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바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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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나의 뜻과 나의 성경해석이 곧 하느님의 뜻'임을 자처했던 장 칼뱅. 그는 세르베투스의 성경해석의 도전도, 카스텔리오의 정의로운 반박도 용납할 수 없었다. 오로지 자신만이 진리요 길이었던 칼뱅은 반대 의견을 자기 신성에 대한 부정으로 여겨 종교적, 정치적 살인을 마다하지 않았다.

정당한 이유 없이 다른 의견을 겁박하고 억압하는 독재자는 지도자가 아닌 힘 센 협잡꾼일 뿐이다. 카스텔리오의 말대로, 교리의 강요나 자유의 억압으론 인간을 야만 같은 세상의 풍파에서 구할 수 없다. 관용만이 인간을 야만에서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문이 든다. 칼뱅의 생각대로, 인간이 애초에 육체적/정신적으로 완전치 않은 적극 교화의 대상이어서, 그토록 강한 규율과 억압 속에서만이 그 구실을 할 수 있는 존재였다면… 신은 왜 이렇게 부족한 피조물을 창조했을까?


0. 옳음과 틀림. 같음과 다름. 정통과 이단. 이것들 사이에 과연 교집합의 영역이, 회색의 지대가 존재할까? 요즘들어 하는 생각이다. 정치사회적으로 이견이 첨예하게 맞붙고 젠더갈등 또한 (한계 수위까지 닿을듯 말듯 하는) 꽤 높은 수위에서 논박이 오가는 걸 지켜 볼 때면(또는 그 장에 뛰어들 때면), 과연 이 갈등을 타개할 중간지대의 방책은 없는가 하는 자문을 하곤 한다. 하지만 고민의 꼬리에 꼬리를 물며, 나의 진영과 다른 입장에서 생각해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흑백으로 나눌 수 없다면 회색의 답이라도 존재하기를 바라지만, 회색의 답이 나온다 한들, 그 짙고 옅은 농도에 따라 '이것은 흑에 가깝다' '아니다 백에 가깝다'라는 다음 단계의 문제가 다시 고개를 들 것이 자명하므로.

생각이란 걸 할 수 있는 인간이 존재하는 동안은, 세상에서 그 어떤 완전한 일치도 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세계에 오롯한 합의나 일치는 없다. 다만 불일치의 세상이 있을 뿐.


0. 슈테판 츠바이크의 문장은 정말 좋다. 드라마틱하면서도 단호하게 맥을 짚어낸다. 사람들이 이승우 작가의 문체에서 찾곤 하는 그런 아름다움을, 나는 츠바이크의 문장에서 찾곤 한다.




역사는 정당할 때가 없다. 역사는 냉정한 연대기 기록자로서 결과만을 헤아릴 뿐, 도덕적인 척도를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다. 역사는 오직 승리자만을 응시하며 패배자들은 어둠 속에 남겨둔다. 이 ‘이름 없는 용사들‘은 거대한 망각의 구덩이 속에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하고 내던져져 있다. 십자가도 없고 화환도 없다. 희생의 행위가 헛되이 끝나고 말았기에 십자가도 화환도 이 잊혀진 자들을 찬양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은 순수한 마음에서 감행되었던 어떤 노력도 헛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어떠한 도덕적인 노력도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영원한 이상을 위해 너무 일찍 나타났던 사람들, 그래서 패배한 사람들도 패배함으로써 자신들의 의미를 실현했다. 한 이념을 위해 살고 죽는 증인과 확신을 얻은 사람들을 만들어냄으로써 이념은 지상에 살아남기 때문이다. - P27

쉽게 정열적으로 싸움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래 망설이는 사람, 내면에서 진심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 천천히 결심하고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이 모든 정신적인 투쟁에서 가장 훌륭한 투사들이다. 모든 다른 가능성들이 사라지고, 무기 드는 것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될 때 그들은 무겁고 편치 않은 심정으로 방어를 위해서 일어선다. 그러나 이렇듯 가장 어렵게 싸움을 결심한 사람들이야말로 언제나 가장 단호하고 확고한 사람들이 된다. - P189

"한 인간을 죽이는 것은 절대로 교리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냥 한 인간을 죽이는 것을 뜻할 뿐이다. 제네바 사람들이 세르베투스를 죽였을 때, 그들은 교리를 지킨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을 희생시킨 것이다. 인간이 다른 사람을 불태워서 자기 신앙을 고백할 수는 없다. 단지 신앙을 위해 불에 타 죽음으로써 자기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다." - P227

고발당한 수치에 대한 보상으로, 세바스티안 카스텔리오의 장례식은 일종의 도덕적인 승리의 행진이 되었다. 카스텔리오가 이단의 의심을 받고 있는 동안 두려워하며 조심스럽게 침묵하던 사람들이 모두 몰려나와 자신들이 그를 얼마나 존경하고 사랑했던가를 보여주었다. 살아서 미움받는 사람보다는 죽은 사람을 옹호하는 것이 언제나 더 편하기 때문이다. - P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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