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 듣기 - 귀 기울여 들음으로써 완성하는 사랑
유지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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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기술과 듣는 기술


나는 캠페인과 모금을 위한 이야기를 만드는 일을 한다.

어떤 문장을 써야 사람의 마음이 움직이는지, 복잡한 이야기를 어떻게 쉽게 전할지 고민하는, 아니 정확히는 설득하는 일이 내 일의 큰 부분이다.


그래서 꽤 큰 돈을 내고 스피치하는 법은 제법 배웠다.

정확히는 잘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법을 익혔던 것 같다.


그런데 일을 계속 할 수록, 나이를 먹어갈 수록 궁금했다.

말하는 법은 이렇게 배우는데 나는 누군가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제대로 배운 적이 아니 고민했던 적이라도 있었던가.


말을 잘하는 사람은 어디에서나 주목받지만 잘 듣는 사람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고보면 회의에서도, 관계에서도, SNS에서도 우리는 다음에 할 말을 준비하느라 바쁘다.

상대는 내 감정을 들어달라고 하고 있는데 우리는 머릿속으로 답을 만들고, 빈칸을 채우고, 해결책을 건넨다.

분명 대화를 했는데 서로 유쾌하지 못한 기분만 품고 돌아서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책 유지영의 <심장 듣기>는 말하기의 뒤편으로 밀려난 듣기를 앞으로 불러낸다.


듣기는 타인의 말을 듣고 판단하고, 흔들리고, 때로는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는 대화의 주체다.

듣기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아니라는 말이다.



지치는 대화


우리는 소위 잘 듣는 사람을 흔히 상대에게 맞춰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분위기를 깨지 않고, 불편한 말도 삼키고, 적당한 반응을 돌려주는 사람.


저자는 자신도 한동안 그런 ‘착한 듣기’에 몰두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한 사람이 계속 사라지는 대화는 머지 않아 그 다정함을 잃는다.


말하는 이의 의중만 헤아리다 보면 듣는 이의 감정과 판단은 지워지고,

대화는 서로를 만나는 일이 아니라 한쪽이 다른 한쪽을 감당하는 일이 된다.


듣기와 들어주기는 닮아 보이지만 방향이 다르다.

들어주기가 상대를 위해 나를 비우는 일로 끝난다면, 책이 말하는 듣기는 타인의 말과 내 생각이 부딪치며 새로운 의미를 만드는 일이다.


듣는 사람도 질문할 수 있고, 오해를 바로잡을 수 있으며,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다시 물을 수 있다.

그래야 화자도 자신이 무엇을 말했는지 새롭게 듣는다.


‘귀를 기울여서 잘 듣는, 잘 들으려 애쓰는 일은 생산적일 수도 효율적일 수도 없다.’(p.115)


들어주지 말고, 듣자.

같은 듣는 시간이라도 어떤 듣기는 버리는 시간이 아니라 한 사람에게 시간을 내어주는 나의 선택적 시간이다.



사랑과 민주주의의 상관관계


책의 1부는 연인과 반려견처럼 일상의 가까운 관계에서 시작한다.

작은 목소리, 설명할 수 없는 보챔, 말이 아닌 몸의 신호를 이해하려 애쓰는 동안 저자는 들어야 들리고, 들려야 관계가 이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사랑은 상대를 이미 안다고 믿는 데서 자주 실패한다.

궁금해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때 비로소 듣기가 시작된다.


2부에 이르면 듣기의 범위는 취재 현장과 사회로 넓어진다.

노동자와 장애인, 이주민을 만난 기사 현장, 강남역과 무안공항, 국회 앞에서 들은 시민과 유가족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여기서 듣기는 개인의 좋은 성품으로 끝나지 않는다.


여기서부터 누구의 말이 기록되고 누구의 말이 소음으로 취급되는지는 권력의 문제가 된다.

피해자의 말이 들리지 않으면 같은 비극은 다른 이름으로 반복된다.


