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흐르는 강 : 토멕과 신비의 물 거꾸로 흐르는 강
장 클로드 무를르바 지음, 정혜승 옮김 / 문학세계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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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토멕의 모험과 성장을 그린 판타지 소설이다. 토멕은 모든 것을 파는 잡화상의 주인이다. 고아 출신으로, 토멕의 부모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알려주지 않는다. 매일 성실하게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데 어딘가로 무작정 떠나고 싶다는 역마의 충동을 꾹 눌러 지내던 참이다. 그러던 어느날 저녁, 한 어여쁜 소녀가 찾아와 '크자르강의 물'이 있는지 묻는다. 소녀는 결국 막대사탕 하나만 구입하고는 가게를 떠난다. 소녀가 토멕을 놀리듯 과연 모든 것을 파는 잡화상인지 이것저것 있는지 시험삼아 물어보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토멕은 마을의 공식 대서인이자 박학다식한 이샴 할아버지를 찾아간다. 이샴은 크자르강이 거꾸로 흐르는 강이고, 그 강의 물은 생명을 죽지 않게 해주는 신비한 마법의 물이라고 알려준다. 할아버지는 강물이 최종 도달하는 지점이 '성스러운 산'이라는 정보까지 알려주지만, 수천년 동안 아무도 그 모험에 성공한 사람이 없었다며 만류한다. 토멕은 뭔가 신비한 사연을 간직한 그 소녀를 다시 만나고 싶고 크자르강을 찾고 싶다는 열망에 모험을 떠난다.

토멕의 용감한 모험은 망각의 숲과 향수 마을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섬, 신성한 산을 거치면서 점점 흥미로워진다. 여행길에서 위험에 빠지게 되면 운좋게 도움을 주는 친구들을 만나곤 한다. 망각의 숲은 여행자가 숲에 들어가면 사람들의 뇌리에서 여행자에 관한 기억이 지워지고 숲에서 나오면 그때 다시 기억이 되살아나는 신비한 곳인데, 여기선 당나귀 카디숑의 주인 마리의 도움을 받는다. 향수 마을은 온갖 꽃들이 펼쳐진 들판에서 꽃들을 채집해 향수를 제조하는 마을이다. 들판에서 푸른 꽃의 독향에 취해 잠이 들게 된 토멕은 앗치곰의 활약 덕분에 깨어나게 된다. 무려 석 달 하고도 열흘 만에 말이다. 깨어날 때 마법 같은 주문이 필요한데, 잠을 깨우는 주문은 책의 어떤 구절이나 대목과 관련 있고 사람마다 효과있는 주문이 제각각이다.

향수마을에서 토멕은 그토록 만나고 싶어하던 소녀가 남긴 편지를 받게 되고, 소녀의 이름이 한나라는 것과 신비의 물이 필요한 사연을 알게 된다. 한나가 사는 마을은 봄마다 세상에서 가장 큰 규모의 새 시장이 열리는 곳. 한나의 아빠는 해마다 생일선물로 새를 선물했다. 여섯 살이 되던 날, 한나는 깃털색이 멋진 작은 새를 골랐다. 그런데 새장수가 그 새가 실은 천년 전에 살았던 공주인데 마녀의 저주에 걸려 새로 변해버린 것이라며 정말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을 불렀다. 그럼에도 아빠는 전 재산을 팔아 그 새를 한나에게 선물한다. 삼년 후 아빠가 돌아가시고 한나는 먼 친척집에서 살게 된다. 이제 자기 곁에는 그 새밖에 없는데, 어느날 새가 시름시름 병이 들고 만다. 새를 살리기 위해, 한나는 이야기꾼에게서 전해들은 거꾸로 흐르는 크자르강을 찾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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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오바마 자기만의 빛 - 어둠의 시간을 밝히는 인생의 도구들
미셸 오바마 지음, 이다희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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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을 뽑는 일은 연예인 인기투표와 같아서는 곤란하다. 연예인 인기투표는 당사자의 끼와 재능만을 살필 뿐이지만, 선거는 끼와 인품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족관계의 원만성을 따져야 한다. 마치 신중한 결혼상대를 고르듯 깐깐하게 부모님과의 관계나 자녀들과의 관계를 따져야 한다. 재주와 깜냥 절대주의는 한 가지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곤 한다. 바로 그건 절대불변의 진리인 '가화만사성'을 홀시했다는 점이다. 집안이 화목해야 모든 일이 잘 되는 법. 일단 집안이 콩가루면 그 인물을 뽑아놓고서도 후회할 일이 천지태산이다.

