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 원더랜드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과학으로 읽다
안세실 다가에프.아가타 리에뱅바쟁 지음, 김자연 옮김 / 애플북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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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신비한 기서인 《산해경》에 필적할 만한 서양 판타지 작품이 있다. 바로 앨리스가 이상한 나라에서 펼치는 환상적인 모험을 그린 영국 작가의 책이다. 루이스 캐롤은 작가의 필명이고, 본명은 찰스 럿위지 도지슨이다. 주인공 앨리스의 실제 모델은 앨리스 리델로, 어릴 적 사진을 보니 레옹의 '마틸다'로 나온 나탈리 포트만을 닮았다. 루이스 캐롤은 옥스퍼드의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에서 수학 교수이자 부사제로 복무했는데, 그곳 학장으로 부임한 헨리 조지 리델의 세 자매 중 둘째가 바로 앨리스였다. 1865년작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이전에 그 모체가 된 작품으로 《땅속 나라의 앨리스》가 있다. 1864년 가을, 찰스가 당시 열두 살의 앨리스에게 직접 삽화까지 그려 선물한 자필 원고다. 원고의 복제본은 1886년 정식 출간된다.

이상한 나라에는 기상천외한 환상 동물들과 인물들이 나온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는 회중 시계를 지닌 흰토끼, 도도새, 개구리 하인, 물고기 하인, 물담배를 피우는 애벌레, 미친 모자 장수, 3월 토끼, 겨울잠쥐, 앙심 품은 비둘기, 모조 거북, 노는 걸 많이 좋아하는 거대한 강아지, 제멋대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체셔 고양이, 공작 부인, "저들의 목을 쳐라!"라고 말하는 하트 여왕 등이 등장한다. 그리고 1871년작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서는 고양이 다이나, 아기 고양이 키티, 붉은 여왕, 양고기로 변한 하얀 여왕, 붉은 여왕, 친절한 하얀 기사 같은 다른 체스 말들, 참나리를 비롯한 말하는 꽃들, 수다스러운 각다귀, 염소, 함께 기차를 탔던 딱정벌레, 싸우고 있는 사자와 유니콘, 바다코끼리와 목수 이야기를 들려준 놀라운 쌍둥이 트위들디와 트위들덤, 유명한 동요의 주인공인 달걀 험프디 덤프디 등이 나온다.

동물행동학자 안세실 다가에프와 아가타 리에뱅바쟁 두 사람이 앨리스가 이상한 나라에서 만나는 주민들과 기묘한 동식물, 곤충들과 관련된 과학적 사실에 대해 알려준다. 가령 이상한 나라에서 앨리스는 물약이나 음식을 먹으면 몸이 커지거나 작아지는 경험을 하고 버섯 꼭대기 위에서 가만히 물담배를 피우는 애벌레는 앨리스에게 몸의 크기를 조절하는 방법을 알려주는데, 이를 통해 변태와 변화, 의태의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의태란 다른 동물의 모습과 행동을 모방하는 전략을 말하는데, 특히 애벌레처럼 해롭지 않은 동물이 위험한 동물을 모방하는 경우를 '베이츠 의태'라고 한다. 가령 스핑크스 나방 애벌레는 위협을 느끼면 몸을 뒤집어 커다란 뱀 머리 모양으로 변신한다.

앨리스의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동물은 웃고 있는 고양이 체셔다. 당시 루이스 캐롤의 동시대인들은 '체셔 고양이처럼 웃는다'라는 표현을 흔하게 사용했다고. 여기서 체셔는 과거 '체스터'라 불린 잉글랜드 북서쪽 지방으로, 작가의 고향이기도 하다. 치즈 제조, 실크 생산, 소금 수출 등의 농산업으로 유명하다. 책은 체셔 고양이를 통해 '고양이 표정 부호화 시스템' 같은 동물의 미소에 대한 연구와 의인화에 대해 알려준다.