그래서 관계의 기본과 민주주의의 기본은 같다.

한 사람의 말을 끝까지 듣는 경험이 없는 사회는 다수의 목소리도 쉽게 통계와 구호로 줄인다.


우리가 누군가를 돕는 이야기를 만들 때도 마찬가지다.

그 사람을 대신해 더 그럴듯한 문장을 만들어주는 것보다, 그가 실제로 한 말을 정확하게 듣고 제자리를 내어주는 일이 먼저다.


말할 기회를 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들을 사람이 있어야 말은 세상에 도착한다.



대화법 책은 아닙니다만


제목만 보면 경청의 방법을 알려주는 실용서를 떠올릴 수도 있다.

그러나 <심장 듣기>는 대화를 잘하기 위한 단계별 요령이나 곧바로 써먹을 질문 목록을 주는 책은 아니다.


연인, 반려견, 취재 현장, 사회적 참사, 우울과 자기혐오까지 여러 장면을 오가며 듣기의 의미를 넓혀가는 산문집이다.

구체적인 대화법을 찾는 독자라면은 더 좋은 책을 권한다.


하지만 되려 그 점이 이 책의 선택이기도 하다.

잘 듣는 법을 정답처럼 건네는 순간 듣기는 다시 상대를 다루는 기술이 된다.


그래서 저자는 성공한 대화의 공식을 제시하기보다 자신이 잘못 듣고, 자신을 지우고, 다시 듣기를 배우는 과정을 펼쳐 보인다.

책을 읽으며 계속 드는 생각이다.

나는 듣고 있었을까, 단지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을까.



말이 머물 자리


<심장 듣기>를 따라가다 보면 듣는 사람이 대화의 조연이 아니라는 사실 하나는 선명해진다.

말은 입에서 나오는 순간 완성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닿고, 그 사람 안에서 해석되고, 다시 다른 말과 행동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살아 움직인다.

듣는 이는 말의 도착지이면서 다음 출발점이다.


말할 기회는 많아졌는데 진짜 대화는 줄었다고 느끼는 사람,

누군가의 이야기를 받아주느라 자신이 자주 사라지는 사람,

인터뷰와 상담, 돌봄과 캠페인처럼 타인의 말을 다루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읽어봐도 좋겠다.


그리고 한 번만은 대답을 서두르지 말고 상대의 문장이 어디까지 가는지 들어보면 어떨까.

우리의 대화는 더 풍성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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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 시대부터 AI 시대까지 만화로 꿰뚫는 경제사 - 물질적 풍요는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었을까
다니엘 코엔 원작, 오드 마소 각색.그림, 이주민 옮김 / 클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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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는 왜 늘 어려울까


경제라는 말을 들으면 먼저 떠오르는 느낌은 어렵다는거다.

요즘이야 다들 주식하는 시대니 금리, 환율, 성장률, 주가 같은 것들이 잘은 몰라도 낯선단어는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 이 단어들이 내 삶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설명하려 하면 갑자기 말문이 막힌다.

오늘 받은 월급으로 장을 보고, 카드값을 걱정하고, 아이의 미래를 준비하는 일도 모두 경제인데 경제학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언어처럼 보인다.

그러고보면 우리는 경제를 다른 이들의 언어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신석기 시대부터 AI 시대까지 만화로 꿰뚫는 경제사>는 그 거리를 1만 년의 역사와 만화로 좁혀준다다.

책에서 경제는 돈을 많이 버는 기술도, 투자 시점을 알려주는 공식도 아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생산했고 누가 그것을 소유했으며, 더 나은 삶을 바라는 욕망이 사회를 어떻게 움직였는지 보여주는 알려준다.

경제든 뭐든 결국은 사람이다.


책의 출발점, 혹은 역사의 시작이 신석기 시대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간이 씨앗을 뿌리고 한곳에 정착한 순간 생산과 소유, 권력과 분배의 문제는 함께 시작되었다.

경제사는 그렇게 먹고사는 방식이 달라질 때마다 인간의 관계가 어떻게 재편되었는지를 들려준다.



