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기억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신유희 옮김 / 예담 / 2006년 10월
평점 :
절판


인간은 추억을 먹고 사는 사회적 동물이라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추억은 우리네 심상에 자리잡은 기억의 잔상들이 쌓인 고유한 영역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이런 추억이 사라진다면.. 아니 기억의 잔상들이 하나 둘씩 사라져 잊혀진다면 어떻게 될까.. 즉, '기억의 죽음'에 이르게 되면 인간의 정신적인 사망신고인 셈이자 인지사고의 붕괴로 이어져 육체마저 죽음에 이르게 되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여기 기억이 점차 잊혀져가는 일종의 희귀병인 '알츠하이머'병을 앓아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가 있으니 자체 평(評)한 일본 인생소설의 대가 '오기와라 히로시'의 대표적 걸작 <내일의 기억>이다. 그의 작품으로는 세 번째 읽게된 소설이다. 첫 시도는 <그 날의 드라이브>라는 인생소설로 어느 40대의 가장이 은행직에서 강퇴당해 택시 운전대를 잡으면서 벌어지는 좌충우돌 유쾌한 인생 이야기, 두 번째로는 <벽장 속의 치요>라는 펑키호러 단편집으로 각 에피소드마다 호러를 접목시킨 사회풍자가 담긴 인생 이야기, 그리고 이번에 세 번째로 읽게된 <내일의 기억>..

우선은 결론적으로 말하면 전직 광고계에서 일한 경력으로 자신의 머릿속을 헤집는 심정으로 글을 썼다는 작가의 말처럼 역시 오기와라 히로시의 대표적 걸작이라는 느낌이다. 어떤 재미와 반전을 꾀하는 일본의 추리소설들처럼 스릴러적 미스터리가 아닌 지극히 드라마적인 요소로 우리네 일상을 담은 이야기다. 그래서 자칫 뻔한 이야기에 진부해 보이기도 하지만 여기 이야기는 그런 진부함 속에도 무언가 심상을 건드는 묵직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이에 간단히 줄거리를 살펴보면 이렇다.

이제 50줄에 접어든 어느 광고대행사의 영업부장 '사에키'.. 그는 20여년 넘게 해온 직장생활에서 유능하진 않아도 모나지 않게 그럭저럭 직장 후배들에게 인정받으며 지내온 상사였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광고 시안문제로 회의를 하는데 인물 섭외를 위한 배우의 이름이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물론, 그럴 수도 있지 하며 넘어간다. 하지만 날이 지날수록 이런 증세는 심각해지고 급기야 직장 후배나 동료의 이름까지 생각이 안 나기도 하고, 또 거래처를 방문하러 가다가 길을 잃기도 한다. 또, 이런 광고 영업중에 잡아놓은 약속등을 잊어먹기도 하며 그는 어려움에 봉착한다. 아니 내가 왜 이러지.. 과도한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 장애로 생각한다. 하지만 집안에서 생활도 무언가 다시 살펴봐야 하는등 결벽증에 시달리고, 급기야 병원을 찾는다.

그리고, 여러 진단끝에 '약년성 알츠하이머'의 진단을 받는다. 청천벽력같은 소리다. 자신의 아버지 또한 이 병을 앓다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부인 '에미코' 또한 남편의 병명에 망연자실해 한다. 이 '알츠하이머'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사실이 결국에 언어나 사고에 이어 몸의 기능마저 앗아가버리고, 급기야 몸이 살아가는 방법과 삶 자체를 잊어가는 것이기에.. 어떻게 해야할까.. 난 이대로 기억을 잃어가며 죽는 것일까.. 두려움이 앞서지만 분노와 한탄이 교차한다. 그래서 사에키는 그때부터 자신만의 기록 비망록을 쓰며 일상의 나날들을 적어간다. 그리고, 점차 어려워진 회사생활을 견디기 위해서 메모지를 활용해 매 순간을 잊지 않기 위해서 메모를 한다. 그 메모만 해도 한 움큼이다. 그러다 또 길거리를 헤매다 메모를 쏟는등.. 그는 처절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결국 이 처절함을 달래볼 심산인지 그는 소싯적에 배웠던 도예공방을 다시 찾아가 도예를 배운다. 그 차분한 그릇을 만드는 환경속에서 자신을 찾고자 했음이다. 또 얼마 안 남은 20대의 무남독녀 '리에'의 결혼식 선물로 그는 부부찻잔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였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선물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병세는 점차 악화돼 회사 생활이 어려워지고 또 그런 병세를 알아차린 회사측에서 그를 한직으로 몇 달간 좌천시키고 만다. 화가 났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 그 속에서 마지막 직장 생활을 버텨내고 딸의 결혼식까지 무사히 마친다. 물론, 결혼식 중간에 사위를 몰라보는 사고를 치긴 했지만서도..

이제 가정으로 돌아온 사에키와 부인 에미코 단 둘이 남은 여생을 어떻게 보낼까 고민하지만 죽음을 앞둔 그였기에 막막할 뿐이다. 급기야 스스로 정신병 보호시설을 찾아가 입원 절차를 받고, 소싯적에 친구와 함께 도예를 가르쳐 주었던 노스승을 찾아가 인생을 반추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그는 모르는 누군가를 만나며 기억의 저편으로 쓸쓸히 걸어갔다. 그 누군가는 누구였을까?

이렇게 이 소설은 내용에서 알다싶이 우리네 인생 이야기다. 특히 40-50대 중년 가장들의 삶.. 치열하게 가족을 위해서 살아왔던 어느 한 가장이 앞만 보고 달려온 자신을 돌보지 못한 채 어느 날 기억을 잃어가며 일상의 나날들까지 점차 사라져가 급기야 기억의 죽음으로 치닫게 되는 애환이 담긴 인생의 드라마같은 이야기다.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든 병에 대한 동요, 분노, 수용의 과정을 제 삼자의 시선이 아닌 환자 본인의 입장에서 비망록과 메모를 기록하는 일상과 연계하여 전개해 나간 이야기였다. 그래서 자칫 투병기처럼 보일지 몰라도 투병기 이전의 마음의 기록으로 전달한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는 오랜 세월 함께 해온 아내에 대한 사랑과 연민, 결혼을 앞둔 딸을 생각하는 마음, 직장 생활의 고충과 애환, 그리고 마음의 의지처자 안식처로 삼아온 도예, 기타 다양한 인간상까지.. 이 모든 것을 전면에 걸쳐 생생하게 또 울림있게 고루 묘사했다는 점에서 '오기와라 히로시'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잊혀진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희망의 끈대신 절망이 찾아들때마다 한없이 약해지는 인간의 모습, 그래서 그런 기막힌 현실에 분노하고, 절망하고, 갈망하고, 마침내 도예를 통한 마음의 구원을 얻었을때 이 남자는 모든 기억을 잃게 되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자신도 모를 남겨진 그 극한의 애상감까지..

바로 제목 '내일의 기억'이 암시하듯 내일이 되면 오늘은 또 어떤 나날로 기억될지 모르는 일이지만, 그 기억이 점차 사라져가 함께 해온 나날들까지 사람들 마음속에 사라진 것일까.. 하지만 여기 주인공은 마지막 절망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한다. 자신이 기록한 삶의 심상을 누군가는 기억하기에 말이다. 여기 그 문구로 대신하며 음미해 본다.

   
  기억은 결코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고 확인하는 것이며,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소중한 약속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기억이 사라져도 나의 지난날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내가 잃은 기억은 나와 같은 나날을 보낸 사람들 속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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