거인이 된 앨리스 자신이 흘린 눈물바다에 빠진 네 마리 새들은 작가의 사적인 친분, 특히 리델 세 자매와의 친분을 드러낸다. 네 마리 새는 오리, 로리, 도도, 새끼 독수리다. 여기서 오리는 작가의 친구이자 동료 교사인 성공회 사제 로빈슨 더크워스를, 호주가 원산지인 작은 앵무새인 로리는 세 자매 가운데 큰 언니 로리나를, 새끼 독수리 이글릿은 막내인 이디스를 나타낸다. 그리고 이제는 멸종한 날지 못하는 새 도도는 바로 작가 루이스 캐롤의 분신이다. 도도는 눈물바다에서 나온 뒤 몸을 말리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원형 달리기인 코커스 경주를 제안한다. 이 밑도 끝도 없는 원형 댄스 장면은 당대 정치인의 무능을 비판한 것이다. 역시 동화책은 날카로운 정치적 비판과 풍자를 숨기기에 딱 좋은 비밀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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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유가 있다 - 고수가 들려주는 인생의 비밀
한근태 지음 / 클라우드나인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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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과 경험은 비율이 맞아야 한다. 병법서를 달달 외운 풋내기 장수의 경우를 떠올려보라. 성어 '읍참마속'의 전고를 안다면, 이론은 능한데 경험이 부족하면 생기는 병폐에 대해 토를 달 필요가 없을 것이다. 모든 일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게 바로 이론이고 경험치다. 이론은 현상의 전후 맥락을 설명하고 해석하는 틀이다. 그 틀은 과학적일 수도 있고 비과학적일 수도 있다. '거리의 이론'이라 부를 수 있는 경험치라는 것도 순전히 개별적인 경우도 있고 보다 대중적인 보편적 경험치도 있는 법이다. 경험치도 수준과 격이 있다. 우리가 인생고수의 경험치에 주목하는 이유다.

인생 멘토 한근태의 《다 이유가 있다(클라우드나인, 2023)는 '가난이 소중한 이유', '나눠야 하는 이유', '다른 사람을 만나야 하는 이유', '로마가 멸망한 이유',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 등, 마치 '호기심 풀이 사전'처럼 꼬리에 꼬리를 무는 다양한 궁금증을 조용헌, 정혜신, 팀 페리스, 팀 하포드 같은 인생고수의 탁견이나 개인의 견해에 기초해 풀어내고 있다. 이유에 대한 각각의 설명은 전문적인 과학 이론보다 고수의 경험치나 직관에 근거한 경우가 더 많다. 이를테면 '노력해도 안 되는 이유'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풀어낸다.

"할 수 있는 일에 힘을 쓰고 할 수 없는 일을 포기하는 것이 지혜다. 세상에는 세 종류의 일이 있다. 내가 할 일, 남이 할 일, 하늘이 할 일이 그것이다. 노력한다고 모든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지혜는 그걸 구분하는 것이다."(57쪽)

'모든 일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핵심 논조 배후엔 동양의 카르마 이론이 깔려 있다. 선업이든 악업이든 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다는 얘기다.

"선불망래善不妄來 재부공발災不空發이란 말이 있다. 좋은 일은 까닭 없이 찾아오지 않고 재앙은 그냥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일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말이다. 모든 일에는 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는 법이다. 그러니 사정을 모른 채 함부로 비난하거나 비판하면 안 된다. "(8, 9쪽)

'남 얘기를 많이 하는 이유'에 대한 대목도 귀담아들을 만하다. 직업이 기자나 평론가가 아니라면 '남 얘기'는 되도록 자제하는 것이 좋다.

