아니라 오늘 당신의 삶에도 찾아올지 모를 것들이다.



2. 아프리카에서 시작된 상실, 그리고 돌아오지 않는 시간


이야기는 대학 졸업 후 삶을 찾아 떠난 아프리카 여행 중 주인공이 함께 떠난 친구를 잃는 사건에서 시작된다.

예고도, 준비도 없이 찾아온 비극에 별생각 없이 책장을 넘기다 '헉'하고 한대 맞은 기분이었다.

그랬다. 상실은 언제나 그렇게 예고도 없이 무례하게 찾아온다.


삶을 찾아 시작된 여행은 삶을 망가뜨리며 멈춘다.

그리고 이 사건은 개인의 불행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남겨진 사람의 죄책감, 그를 둘러싼 관계의 균열,

그리고 그곳에 살고 있던 선량한 사람들의 삶까지 함께 무너뜨리며 주인공의 삶을 끝까지 몰아붙인다.


숨쉬기조차 버거울 고난 앞에 성경의 욥이 떠올랐다.

마치 인간 이상의 존재들끼리의 내기 혹은 장난에 까불리고 죽어 나가는 사람들처럼 속수무책인 인생 앞에 그는 묻는다.


이 지옥 같은 풍경도 삶인가.

삶은 계속되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3. 구멍의 의미


주인공 버든은 살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그 여행을 계속한다.

이 여정에서 ‘구멍’은 점점 의미를 바꾼다.

처음에는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공허였지만, 시간이 지나며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게 만드는 틈이 된다.

주인공 버든과 친구 채트인의 관계 역시 그 구멍을 통해 다시 정의된다.

물론 이들은 완전히 회복되지 않는다. 대신, 불완전한 상태로 서로를 이해하는 법을 배운다.


우리가 살면서 잃게 되는 것들이 있다. 관계, 꿈, 희망 같은 것들.

그리고 이렇게 잃어버린 대부분의 것들은 회복되기를 바랄 뿐 완벽하게 회복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정해야 한다.

그것들을 져버린 채 새로운 삶을 시작할 것인지 그 상실을 안고 함께 살아갈 것인지.

주인공은 후자를 택한다. 그 상실을 안고 무겁게 남은 걸음을 걷는다.



4. 낯선 풍경이 우리 안의 공허를 비출 때


아프리카라는 배경은 단순한 이국적 장치가 아니다.

빈곤과 재난,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복잡한 얼굴들이 주인공이 지나가는 걸은 곳곳에 묻어있다.

그리고 책은 묻는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 땅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고통받는 이들과 나의 삶을 그저 분리하고 그저 '저들과 다름에 감사하다'며 나의 삶을 채우고 있지는 않은지.


이 지점에서 <구멍 난 세계>는 개인 서사를 넘어서 우리 세계의 구멍을 응시한다.

세계의 균열과 개인의 상처가 겹쳐지는 순간 구멍 너머 타인의 삶이 보인다.

나의 고통과 다르지 않은 삶이, 나와 같이 고통 속에 있고 도움을 청하는 손길을 내밀고 있는 이들의 인생이 보인다.

그랬다. 우리는 모두 그 구멍으로 연결되어 있고, 누군가의 상실과 상처는 언제든 나의 질문이 될 수 있다.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말아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5. 구멍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기대치 않고 어느 정도까지 읽다 잠들어야지라는 마음으로 책을 펴들었는데 다 읽지 않고는 잠들 수 없었다.

그리고 한동안 생각했다.


나는 지금 내 안에 난 이 구멍을 얼마나 정직하게 바라보고 있는가.

자꾸 피하려 하거나 비웃음으로 이 시간이 지나기만을 바라고 있지는 않은가.

혹은 외부의 누가 나를 이 구멍에서 꺼내주기를 바라며 자꾸 도움을 요청하고만 있지는 않은가.


어쩌면 나뿐 아니라 누구라도 이 질문 앞에서 멈칫할지도 모르겠다.