나는 미셸 오바마의 저작에서 '가화만사성'의 고전적 가치를 다시금 확인했다. 특히 우리를 둘러싼 세상이 불확실하고 불투명하고 불안과 공포의 분위기가 자욱할 때야 말로 '집'과 '화목'의 가치가 빛난다고 말이다. 저자는 부모와 남편, 그리고 자녀들이 등장하는 자전적 에피소드를 통해 크게 세 가지 성장 모드를 강조한다. 바로, 우리 내면의 불굴의 재능을 일깨우는 '자기만의 빛' 모드, 사랑과 우정의 문제 등을 비롯해 사회적 대인관계의 원만함을 지향하는 '관계' 모드, 그리고 더 나은 삶을 살아내려는 태도와 공공선의 가치관과 결부된 '계속 나아갈 용기'와 관련된 품위 모드다.

어둠의 시간을 밝히고 우리를 계속 성장하게 만드는 인생의 도구들은 거대하거나 거창한 것, 값비싼 것이 아니다. 두려움, 분노, 좌절 같은 부정적인 감정과 경험을 극복하는 길은 오히려 뜨개질이나 산책, 땀 흘리며 운동하기, 푹 자기 등 지극히 사소하고 작은 것이다. 우리는 나를 다시금 정상 궤도에 올리는 자기만의 연장통을 챙겨야 한다. 이는 인지왜곡으로 무척 커보이는 부정적인 감정과 대상을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자그마한 행동 혹은 도구를 통해 점차적으로 해소하는 방식이다.

딸은 아버지와 관계가 원만한 편이다. 미셸은 아버지에게서 남의 평가에 얽매이지 않고 사는 법을 배운다. 저자의 아버지는 다발성경화증으로 걸음이 불안했다. 혹여 넘어지면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넘어지면 일어나서 가던 길을 가면 된다." 그리고 아버지가 불안한 자세로 다리를 절름대며 걸으면 사람들은 종종 가던 길을 멈추고 아버지를 쳐다볼 때가 있었는데, 그러면 이렇게 말하곤 했다고. "내가 나에게 만족하면 누구도 나를 기분 나쁘게 할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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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존재에 대해 사과하지 말 것 - 삶, 사랑, 관계에 닿기 위한 자폐인 과학자의 인간 탐구기
카밀라 팡 지음, 김보은 옮김 / 푸른숲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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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인은 지구인을 어떻게 관찰할까. 그것이 알고 싶다면, '삶, 사랑, 관계에 닿기 위한 자폐인 과학자의 인간 탐구기'를 참조하면 꽤 도움이 될 것이다. 다만 이웃집 할머니나 유치원생에게 알기 쉽게 설명하는 눈높이 방식을 기대하면 곤란하다. 그러니 약간의 먹물이 요구된다. 주인공은 바로 생물화학을 전공한 카밀라 팡으로, 여덟 살에 자폐스펙트럼장애를 진단받고 ADHD, 범불안장애, 강박장애, 감각처리장애와 함께 오래도록 살아온 여성 과학자다. 자폐 과학자에게 대인관계에 얽힌 인간 심리와 행동은 언제나 블랙박스나 수수께끼 미로처럼 다가왔다. 그래서 저자는 머신러닝, 생물화학, 열역학, 파동설, 양자물리학 등 과학 이론을 토대로 자신이 마주하는 세상과 실존적 관계를 이해하려고 애를 쓴다. 이 책 『자신의 존재에 대해 사과하지 말 것』(푸른숲, 2023)은 바로 그런 인간 탐구의 결과물이자 인간 이해를 향한 과학적 분투의 결실이다.

서번트 증후군을 비롯해, 정상적인 분포 곡선을 벗어난 이들은 누구나 고향과 동떨어진 '실향'과 '이향'의 감각을 뼈에 사무치게 느끼기 마련인데, 낯선 이질감이 느껴지는 곳에서 살아가려면 롤모델이 절실해진다. 흥미롭게도 자폐 과학자가 꼽은 인생의 롤모델은 부처, 공자, 예수, 소크라테스 같은 사대성인이 아니라 의외로 '단백질'이다. 저자는 단백질로부터 사회생활과 대인관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화이부동'의 경지를 깨친다.

단백질을 단 한 번도 삶의 롤모델로 고려해본 적이 없는 평범한 독자라면, 일단 단백질이 정말 타인과 더 원활하게 상호작용하고 생산적으로 일하는 조직 생활의 노하우를 가르쳐줄 수 있을지 호기심과 의문이 동시에 들 것이다. 하지만 저자가 보기에 단백질은 길거리 인간보다 더 인간적이고 개성이 넘치며, 이웃집 어른보다 더 성숙하고 모범적이다. 단백질이 개성이 넘치면서도 다름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다양성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단백질은 인간 성격 유형을 효율적으로 보여주는 대체물이며, 공존과 협력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관한 모델을 제공하고, 개성의 표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준다.