"자기 인생이 재미있는 사람은 남 얘기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다. 할 일이 없는 경우에도 남 얘기를 많이 하게 된다. 하루하루가 심심하고 무료한 사람에게 남에게 일어나는 사건 사고는 그 자체로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얘기 소재다. 책을 읽지 않아도 남 얘기를 많이 하게 된다. 공부하지 않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소재는 남 얘기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난 남 얘기를 많이 하는 사람을 피하려 한다."(53쪽)

리더를 '똑부, 똑게, 멍부, 멍게' 네 가지 유형으로 구분한 것도 뇌리에 남는다. 똑부는 똑똑하고 부지런한 리더, 똑게는 똑똑하고 게으른 리더, 멍부는 멍청하고 부지런한 리더, 멍게는 멍청하고 게으른 리더를 말한다. 최악의 리더는 멍부이고, 다음이 멍게, 차선은 똑부, 최선의 리더는 똑게다. '습관적인 만남이 위험한 이유'에 대한 대목도 곱씹어볼 만하다. 만나는 이유를 기준으로 크게 네 가지 유형의 만남을 가리는데, "이유가 있어도 만나지 않는 사람, 이유가 없어도 만나는 사람, 이유가 있어야 만나는 사람, 이유를 만들어 만나는 사람이 그것이다".

물론 고개를 살짝 갸우뚱하게 만드는 대목도 없진 않았다. 가령 '기계치가 좋은 이유'는 수필 '가난한 날의 행복'처럼 아전인수격에 가깝고, '대만이 일본에 너그러운 이유'에 대해선 딱 한 구절을 달았는데, "워낙 본토 사람들에게 심하게 당했기 때문이다"라고만 했다. 틀린 말은 아닌데, 다만 이런 반사적 이유만으로 일본을 향한 대만의 뿌리깊은 숭배심리를 설명하기엔 태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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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돌보는 뇌과학 - 더 좋은 기분, 더 좋은 삶을 위한 뇌 사용법
안데르스 한센 지음, 이수경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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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생물학은 행복보다는 '생존과 번식'에 방점을 찍고, 긍정심리학은 생존보다는 '행복'에 방점을 찍는다. 둘은 차이점도 있지만 공통점도 적지 않다. 둘 다 우리 심신의 건강과 삶의 질을 높이는 데 관심이 많다. 가령 진화생물학은 진화의 관점에서 뇌를 망치는 습관을 뇌를 살리는 습관으로 변화시키는 데 중점을 둔다. 그리고 긍정심리학은 부정적인 기분과 태도를 긍정적인 것으로 변화시키는 데 중점을 둔다. 다시 말해서, 진화생물학과 긍정심리학 모두 "일상을 방해하는 부정적 기분의 소용돌이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것인가?"에 대한 과학적인 해답을 제시한다. 더 좋은 기분을 느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과학적으로 검증된 방법을 제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는 셈이다.

현대인은 만성 스트레스 상태에서 살아간다. 우리 뇌는 여전히 수렵채집인의 원시적 삶에 맞춰져 있는데, 오늘날 콘크리트 사막과 디지털 숲에서 생활하고 있으니 일상적인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가 없다. 우울, 불안, 공허, 외로움, 권태 등은 너무나 흔한 감정이 되어 버렸고, 프로이트 정신분석학 덕분에 이들 부정적인 감정과 기분은 제거 대상이 되었다. 게다가 일부 대중심리학 때문에 불안과 우울증을 뇌의 고장이나 마음의 감기 탓으로 돌리곤 한다.

하지만, 스웨덴의 정신과 의사이자 과학 저술가인 안데르스 한센은 뇌는 행복이 아니라 생존과 번식을 위해 발달했고, 우울, 불안, 스트레스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도 기실 뇌가 생존을 위해 만들어낸 것이라고 강조한다. 저자는『마음을 돌보는 뇌과학』(한국경제신문, 2023)에서 인류학과 진화생물학, 정신의학과 뇌과학 연구를 통해 마음의 메커니즘이 여전히 수렵채집인의 뇌에 기반하고 있고, 뇌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행복이 아니라 생존이기에, 스트레스, 공황장애, 강박장애, ADHD, PTSD, 자폐 스펙트럼 등은 뇌가 고장난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만들어낸 것이라고 지적한다.

정신과 의사의 주요 처방은 약물 치료와 인지행동 치료다. 마음을 돌보는 인지행동 치료의 고전적 기원은 그리스 로마의 스토아 철학과 관련이 깊다. 가령 불안을 다룬 에피쿠로스, 키케로, 세네카 등의 철학 담론이 그러하다. 저자는 스토아학파의 불안 대처법을 "세계 최초의 인지 행동 치료 매뉴얼"이라고 높이 평한다.