다만 바라기는 이 책을 읽는 당신이 자기 안의 구멍을 천천히 그리고 깊게 들여다보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 책의 주인공처럼 그 순간을 두려움으로 비켜 가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연결로 이어갔으면 좋겠다.


상실 이후에도 삶은 계속된다.

완전해지지 않은 채로. 우리는 결코 이 구멍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이 구멍은 끝이 아니라 다시 사람에게로, 내가 알지 못했던 또 다른 세계로 향하는 통로일 수도 있다.

이는 오롯이 그 구멍을 바라보는 스스로의 선택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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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끝의 기록
존 버거.장 모르 지음, 민지현 옮김 / 더퀘스트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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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익숙한 세계를 낯설게 바라보는 눈


<급류>의 작가 정대건은 창작자들이 가장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은 결국 매일 보던 것을 처음 보는 것처럼 바라보는 눈,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세계 앞에서 다시 멈춰 설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이 책<세상 끝의 기록>을 권한다. 세상을 분석하거나 해석하기 이전의 시선, 설명보다 경탄이 먼저 도착하는 상태 말이다. 이 책을 펼치면 독자는 무언가를 배우기보다, 잊고 있던 어떤 것을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여행이란 결국 새로운 장소로 이동하는 일이 아니라, 익숙한 세계를 다시 바라보는 방식의 변화라는 사실을 이 책은 상기시킨다.



2. 이방인의 시선, 그러나 그리움이 스며드는 풍경


다큐작가 장 모르가 세상의 변방을 여행하며 찍은 사진과 존 버거의 글을 함께 엮은 책이다. 장 모르의 사진은 늘 한 걸음 물러나 있다. 대상에 지나치게 다가가지도, 멀찍이 도망치지도 않는다. 그 미묘한 거리는 사진 속 인물과 풍경을 소비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삶으로 남겨둔다. 그래서 그의 사진에는 늘 이방인의 시선이 담겨 있으면서도 따뜻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래 머물다 떠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그리움 같은 감정마저 은근히 배어 나온다. 존 버거의 글은 그 감정을 확대하지 않는다. 읽는 이가 스스로 그 여백을 느끼도록 내버려 둔다.

떠나기 전 사진을 많이 빼앗겼다고도 기록되어있는데 그의 여행지 중에는 북한도 있다. 몇 장 되지 않지만 그가 평양에서 찍은 사진들에는 괜히 마음이 찡해지기도 한다. 가까이 두고도 가지 못하는 나라. 이 사진에 담겨 있는 이들은 지금쯤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3. 여행은 장소가 아니라 기억으로 완성된다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독자는 어느새 자신의 기억으로 미끄러진다. 낯선 도시의 골목을 보다가, 문득 오래전의 여행의 공기와 냄새, 함께 걷던 사람의 얼굴이 겹쳐진다. 책을 읽다보면 이 사진들이 정작 어디서 찍혔는지는 크게 중요치 않다. 다만 작가의 카메라가 머물던 그 시간이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묻는다. 그래서 <세상 끝의 기록>은 여행기라기보다는 어떤 기억의 기록에 가깝다.

좋은 사진집이 늘 그렇지만 이 책도 한번의 호흡에 다 읽히지는 않는다. 어쩌면 한 장을 보고 덮었다가, 며칠 뒤 다시 펼치게 되는 책이다.

그 느린 리듬 속에서 독자는 그의 발걸음과 겹쳐지는 자신만의 여행과 삶의 여정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4. 책을 덮은 뒤에 시작되는 또 하나의 여정


책을 덮으니 아주 먼 곳까지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매일 보던 풍경인데도 잠시 낯설게 느껴졌고, 그 낯섦이 이상하게 반가웠다.

세상의 끝의 풍경. 이 책의 제목이다. 당신에게 세상 끝의 풍경은 무엇인가.

그것은 지구 반대편의 황량한 풍경일 수도, 이미 지나온 삶의 어느 평범한 하루일 수도 있다.

지금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면. 그래서 오늘 당신의 삶을 좀 더 새롭게 보고 싶다면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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