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홍
노자와 히사시 지음, 신유희 옮김 / 예담 / 2010년 7월
평점 :
절판


제목부터 짦은 두 단어 '심홍(深紅)'과 표지에 한 소녀의 그로테스크한 모습으로 눈길을 끄는 또 하나의 장편소설.. 사실 잘 모르는 작품이었다. 그런데, 서평단 지원에 두 번이나 미끄러지면서 오기로? 사서 읽게 된 책 <심홍>.. 작가는 젊은 나이 44에 자살한 '노자와 히사시'의 유작이라고 한다. 그는 SBS 동명의 드라마 <연애시대>의 원작자로 알려졌는데.. 특히 이 <심홍>은 2001년에 발표돼 22회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 신인상을 탄 작품이다. 이후에도 각종 굵직한 문학상을 수상한 그의 작품들은 탄탄하게 짜여진 스토리 구성과 인간의 심층을 파고드는 치밀한 묘사, 허를 찌르는 반전이 돋보이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고 한다.

그렇다. 여기 9년 전에 쓴 이 작품 <심홍>이 그런 류에 속한다. 심홍? 한자어 深紅을 풀어쓰면 '깊은 붉음', 아니면 '붉은 깊음' 이렇게 직역이 되는데.. 그런데, 이 소설의 내막을 알거나 다 읽게 되면 이 소설의 제목이 바로 느껴진다. 심홍은 바로 피의 소용돌이, 즉 깊은 심연에 깔린 피가 부르는 복수와 분노 그리고 처절한 울분과 슬픔이 교차되는 애환과 애상까지..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그런 제목이 아닐 수 없음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표지에 있는 저 소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그 소녀의 참혹하고도 슬픈 이야기속으로 잠시 빠져보자.

여기 10대 초반의 한 소녀 '아키바 가나코(이하 가나코)'가 있다. 아직 세상의 떼가 온전히 묻기 전 그 어린 소녀에게 충격적인 참극이 벌어지고 만다. 자신을 뺀 온가족 넷이 참혹하게 살해된 것이다. 자신은 6학년 수학여행차 그 참극의 현장에 없었기에 살 수 있었다. 행복하고 즐겁기만 한 수학여행 첫날 밤 선생님이 조용히 부른다. 집에 문제가 생겼다면서 얼른 가보자고 한다. 수학여행지에서 집이 있는 도쿄까지는 4시간이 족히 걸리는 거리.. 그 거리를 선생님과 택시를 타고 가며 가나코는 별의 별 생각을 한다. 교통사고일까 아니면 더 큰일일지도.. 그런데, 두려움때문에 선생님에게 묻지 않는다. 그리고 도착해서 하얀 천으로 뒤덮힌 네 구의 사체를 확인한다. 얼굴은 참혹하게 함몰돼 보지 못하고 발가락을 만지며 잔잔하게 오열한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이렇게 어린 소녀 '가나코'를 뺀 '아키바' 일가족 네 명이 참혹하게 살해된 사건.. 가나코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물론 네 다섯 살의 어린 남동생 둘까지 잔혹하게 살해된 전대미문의 참극.. 이 사건으로 일본 열도는 술렁인다. 그렇다면 범인은 누굴까? 그것은 바로 가나코의 아버지 '아키바'와 관련된 사업문제로 빚어진 사건이었다. 바로 아키바 장인의 사업실패로 이어진 대출금 상환의 빚을 거래처에서 좋게 봐왔던 '쓰즈키 노리오'을 꼬득여 연대보증을 서게하고, 결국 그 빚을 쓰즈키가 떠앉게 되자 사랑했던 아내의 사망으로 받은 보험금 수 억원으로 갚게된다. 그런데도 안면을 돌리며 자신을 무시한 아키바의 처신에 분노를 느껴 그 가족의 집을 부스러 들어갔다가 네 사람까지 쇠메로 내리쳐 죽이고 안면까지 함몰시켜 처참하게 죽인 것이다. 과연, 그 행위는 정당했을까.. 여기 소설에서는 자세하게 쓰즈키 노리오의 '상신서'가 나와있다. 자신의 처지와 죄에 대한 설명과 사죄의 글인데.. 해석하기 나름일 수 있다.

아무튼, 이렇게 참혹하게 살해된 일가족을 나두고 남겨진 '가나코'.. 어느 덧 세월이 8년이나 훌쩍 지나 20살의 대학생이 된 가나코.. 이때부터 가나코의 일상을 쫒는다. 여느 대학생들 일상이 그러하듯.. 알바와 학업을 병행하고, 남친이든 여친이든 애정전선을 꾸리며 가나코는 나름의 대학생활을 영위한다. 그런데,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혼자 있을때면 8년 전의 사건이 생생히 떠올라 괴로워한다. 그리고 그녀는 어느 르뽀기자를 찾아가 살인범 쓰즈키가 쓴 상신서를 훑어보게 되면서 또 최근 사형확정 소식을 접하면서 내가 피해자의 딸이듯, 가해자의 딸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과 동갑내기 가해자의 딸 '쓰즈키 미호'(이하 미호)를 찾아 나선다. 왜 찾아 나서는 것일까.. 복수를 하려고, 아니면 사죄를 받기 위해서일까..