"20년 가까이 의사로 살면서 확실히 깨달은 점이 있다. 인간의 건강과 정서적 안정에 관한 한 가장 커다란 성과를 올리는 길은 탁월한 연구를 완성하는 것도, 더 많은 이들에게 향정신성 약물을 처방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최첨단 기술과 무관한 구식 방법으로 가장 큰 성과를 얻을 수 있다. 즉 사람들에게 필요한 지식을 알려주는 동시에 몸을 움직여 더 걷고 사랑하는 이들을 더 자주 만나도록 독려하는 것이다."(226, 2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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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안에 갇힌 사람들 - 화면 중독의 시대, 나를 지키는 심리적 면역력 되찾기
니컬러스 카다라스 지음, 정미진 옮김 / 흐름출판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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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인 삶은 단순한 삶이다. 단순한 삶과 멀어질수록 인간은 그만큼 '비인간화'의 각종 불량 증후군에 시달리게 된다. 반대로, 단순한 삶에 머무를수록 더 자연스럽고 안정되고 건강한 일상을 누릴 수 있다. 문제는 디지털 문명에 찌든 삶은 이미 단순한 삶에서 아주 멀리 가 있다는 데 있다. 우울, 공황, 불면, 불안 등 각종 정신적 문제와 약물 중독 문제가 범람하는 사회적 배경에 바로 디지털 기술 중독이 자리하고 있다. 2015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앵거스 디턴은 '절망사'란 개념을 제시한 바 있는데, 이는 자살, 약물 과다 복용,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사망을 뜻한다. 미국 청소년 사망의 대부분이 절망사이고, 절망사의 배후에 과도한 디지털 중독이 도사리고 있다. 특히 코로나 19는 비대면 접촉과 원격 생활을 일상화해서 디지털 중독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미국의 정신 건강 및 중독 전문 심리학자 니컬러스 카다라스는 디지털 기기가 '디지털 헤로인'이라는 악습관을 형성시킨다고 지적한다. 마치 마약 중독처럼, 디지털 화면이 우울증, 불안, ADHD(주의력 결핍 및 과잉 행동 장애), 자해에 대한 생각을 부추길 수 있다는 얘기다. 일찍이 카를 마르크스는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종교의 자리를 디지털 화면이라는 최신 아편이 대신하고 있다는 비유이기도 하다. 저자는 신작 『손 안에 갇힌 사람들』(흐름출판, 2023)에서 디지털 기술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소셜 미디어 중독이 청소년과 젊은 성인에게 끼치는 악영향에 대해 설명하고, 최첨단 '디지털 디톡스'보다 더 효과적인 고전적인 해독제를 처방한다.

저자의 표현을 빌면, 우리는 우리를 중독시키고 노예화할 뿐만 아니라, 감시하고 세뇌할 수 있으며 우리의 성장과 번영을 막을 수 있는, 세계적으로 연결된 작은 스크린 감옥들에 갇혀 있다. 페이스북, 유튜브, 트위터, 인스타그램, 틱톡, 구글의 검색 알고리즘 등 소셜 미디어 플랫폼은 데이터 마이닝과 예측 알고리즘을 이용해 사용자의 확증편향을 심화시키고 양극화된 이분법적 사고를 유발하는데, 이는 경계선 성격 장애의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하다. 또한 소셜미디어는 '디지털 아편'이라는 비유에 걸맞게, 충동적이고 과민하고 극단적인 감정, 의존성, 우울감을 유발하여 사용자를 정적인 고립 상태로 이끈다. 정신 건강을 해치는 기술 중독은 디지털 세뇌와 행동 수정으로도 이어진다. 한마디로, 소셜 미디어는 절망사와 깊이 연관된 정신 이상 유발 플랫폼이다.