풍요는 성장의 다른 이름이 아니다


농업은 더 많은 식량을 생산했지만 그 풍요만큼의 인구 증가가 이루어졌다.

생산량이 늘어도 평범한 사람의 생활은 수천 년 동안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이걸 맬서스의 덫이고 한다.


그렇게 수천년을 흘러온 역사를 산업혁명이 깨뜨렸다.

기계와 에너지가 생산성을 폭발적으로 높이면서 인류의 성장은 이전과 다른 속도를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문제는 그 성장의 몫이 모두에게 같은 크기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데 있다.

공장은 물건을 쏟아냈지만 노동자는 더 고된 환경에 놓였고, 시장의 자유는 자본을 가진 사람에게 더 큰 자유로 작동했다.

마르크스가 등장하고, 1929년 대공황 이후에는 국가가 시장의 실패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케인스가 등장한다.

전후 복지국가의 성장은 이러한 사회적 혼란을 수정하려는 시도다.


이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경제의 발전은 기술 하나가 세상을 바꾼 영웅담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기계와 자본, 노동과 국가, 위기와 제도가 서로 밀고 당기며 지금의 세계를 만들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월급, 실업급여, 연금과 공공서비스도 수많은 충돌과 타협 뒤에 생긴 결과다.



성장의 영수증


책이 더 흥미로운 지점은 성장의 성과만 세지 않는다는 데 있다.

1980년대 이후 금융화와 세계화는 자본의 이동을 자유롭게 했고 기업의 효율을 높였지만, 고용의 안정과 조직 안의 연대는 약해졌다.

부가 커지는 속도와 분배되는 속도 사이의 간격도 벌어졌다.

경제가 성장했으니 모두가 조금씩 더 행복해질 것이라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농경사회에서 산업혁명, 그리고 디지털 시대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시계는 그 어느때보다 빨리 돌아간다.

디지털과 AI는 이 역사를 그 어느때보다 빠르게 돌리고 있다.

산업혁명이 육체노동을 기계로 바꾸었다면 디지털 기술은 모든 것을 자동화한다.

AI의 생산성이 자꾸만 높아지며 노동의 의미와 소득의 분배는 이제 다시 설계되어야 한다.

최근 이슈가 되는 기본소득 또한 이 이슈에 기인한다.

우리는 어떤 세상을 맞을 것인가.


기후 위기도 또한 성장의 영수증 한쪽에 적혀 있다.

유한한 지구에서 무한한 생산과 소비를 이어갈 수는 없다.

책은 성장을 무조건 나쁘다고 말하기보다, 무엇을 위해 성장하고 그 비용을 누가 부담하는지 따져보게 한다.

물질적 풍요가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면 이제 경제가 추구해야 할 목표부터 다시 정해야 한다.



행복해지기 위한 역사


경제사는 지나간 제도와 이론을 암기하는 과목처럼 보이지만, 실은 오늘의 삶이 왜 이런 모양이 되었는지 설명하는 기록이기도 하다.

주말에도 일하는 사람, 집값 때문에 도시 밖으로 밀려나는 사람, 기술이 자신의 일을 대신할까 걱정하는 사람의 일상은 모두 이 역사 위에 서 있다.


그래서 <만화로 꿰뚫는 경제사>의 마지막 물음은 꽤 직접적이다.

우리는 더 많이 생산하고 더 편리하게 소비하게 되었는데, 그만큼 더 행복해졌는가.

답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성장률 하나로는 설명할 수 없다.

누가 풍요를 누리고 누가 비용을 치르는지까지 보아야 한다.


저자는 행복해지기 위한 열가지 조언을 첨부한다.


1) 천재가 아니라는 사실에 신경쓰지 마라

2) 돈얼 벌되 집착하지 마라.

3) 우아하게 나이들어라.

4) 외모를 타인과 비교하지 마라.

5) 무언가를 믿어라 - 삶의 의미를 가져라.