여튼, 미호의 은신처를 찾아냈다. 그녀는 가나코와 달리 어린 나이부터 직업전선에 뛰어든 여자 바텐더로 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남친과 위장해서 처음에 그 곳을 접근하고, 이후 혼자서 찾아가 미호와 말을 튼다. 그리고 그때부터 둘은 친해진다. 물론 가나코는 절대로 자신의 신분을 속인다. 끝까지 말이다. 즉, 이때부터 가나코가 미호를 바라보는 시선과 반응들이 세밀하게 묘사된다. 그녀에게 복수를 하려는 단순한 그림이 아닌 물론 그런 내막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자신은 피해자의 딸이고, 가해자의 딸 미호를 통해서 자신을 들여다보며 미호의 원죄와 속죄 사이에서 그 아픔을 달래는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만.. 살아남아서.. 미안해.."라고 외쳤든 그 수 년의 외침때문에 말이다.



결국 미호와 친해진 가나코, 하지만 미호는 폭력적인 남편이 있었다. 그리고 그 남편의 폭력으로 인해 아기까지 유산되는등 살인자의 딸로 살았던 미호의 원죄속에 일그러진 복수가 고개를 든다. 그래서 이런 폭력으로 피폐해진 자신을 위로해준 가나코와 모의해 그 남자를 죽이려 한다. 과연, 그녀들은 그 남자를 죽일 수 있었을까.. 이야기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부분이자 결말이라 언급을 피한다. 결국 다 읽고 나서 간단한 소회는 참혹한 범죄뒤 남겨진 피해자와 가해자를 병립시켜 디테일하게 묘사한 작품이라는 생각과 함께 오랜만에 만난 묵직한 미스터리다. 

그래서 간단히 본다면 참혹하게 죽은 일가족에 남겨진 어느 한 소녀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어찌보면 후반부로 갈수록 성장소설의 느낌도 많이 드는데.. 특히 전반부는 사건 자체를 파헤치고 묘사하는데 중점을 둔 반면에 중반 이후부터는 사건 이후의 삶을 그려내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즉, 참혹한 범죄로 인한 삶과 마음의 상처를 확인해 나가는 전개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 삶이라는 것도 즉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통용되는 '트라우마'에 갇혀 사는 가나코였다. 12살 어린 소녀에서 8년이 지나 대학생이 됐지만 그 사건이 발생된 시점부터 현재 순간까지 끊임없이 매 순간을 생생히 기억하고 그려낸다.

사건 직후 네 시간에 걸쳐왔던 고통의 시간과 이후 정신 치료를 받던 시절, 몇 년이 지난 중학교 시절과 고등학교 시절, 그리고 현재 대학생이 되서 가해자의 딸 미호를 만나 친해지고 미호를 대하며 괴로워하는 심정과 마지막 미호의 남편을 죽이려는 사건의 모의까지.. 하지만 그 사건의 모의 순간에도 이른바 '네 시간'의 트라우마에 갇혀 그녀는 마지막까지도 그 심상에 마냥 허우적 댄 것이다. 과연, 그녀가 가해자의 딸 '미호'를 통해서 얻으려 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어찌보면 피해자의 딸과 가해자의 딸이라 대척점에서 그 둘은 마치 마주한 거울처럼 닮았다는 점이다.

가나코는 가족들이 겪었을 공포와 고통이 지워지지 않고 매 순간 상상돼 자신만이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시달렸고, 가해의 딸 미호는 아버지의 살인죄로 인해 고통과 체념 속에서 포기하듯 살아가는.. 그래서 그 둘은 어쩌면 영원히 지속될지 모를 고통과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는 점에서 닮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본문 속 '가해자는 법률의 심판을, 피해자는 사회의 심판을 받는 셈이지'라는 이야기처럼 결국 두 사람 다 같은 고통으로 이어진 피해자가 아닌가 싶다. 그것은 죄 값에 대한 법률의 해석과 인권 해석의 충돌로 이어져 사회 문제로까지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이야기의 묘사는 '인생의 죄의식'이라는 또 다른 운명의 트라우마를 겪으며 이 둘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네 운명의 쇠사슬을 얽히듯 섥히듯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특히 '가나코'가 겪은 그 극한의 슬픈 트라우마를 통해서 말이다. 즉, 참혹한 범죄로 인해 피해자로 남겨진 사람과 가해자로 남겨진 사람.. 결국에 이 둘을 믹싱시켜 소녀들의 일상을 쫓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진 갈등과 성장을 통해서 범죄의 상흔을 딛고 일어나 다시 재생을 꾀하려는 두 소녀의 이야기 <심홍>..

하지만 남겨진 상처는 계속 깊기에 그 내면의 심상에 자리잡은 '직시하고 싶지 않은 어두운 심리'는 모를 일이다. 여기 주인공 '가나코'처럼 말이다. 그것은 가족들이 흘린 피의 소용돌이, 그 심홍 속에서 갇힌 그녀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반전이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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