"보시다시피 단백질은 팀워크와 효율적인 조직의 모범 사례다. 다양한 유형이 자신의 성격에 따라 독특한 역할을 하며, 몸이 효율적으로 움직이기 위해 이들 모두 필요하다. 단백질은 서로 질투하지 않으며, 다른 역할을 탐내지도 않는다. 자존심은 낮고 생산성은 높은 환경이다. 모든 직장이나 친목 단체가 이와 같다면 좋을 것이다."(71, 72쪽)

저자가 단백질을 MBTI 유형에 빗대어 성격 구분을 하고 있는 게 흥미롭다. 가령 수용체 단백질은 ENFP 유형이나 ENFJ 유형, 연결체 단백질은 ESTJ유형이나 ISTP 유형, 키나아제 단백질은 ENTP 유형이나 ESTP 유형 혹은 ENTJ 유형, 핵단백질은 INFJ 유형이나 INTJ 유형이라고 해석한다. 그런데 MBTI가 정녕 생물화학만큼이나 과학적인가. 아무튼 다양한 유형의 단백질과 조화롭게 기능을 수행하는 단백질 분자의 본성은 남과 비교해서 우월을 따지거나 자존심만 내세운채 남의 성공을 시기질투하는 인간보다 훨씬 성숙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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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일의 모든 것 - 성과, 승진, 소득을 얻는 상식 밖의 오피스 심리학
살마 로벨 지음, 문희경 옮김 / 청림출판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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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에게 가장 필요한 지식이 '오피스 심리학' 아닐까 싶다. 직장 만족도와 삶의 행복도는 비례하기 때문에, 일에 대한 만족도와 안녕감을 높이고, 성과와 소득을 끌어올리고, 창의성을 높이고, 동료에게 인정받도록 돕는 오피스 심리학은 매우 중요하다. 이스라엘의 심리학자 살마 로벨은 "일의 세계에서 성과와 창의성과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에 집중한다." 저자는 그동안 우리가 소홀히 했던, 때론 우리의 상식을 거스르는, 하지만 우리의 성과와 만족감과 행복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사무실 요인들 혹은 단서들을 소개한다. 오피스 심리학은 크게 세 가지 테마로 나뉜다. 사무실 환경이 업무에 미치는 영향, 팀 동료들과의 의사소통법, 그리고 올바른 개인 습관이다.

저자는 먼저 업무 환경의 질을 높이는 단서들을 소개한다. 이를테면 사무실 배치, 폐쇄형 공간과 개방형 공간, 조명(밝은지 어두운지, 인공광인지 자연광인지), 온도, 창문 유무(혹은 창문 부족), 창밖 풍경의 효과, 자연 등이 업무에 미치는 영향이다. 혹시 사무실 '풍수'에 관심이 있다면, 이들 환경적 단서에 자연스레 관심이 갈 것이다. 실내 환경의 질은 직원들의 성과와 행동과 동기와 만족감에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 카공족이 많은 이유는 적당한 수준의 백색소음과 향긋한 커피 내음이 작업 집중력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이어서 함께 일하는 방식을 바꾸는 단서들을 소개한다. 가령 악수 방식, 남을 모방하는 카멜레온 효과, 분노와 실망을 비롯한 다양한 감정 표현, 옷차림, 외모, 목소리의 높낮이, 다양한 인종 구성 등이 팀의 성과는 물론, 개인의 협상 능력에 미치는 영향을 다룬다. 한국의 직장 문화는 아직은 다문화주의가 보편화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하지만 팀 구성에 있어서 인종, 성별, 민족, 문화적 배경 등의 다양성은 창의력과 실행력, 실질적인 이익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저자는 "다름은 새로운 효율성이다"라고 단언하면서, 다름이 다채로움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습관이 만드는 힘의 단서들을 소개한다. 개인의 선택과 습관에 따라 달라지는 성과와 이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을 다루는데, 가령 스마트폰을 유리하게 활용하는 법, 스마트폰이 일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피하는 법, 일하면서 듣는 음악과 업무 효율의 관계, 정돈된 책상의 득과 실 등이 그러하다. 또한 명상과 마음챙김처럼 창조력과 혁신의 힘을 끌어올리기 위해 활용할 수 있는 방법들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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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븐
가와카미 미에코 지음, 이지수 옮김 / 책세상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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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학폭 가해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학폭 피해자들은 언제나 가해자들에 비해선 소수다. 학폭 가해자는 '일진'이라 불리며 대개 패거리 문화를 이루기 때문에 피해자보다 쪽수가 많다. 일진은 악의 세력을 미화한 꼬리표다. 반면에 피해자는 '나 홀로' 약자이기에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그냥 짓밟히고 만다. 반항과 복수는 생각지도 못한채, 피해자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다. '내가 왜 이런 대우를 받게 되었을까, 특별히 잘못한 일도 없는데 나날이 왜 지옥일까.'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학폭 가해자들은 외려 당당하다. 굳이 해명할 생각도 없지만 막상 한다고 해도 가해자의 해명은 언제나 궁색하다. '고작 이런 이유로'라는 생각이 들게끔 하는 궁색한 변명이다. '그때는 어렸으니깐, 잠깐의 재미로 한 거야', '이유는 없어…그냥 하고 싶어서 한 거야', 아님 '가해자 편에 서지 않으면 피해 당사자가 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그랬어'. 학폭은 범죄다. 범죄 기록이 평생 남듯, 학폭 가해자의 기록도 어딘가에 평생 남겨져야 하지 않을까. 피해자보다 가해자에게 관대한 세상은 또다른 희한한 지옥이다.