6) 타인을 도와라.

7) 자신의 욕망을 통제하라.

8) 친구를 소중해 여겨라.

9) 짝과 함께 살아가라.

10)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약점을 이성적으로 관리하라.


아 그리고 이 책은 아이가 클때까지 두고두고 뒀다가 하나씩 알려줄 생각이다.

우리 아이는 부모와 달리 뒤늦게 경제가 어쩌고 하는게 아니라 어릴적부터 경제를 아는 아이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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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들판 - 침묵은 어떻게 역사를 드러내는가
마거릿 주혜 리 지음, 장상미 옮김 / 한겨레출판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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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도 상속된다


술만 마시면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는 레파토리 몇 개가 있다.

지겹고 질리도록 들은 이야기는 언젠가부터 나의 이야기가 된다.

나의 아버지가 고민하고 결정했던 지점에는 나도 같이 서있고, 그의 고민을 나도 함께 한다.


그러고보면 가족에게서 물려받는 것은 얼굴이나 성격만이 아니다.

반복해서 듣는 이야기도, 그리고 집안의 누구도 말하지 않는 어떤 것도 물려받는다.

집안에서 자란 아이는 그 빈 공기, 누구도 설명하지 않은 집안의 공허도 함께 배운다.


마거릿 주혜 리의 <비밀의 들판>은 바로 그 공허에서 시작한다.

저자는 휴스턴에서 자라지만 미국에서도 이방인, 한국에서는 미국인으로 여겨진다.

어느 쪽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 그녀가 느끼는 공허의 끝에 모든 가족이 입을 다문 할아버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알고 있는 할아버지에 관한 정보.

전과자, 공산주의자, 집안의 수치.


어른의 침묵은 그 가족을 지키기도 하고 한 사람의 이름을 지우기도 한다.

하지만 그 침묵은 손녀가 자신을 이해하는 길까지 막아선다.

그녀는 이제 그토록 꺼려왔던 그 이름을 불러 내려고 한다.



할아버지를 찾아서


아버지는 자신의 아버지를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할아버지 이철하는 스물일곱에 세상을 떠났고, 가족이 아는 그의 생애에는 수감과 수치라는 낙인만 붙어 있다.

아버지도 할아버지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지만 병으로 멈추고 그 과업은 딸이 이어받는다.


다른 것보다 사실 이게 좀 궁금했다.

왜 우리는 늘 자신의 뿌리를 찾고 싶어할까.

그 끝에 마주할 수 없는 어떤게 있을지도 모르는데 우리는 왜 굳이 그 일을 알고 싶어하는 걸까.


마거릿은 할머니를 세 차례 인터뷰하고 한국의 기록 보관소와 사람들을 찾아다닌다.

흩어진 문서를 맞추자 전과자라던 남자는 일제강점기 공주에서 항일 동맹휴학을 이끌고 비밀결사에 참여한 학생 운동가 이철하로 돌아온다.


일본 제국이 범죄자로 만든 청년을 해방된 나라가 독립유공자로 다시 부르기까지 약 6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할아버지는 그 기간 동안 국가 뿐 아니라 가족에게도 철저히 외면당했다.



영웅과 영웅의 부재를 견뎌낸 사람


이제까지의 이야기는 잃어버린 영웅,

그것도 나의 자랑스런 할아버지를 찾는 이야기다.

그런데 <비밀의 들판>이 더 복잡해지는 지점에는 할머니가 있다.


어린 나이에 이철하와 결혼한 할머니는 남편의 투옥과 죽음 뒤에 두 아들을 혼자 키워내야 했다.

식민 지배와 해방, 전쟁과 반공의 시대에 독립운동가와 공산주의자의 아내라는 이름은 결코 내세울 수 있는 이름이 아니다.


결국 할머니는 남편의 기록을 없애고 남편에 관한 모든 것에 입을 닫는다.

이 침묵이 온 가족이 지닌 상처와 공허의 원인이지만 그 시절을 살아내야 했던 할머니에게는 가족을 지키는 방법이었다.