저자는 거대 기술기업과 소셜 미디어가 야기한 집단적 정신 건강의 위기에 대한 해결책으로 고대 철학의 지혜 전통을 강조한다. 기술 기업의 플랫폼은 우리의 사고능력을 약화시키고 극단적인 양극화 사고를 조장하며 섬세한 비판적 사고를 방해한다. 따라서 플라톤과 피타고라스 같은 고대의 현인들이 강조한 비판적 성찰법은 디지털 아편의 치료제가 될 수 있다. 저자는 피타고라스가 말한, 회복력과 윤리적 분별력을 갖춘 '철학자 전사'가 될 것을 요청한다. "철학자 전사의 요점은 자신을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철학적으로, 윤리적으로 훈련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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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로와 함께한 산책
벤 섀턱 지음, 임현경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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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로의 발자취를 따라 걷기, 아마도 그게 서구 뚜벅이들의 로망일 수 있겠다. 노마드의 열정을 가슴에 품은, 뚜벅뚜벅 걷기를 예찬한 사상가들은 매우 많다. 생태문학의 고전인 『월든』의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를 비롯해 루소, 뮤어, 월서, 벤자민, 솔닛 등 셀 수 없을 정도다.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리던 예민한 영혼의 소유자들이 걷기와 유목, 탈주를 통해 구원받았다는 고백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미국의 아티스트 벤 섀턱 역시 유목, 즉 목가적인 산책을 통해 불면과 상실의 늪에서 헤어나올 수 있었다. 벤은 소로가 걸어간 길을 나침반 삼아 총 여섯 번의 시적인 산책을 이어간다. 케이프코드, 커타딘산, 와추셋산, 사우스웨스트, 알라가시, 케이프코드로 이어진 여정이다. 저자가 직접 스케치한 다양한 풍경 그림들이 유목만의 고유한 아날로그적 감수성을 더한다.

1849년 가을 아침, 헨리 소로가 해변을 걷기 위해 집을 나섰다. 그리고 웰플릿의 굴잡이의 집에 하룻밤 머물렀다. 기나긴 악몽과 불면의 밤에 시달리던 벤 역시 헨리의 『케이프코드』를 지도 삼아 그의 뒷모습을 따른다. 여행 첫날 벤은 빵 한 덩이, 치즈 한 조각, 노트 한 권을 배낭에 넣고선 굴잡이의 집을 구경한 뒤, 호수 맞은 편에 있는 친절하고 낯선 사람들의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진다. 헨리는 아침에 장어와 줄기콩, 도넛을 먹고 차를 마셨는데, 벤은 시나몬 토스트와 치즈, 계란을 먹었다. 그리고 북쪽의 프로빈스 타운으로 향했다.

야생에서 낭만은 위험한 망상이고, 불같은 로맨스는 금기다. 물론 지친 몸과 마음을 다독여주는 따스한 인간애를 만끽할 수도 있지만 말이다. 만약 문명보다 대자연을 사랑하고, 스스로 '바람의 딸'이라 자부하는 뚜벅이나 캠핑족이 있다면 작가의 다음 말에 주의를 기울여주기 바란다.

"내가 밤마다 어디서 자든 상관없다는 사실, 혹은 어디서 자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은 나의 예의 바름이나 타인의 환심을 살 수 있는 성정과는 상관없을 것이다. 숲에서, 해변에서, 공동체 안에서, 공간을 넘나들며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이유는 내가 백인이기 때문에 비교적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과 남성이기 때문에 위협받지 않을 거라는 사실에 기인한다."(31, 32쪽)

평소에 자주 걷는 길의 상태가 우리의 생각과 마음과 영혼의 상태와도 관련이 있다. 명상과 다를 바 없는 시적인 산책의 마스터인 소로에 따르면, "먼지 자욱한 길을 오래 걸으면 우리의 생각도 길처럼 지저분해진다. 사고는 무너지고 멈추며 혼란스러운 재료의 주기적인 리듬에 따라 소극적으로만 이루어진다." 당신이 지금 걷고 있는 길의 상태는 어떠한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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