소설가 가와카미 미에코는 감수성이 충만한 10대 중학생 '나'를 등장시켜, 청소년 학교 폭력 문제를 무대에 올린다. 두 명의 학폭 피해자와 한 무리의 학폭 가해자가 등장하는데, 피해자 두 명은 주인공인 사시를 가진 '나'와 꾀죄죄한 교복을 입고 다니는 동급생 고지마다. 사팔뜨기인 '나'는 니노미야 일당들의 '일용할 밥'이고, 고지마는 반 여자애들의 따돌림 단골이다. 학폭 가해자는 일진인 니노미야 패거리와 패거리의 만행을 한 발짝 뒤에서 방관하는 모모세다.

학폭에도 합당한 논리가 성립할까. 작가는 의도적으로 강자의 궤변과 약자의 궤변을 대비시킨다. 독자들은 학폭과 관련된 두 개의 궤변이 나란히 평행선을 질주하는 모습에 진저리칠 수도 있다. 모모세는 "세상의 모든 일은 우연히 벌어지며 그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다"는 강자의 궤변을 보인다. 마치 세기말 묵시록의 패자 논리 같다. 모모세는 피해자인 나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당하면 싫은 것은 남한테도 하면 안 됩니다"라는 인간관계의 황금율을 속임수나 뻔한 거짓말로, 약자의 변명으로 간주한다. 터무니없는 개똥철학을 늘어놓는 모모세에게 사이비 교주의 자질이 엿보인다. 주인공까지도 혹하게 만드니 말이다. 반면에 피해자인 고지마는 "모든 약함에는 이유가 있으니 자신의 약함을 유지하며 존재하는 것으로 싸워야 한다"는 약자의 궤변을 내비친다. 고지마의 약자 논리는 아큐적 정신승리법이라기보다는 기독교적인 구원 논리에 가깝다. 고지마는 마치 '성녀 신드롬'의 거룩한 희생자를 자처하는 것 같다. 고지마는 강박처럼 성녀나 성자의 표식을 학폭 피해자의 몸에서 찾곤 하는데, 고지마가 주인공의 사팔뜨기 눈을 좋아한 이유도 바로 그런 연유에서다.

얻어 터지는 '샌드백'이 존재의 이유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고지마는 학교 폭력 피해를 일종의 경건한 신앙이나 믿음 차원으로 합리화한다. 고지마가 '헤븐'이라 새롭게 이름 붙인 미술관의 어느 작품을 보더라도 고지마의 생각은 종교적인 혹은 미신적인 색채가 짙다. 여기서 헤븐은 "슬픔과 고난을 극복한 후에 도달할 수 있는 공간"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저 걔네들의 괴롭힘에 굴복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태를 선택해서 받아들이고 있는 거라고, 고지마는 몇 번이나 나에게 거듭 말했다. 우리가 아무리 지독한 꼴을 당해도 누구에게도 호소하지 않고, 무슨 일이 있어도 학교에 가고, 그리고 거기서 같은 일이 반복되고, 그럼에도 거기서 그저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야말로 정말로 중요하고 의미있는 일이라고 말했다."(167쪽)

작가는 학교 폭력의 심각성을 폭로하고 폭력의 원인과 논리를 나름 모색도 하지만, 마치 학폭을 한때 잠시 내리는 소낙비처럼 묘사하려는 경향이 있다. 정작 학교폭력 예방에 대한 고민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주인공이 사시 교정 수술을 받은 뒤 바라본 세상은 아름답기 그지 없는데, 그런 정상적인 눈이 앞으로 학교폭력에 당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나 복선은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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