같은 행동이지만 어떤 세대에는 방패가 되고 어떤 세대에는 상처가 되는 일.

저자는 이 간극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는다.

그 침묵의 좋고 나쁨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다.


마거릿의 취재는 할아버지 뿐 아니라 할머니에게도 시대를 살아낸 이야기가 있었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된다.

영웅과 그 영웅의 부재를 평생을 감당해온 사람의 생애는 같은 무게로 존중 받아야 한다.



당신의 역사도 새롭게 쓰이길


책은 세 차례의 할머니 인터뷰를 중심으로 과거와 현재, 한국과 미국, 가족사와 저자의 성장기를 오간다.

같은 기억을 여러 각도에서 되짚고 자료를 구하는 과정은 느리고 길고 꼼꼼하다.


그리고 이 더딤은 가족의 기억이 복원되는 모습과도 닮아있다.

한 번의 증언으로 모든 것이 명확해지지 않고, 기록이 존재한다고 해서 그 밑바닥의 사정까지 설명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보면 역사는 객관적 팩트라기 보단 서로 다른 기억과 문서를 대조해 누군가에 의해 그냥 쓰이는 것이다.


<비밀의 들판>을 읽으며 우리가 역사라고 배운 이것들을 교과서는 식민 지배와 해방, 전쟁과 분단으로 설명하지만,

한 가족에게 역사는 불태운 문서 한 장이고, 부르지 않는 이름이며, 아이에게 끝내 들려주지 못한 아버지의 이야기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거릿은 할아버지를 찾으려다 아버지를 이해하고, 할머니를 새로 바라보며, 자신의 아이들에게 건넬 가족의 기록을 만든다.

한 사람이 자신의 가족을 기록하기 시작하자 집안의 수치로 불리던 이름은 한국 현대사의 한 자리로 돌아온다.


나는 나의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부끄럽지만 거의 아는게 없다.


쑥쓰러운 일이지만 나의 가족에게도 그 시절의 평범한 하루 하나를 물어보면 어떨까.

대단한 간증보다 무엇을 먹고, 어디로 걸었으며, 무엇을 두려워했는지부터.


우리의 역사, 그 뿌리는 이 대답에서 다시 시작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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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호한 마음에 이름 붙이기 - 현대인을 위한 정신분석사전
노은정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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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되지 않는 감정들


요즘 보기 시작한 JTBC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줄여서 <모자무싸>를 넷플릭스에서 정주행 중이다.

인생드라마라는 평이 많아서 아끼고 아끼다 이제 시작했다.

드라마에는 쉽게 정의되지 않는 감정들이 나온다.


잘되고 싶으면서 잘된 친구를 견디기 힘들고, 사랑받고 싶으면서 누가 안으로 들어오면 먼저 밀어낸다.

인물들은 못났고 이기적이다가도 뜬금없이 다정하다.

보고 있으면 '저 사람 왜 저래'와 '나도 저런데'라는 마음이 동시에 올라온다.


아직 드라마가 채 끝나기 전인데 이 책 <모호한 마음에 이름 붙이기>라는 제목을 보았다.

사실 그래서 더 관심이 갔다.


이 책은 드라마 속 인물들의 마음뿐 아니라 그들을 보며 흔들리는 내 감정에도 이름을 붙여줄 수 있을까.

그리고 한참을 읽었다.

다 읽고 한참을 책을 덮고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답을 얻어서가 아니었다.

내가 별뜻 없이 지나친 마음들이 이미 여러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감정은 언제나 단순하지 않다. 그리고 단순하지 않아도 괜찮다.'(p.91~92)


모순되는 감정이 함께 있다는 이유만으로 한쪽이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미울 수 있고, 떠나고 싶으면서 붙잡히고 싶을 수 있다.


나는 그 복잡함을 성격의 문제로 넘겼지만, 실은 제대로 분류하지 못했을 뿐인지도 모르겠다.



