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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 듣기 - 귀 기울여 들음으로써 완성하는 사랑
유지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8월
평점 :
말하는 기술과 듣는 기술
나는 캠페인과 모금을 위한 이야기를 만드는 일을 한다.
어떤 문장을 써야 사람의 마음이 움직이는지, 복잡한 이야기를 어떻게 쉽게 전할지 고민하는, 아니 정확히는 설득하는 일이 내 일의 큰 부분이다.
그래서 꽤 큰 돈을 내고 스피치하는 법은 제법 배웠다.
정확히는 잘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법을 익혔던 것 같다.
그런데 일을 계속 할 수록, 나이를 먹어갈 수록 궁금했다.
말하는 법은 이렇게 배우는데 나는 누군가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제대로 배운 적이 아니 고민했던 적이라도 있었던가.
말을 잘하는 사람은 어디에서나 주목받지만 잘 듣는 사람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고보면 회의에서도, 관계에서도, SNS에서도 우리는 다음에 할 말을 준비하느라 바쁘다.
상대는 내 감정을 들어달라고 하고 있는데 우리는 머릿속으로 답을 만들고, 빈칸을 채우고, 해결책을 건넨다.
분명 대화를 했는데 서로 유쾌하지 못한 기분만 품고 돌아서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책 유지영의 <심장 듣기>는 말하기의 뒤편으로 밀려난 듣기를 앞으로 불러낸다.
듣기는 타인의 말을 듣고 판단하고, 흔들리고, 때로는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는 대화의 주체다.
듣기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아니라는 말이다.
지치는 대화
우리는 소위 잘 듣는 사람을 흔히 상대에게 맞춰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분위기를 깨지 않고, 불편한 말도 삼키고, 적당한 반응을 돌려주는 사람.
저자는 자신도 한동안 그런 ‘착한 듣기’에 몰두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한 사람이 계속 사라지는 대화는 머지 않아 그 다정함을 잃는다.
말하는 이의 의중만 헤아리다 보면 듣는 이의 감정과 판단은 지워지고,
대화는 서로를 만나는 일이 아니라 한쪽이 다른 한쪽을 감당하는 일이 된다.
듣기와 들어주기는 닮아 보이지만 방향이 다르다.
들어주기가 상대를 위해 나를 비우는 일로 끝난다면, 책이 말하는 듣기는 타인의 말과 내 생각이 부딪치며 새로운 의미를 만드는 일이다.
듣는 사람도 질문할 수 있고, 오해를 바로잡을 수 있으며,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다시 물을 수 있다.
그래야 화자도 자신이 무엇을 말했는지 새롭게 듣는다.
‘귀를 기울여서 잘 듣는, 잘 들으려 애쓰는 일은 생산적일 수도 효율적일 수도 없다.’(p.115)
들어주지 말고, 듣자.
같은 듣는 시간이라도 어떤 듣기는 버리는 시간이 아니라 한 사람에게 시간을 내어주는 나의 선택적 시간이다.
사랑과 민주주의의 상관관계
책의 1부는 연인과 반려견처럼 일상의 가까운 관계에서 시작한다.
작은 목소리, 설명할 수 없는 보챔, 말이 아닌 몸의 신호를 이해하려 애쓰는 동안 저자는 들어야 들리고, 들려야 관계가 이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사랑은 상대를 이미 안다고 믿는 데서 자주 실패한다.
궁금해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때 비로소 듣기가 시작된다.
2부에 이르면 듣기의 범위는 취재 현장과 사회로 넓어진다.
노동자와 장애인, 이주민을 만난 기사 현장, 강남역과 무안공항, 국회 앞에서 들은 시민과 유가족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여기서 듣기는 개인의 좋은 성품으로 끝나지 않는다.
여기서부터 누구의 말이 기록되고 누구의 말이 소음으로 취급되는지는 권력의 문제가 된다.
피해자의 말이 들리지 않으면 같은 비극은 다른 이름으로 반복된다.
그래서 관계의 기본과 민주주의의 기본은 같다.
한 사람의 말을 끝까지 듣는 경험이 없는 사회는 다수의 목소리도 쉽게 통계와 구호로 줄인다.
우리가 누군가를 돕는 이야기를 만들 때도 마찬가지다.
그 사람을 대신해 더 그럴듯한 문장을 만들어주는 것보다, 그가 실제로 한 말을 정확하게 듣고 제자리를 내어주는 일이 먼저다.
말할 기회를 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들을 사람이 있어야 말은 세상에 도착한다.
대화법 책은 아닙니다만
제목만 보면 경청의 방법을 알려주는 실용서를 떠올릴 수도 있다.
그러나 <심장 듣기>는 대화를 잘하기 위한 단계별 요령이나 곧바로 써먹을 질문 목록을 주는 책은 아니다.
연인, 반려견, 취재 현장, 사회적 참사, 우울과 자기혐오까지 여러 장면을 오가며 듣기의 의미를 넓혀가는 산문집이다.
구체적인 대화법을 찾는 독자라면은 더 좋은 책을 권한다.
하지만 되려 그 점이 이 책의 선택이기도 하다.
잘 듣는 법을 정답처럼 건네는 순간 듣기는 다시 상대를 다루는 기술이 된다.
그래서 저자는 성공한 대화의 공식을 제시하기보다 자신이 잘못 듣고, 자신을 지우고, 다시 듣기를 배우는 과정을 펼쳐 보인다.
책을 읽으며 계속 드는 생각이다.
나는 듣고 있었을까, 단지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을까.
말이 머물 자리
<심장 듣기>를 따라가다 보면 듣는 사람이 대화의 조연이 아니라는 사실 하나는 선명해진다.
말은 입에서 나오는 순간 완성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닿고, 그 사람 안에서 해석되고, 다시 다른 말과 행동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살아 움직인다.
듣는 이는 말의 도착지이면서 다음 출발점이다.
말할 기회는 많아졌는데 진짜 대화는 줄었다고 느끼는 사람,
누군가의 이야기를 받아주느라 자신이 자주 사라지는 사람,
인터뷰와 상담, 돌봄과 캠페인처럼 타인의 말을 다루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읽어봐도 좋겠다.
그리고 한 번만은 대답을 서두르지 말고 상대의 문장이 어디까지 가는지 들어보면 어떨까.
우리의 대화는 더 풍성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