애쓰지 않은 척 애쓰기


애쓰지 않게 보이기 위해 애쓰는 모습.


책은 이를 EP문화라는 개념을 설명한다.

일은 빈틈없이 해내되 힘들어 보이면 안 되고, 자기 관리는 철저히 하되 무엇도 포기하지 않은 사람처럼 보여야 한다.


성취만 요구하는 것도 벅찬데 이제는 성취하는 표정까지 관리해야 한다.

최선을 다한 흔적을 들키면 세련되지 못한 사람이 되고, 실패하면 재능이 없다는 판결을 받을까 봐 우리는 '별로 노력하지 않았다'는 문장을 보험처럼 꺼낸다.


책은 또 비정상적일 만큼 정상적이려는 마음도 우리에 보여준다.

노모패시는 사회가 정한 정상성에 자신을 맞추느라 내면의 감정과 욕구를 밀어내는 상태를 가리킨다.

괜찮지 않은데 괜찮아 보여야 하고, 화가 나도 적절한 방식으로만 화를 내야 한다.

아픔에도, 아니 어떤 감정에도 사회가 허락한 모양이 있는 셈이다.


이러니 아무 일도 하지 않은 날보다 아무렇지 않은 척한 날에 더 지칠 수밖에 없다.



사랑과 부재 사이


금사빠.


누군가에게 금세 빠지는 사람을 우리는 이렇게 부른다.

반은 농담이고 반은 핀잔이다.

책은 강렬한 사랑의 환상을 만드는 마음을 '리머런스'라는 말로 더 세밀하게 본다.


이것은 사랑이 빠른 성격만을 뜻하지 않는다.

상대가 실제 어떤 사람인지보다 내가 바라는 모습과 반응을 그 사람 위에 겹쳐 놓고, 사소한 신호 하나에 천국과 바닥을 오가는 마음까지 포함한다.


반대의 모습으로 대상항상성이라는 개념이 있다.

상대가 눈앞에 없거나 연락이 잠시 끊겨도 관계 전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느낄 수 있는 힘이다.


부재를 견디는 마음은 사랑하지 않는 마음이 아니다.

눈앞의 공백을 곧바로 버림받았다는 증거로 해석하지 않는 마음이다.


사람의 마음을 한 단어로 규정하는 일은 위험하지만, 단어 하나가 관계의 장면을 다시 보게 만들 때가 있다.

금사빠라가 대상항상성을 지닌 이로 변해간다면 사랑이라는 같은 이름의 감정도 조금 다르게 보인다.



잘되는 것이 두려운 이유


요나 증후군이라는 게 있는지 처음 알았다.

뭐랄까. 내 얘기 같아서 좀 마음이 그랬다.


실패가 무섭다는 말은 누구나 하는 말인데 성공이 두렵다는 말은 선뜻 생각하기 어려웠다.

잘되고 싶은데, 진짜 기회가 오면 한발 물러선다.

강요받은 겸손인지 뭔지는 모르겠으나 잘되면 더 잘해야 하고, 기대를 받으면 다음에도 증명해야 하며, 지금의 관계와 생활이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다.

성공은 환호만 데려오는 것이 아니라 변화와 책임도 함께 데려오는 법인지라..


그래서 충분히 준비하고도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할 수 있는 일도 우연히 잘된 것처럼 축소한다.

원하는 것이 눈앞에 왔는데도 그것을 원하지 않았던 척할 때도 있다.


요나 증후군이라는 이름을 읽으며 나는 내가 피한 것이 실패뿐이었는지 생각했다.

혹시 달라질 나를 감당하기 싫어서 아예 시작을 미룬 적은 없었을까.


자꾸 도망가려는 이유를 알아야 다음에는 도망치는 대신 선택할 수 있다.

잘되고 싶은 마음과 잘되는 것이 두려운 마음. 둘은 내 안에서 화해할 수 있을까.



이름표가 정답은 아니다


책은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지 않아도 지금 자신에게 걸리는 장을 골라 펼칠 수 있고, EP문화나 요나 증후군처럼 처음 듣는 개념이 익숙한 일상을 새롭게 설명해준다.

반면 낯선 용어가 연이어 등장하다 보니 읽는 흐름이 사전처럼 끊길 때도 있다.

하나의 사례가 나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자신이나 타인을 특정 개념에 넣고 싶어질 위험도 있다.


책의 제목은 모호한 마음에 이름 붙이기다.

그렇게 이름표를 붙여보려는 찰나, 이름표가 그렇게 중요한가라는 마음이 들었다.


'나는 요나 증후군이야'라고 결론 내리기보다 '내게도 이런 마음이 있구나'에서 잠시 멈추는 편이 낫지 않을까.

이름을 알게 된 뒤에 필요한 것은 진단이 아니라, 그 마음이 언제 시작됐고 무엇을 지키기 위해 생겼는지 살피는 일일 것이다.


오랜만에 쳅터 하나하나를 꼼꼼히 새겨가며 읽었다.

책은 이해할 수 없던 마음을 이상함이나 결함으로 몰아붙이지 않고, 그 안에도 사연과 기능이 있다고 말해준다.


<모자무싸>의 인물들이 한 단어로 설명되지 않듯 우리도 그렇다.

사랑과 미움, 욕망과 두려움, 애씀과 포기가 한꺼번에 들어 있다.

복잡한 것과 틀린 것은 다른 개념이다.


오늘 대답하지 못한 감정이 있다면 그 감정에 이름을 한번 지어주는 건 어떨까.

딱 떨어지는 답을 찾지 못해도 내가 이상한 사람이라는 판결은 미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정의하기 어려운 감정 때문에 스스로를 몰아붙였던 사람에게,

그냥 지금 내 마음을 모르겠다는 사람에게 추천. 아니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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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국방의 가성비 - 대한민국, 누가 어디까지 지킬 것인가
정욱식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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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가 답이라는 건 알겠는데


한미군사훈련, 전시작전통제권, 확장억제, 자주국방.


누군가는 뉴스에서 수도 없이 들었겠지만 이런 단어가 여전히 낯선 이들에게는 조금 어려운 책이다.

아니 낯설지 않아도 조금 어렵다. 평화가 답이라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어려운 건 어려운거다.

<자주국방의 가성비>를 읽고 난 뒤의 감상을 한 문장으로 줄이면 딱 이 정도일 것 같다.


사실 한반도 평화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이야기다.

이 땅에서 전쟁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고, 남북의 긴장은 외교와 경제, 일상의 불안에 계속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평화라는 말은 고루하게 들린다.

국방이라는 단어는 무기 도입, 군사훈련, 핵 위협 같은 무시무시한 단어가 아니라 청춘들의 무용담으로 소비된다.


우리는 왜 싸우고 있고, 또 왜 싸우지 않아야 하는지, 전쟁을 피하려면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에 대해 누군가는 꾸준히 말하지만 누군가는 꾸준히 듣지 않는다.

중요한 이야기가 전문가의 언어 안에서만 오간다면 시민은 찬성과 반대 중 하나를 고를 뿐이다.

이 책을 읽으며 느낀 난감함은 그래서 내용의 난도만을 뜻하지는 않는 것 같다.



자주국방은 그렇게 쉬운 단어가 아니다


자주국방이란 우리 나라를 우리 힘으로 지키자는 뜻처럼 보인다.

이 당연한 이야기가 식민지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우리나라, 아니 동아시아 전체는 늘 예외인 이야기가 되었다.

이미 전쟁이 끝난지 70년이 지났고 한국도 여느 국가 못지 않은 국방비와 군사력을 키웠지만, 전쟁이 벌어졌을 때 우리 군을 지휘할 권한은 아직도 한미연합 체계에 묶여 있다.

강한 무기를 갖추었지만 미국의 확장억제에 대한 의존은 커지는 모순이다.


저자는 이 이야기를 깨놓고 해버린다.

돈을 더 쓰고 무기를 더 사면 언젠가 자립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착각인지. 그는 역대 정부의 핵 개발 구상과 전작권 환수 과정을 따라가며 설명해준다.

무엇을 위협으로 정하고 어디까지 방어할지에 따라 우리에게 필요한 힘과 비용은 달라진다.



국방에도 가성비가 필요하다


맞다. 국방에도 가성비가 필요하다.

저자가 계산하는 가성비는 무기의 가격표보다 넓은 개념이다.

자꾸만 한정된 국가 예산을 군사비에 더 배분하면 복지와 돌봄, 기후위기 대응에 쓸 몫은 줄어든다.

이제 자주 국방을 핑계로 국방비를 무한 증액할 것이 아니라 전쟁 가능성과 군비 수요를 함께 낮출 필요가 있다.


책은 선제공격보다 반격 능력에 집중하고, 국방의 범위를 실제 행정력이 미치는 지역으로 설정하며, 흡수통일 계획을 재검토하자고 제안한다.

꽤 논쟁적인 주장이다.

북핵 위협 앞에서 관계 개선이 안보를 보장할 수 있느냐는 반론도 피하기 어렵다.

이에 저자는 군사적 억제를 없애자는 대신 자주국방과 평화공존이 만나는 목표를 ‘전쟁 방지’ 즉 '평화협정'으로 좁혀 정한다.


위협이 줄면 대응 비용도 줄어든다.

얼핏 당연한 계산인데 우리는 더 비싼 무기와 강한 훈련을 가져야만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는다.

전쟁을 막건 강한 힘보다 어쩌면 외교와 신뢰 구축이 더 가성비 있는 전략일 수 있다.

그리고 지금같은 경제위기의 시대에 이는 또 다른 생존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어렵다


서두에 언급했듯 이 책은 이 이야기에 관심없는 이들에게는 어렵다.

전작권 전환의 시점, 정부별 정책 변화, 핵 억제와 확장억제의 차이, 헌법 영토조항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의 범위를 따라가려면 상당한 집중과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모르긴 몰라도 매일 뉴스를 들여다 보는 이들도 저자의 논리를 곧바로 소화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내가 여기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서 일수도 있지만 입문자용 안내서라기보다 정책 논쟁에 참여하기 위한 압축 강의나 칼럼으로 읽혔다.

핵심 용어를 먼저 풀어 주는 설명이나 쟁점별 찬반 비교, 정부별 흐름을 보여 주는 연표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고 저자의 제안이 논쟁적인 만큼 반대 논리를 조금 더 충분히 소개했다면 설득력도 커졌을 것 같다.



그렇지만 필요한 책


책을 덮으며 한 가지 바람이 먼저 떠올랐다.

한반도 평화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이야기임에도 언제부턴가 고루한 이야기로 들리는데, 이런 이야기 좀 더 재미있게 해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자주국방의 가성비>는 필요한 책이다.

하지만 이런 내 바람에 완전히 답하는 책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강한 군대는 반드시 더 많은 무기에서 시작하는가.

우리 힘으로 지킨다는 말은 누구의 판단으로 어디까지 지킨다는 뜻인가.

평화를 위한 돈은 왜 국방을 위한 돈보다 쉽게 낭비로 취급되는가.


라는 질문에 한번쯤 의문을 품었던 이들이라면 한번쯤은 정독을 권한다.

이런 이슈가 어렵기에 판단을 정치인이나 전문가에게 전부 맡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런 책은 필요하다.


우리가 곧잘 듣는 평화는 이상적인 구호이고 국방은 현실적인 선택이라는 구분부터 다시 생각해보면 좋겠다.

전쟁을 피하고 시민의 삶을 지키는 것이 국방의 목적이라면, 평화협정과 군비 통제도 이제는 이 국방의 계산표 안에 들어와야 한다.


우리에게 남은 예산도 시간도 사실은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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